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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보는 공녀님 (117)화 (117/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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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악!”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도 좋아.”

“크… 저, 정말 모릅니다.”

의자에 몸이 묶인 채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남자의 오른손을 에스크라 공작이 깍지를 끼듯 다시 잡았다.

으드득!

“크… 으아아악!”

“사람의 뼈라는 게 생각보다 참 약해.”

“주… 죽여……. 그냥 죽이라고!”

“당연히 넌 죽어.”

“크으…….”

“다만 곱게 죽느냐, 아니냐의 문제지. 그러니 말해.”

에스크라 공작은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말하면 바로 죽여 줄 테니까.”

“크… 몰라……. 정말 난 아무것도 몰라!”

“쯧.”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에스크라 공작은 소매 단추를 푼 후 걷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남자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낚아챘다.

“죽기 싫은가 보군.”

“아아악! 크으윽!”

“아직 살 만한가 봐.”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남자의 비명에 에스크라 공작의 눈빛이 더욱 사납게 빛났다. 반면 입가의 미소는 오히려 짙어졌다.

‘맛이 가셨네.’

그 모습을 한쪽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던 알트온 백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랜만에 눈이 돌아가 있는 자신의 주군을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을 해 본다.

저건 아무리 봐도 그냥 화풀이인데.

‘카이스 님도 아시잖아.’

저자가 정말로 배후 따위 알지 못한다는 걸.

보통 수뇌부나 알까, 직접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저런 말단 암살자들은 그저 지시만 받을 뿐 배후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잡혀 고문당하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 게 비밀을 유지하기 제일 좋으니까.

그 사실을 에스크라 공작 역시 분명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저러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이런 일에 직접 저리 손을 쓰는 일도 없었거늘, 알트온 백작은 오랜만에 잔혹성을 마구 드러내고 있는 그를 보며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말하라니까. 편안하게 죽여 줄 테니.”

“크아아악!”

아무래도 한동안 비명이 그치지 않을 듯했다.

* * *

“…지금 뭐라고 했나.”

“황실에서 움직였습니다!”

가브엘 후작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실이 왜!”

안 그래도 암살 소식을 들은 소르펠 공작이 배후를 찾는다고 제국 전체를 뒤집는 중이다.

암살 집단 칸, 제국 곳곳에 은밀히 퍼져 있는 그들의 지부들을 어찌 그리 잘도 찾아내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지부들이 파괴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라시아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요청이 들어왔답니다.”

“그라시아에서?”

사절단으로 온 카밀라 영애를 공격한 건 두 국가 간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려는 사특한 무리의 술수라며 정식으로 요청이 들어왔단다.

“배후를 반드시 찾아 처단해야 한다고요.”

“그것들이 언제부터 사절단에 그리 신경을 썼다고!”

“배후를 찾는 데 그라시아에서도 적극적인 도움을 주겠다며…….”

콰앙!

예상치 못한 전개에 가브엘 후작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암살 집단이 아무리 은밀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황실이 나선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색출이 이뤄진다면? 수뇌부까지 잡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건 시간문제다.

“빌어먹을!”

가브엘 후작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집무실을 연신 서성였다. 그러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가 한층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먼저 손을 써야겠어.”

“예?”

“수뇌부를 유인해서 처리해.”

“유인이요? 하지만……!”

“새로운 의뢰를 넣겠다든지! 뭐라도 해서 어떻게든 수뇌부에 접근하라고! 시간이 없어! 서둘러라!”

“아, 알겠습니다.”

* * *

“그러니까…….”

잠시 말을 멈춘 카밀라는 에스크라 공작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 반지가 공작님 거라고요?”

“그래.”

“이 반지를 제 어머니께 준 분이 공작님이시라는 거죠?”

“맞아.”

다시 말을 멈춘 카밀라는 머리가 무척 아프다는 듯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 말이 무슨 뜻인 줄은 아세요?”

“대충.”

“공작님이…….”

그러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

“그런 것 같군.”

그런 것 같군?

“하!”

그게 다야? 더 할 말은 없어?

‘뭐, 이런!’

아침은 드셨나요? 같은 시답잖은 질문을 받은 이처럼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크라 공작의 모습에 카밀라는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이렇게 침묵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아주 흔한 반지예요. 주변 보석상 어디를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정말 별거 없는 루비 반지죠.”

그러니 당신이 착각한 거 아니냐고, 카밀라는 일단 상황을 부정해 봤다.

“줘 봐.”

“반지요?”

“그래.”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손에 끼고 있던 루비 반지를 빼 그에게 건넸다. 반지를 받아 든 그는 자신의 기운을 살며시 집어넣었다.

치이익.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반지에서 붉은빛이 쏟아지더니 탁자에 올려져 있던 종이를 살짝 태우며 표식을 남겼다.

붉은 장미. 에스크라 공작가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가문의 인장으로 쓰이던 반지지.”

…침착하자. 침착해. 그래, 반지는 저 사람 것일 수 있어.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셨나 보네요. 아버지에게 받은 거라고 했지만 그냥 길에서 주운 것일 수도 있……!”

“붉은 눈.”

상황을 어떻게든 부정하려는 카밀라의 말을 이번에도 그가 단박에 잘랐다.

“에스크라가의 피를 이은 자의 특징이다.”

그래서 처음 저 아이를 봤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갔던 거다. 가문의 특징이 보였으니까.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모두 다 그쪽 핏줄이라고 주장하실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우연이라고 우기기에는 무리지 않나?”

…무리긴 하지.

‘젠장.’

모든 상황을 두고 봤을 때 아무래도 내가 저 인간의 딸인 게 맞는 것 같은데…….

카밀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조금이라도 입을 열었다간 온갖 쌍욕이 다 튀어나올 것 같아서.

“영애, 많이 놀라신 건 알겠는데, 일단……!”

말 시키지 말라니까!

카밀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 영애.”

“그러니까 뭐야?”

정말 저 인간이 내 친아버지라고?

“장난해요?”

아버지? 아버지이? 와 씨! 저쪽 세상이고 이쪽 세상이고 뭔 놈의 아버지라는 것들이 다 이리 개떡 같아!

“제가 몇 살인지는 아세요?”

무려 열일곱이다. 그렇게 그 긴 세월 동안 저 인간은 대체 뭐 했대? 찾을 생각이 전혀 없었나 봐?

공작이라는 직책에 앉아 있는 인간이 마음만 먹었으면 몇 번은 찾고도 남았을 긴 세월이다.

안 찾은 거 맞잖아!

“그 반지, 공작님이 가지세요. 주인이 나타났으니 돌려 드려야죠.”

카밀라는 그 말을 끝으로 바로 걸음을 뗐다. 이곳에 조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 있다간 진심으로 저 인간에게 엿을 날릴 것 같거든.

“영애!”

그 순간 알트온 백작이 그녀를 다급히 불렀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간곡한 외침에 짧은 한숨을 내쉰 카밀라는 결국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곳에 있는 내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유일한 이인데 막무가내로 무시하기는 그랬으니까.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이대로 그냥 가시다니요.”

“그냥 안 가면요?”

“아니, 그래도……!”

그녀를 급히 붙잡았던 알트온 백작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여, 영애.”

눈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으… 으윽…….”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눈물을 연신 떨어트리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애처로웠다.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쩌릿해지는 모습에 에스크라 공작 역시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영애, 진정하시고…….”

“…뭐, 이렇게 눈물이라도 흘려 주고 가야 하는 건가요?”

알트온 백작은 다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녀의 표정이, 말투가 어느새 또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눈가를 손으로 스윽 훑어 낸 그녀의 얼굴엔 더 이상 슬픔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방금까지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비릿한 미소까지 머금은 그녀의 눈빛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애절한 부녀 상봉을 바라시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는데…….”

내가 또 연기는 좀 하잖아.

가족? 피의 끌림? 애초에 그딴 거 저쪽 세계에 있을 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쪽 세계의 친부모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여 아쉬울 것도 없었다.

‘지금껏 모르고도 잘 살았는데 뭐.’

카밀라는 여전히 자리에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에스크라 공작을 마지막으로 한번 응시한 뒤 그대로 돌아섰다.

타악!

“카이스 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알트온 백작이 답답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이럴 땐 좀 더 솔직하셔도 될 텐데요.”

사정이 있었다고, 사고가 있었다고. 오해가 없도록 잘 얘기를 해 보라고 이 자리를 만들었거늘, 저리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

“…….”

그런 알트온 백작의 시선에도 에스크라 공작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카밀라가 놓고 간 반지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 * *

“하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카밀라는 의자에 풀썩 앉으며 긴 숨을 토해 냈다.

머리가 여전히 멍하다. 머릿속이 뭔가 꽉 막힌 것처럼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에스크라 공작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을 했지만,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려왔다.

친아빠라니. 살아 있는 줄도 몰랐고,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누구도 자신에게 아버지에 대해 먼저 나서서 말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특별히 궁금해하지도 않았었다. 그는 처음부터 죽은 이였을 뿐이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 그때 고용인들이 숨겼던 그 반지를 여전히 자신이 찾지 못한 상황이라면?

혹은, 자신이 마력석 광산을 소르펠 공작에게서 받지 못했다면? 그래서 이번 축하 사절단에 애초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모르고 살았겠지.’

이렇게 친아빠를 만날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됐어.”

차를 권하는 도르만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차가 아니라 술이라도 한잔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말 그대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말이지.

‘여긴 17세한테도 술을 팔던데, 확 먹어 버려?’

“반지는 돌려 드리고 오셨나 보네요.”

“…….”

카밀라의 시선이 아주 느릿하게 도르만에게로 향했다. 그를 바라보는 카밀라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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