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마수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오래전과 달리 추위에 강한 마수들만 살아남았을 테니까요.”
“그 수가 줄긴 했지만 한 마리라도 민가로 내려오는 순간 거긴 초토화되겠죠.”
“그렇겠지.”
세 사람은 여전히 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숄츠 산맥이라면…….”
카밀라도 들어 본 적이 있는 곳이다. 그라시아 제국을 언급할 때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니까. 산이 험하기도 하지만 다른 걸로도 아주 유명했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카밀라에게 향했다.
“마수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곳이지.”
제이너가 친절하게 그녀의 관심에 응답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기후가 변화하며 숄츠 산맥 주변으로 빙벽이 생겨났어.”
카밀라도 알고 있는 내용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빙벽 덕분에 마수들이 더 이상 외부로 나오지 못해 그 주변 지역이 그동안 안전했, …잠깐만, 빙벽?
“그런데 그 빙벽이 지금 빠르게 녹고 있어.”
“혹시 날씨가…….”
“맞아.”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겨울의 정령왕이 오랫동안 거두지 않은 분노에 도움이 된 부분이 있었다니.
“이렇게 갑자기 따뜻해진 이유가 난 참 궁금해.”
제이너는 카밀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너도 궁금하지 않아?”
“…신기한 일이죠.”
“그게 다야?”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해요?”
“그러게. 난 왜 자꾸 뭐가 더 있을 것 같지?”
저 새끼, 진짜 뭘 알고 있는 거 아냐? 왜 그런 말을 날 보면서 하냐고!
“그래서 말인데.”
그가 다시 특유의 유한 미소를 지었다.
“네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도움이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네가 아니라 저 신수의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하는데.”
제이너의 시선이 신수 킹에게 향하는 걸 보며 카밀라도 고개를 돌렸다.
[규?]
사과를 입에 문 채 킹이 왜 그러냐는 듯 카밀라를 바라봤다.
“문헌에도 적혀 있잖아. 마수를 처리하는 데 신수의 도움을 종종 받았다고.”
그의 말대로 카밀라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오래전에, 그러니까 그라시아 제국이 눈으로 뒤덮이기 전에 친선의 목적으로 신수를 숄츠 산맥으로 보내 마수 소탕에 도움을 줬다나.
“마침 신수가 우리 눈앞에 있잖아.”
제이너의 미소가 더욱 고운 호선을 그렸다.
“기각.”
하지만 제이너의 그 제안에 대한 답은 카밀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바로 튀어나왔다.
“저 콩알만 한 게 뭘 해.”
에스크라 공작이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작아도 신수이지 않습니까. 사악한 기운을 가진 이들과 마수에겐 누구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들었습니다. 실험해 봐도 좋지 않을까요?”
에스크라 공작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소르펠 공작의 허락도 없이 신수를 이용하는 건 국가 간의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그 정도야 카밀라가 허락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게다가 신수는 아무나 따르지 않아.”
“알죠.”
“신수를 데려가려면 저 녀석도 함께 그곳에 가야 한다는 거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그러니 안 돼.”
에스크라 공작은 더 이상 다른 의견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결국 제이너도 신수에 대한 언급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한 번 정한 건 절대 바꾸지 않는 에스크라 공작의 성격을 그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계절이 바뀌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죠.”
아니, 그러니까 그 말을 왜 자꾸 날 보면서 하냐고.
“큰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안 찔려. 봄이 온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참 걱정이네요. 사람이 많이 죽지 않아야 할 텐데.”
안 찔린다고!
…젠장.
* * *
“제이너를 따라가겠다고?”
“네.”
이번 숄츠 산맥 지원군을 이끌 이로 제이너가 선정됐다.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떠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숄츠 산맥의 상황이 말 그대로 일촉즉발이었으니까.
오랫동안 빙벽 안에 갇혀 있는 마수들이 외부로 나오는 순간 아비규환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왜?”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요.”
“뭐?”
…진짠데.
자신이 농담한 거라 여긴 듯 미간을 와락 일그러트리는 에스크라 공작의 모습에 카밀라는 급히 킹을 가리켰다.
“얘가 가고 싶대요.”
[규우?]
바닥에서 자기 몸통만 한 공을 갖고 놀고 있던 킹은 ‘내가 언제?’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빼꼼 들었다.
“제이너 말대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에스크라 공작은 들고 있던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어제도 밤을 새운 건가? 무척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부스럭.
카밀라는 늘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그의 앞에 슬쩍 내려놓았다. 사탕이었다.
피곤할 땐 당 충전이 최고지.
바쁜 연예인 생활을 할 때 밥보다 사탕을 더 많이 먹었던 것 같다. 그 습관이 남아 있어 지금도 항상 사탕 몇 알은 꼭꼭 챙겨 가지고 다닌다.
“…….”
에스크라 공작은 조금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사탕과 카밀라를 바라봤다. 그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기각.”
“어쨌든 갑니다.”
“카밀라.”
“어, 음… 네?”
처음이지 않나? 그가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부르는 건. 순간 묘한 기분이 자신을 감쌌다.
“위험한 곳이다.”
“알아요.”
“그런데 가겠다고?”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카밀라는 조금 전에 한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솔직히 그녀도 확신은 없었다. 아니, 거의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신수가 마수에게 큰 힘을 발휘한다고 하지만 아직 제대로 다 성장하지도 않은 킹이 특별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찜찜해서. 뒤가 구려서.
‘어쨌든 내 책임도 조금은 있으니까.’
자신이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이곳은 여전히 겨울이었을 거고 빙벽이 녹을 일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봄이 찾아온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가 있다면 어느 정도 책임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일로 카밀라 자신과 소르펠 가문이 사업상 커다란 이득을 본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은가.
‘그리고 제이너.’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대해 좀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가 자신에게 한 말들이 정말로 별생각 없이 한 말인지, 뭔가를 알고 한 것인지.
이런 건 직접 부딪쳐서 확인해 보는 게 제일 낫다.
이대로 그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숄츠 산맥으로 떠나 버리면 계속 찜찜해서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단 말이지. 긴 시간 고민하는 건 딱 질색이다.
“전 전투에 끼어들 생각 전혀 없어요.”
“아무도 너한테 그런 거 기대하지도 않아.”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저씨가 뭘 모르시네. 저 검 좀 쓰거든요? 물론 귀신인 제노의 힘을 빌렸을 때의 일이지만 말이다.
“킹이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만 하고 뒤로 바로 빠질 거예요.”
나도 내 목숨 귀한 줄 너무 잘 알거든.
에스크라 공작이 또다시 말이 없다. 한참 카밀라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결국 한발 물러섰다.
“생각해 보도록 하지.”
“네.”
모든 얘기를 끝낸 카밀라는 킹을 안아 들고 일어섰다. 가볍게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그녀는 곧장 밖으로 향했다.
“어? 영애, 여기에 계셨네요.”
그때 마침 문이 열리며 알트온 백작이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가는 길이에요.”
“벌써요? 좀 더 있다 가시지.”
“다음에요.”
아쉬워하는 그를 뒤로한 채 카밀라는 마저 집무실을 나섰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렇게 카밀라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알트온 백작은 곧장 에스크라 공작에게 다가가 물었다.
“대화는 좀 하셨어요?”
“흐음.”
그의 물음에도 에스크라 공작은 대답 대신 의자 손잡이를 툭툭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제이너와 함께라면 딱히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따라가는 게 나으려나?”
“따라가요? 어디를요? 뭔지 모르겠지만 전 반대입니다. 지금 할 일이 태산인 거 아시죠? 가긴 어딜 가십니까?”
“숄츠 산…….”
무심코 대답하며 고개를 돌린 에스크라 공작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너 지금 뭐 먹냐?”
“네? 아, 사탕이요.”
탁자 위에 있던 사탕 한 알을 입에 넣었던 알트온 백작은 해맑게 웃었다.
“이 사탕 맛있네요. 어디서 나셨……?”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크라 공작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뱉어.”
“예?”
“뱉으라고! 이 자식아!”
“아니, 왜요?”
“그 사탕이 뭔지 알고!”
“사탕이 사탕이죠.”
“당장 뱉으라고!”
“고작 사탕 하나에 왜……!”
“고작? 고오작?”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알트온 백작은 에스크라 공작에게 멱살이 잡혀 잠시 탈탈 털려야만 했다.
* * *
“추, 추워!”
“그러게요.”
“여긴 왜 아직도 추운 거야!”
빙벽이 녹을 정도로 따뜻해졌다며!
결국 에스크라 공작은 카밀라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는 숄츠 산맥으로 향하는 일행에 그녀를 포함하는 대신 엄청난 양의 이동 마력석을 카밀라에게 안겨 줬다.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바로 마력석을 터트리라며 가방 가득 그 비싼 마법 아이템을 잔뜩 건넸다.
“그런데 아가씨?”
“왜?”
“그거, 저도 하나만 주시면 안 돼요?”
자신을 따라온 도르만이 아까부터 자꾸 이동 마력석을 탐내고 있었다.
“위험하면 저도 도망쳐야 하잖아요.”
그러게 따라오지 말라니까. 절대 아가씨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굳이 따라오더니.
“도르만.”
“네.”
“방패는 말이야.”
“방패요?”
“방패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막을 때 쓰라고 있는 거야.”
“…….”
“내가 이동 마력석으로 안전하게 도망갈 때까지 잘 막고 있어.”
“와… 진짜!”
웃긴 놈. 내가 진짜로 자기만 놔두고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자신의 말에 삐진 척 고개를 획 돌리는 그를 보며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