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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보는 공녀님 (137)화 (137/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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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창구로 다가서자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에스크라 공작과 알트온 백작을 알아본 그가 살짝 긴장하는 기색을 잠시 내비쳤지만 이내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금고를 열고 명의를 바꾸고 싶어요.”

“금고 열쇠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카밀라는 미리 챙겨 온 황금 열쇠를 그에게 건넸다.

개인 금고를 확인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이 열쇠다. 열쇠는 에스크라 공작이 잘 갖고 있었다.

“동행이 있으시군요. 함께 가시는 건가요?”

순간적으로 주변에 서 있던 직원들의 기운이 일제히 강해졌다. 상대가 마스터인 에스크라 공작과 대마법사인 알트온 백작임을 알면서도 그들은 경계의 뜻을 감추지 않았다.

“네.”

하지만 이어진 카밀라의 짧은 대답에 그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스크라 공작과 알트온 백작은 이미 익숙한 일인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쪽 마법진 위에 서 주십시오. 총 세 분이 이동합니다.”

카밀라와 다른 두 사람이 지정된 공간에 서자 직원이 열쇠를 벽에 뚫려 있는 구멍에 집어넣었다.

후우욱!

그러자 세 사람이 선 자리에 마법진이 발동하였고 순식간에 빛에 휩싸이며 어딘가로 이동했다.

밝은 빛에 잠시 눈을 감았던 카밀라는 곧 주변 공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긴…….”

눈을 뜨자 낯선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섯 평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공간이었는데 문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건 단 하나였다. 벽 한쪽에 붙어 있는 새하얀 판.

신기한 건 판 안에 마치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는 거다.

“이게…….”

“네, 거기에 암호를 적으시면 됩니다.”

알트온 백작의 말에 카밀라는 벽에 가까이 다가섰다.

“경보가 울리면 바로 구속인데, 일단 카밀라 님이 잡힌 뒤에 일을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저 아이가 끌려가는 꼴은 못 보지.”

“그럼 일단 직원들을 제압하고 일을 처리해야겠군요.”

“폐하께는 내가 윤허를 받도록 하지.”

…이 인간들이.

두 사람의 대화 소리에 카밀라는 뒤돌아 그들을 지그시 노려봤다. 알트온 백작이 환하게 웃으며 파이팅 포즈를 취한다.

짧은 한숨을 내쉰 카밀라는 다시 벽을 바라봤다.

우우웅-

그녀가 물결치고 있는 하얀 판에 손을 뻗자 빛이 모여들더니 새하얀 깃털 펜 하나가 생성됐다.

“그 펜으로 적으시면 됩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펜을 잠시 신기하게 바라보던 카밀라는 천천히 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하얀 판 위에 암호를 적어 갔다.

325 12 04 07 50

샤루아가 알려 준 암호는 숫자였다.

[그분을 제일 처음 본 날이에요.]

에스크라 공작을 처음 본 날.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그와 눈인사조차 주고받은 것도 아니란다. 정말 말 그대로 멀리서 그녀가 그를 처음 본 날.

제국력 325년 12월 4일 오후 7시 50분.

[꺄아! 제가 첫눈에 반해 버렸지 뭐예요.]

‘…아, 예.’

화아악!

암호를 다 새겨 넣자 새하얀 판 안에서 일렁이던 물결이 더욱 거세졌다. 그러더니 순간 거기서 아주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자 눈앞의 벽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바닥에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마법진이 생겨났다.

알 수 없는 도형으로 가득한 마법진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빛이 참으로 신기하고 예뻤다.

“와……. 정말 암호를 푸셨네요.”

알트온 백작의 감탄사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카밀라는 뒤를 돌아봤다.

“저 마법진 위에는 암호를 푼 자만이 설 수 있다.”

에스크라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밀라는 천천히 마법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완전히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희미했던 빛이 빠르게 밝아지며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다.

잠시 후 그녀의 눈앞에 또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헐…….”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저게 다 돈이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직업이 있다. 바로… 돈 많은 백수.

“나 이제 돈 많은 백수 되는 거야?”

족히 백 평은 넘을 듯한 공간에 수많은 산이 만들어져 있었다.

금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산이.

설마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귀족가의 여식이었으니 어느 정도의 재산이 쌓여 있을 줄은 알았지만, 저게 대체 다 얼마야?

카밀라는 한동안 황금산을 황홀한 눈빛으로 감상했다.

* * *

“이게 뭐예요, 누나?”

“금고 열쇠.”

“금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다이브의 손에 황금 열쇠를 쥐여 줬다.

‘에스크라 공작가 못지않은 자산가였다니.’

샤루아가 남긴 금고를 확인하고 나온 카밀라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알트온 백작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샤루아가, 그녀의 가문이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던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제가 금고를 열겠다는 걸 그냥 내버려 뒀어요?’

‘그냥 안 두면?’

‘암호만 내놓으라고 하든가… 아니, 그게 아니고, 그 많은 재산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어째요!’

‘…넌 가끔 우리 가문을 아주 가난하게 보는 것 같아. 그 돈 없어도 지금껏 잘 살았다.’

‘그래도…….’

‘애초에 나는 암호도 모르고 관심도 없던 금고야. 암호를 알아낸 네가 주인이 되겠다는데 왜 말려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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