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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보는 공녀님 (131)화 (1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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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공작에게 온갖 패악을 다 부리다 기억 상실까지 걸리게 만든 장본인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단 말이야?

가문 회의에도 참석한다는 건 여전히 사회적 활동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신기하네.”

“뭐가?”

“그 성격에 살려 둔 게.”

에스크라 공작, 적에겐 가차 없기로 유명하지 않나? 그래도 친동생이라고, 핏줄이라고 봐주고 있는 건가?

“증거가 없었거든. 숙부님이 아버지를 공격했다는 증거가. 아버지가 기억을 찾고 돌아오는 순간 그동안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을 아주 깔끔히 지워 버렸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잇는 그를 보며 카밀라는 새삼 어이가 없었다. 제이너의 친아버지를 죽인 것도 공작의 동생이니 뭐니 하는 그 작자라고 들었는데?

즉, 지금 자기 친아버지를 죽인 이를 저리 아무렇지 않게 숙부라 칭하고 있다는 거다.

“다 해 봤거든.”

“뭘?”

그런 자신의 눈빛을 읽은 듯 그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수도 없이 죽였었어.”

“누굴? 그 동생이라는 자?”

“에르쉬. 숙부님의 이름이야.”

그가 습관처럼 쿡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 봤다고 보면 돼.”

…그게 뭔데? 나 아무 생각 없거든! 사람 죽이는 방법 따위를 내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5회 차였나? 물 한 방울 안 주고 굶겨 죽인 적도 있는데, 그때의 모습이 가장 비참했던 것 같아. 제발 물 한 방울만 달라며 질질 짜더라고.”

“…….”

“큭.”

자신이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까?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작게 폭소했다.

“스무 번 넘게 그렇게 죽이고 나니 죽이는 것도 점점 식상해지더군. 그를 봐도 딱히 화가 나지 않더란 말이지. 돌아가신 아버지를 언급하는 말을 들어도 웃음이 나던데.”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 나중에 다시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르지만… 이젠 이 삶도 이번으로 끝이라고 했으니 대놓고 죽이는 건 자제해야겠지?”

…미친놈이다. 이놈도 미친놈이었어!

‘누가 저놈보고 성격 좋다 한 거야!’

이제야 떠올랐다. 왜 그를 처음 봤을 때 그토록 찜찜한 기분이 들었는지, 자신을 보며 웃는 그의 눈빛이 왜 그토록 신경이 쓰였던 건지!

한없이 선하고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 담긴 묘한 즐거움.

카밀라는 전에 살던 세상에서 제이너와 똑같은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연쇄 살인마였던 남자.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그가 결국 붙잡혀 대중들 앞에 섰을 때, 딱 저런 눈빛이었다.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표정. 사람을 그저 잠깐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만 여기는 듯한 그 즐거워 보이던 눈빛.

‘그때 그자의 눈빛이 딱 저랬지.’

카밀라는 긴 한숨을 토했다. 원래 미친놈이었던 걸까? 아니면, 반복되는 삶이 그를 저렇게 만든 걸까?

“어쨌든 그 에르쉬라는 자가 이번에 온다는 거야?”

“그래.”

에르쉬 에스크라. 어머니가 자신을 홀로 낳게 만든 장본인.

막말로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태어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장난해?’

카밀라가 이곳에서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뻔히 다 아는데, 뭘 고마워해야 하는데? 그런 개떡 같은 삶을 살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할까?

에스크라 공작을 만나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점점 쌓여 가는 분노를 딱히 풀 곳이 없었다.

기억을 잃어 어쩔 수 없었다는 에스크라 공작에게 그 짜증 나는 기분을 풀어낼 수는 없었으니까.

‘…에이, 됐다.’

그렇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도 좀 웃긴 일이겠지?

“그래도 면상은 한번 보고 싶네.”

에르쉬 에스크라.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지.

* * *

가문 회의가 열리는 당일.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이 참석한 회의장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이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에 향해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에도 태연하게 차를 홀짝이며 앉아 있는 이, 바로 카밀라였다.

“저 아이가…….”

“붉은 눈이네요.”

“역시 소문대로…….”

“가주의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더군.”

이내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카밀라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하아.”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던 알트온 백작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밀라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갑자기 회의에 참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그녀의 의도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는 걸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굳이 왜?

달칵.

잠시 후 수군거리던 소음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사람으로 인해 곧 잠잠해졌다. 에스크라 공작이었다.

그의 등장에 순식간에 회의실 안에 긴장감이 감돈다. 유일하게 카밀라와 제이너만이 여전히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에르쉬 에스크라. 에스크라 공작과 조금은 닮은 듯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인사말을 전했다.

“그래.”

간단히 대답을 내뱉은 에스크라 공작이 자리에 앉으며 좌중을 한 번 가볍게 훑었다.

그 시선에 움찔하는 이들도 있었고 급히 고개를 숙이는 이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카밀라를 바라봤다. 그는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영 못마땅한 듯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형님의 딸입니까?”

그 순간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에르쉬였다.

다른 이들이 망설이고 조심스러워하는 것과 달리 그는 아주 대놓고 물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저게? 너 지금 나한테 저게라고 했니?

“말조심해라, 에르쉬.”

순간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에스크라 공작의 모습에 내내 여유로웠던 에르쉬마저 살짝 움찔했다.

하지만 몇 번 헛기침을 내뱉은 그는 바로 다시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아마도 형님께 사고가 있었던 당시 생긴 아이인 듯한데…….”

그의 시선이 다시 카밀라에게 향했다.

“그렇다면 형님의 기억에도 없는 아이겠군요.”

그때의 일을 들먹이는 에르쉬의 말에 알트온 백작을 포함한 몇몇 이들의 미간이 꿈틀했다.

감히 뻔뻔하게 그때의 일을 입에 담다니!

“그런데도 저걸 가문의 핏줄로 인정하겠다는 겁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저것의 어미가 어디서 굴러먹던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어찌 저걸 우리 가문의 핏줄로 받아들인다는 말……!”

에르쉬는 끝까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순간 숨 막힐 듯한 압박감이 훅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압박감이 에스크라 공작이 내뿜는 기운이라는 걸 안 에르쉬는 급히 숨을 삼켰다. 다른 이들도 심상치 않은 에스크라 공작의 기운에 다들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저게…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그 순간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 카밀라다.

‘저게’라는 단어에 유독 악센트를 준 그녀는 에르쉬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냥 얼굴이나 한 번 보고 가려고 했더니, 제발 건드려 달라고 아주 용을 쓰네?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고.

그쪽이 먼저 건드린 거다.

“에르쉬 님 맞으시죠?”

카밀라를 바라보는 에르쉬의 눈빛에 못마땅함이 가득 차올랐다.

건방지게 어딜 나선단 말인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뻔뻔하기 짝이 없거늘! 벌써 자기가 에스크라의 핏줄로 인정받은 줄 아는 건가?

벌레라도 보는 듯한 그의 표정에 카밀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여보.”

에르쉬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여성이 그만하라는 듯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는 에스크라 공작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에르쉬의 아내였다.

그녀 역시 에스크라가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 중이었기에 가문 회의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나에게 할 말이 뭐야?”

그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며 아랫것들을 대하듯 툭 말을 내뱉었다.

“저런…….”

하지만 카밀라는 에르쉬 대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곧 이혼하시겠네.”

“…뭐라?”

흥얼거리듯 내뱉은 그녀의 짧은 한마디에 회의장 안의 분위기가 다시 싸해졌다.

“지금 뭐라고 지껄……!”

촤르르륵!

벌떡 일어나 소리치던 에르쉬는 이번에도 끝까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경련이 일듯 파르르 떨렸다. 카밀라가 그를 무시한 채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쫙 펼쳤기 때문이다. 기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카드들이었다.

부채꼴로 펴진 카드 중 하나를 카밀라가 뽑아 들었다.

“부하의 아내라.”

“……!”

이어진 카밀라의 말에 에르쉬의 얼굴에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것도 가장 아끼는 부하의 아내군요.”

“무, 무슨……!”

“당신이 현재 바람피우는 존재요.”

단조롭게 내뱉어진 카밀라의 그 말은 이번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밀라는 또 하나의 카드를 뽑았다.

“그 여자분, 당신의 아이까지 가졌네요.”

“어, 어디서 헛소리를!”

“이니셜이 L로 시작하는 부하의 아내이고.”

“그……!”

“그 여자에게 협박까지 받고 계시네요. 책임지라고.”

에르쉬는 더 이상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소문이 정말이었던 건가?’

출신도 모르는 여자의 핏줄이라고 지껄였지만, 그 또한 카밀라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소르펠 공작의 의붓딸이라는 사실을.

또한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예지 능력.

하지만 믿지 않았다. 그냥 단순히 운이 좋은 그녀의 행보에 사람들의 과장된 말이 보태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현재 골머리를 썩고 있는 일을 정확하게 끄집어내는 그녀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는 사이 카밀라는 다시 카드 한 장을 뽑아 들었다.

“이런… 새어 나가고 있는 돈이 보이네요.”

에르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설마…….

“1,254만 골드.”

그녀가 내뱉은 숫자에 에르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동안 그가 빼돌린 가문의 공동 자금액이 카밀라의 입에서 흘러나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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