자신의 한마디에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방긋 웃으며 조르륵 가까이 다가왔다. 페트로도 동생의 그런 모습이 신기한 듯 연신 감탄했다.
“언니, 우리 집에 오래오래 있다 가세요오.”
팔짱을 낀 엘리샤가 얼굴을 살며시 기대 왔다. 얼굴을 살살 비비며 눈웃음까지 치는 모습이 마치 애교를 부리는 새끼 고양이 같다.
‘부담스러워서 원.’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샤의 눈빛이 아주 익숙하다. 예전에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던 팬들의 눈빛이 딱 저랬었지.
‘내가 연기를 너무 열심히 했나?’
오랜만에 무대에 서서 그랬을까? 자신 또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연기를 즐겼다. 오랜만에 하는 제대로 된 연기가 제법 재미있었거든.
“언니, 덥죠? 부채질해 드릴까요?”
어느새 손에 부채까지 든 채 눈을 반짝거리는 엘리샤를 보며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 *
[너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제노는 의아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부터 카밀라가 집 안 곳곳에 뭔가를 몰래몰래 숨겨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뭐야?]
“라비 오라비가 준 거요.”
[보호 마력석? 그걸 왜 거기에다 놔?]
“불을 막아 준다고 해서요.”
대답을 하면서도 카밀라는 불 저항력을 가진 방어 물품들만 골라서 여기저기 보이지 않는 곳에 놓기 시작했다.
[불? 갑자기 웬 불?]
“그런 게 있어요.”
카밀라는 결국 이번 일, 수호의 검이 도난당하는 일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걸 포기했다.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한 점이 있었거든.
‘다른 곳도 아니고 제이빌런 공작가잖아.’
그런데 너무도 쉽게 방어선이 뚫리고 집 안에 불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제이빌런 공작이 자리를 비웠다고 하지만 기본 방어력이 짱짱한 곳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이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혹시 모르잖아?’
내부에 적이 있었을지도. 전에 소르펠 공작도 독에 당하지 않았던가.
범인은 오랫동안 공작가에서 일해 온 이였다. 부주방장이었던 그가 설마 적에게 매수됐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여기도 그럴지 모르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도저히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내부의 적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더 꼬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는 제노만 믿어요.”
[갑자기 뭔 소리야?]
“어쩌면 조만간 여기가 공격받을지도 모르거든요.”
[공격? 무슨……! 잠깐만!]
제노도 그제야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듯 표정을 굳혔다.
[너 저번에 나한테 수호의 검이 없어지면 어쩌고저쩌고하더니! 혹시 그거와 관계있는 거야?]
“네, 조만간 수호의 검이 도난당…….”
“무슨 말이야?”
순간 그들의 대화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적이라니?”
아르시안이다. 그는 검은 형체로 보이는 유령 제노는 완전히 무시한 채 카밀라에게 성큼 다가섰다.
“이 집에 뭔가 일이 생기는 거야?”
“그게…….”
“똑바로 말해.”
“응!”
헉! 지금 저 녀석 화났나? 미간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긴.’
이렇게 된 거, 아르시안이라도 알고 있는 게 낫겠지?
“확실한 건 아닌데 이상한 꿈을 꿨거든.”
“꿈?”
“이 저택이 활활 불타오르고 수호의 검이 없어지는 꿈.”
아르시안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너, 그거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자신의 눈을 슬쩍 피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밀라의 모습에 아르시안의 미간 골이 더욱 깊게 파였다.
“어쩐지…….”
뭔가 좀 이상하다 했다. 갑작스레 친하지도 않은 엘리샤와 놀겠다며 제이빌런가에서 지내겠다는 그녀의 말과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했는데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는 바로 카밀라의 손을 낚아챘다. 그러곤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어디 가?”
“당장 짐 싸.”
“뭐?”
“그걸 알면서 여길 왜 와! 당장 집으로 돌아가.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당장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인 듯 맞잡은 손의 힘이 장난이 아니다.
“잠깐만.”
그런 아르시안을 카밀라는 급히 멈춰 세웠다.
“여기서 할 일이 있어.”
“내가 할게.”
뭔 일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하는 그를 카밀라는 조금 멍하니 바라봤다. 순간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금 웃음이 나와? 당장 짐 싸라고.”
“아르시안.”
너무도 무모한 행동에 진심으로 화를 내던 그가 카밀라의 부름에 멈칫했다.
아르시안. 어릴 때부터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그 인간이 지어 준 이름. 불리는 것만으로도 역겨웠고 하나의 족쇄처럼 여겨졌다.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족쇄.
그런데 왜일까?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알 수 없는 충족감이 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자신의 이름이 고스란히 담긴다는 것이 좋았다.
“뭐가 걱정이야? 네가 내 옆에 있는데.”
“너…….”
“너와 함께 있는데 내가 위험해질 리가 없잖아.”
카밀라는 그를 살살 달랬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신경이 더 쓰일 것이다.
언제 공격이 시작될지, 수호의 검이 그새 사라진 건 아닐지. 그런 걱정으로 제대로 잠도 못 이룰 것이다.
‘제노는 또 어떻고.’
적이 침범해 수호의 검을 건드릴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 또한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알아보라고 매일같이 자신을 달달 볶겠지. 그럴 바에야 그냥 이곳에 있는 게 나았다.
“여기에 계속 있겠다는 거야?”
“응.”
“…….”
“절대 다치는 일 없을 거야. 맹세해.”
한 점 거짓도 없다는 듯 자신의 눈을 조금도 피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아르시안 입에서 결국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냐.”
아르시안의 손길이 그녀의 얼굴 주변을 가볍게 스쳐 갔다. 그럴 때마다 카밀라가 차고 있던 보호 도구들이 살짝 빛을 내뿜었다. 라비가 준 보호 마법에 그가 또 다른 보호 마법을 더 건 것이다.
그 모습을 다른 마법사들이 봤다면 아주 기겁했을 거다. 기존 아이템에 새로운 마법을 집어넣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작업을 아르시안은 지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해내고 있었다.
“불 저항력을 올리면 되는 거야?”
이어 아르시안은 카밀라가 몰래 숨겨 둔 마법 물품에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자신의 마법을 덧씌웠다.
“그렇긴 한데…….”
카밀라는 그런 아르시안을 조금 신기하게 쳐다봤다.
“믿어? 내 말을?”
저택이 불타고 적들의 공격이 있을 거라는 자신의 그 허무맹랑한 말에 대해 아르시안은 조금의 의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네 말이잖아.”
그 짧은 대답에 살짝 눈이 커졌던 그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뭐가?”
“그냥 좀 타게 두는 건 어때? 돈도 많은 집안인데.”
자기가 페트로의 집을 보호해 주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입에서 연신 투덜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뭐예요?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건데요?”
그때 멀리서 엘리샤가 자신들을 발견하곤 후다닥 달려왔다. 혹시 우리 얘기를 들은 건…….
“떨어져요! 당장!”
…아니구나.
아르시안과 카밀라 사이를 파고든 그녀는 두 사람을 멀찍이 떨어트렸다.
“내가 우리 언니한테 접근하지 말랬잖아요. 에비.”
“너 진짜 혼나 볼래?”
“뭐래? 지금 객식구가 집주인 협박하는 거예요? 진짜 밥 안 주는 수가 있……!”
“엘리샤, 그만.”
“네에!”
언제 앙칼지게 굴었냐는 듯 순식간에 입을 다물며 카밀라 곁으로 다가서는 엘리샤.
“언니, 언니 카페에서 커피 사 왔는데. 같이 마실래요?”
확 달라지는 온도 차에 아르시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고 카밀라는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 * *
[카밀라!]
“으… 음?!”
[일어나야 할 것 같다.]
늦은 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잠이 들었던 카밀라를 제노가 급히 깨웠다. 평소와 달리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카밀라는 빠르게 눈을 떴다.
“무슨 일이에요?”
[수상한 움직임이 있어.]
“……!”
그 말에 카밀라는 더 묻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컥!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카밀라는 바로 멈칫했다. 바닥이 뭔가로 아주 축축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름?”
[맞아.]
역시 내부에 조력자가 있었던 건가? 구석구석에 부어져 있는 기름을 보며 카밀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봤어요?”
[저쪽.]
카밀라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뿌려져 있는 기름을 밟지 않고 어둠 속에서 걷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저기.]
‘한 명이 아니잖아.’
기름을 붓고 있는 이는 총 세 사람이었다. 시종으로 보이는 이 두 명과 시녀로 보이는 이 한 명.
이내 기름을 다 부은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뭔가를 연신 소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다시 흩어졌다.
시녀로 보이는 한 사람이 밖으로 달려 나갔고 다른 둘은 미리 가지고 있던 불씨를 기름에 붙이기 시작했다.
‘이래서 그리 쉽게 뚫렸던 거구나.’
다른 곳도 아닌 제이빌런가가 너무도 쉽게 다른 이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 이상했는데 역시나 내부에 적이 있었던 거다.
파악!
불씨가 피어오르는 걸 보며 카밀라는 숨어 있던 곳에서 천천히 나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 * *
“이쪽이에요! 어서요! 집 안에 정말 큰불이 났어요!”
조금 전 밖으로 달려 나간 시녀는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와 기사들을 최대한 불러 모았다. 저택 안쪽에 불이 크게 났다는 소리에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급히 달려왔다.
‘뭐야? 아직 불이 덜 붙었나?’
그런데 저택으로 다가갈수록 여자는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쯤 연기도 피어오르고 불길이 활활 솟아 정신이 없어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밖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런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어쨌든 여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대로 사람들을 이끌고 저택 안으로 급히 들어섰다.
건물 안은 그래도 타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