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점괘보는 공녀님 (119)화 (119/215)

16584891623066.jpg 

“그 기간 동안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건가요? 지금도요?”

“맞습니다. 그러니 제발 오해하지 마십시오. 일부러 찾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알트온 백작은 저번에 진실을 들은 카밀라가 무엇에 대해 그토록 화가 났는지 정확히 파악해 그걸 강조했다.

“그분도 몰랐습니다. 자신에게 남겨 놓고 온 자식이 있는 줄……. 조금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니 믿어 주십시오.”

잠시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던 카밀라는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단 1년이었다는 거죠?”

“네, 1년 정도 사라지셨다 돌아오셨습니다.”

즉, 라비는 아니라는 거다. 라비와 자신의 나이 차가 다섯이니 그가 에스크라 공작의 자식일 수는 없었다.

‘어머니 인생도 참.’

이제 보니 그녀의 삶도 자신 못지않게 참으로 순탄치 않았던 것 같다.

세 번의 결혼이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결혼 생활이 다 그리 짧았으니. 비교적 행복했던 소르펠 공작과도 1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어 버리지 않았던가.

“영애, 갑작스러운 일에 마음이 많이 좋지 않은 거 압니다. 다만 공작님의 상황도 조금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연신 한숨을 내쉬는 자신의 모습에 뭔가 다른 오해를 한 알트온 백작이 다시 조심스럽게 자신을 달랬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전에 제가 말씀드렸지요.”

알트온 백작이 자신의 안색을 연신 살피며 말을 이었다.

“거처를 에스크라 공작가로 옮기는 건 어떠신지…….”

그래서였나? 갑자기 궁에서 짐을 싸라고 한 게?

“그때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던 거군요.”

자신이 에스크라 공작의 딸이라는 걸.

“영애…….”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알트온 백작의 모습에 카밀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왜 안 된다는 거야!”

“또 말해야 하나? 지금 모든 통행증 발급이 중지됐다.”

“그러니까!”

콰앙!

“내가 굳이 당신을 이렇게 찾아와 부탁이라는 걸 하는 거잖아, 그 같잖은 힘 좀 제발 써 달라고.”

“그 같잖은 힘, 못 써 주겠다고 방금 말했는데.”

“그러니까 왜!”

“이미 소르펠가에서 그 아이를 데려올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가족도 아닌 네가 무슨 자격으로 거길 가겠다는 거지?”

집무실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에 밖에 서 있는 이들의 눈빛이 조마조마하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두 사람을 모신 집사 바올 또한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문을 지그시 바라봤다.

‘한동안 조용하시더니…….’

집 안에 다시 큰소리가 퍼지기 시작한 건 카밀라 영애가 그라시아 제국에서 큰일을 당할 뻔한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다.

아르시안이 카밀라를 만나기 위해 그라시아 제국으로 홀로 떠나겠다는 걸 세프라 공작이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현재 통행증 발급이 모두 중지되었고 황실을 통해서만 통행증이 임시로 발급되는 상황이다.

즉, 황실에 줄이 없는 이는 현재 일절 그라시아 제국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기다리라고?”

“그럼 지금 네가 뭘 할 수 있지?”

“씨X!”

콰앙!

다시 흘러나오는 큰 소리에 밖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였다. 저러다 정말 큰 싸움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다다다-

“음?”

그 순간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가 있었다. 집사 바올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런 그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어? 다들 여기서 뭐 해요?”

리오였다. 집무실 입구에 모여 있는 이들을 본 아이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다들 현 상황도 잊은 채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처음엔 아이가 이곳에서, 저 무뚝뚝한 두 부자 사이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했는데, 웬걸? 아이가 온 뒤로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작은 생명체의 힘이라는 게 생각보다 정말 무시무시했다.

까르르거리는 웃음소리와 통통거리는 작은 발소리……. 그런 아이의 모습에 어느새 다들 웃음을 짓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곤 했다.

“근데 아까 여기서 형아…….”

“손 좀 써 달라고!”

아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할아버지.”

그러더니 집사의 바짓단을 슬쩍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저씨랑 형아… 싸워요?”

그 물음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사실 그대로 말하기도 애매하고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자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그때 집사 바올이 그런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두 분의 의견이 잠시 맞지 않는 듯합니다.”

“안 되는데… 싸우면 선생님께 혼나는데…….”

두 사람이 선생님께 혼이 날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며 집사의 입가에 다시 스르륵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리오 도련……!”

하지만 다음 순간 아이가 바로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뛰어드는 모습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릴 사이도 없었다.

달칵!

“…….”

“…….”

리오의 등장에 세프라 공작과 아르시안이 동시에 말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이 총총 안으로 들어서는 아이에게 향했다.

두 사람을 잠시 살피듯 번갈아 바라보던 아이는 곧장 세프라 공작에게 다가섰다.

“아저씨.”

자리에 앉아 있는 세프라 공작의 손을 리오가 잡아당겼다. 자리에서 빨리 일어나라고.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아이의 작은 손길에 세프라 공작은 별 저항 없이 아이의 뜻에 따라 줬다.

“여기요.”

아이는 세프라 공작을 이끌어 아르시안의 맞은편에 세웠다. 그러곤 잡고 있던 손을 힘껏 들어 올렸다.

“어깨에 손.”

“…뭐?”

“형아 어깨에 두 손요.”

“…올리라고?”

“응!”

아르시안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라는 말에 잠시 멈칫한 세프라 공작은 결국 이번에도 아이의 말을 따라 줬다.

“…….”

무표정했던 세프라 공작의 입에서 미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르시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처음인 것 같은데? 어둠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의미로 이 아이의 몸에 손을 대는 게…….

아르시안도 같은 어색함을 느낀 듯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표정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형아도.”

아르시안의 손을 잡은 아이는 그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나도?”

“응!”

어이없는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본 아르시안은 리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자. 이제 말해요.”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의 어깨를 붙잡은 걸 본 아이는 손뼉을 짝 쳤다.

“내가 잘못했어. 우리 다시는 싸우지 말자.”

“…….”

“…….”

얼떨결에 네 살 아이의 화해법을 배운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로의 어깨를 붙잡은 어색한 모습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아마도 보육원에선 아이들이 싸우면 이렇게 화해를 시키는 것 같은데…….

“우린 싸운 게 아니란다.”

“맞아!”

동시에 어깨에서 손을 내린 두 사람이 급히 말을 이었다.

“그냥 의견이 좀 안 맞았을 뿐이야.”

그러니 제발 이런 쪽팔리는 짓은 두 번 다시 시키지 마!

“으음… 네.”

아이는 이미 거기에 대한 흥미를 잃었는지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이곳에 온 원래 목적이 있었던 듯 그냥 바로 자리에 앉더니 뭔가를 잔뜩 탁자에 내려놓았다. 고운 색으로 물들어 있는 종이들이었다.

“뭐 하는 거야?”

아르시안이 먼저 아이의 행동에 관심을 보였다.

“소원꽃 만들 거예요.”

“소원꽃?”

“응!”

“그게 뭔데?”

“쥬리 누나가 그랬는데, 이렇게 꽃을 잔뜩 만들어서 자는 방 창문에 붙여 놓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소원… 종이꽃으로?”

“네!”

“…….”

소원이 이딴 걸로 이루어진다면 세상에 못 이룰 소원이 어디 있겠냐, 라는 말 따윈 아무도 내뱉을 수 없었다. 아이의 눈빛이 너무도 진지했으니까.

“꽃을 많이 만들수록 소원이 더 잘 이루어진다고 했어요!”

“무슨 소원 빌게?”

“누나 무사히 돌아오라고.”

“…누나?”

“응! 하루빨리 돌아오라고 빌 거예요.”

아이는 이내 아주 정성껏 종이를 오리기 시작했다. 그 표정이 숫제 경건하기까지 해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다시 고개를 든 리오는 두 사람을 향해 종이를 쓱 내밀었다.

“같이 만들어요. 많이 만들수록 좋아요!”

아르시안은 속으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지금 자신이 여기서 이런 거나 만들고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형아? 꽃 오릴 줄 몰라요?”

“그게 아니라…….”

“제가 가르쳐 줄까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고개를 저으며 몸을 뒤로 빼는 아르시안을 아이가 빤히 바라봤다.

“형.”

“왜?”

“형은 누나가 무사히 돌아오는 거 싫어요?”

“…뭐?”

“싫구나.”

“그런 게 아니……!”

“난 누나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안 아프고. 그래서 꽃 만드는 건데.”

“…….”

‘왜 이렇게 조용하지?’

리오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집무실 밖을 서성이고 있던 집사 바올은 너무도 고요한 안의 분위기에 의아함을 느꼈다. 말소리가 거의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안을 살폈다.

“……!”

그런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집무실 안이 조용한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의 풍경에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다들 탁자에 모여 앉아 뭔가를 아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세프라 공작은 종이의 색깔을 골라 주고 있었고 리오와 아르시안은 그 종이를 아주 열심히 오리고 있었다.

“영감은 이 빨간색에 저 검은색이 맞는다고 생각해? 이딴 꽃이 어디 있어?”

“고정 관념을 버려라. 마법을 쓰는 녀석이 그리 틀에 박힌 사고만 하고 있으니.”

“씨……! 여기서 마법 얘기가 왜 나……!”

“미안해. 우리 다시는 싸우지 말자, 해요.”

“…….”

“…….”

아이의 한마디에 입을 꾹 다무는 두 사람.

“가위질이 왜 그 모양이야. 제대로 자른 게 없군.”

“이게 어때서!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영감이 직접 자르든가! 자기는 색깔도 못 고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해요.”

“…….”

“…….”

집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사라졌다. 그는 앞으로도 오늘처럼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