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못 가.]
“뭐?”
[여기까지가 한계야!]
제노의 손에 잡혀 걸음을 옮기던 여자 귀신이 빽 소리를 질렀다.
예상대로 화장대에 묶인 지박령인 듯 방에서 일정 거리 이상은 떨어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쯧.”
큰 소리를 내도 상관없게 밖으로 나가려고 했거늘.
카밀라는 계획을 바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방문을 닫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뭔 짓이야? 저 애한테 뭐 하려고 한 거야?”
귀신이 인간한테 해를 가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뭔가 한을 가진 영(靈) 같은데, 엘리샤에게 원한이 있는 건가?
저 녀석이 싸가지가 없긴 해도 누군가에게 저리 한을 맺게 할 정도로 머리가 빈 녀석은 아닌데?
[으… 으으…….]
귀신이 눈을 부릅뜨며 카밀라를 노려봤다. 겁이라도 줄 생각인 건가? 꿈도 크다, 진짜.
풀어 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입으로도 기이한 소리를 내뱉으며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연출했다.
그 모습을 본 카밀라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신이 되면 다들 머리가 꽃밭이 되나? 자기가 하는 행동이 다 통할 거라는 저 끝없는 긍정 마인드는 뭘까?
“제노.”
따아악!
[아앗!]
바로 날아드는 제노의 타격감 만땅 응징에 여자 귀신은 그대로 다시 한번 앞으로 고꾸라져야만 했다.
“화장대 확 태워 버리기 전에 똑바로 말해.”
[……!]
화장대를 언급하자, 안 그래도 핏기 하나 없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리며 자세가 바로 달라졌다.
잔뜩 화가 나 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긴장으로 물들며 카밀라의 눈치를 봤다.
“정신 사나우니까 풀어 헤친 머리 정리. 눈깔에 힘 풀고.”
[아, 알았어!]
나이는 한 30대 초반? 자세를 바로 하고 앞으로 풀어 헤친 머리를 단정히 뒤로 넘기자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제법 고운 얼굴이었다.
[난 배우야.]
“배우?”
[연기가, 연기가 하고 싶어.]
귀신은 울부짖듯 말을 이었다.
[저 아이의 몸에 들어가서 다시 연기를 하고 싶다고!]
뭐라는 거야?
“빙의가 아무한테나 막 되는 줄 알아?”
그게 가능했으면 귀신들이 다 사람 몸에 들어가려고 야단법석을 떨었겠지.
제노가 내 곁에 딱 붙어 있는 이유가 뭐겠어? 빙의되는 몸이 그리 흔한 게 아니라서다.
[저 아이라면 가능해!]
“뭐?”
[저 아이도 간절히 원하는 게 바로 무대에 서는 거니까.]
“엘리샤가?”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카밀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아이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연극을 좋아하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설마 무대 욕심까지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내 기운이 조금만 더 깃든다면 저 아이 몸에 들어갈 수 있어!]
“그래서?”
[다시 연기를 할 수 있다고!]
“그래서?”
[그, 그래서…….]
흥분해서 소리치던 귀신은 카밀라의 음성이 점점 차갑게 변하는 걸 느끼곤 움찔 몸을 다시 떨었다.
“내가 이래서 귀신들을 함부로 상대를 안 하는 거야. 아주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고 꼴값을 떨거든.”
꿈이 같다고 맘대로 몸에 들어가겠다니.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그리고 너 바보니?”
[바보라니!]
“여기가 어딘지 몰라?”
[나도 아는데…….]
“알면서 이 짓거리를 한다고? 정말 아는 거 맞아?”
[무슨……?]
“신수.”
[시, 신수?]
“아직까지 안 걸린 게 용하네.”
지금까지야 안 걸리고 잘 버텼다지만 엘리샤의 몸에 들어간 후에도 그게 가능할까? 매일같이 신수와 마주해야 할 텐데.
“신수 제티의 능력이 불이었나?”
활활 태워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허억!]
…뭐지? 이 반응은?
“생각도 안 한 거야?”
[나, 난 그냥…….]
신수에 대해선 정말 전혀 생각을 안 했던 듯 그녀는 울먹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시 연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할 거야!]
“맞는 말이네.”
[그, 그렇지?]
“처맞을 말.”
[…….]
자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급히 머리를 감싸며 제노의 눈치를 보는 여자의 모습에 카밀라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으음…….”
조금은 이른 시간. 엘리샤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에서 깼다.
최근 잠을 아무리 길게 자도 계속 피곤하고 영 뭔가 개운치 않았는데 오늘은 무척 상쾌했다. 정말로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하아……?”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서던 엘리샤는 순간 그대로 몸이 굳어졌고.
“흐억!”
너무 놀라 침대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방 한쪽에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예요?”
“너 일어나길 기다리는 중.”
카밀라였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엘리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방에서 왜 그러고 있냐고요!”
“물어볼 게 있어.”
“뭐라고요?”
엘리샤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무슨 급한 일이기에 아침부터 찾아와 저러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화장대 말이야.”
“화장대?”
“어디서 났어?”
카밀라는 어제 본 유령의 거처라 할 수 있는 화장대를 가리켰다.
딱 봐도 이 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다. 아주 낡은 것이 어디 고물상에서 주워 온 것 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겼다.
“그건 왜 물어요?”
“쓰레기장에서 주워 왔나 해서.”
“무슨 소리예요! 쓰레기장이라니!”
엘리샤는 바로 버럭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에 손을 척 올린 그녀는 당당히 외쳤다.
“경매에서 당당히 낙찰받은 거거든요!”
“경매?”
“저게 바로 대배우 쥴리아가 쓰던 화장대란 말이에요.”
태어나 처음으로 경매장에서 저걸 직접 낙찰받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왠지 어른이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쥴리아? 그 여자 이름이 쥴리아야?”
“서, 설마 쥴리아를 몰라요?”
“내가 알아야 해?”
“어떻게 쥴리아를 모를 수가 있어요? 악의 마음!”
“악의 마음?”
“그 극의 주인공이잖아요!”
아. 어쩐지 얼굴이 좀 낯이 익다 했더니 그 극의 주인공이었구나. 화장을 하지 않으니 이목구비가 완전 딴판이던데?
“배우로 얼마나 이름을 날린 분인데!”
너 정말 연극 좋아하는구나.
평소보다 더욱 흥분해 말을 쏟아 내는 엘리샤를 보며 카밀라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살해당한 여자의 물건이 갖고 싶니?”
“그 여자가 죽은 건 어떻게 알아요? 쥴리아가 누군지도 몰랐으면서?”
“어떻게 알긴.”
…들었다. 본인한테.
쥴리아는 3년 전에 그녀를 쫓아다니던 팬… 아니지, 그건 팬도 아니다. 팬이라고 우기는 스토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스토커는 그때 바로 잡혀 사형을 당했지만, 그녀는 연기에 미련이 남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녀석도 참.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죽은 쥴리아는 자신의 피가 잔뜩 스며든 화장대에 묶여 버렸고 하필 그 화장대를 엘리샤가 좋다고 구입한 것이다.
그토록 좋아하던 배우가 죽어서 자기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알면 좋아할까? 아니면 기겁을 할까?
“배우가 꿈이야?”
“흐읍!”
카밀라의 돌직구에 엘리샤는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안 거지?
“무, 무슨 소리예요?”
“무대에 서는 게 꿈이냐고.”
“아니에요!”
“아니야?"
"귀족 영애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말도 안 돼.”
“그래?”
일단 잡아떼긴 했지만 자기가 너무도 좋아하는 연극을 부정했다는 사실 자체에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난 또…….”
“또 뭐요?”
“무대에 서고 싶으면 도와주려고 했지.”
“…네에?”
눈이 동그래지는 엘리샤를 뒤로한 채 카밀라의 시선이 다시 화장대로 향했다. 거기에 깃든 귀신, 이름이 뭐라고? 쥴리아?
[악의 마음… 그 연기를 다시 한번 무대에서 하고 싶어.]
‘원하는 게 연기만 아니었다면.’
귀신의 소원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한때 배우의 삶을 살았던 카밀라의 입장에선 연기를 하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을 마냥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연기에 대한 갈망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아니까. 그 맛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참 힘들지.
“무대에 서는 거야 딱히 어려울 게 없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렵지 않다니?”
바로 관심을 보이는 엘리샤의 모습에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엘리샤 역시 연기에 아주 목말라 있는 게 보였으니까.
“극장을 하루 통째로 빌릴 생각이거든.”
“통째로요?”
“너도 알다시피 내가 돈이 좀 많아.”
빌리는 게 문제겠는가. 아예 극장을 통째로 살 수도 있었다. 하루 정도 무대를 빌리는 게 뭐 대수겠는가.
“물론 관객은 없겠지만 말이야.”
저런 초짜와 귀신을 섞어서 무대에 서는데 관객과 다른 배우들까지 끌어들이는 건 무리다. 관객에게도 다른 배우에게도 그건 예의가 아니지.
다만 저 둘이 무대 중앙에서 맘껏 연기를 하게 하는 것 정도야 어려울 게 없었다.
“무대에…….”
“왜? 관심 있어?”
“무대…….”
그녀는 멍하니 같은 말만 되뇌었다. 한참 후에야 마구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한 채 조심스레 묻는다.
“제가… 제가 무대에 서도 돼요?”
“물론 다른 배우는 없어. 너를 상대해 줄 사람은 오로지 한 명뿐이야.”
“한 명?”
“나.”
눈이 화등잔만 해지는 엘리샤를 보며 카밀라는 빙긋이 웃었다.
물론 이번 일에 굳이 엘리샤와 함께할 이유는 없었다. 귀신만 극장으로 데리고 가 그녀의 한을 풀어 주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밀라는 한쪽 탁자에 놓여 있는 책과 대본을 바라봤다. 조금 전 방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 이미 확인했던 부분이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는지 너덜너덜한 대본과 책들. 거기엔 자기만의 인물 해석도 아주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걸 보자 마음이 움직였다. 기왕 무대를 빌리는 거 엘리샤의 저 간절한 소원을 조금이나마 들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무슨 극을 할 건데요?”
결국 한참을 망설이던 엘리샤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밀라의 입꼬리가 다시 살며시 올라갔다.
“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