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다이브는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 당근만 쏙쏙 골라 에스크라 공작의 접시에 담았다.
그제야 아이가 밝은 표정으로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샤루아가 감사 인사를 카밀라에게 건넸다. 그녀의 얼굴 역시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그날 샤루아가 자신의 몸에 들어와 아이와 직접적으로 접한 이후 신기하게도 아이의 몽유병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
역시 아이가 찾던 건 엄마였던 건가?
물론 그 증상이 사라진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거처가 바뀌었고 아이를 압박하던 세빈느도 사라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날, 아이를 붙잡고 따뜻하게 안아 준 샤루아와의 만남이 가장 큰 변화의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난 며칠 끙끙 앓아야 했지만.’
이번에도 빙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기가 몸에서 쉽게 가시지 않아 며칠을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어야 했다.
“누나, 이제 안 아파요?”
“응.”
“다행이다.”
타지에서 홀로 아픈 게 가장 서러운 법이거늘. 웃기게도 그 외로운 마음을 달래 준 게 어린 다이브였다.
자신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린 바로 저 아이.
[규!]
그래. 우리 킹도 옆에서 계속 지켜 줬지.
두 꼬맹이가 엉겨 노는 모습에 외로울 틈이 없었다. 반면.
“뭐지? 그 눈빛은?”
“뭐가요?”
“지금 노려봤잖아.”
“제 눈빛이 원래 좀 사나워요.”
저 인간, 자신이 아파 누워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도 딱히 안 기다렸다, 뭐.’
마지막으로 그를 한 번 더 노려본 카밀라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일어나 볼게요.”
“저, 저도요! 저도 다 먹었어요.”
이어 다이브 역시 급히 카밀라의 뒤를 따라 식당을 떠났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난 식당엔 에스크라 공작과 함께 식사하고 있던 알트온 백작 두 사람만 남았다.
“넌 또 왜?”
접시에 담겨 있는, 다이브가 넘겨준 당근을 나이프로 난도질하고 있던 에스크라 공작은 다시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알트온 백작이 아주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 치료사만 닦달해 자꾸 보낼 게 아니라 직접 한 번 찾아가 보시라고 했잖습니까.”
카밀라가 아파 쓰러졌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신경을 쓴 건 다름 아닌 에스크라 공작이었다.
겉으로야 별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냉랭하게 굴었지만, 치료사에게 새로운 소식이 올 때까지 서류를 같은 페이지만 계속 읽어 대던 그였다.
그랬던 분이 또 카밀라 님 앞에선 센 척을 하신다. 옆에서 보기 어찌나 답답한지.
“안 좋아해.”
“예?”
“내가 가는 거 불편해한다고.”
그 말을 끝으로 에스크라 공작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방장한테 다음부터 식탁에 당근 보이면 가만 안 둔다고 전해.”
마지막으로 괜한 화풀이성 말을 남긴 그는 식당을 벗어났다.
알트온 백작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며시 내저었다.
* * *
“크윽!”
짧은 단말마와 함께 한 남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무심한 눈빛으로 쓰러진 이를 바라보는 자는 바로 아르시안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여기저기 신음을 흘리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다들 한동안 거동은 힘들어 보였다.
현재 그가 서 있는 곳은 바로 칸 지부 중 한 곳이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졌지만, 그는 지부를 부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배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카밀라, 그 녀석을 건드린 이들은 누가 됐든 한 사람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으니까.
주변을 잠시 훑던 그의 시선이 어느 순간 한곳을 무심히 바라봤다.
짙은 그림자가 깔린 그곳을 응시하던 그의 입에서 짜증 섞인 욕설이 흘러나왔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오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검은 가면을 쓴 이는 쓰러져 있는 이들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연신 혀를 찼다.
“이건 정말 예전에는 없던 일인데…….”
짧은 한숨을 내쉰 그가 아르시안을 향해 말을 던졌다.
“배후도 직접 죽여 보내 줬는데 별 소용이 없군요.”
“너도 칸과 관련된 놈이냐?”
“그렇다면요?”
남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반면 아르시안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아래로 늘어트렸던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더 할 말 없어.”
“소문대로네. 타인에게 전혀 자비가 없다더니. 한 가지만 물읍시다.”
아르시안이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듯하자 남자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소르펠 가문도 멈춘 이 행동을 아무 상관 없는 그쪽이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곧 죽을 놈과 대화 길게 하는 취미가 없어서.”
“역시 그녀 때문인가요?”
카밀라를 언급하자 아르시안의 기운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반면 남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여기서 멈춘다면 정보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길게 대화할 생각 없다니까.”
“그녀와 관련된 정보인데?”
“…….”
단호하던 그가 순간 주춤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아주 찰나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의 기운이 한층 더 흉포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함부로 그 녀석을 입에 담지 마라.”
다른 이를 통해 그녀에 대한 그 어떤 말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알아야 할 게 있다면 그녀에게 직접 들으면 그만이다.
“말이 안 통하시네.”
쯧, 혀를 찬 남자는 바로 뭔가를 품에서 꺼내 아르시안을 향해 던졌다. 단검이다.
가볍게 몸을 틀어 단검을 피한 아르시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아악!
그 틈을 타 남자가 이동 마력석을 터트려 그 자리에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뭐야? 저 새끼.”
마력의 흔적을 쫓으려다 그만뒀다. 날이 밝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이 트는 모습을 본 그의 마음이 조금 바빠졌다.
“돌아가야겠네.”
곧 리오가 깨어날 것이고 아이의 식사 시간이다.
리오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후 카밀라, 그 녀석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리오를 절대 혼자 밥 먹게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 약속을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우우웅!
빠르게 이동 마법을 시전한 그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킹! 물어 와!”
다이브가 들고 있던 작은 공을 힘껏 던졌다.
정원 한쪽으로 날아가는 공을 보며 킹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카밀라를 바라봤다. 자신이 굳이 이런 짓까지 해 줘야 하는 거냐고 묻는 눈빛이다.
끄덕.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귀찮은 표정을 지은 킹이 빠르게 공이 날아간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곤 순식간에 공을 주워 와 아이 앞에 툭 내려놓았다.
“잘했어!”
킹을 완전 강아지 취급하고 있는 다이브를 보며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자신이 다이브를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아는 듯 귀찮아하면서도 아이와 제법 잘 놀아 주는 킹이다.
“자! 또 던진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나 보다.
[규우.]
또 힘껏 공을 던지는 아이를 보며 킹이 바닥에 드러누우며 고개를 획 돌렸다. 더 이상 하기 싫다는 듯.
“어? 하기 싫어?”
그런 킹의 뜻을 다이브도 바로 알아들었다.
“알았어. 미안해! 내가 주워 올게! 잠시만 기다려!”
…왠지 다이브가 킹에게 조련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어어… 어!”
급히 달려가던 아이가 뭔가에 걸린 듯 바닥을 나뒹굴었다.
“다이브!”
[규!]
그 모습에 카밀라와 킹이 동시에 아이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런 자신들보다 먼저 아이를 일으켜 세워 주는 손길이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흙이 묻은 아이의 옷을 가볍게 털어 주는 한 남자. 그를 제일 먼저 알아본 다이브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형님.”
“잘 있었니?”
“언제 오신 거예요?”
“방금.”
형님? 그럼 저 사람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카밀라는 남자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제이너 에스크라. 에스크라 공작의 첫째 아들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아이돌이다.’
당장 기획사 어디를 데리고 가도 계약서부터 들이밀 얼굴이었다.
춤? 노래? 연기? 다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냥 무대에 세워 놓기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갈 것 같은데?
아르시안도 키가 큰 편인데 그보다 한 뼘은 더 큰 것 같다. 검은빛 도는 푸른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미모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 주고 있었다.
에스크라 공작도 한 인물 하더니 그 피를 아주 잘 물려받은 것 같다. 그리고 검은 눈동……!
‘잠깐만.’
검은 눈동자?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남자의 눈동자 색이… 검다.
‘아니, 왜?’
왜 붉은색이 아니지? 에스크라 가문의 핏줄은 눈동자 색이 다 붉다며? 분명 에스크라 공작이 그랬는데?
“부럽네.”
그가 자신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붉은 눈동자.”
그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반가워, 동생.”
그 말에 카밀라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