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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보는 공녀님 (114)화 (1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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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 안다고. 기가 막히지? 그토록 오랫동안 한을 품고 살았는데 그동안 내가 뭐 했나 싶지?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아이슬라의 모습에 카밀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스…….]

“네.”

[아이…….]

“네.”

몇 번을 반복해 확인하던 그녀는 다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 모습에 카밀라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시시각각 변해 가던 그녀의 표정이 이내 편안해졌다.

‘오.’

왠지 도박에 성공한 것 같은데?

어쨌든 마르스가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 그녀의 분노가 어느 정도 잠재워진 듯했다.

[멍청한 놈.]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허탈하고 허망한 듯 그녀는 얼어붙은 호수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 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여기가 그곳인가 보네.’

마르스, 그가 죽음을 맞이한 곳.

그 긴 세월을 아이슬라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을까. 죽은 친구의 모습을 그리고 또 그렸을까? 그래서 이곳에 있는 걸까?

짧게 혀를 찬 카밀라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매만졌다.

‘에이, 모르겠다.’

조금 아깝긴 한데… 아니, 많이 아깝긴 한데!

잠시 망설이던 카밀라는 목걸이를 풀어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러자 아르시안이 준 검은 보석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이슬라.]

[……!]

멍해 있던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마, 르스.]

그가, 이제 얼굴조차 희미해져 버린 그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소중한 나의 친구…….]

[…….]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겨울의 정령은 눈물도 얼음이네.’

수정처럼 반짝거리는 얼음 결정체가 쉬지 않고 그녀의 눈에서 떨어졌다.

[하…….]

이게 환상인 걸 아는데, 신수의 힘으로 만들어진 모습인 걸 아는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는 여전히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뚝. 뚜욱.

“어?”

차가운 무언가가 이마에 떨어졌다.

쏴아아-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방울은 이내 주변 땅을 적시기 시작했다.

“비다…….”

500년 만에 그라시아 제국에 비가 내렸다.

* * *

쏴아아-

연일 내리는 비에 그라시아 제국 전체가 들썩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떤 사람은 신기해했고, 어떤 사람은 두려워했다.

그러는 사이 몇백 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강이 녹기 시작했으며, 대지를 덮고 있던 눈과 얼음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

에스크라 공작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시선에도 카밀라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우산부터 공급해 드릴까요?”

카밀라는 계약서를 펼쳐 보이며 더욱 짙은 미소를 날렸다. 잭팟을 터트렸으니 맘껏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정말 설마 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뭐든 물어보세요.”

에스크라 공작은 바로 창밖을 가리켰다.

“저거, 자네와 관련이 있나?”

“설마요. 제가 무슨 능력으로 날씨를 변화시키겠어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도 절묘했다.

마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들을 미리 다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자신과 저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하지 않았던가.

겨울 왕국에 와서 다른 계절 용품을 팔겠다고 하더니 딱 맞추어 계절이 변화하고 있었다.

‘이게 우연이라고?’

그는 얼마 전에 알트온 백작이 조사해 온 내용을 떠올렸다.

“예언을 한다지.”

카밀라 공녀, 그녀가 사람의 미래를 보고 주변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걸로 매우 유명하단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어 헛웃음을 지었는데.

“미리 안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저와 공작님이 딱 맞게 계약을 미리 해 뒀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카밀라가 든 계약서를 바라보는 에스크라 공작의 표정이 영 못마땅했다. 정말로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다른 계절 용품이었으니까.

“설마 이제 와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건 아니죠? 계약서에 명시했다시피, 파기 시에는 계약금의 30%를 위약금으로 무셔야 해요.”

“설마 내가 얼마 전에 한 계약 내용도 잊었을 것 같나.”

“그러니까요. 우리 서로서로 손해 볼 일은 하지 말자구요.”

에스크라 공작은 그 대화를 끝으로 다시 말이 없다. 그는 지긋한 시선으로 카밀라를 바라봤다.

‘이 아저씨가 또 저러네.’

저리 날카로운 시선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면 솔직히 무척 부담스럽다. 뭔가 속을 들키는 기분이랄까?

“영애 나이가 열일곱이라지.”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웬 신상 조사?

뜬금없는 그의 물음에 카밀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 와 어리다고 깔보기라도 할 생각인가?

“내가 마지막으로 페이블러 제국에 간 게 그때쯤이지.”

“그러시군요.”

뭐야? 갑자기 자기 여행 간 얘기를 왜 하지?

“거기서 사고를 당했고.”

“사고요?”

카밀라의 물음에 그의 입이 다시 닫혔다. 잠시 후 그가 짧게 혀를 차더니, 이제 가 보라며 축객령을 내렸다.

“당장 필요한 물품 목록과 수량을 서류화해 놓을 테니 알트온 백작에게 받아 가라.”

“알겠습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카밀라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계약이 유효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바로 집에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저 엄청난 양의 물품을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무척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

타악.

그렇게 문이 닫히고 카밀라가 나간 후, 에스크라 공작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의 잃어버린 1년이 저 아이인가.”

* * *

“정말 신기하군.”

비가 그친 그라시아 제국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해 갔다.

봄기운을 가득 담은 햇빛에 완전히 말라 죽었다고 생각한 생명체가 아주 조금씩 싹이 트기 시작했다.

흙 속에 감추어져 있다 삐죽 튀어나온 잡초 같은 풀떼기를 보며 에드센 황태자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겨울이 끝난 거죠.”

카밀라는 자신의 어깨에 떡하니 앉아 있는 존재를 힐끔거렸다.

겨울의 힘을 모두 거두어들인 아이슬라는 새하얗고 작은 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봄을 다스리는 정령왕 노랑이였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한 힘을 한 번에 터트리는 건지, 파릇해져 가는 속도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심지어 더워.”

햇살이 따뜻하다 못해 덥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두꺼운 겉옷이 더 이상 필요 없을 지경이다.

“두 국가가 공녀에게 납작 엎드리게 생겼군.”

소식을 전해 받은 페이블러 제국 전체가 들썩였다. 거대한 거래처가 새로 탄생한 꼴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벌써부터 소르펠가에 줄을 대려고 사방에서 난리라던데.”

에드센 황태자 역시 이번 계약에 대해 언급했다.

“이제 고작 1차 거래인걸요.”

일단 급하게 필요한 물품만 작성해 소르펠 가문에 전달했다.

당장 필요한 물품과 조율할 것이 너무도 많아 카밀라는 바로 페이블러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동안은 이곳에 남아 중간 역할을 해야 했다.

“전하께선 내일 돌아가신다면서요.”

“왜? 섭섭하기라도 한가?”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너무 좋아하는 티 나지 않게!

“네, 저만 여기 남게 된다니… 무척 섭섭하네요.”

“그래? 공녀가 그리 섭섭하다니 돌아갈 시기를 다시 조정해 봐야겠군.”

미쳤냐!

“바쁘신 전하를 감히 제가 어찌 붙잡겠습니까. 아쉽지만 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에드센이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속아 주도록 하지.”

스윽.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카밀라의 곁으로 다가와 살짝 흘러내린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줬다.

“또 봐, 공녀.”

귓가로 전해지는 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카밀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 * *

“에스크라 공작님 댁에요?”

“네, 혼자 여기에 계시는 것보다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공작님도 곧 자택으로 돌아가실 거라서요.”

“혹시 해서 묻는 건데, 저 쫓겨나는 건가요?”

“아닙니다! 쫓아내다니요!”

맞는 것 같은데?

에드센 황태자가 떠나자마자 자신을 찾아온 알트온 백작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사절단이 모두 돌아가 텅텅 빈 별궁에서 홀로 지내지 말고 에스크라 공작가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다.

“눈칫밥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릴 때 하도 많이 먹어서.

“눈칫밥이라니요. 감히 어떤 인간이 영애에게 눈치를 준다는 말입니까.”

댁 상사요. 요즘 나만 보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데.

“혹 지금 지내시는 곳에서 눈칫밥이라도…….”

안색이 굳어진 알트온 백작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뭐지? 저 표정은?’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카밀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아, 내가 의붓딸이라는 걸 알고 하는 말인가? 혹 집에서 구박받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하긴, 계약 전에 대충 알아봤겠지.

“어릴 때야 눈치를 좀 보긴 했죠.”

아니지, 최근까지도 그랬다. 안 죽으려고 엄청 아등바등했으니까.

카밀라는 대충 대답을 내뱉으며 피식 웃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참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는 생각을 하는데, 뭐 때문인지 백작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에스크라 공작저로 가시는 걸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진짜 왜 저러냐고.

알트온 백작이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강력하게 주장하자, 결국 카밀라가 한 발 물러섰다.

“생각해 볼게요.”

“네!”

그 후로도 연신 공작가의 좋은 점을 어필하는 그를 보며 카밀라는 더욱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찜찜해.’

왠지 등골이 아주 싸한 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듯하단 말이야.

“그런데 카밀라 님.”

잠시 후 알트온 백작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그 반지 말입니다.”

“이거요?”

카밀라는 자신의 손에 끼어 있는 루비 반지에 시선을 줬다.

“다들 이 반지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저번에 에스크라 공작도 그러더니, 왜 자꾸 이 반지에 관심일까? 어머니가 물려주신 거라는 것 빼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반지인데 말이야.

‘세공이 좀 남다르긴 한데…….’

보석을 보는 눈이 남들보다 뛰어난 카밀라가 보기에도 세공이 무척 잘되어 있긴 했다. 그렇다고 연달아 사람들이 관심을 줄 정도는 아닌데?

“어머님께 다른 말은 듣지 못하셨습니까?”

“전혀요.”

이 반지를 친아버지가 어머니께 준 거라는 사실도 최근에 라비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이다.

“그러시군요.”

그가 아쉽다는 듯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뭐지?

“하하…….”

의아함이 담긴 자신의 시선에 누가 봐도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연신 흘리는 알트온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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