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 아버지.”
카밀라는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도 원한 일인걸요.”
리오는 보육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닌 세프라 공작이 리오의 입양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저도 제가 데리고 있으려 했는데…….”
아르시안이 먼저 리오에게 의사를 물었다.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겠냐고.
그 말에 다른 이들은 경악했지만, 카밀라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은근히 애들한테 약하더란 말이지.’
특히 리오한테 말이다.
주변에 사람이 알짱거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주제에 그 아이한테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은근히 곁을 맴돌며 챙겨 주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엄청 빠르거든.’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을 바로 느낀다. 리오가 페트로보다 아르시안을 더 따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르시안이 조금이라도 저를 싫어하는 분위기를 풍겼다면, 리오가 그렇게 따를 리 없다.
‘조금 닮았나?’
시에르, 그 아이와.
똘망똘망한 눈빛이 조금 닮은 것도 같다. 어쨌든 아르시안이 내민 손을 리오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으로 급격히 친해진 분위기랄까?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 아르시안이 아이의 눈엔 더없이 멋져 보였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 녀석 집은 좀…….”
소르펠 공작은 여전히 걱정이 앞서는 듯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그 무뚝뚝한 녀석과 지내야 할 아이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으니까.
“리오라면 그 집에서 잘 지낼 거예요.”
생각보다 붙임성이 아주 좋은 아이다.
‘큭.’
카밀라는 속으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시안이 리오를 꾈 목적으로 내뱉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집에 비어 있는 방 있어.’
처음에는 황당했다. 지금 자기 집에 방 많다고 자랑하는 건가?
우리 집도 빈방 많아! 라고 말하려다 그가 말하는 방이 어떤 곳인지 짐작하곤 입을 다물었다.
‘다른 녀석이 쓰던 방이지만…….’
리오를 친동생처럼 여겨 주겠다는 뜻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괜찮을 거예요.”
그 한마디로 아르시안이 그 누구보다 아이를 잘 보살필 거라는 확신이 섰다.
* * *
“…….”
“…….”
식당 안이 무척 고요하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미 세프라 공작과 아르시안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둘 다 침묵을 어색해하지도 않는다. 이런 분위기야 너무도 익숙하니까.
주변에 대기 중인 고용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시는 이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들의 행동 역시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다다다다!
그때였다. 작고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식당 앞까지 이어진 소리는 이내 뚝 멈췄다. 그 소리에 세프라 공작과 아르시안의 시선이 동시에 입구로 향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안으로 들어설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무런 기척이 없다.
쏘옥.
잠시 후 아주 작은 머리 하나가 빼꼼 들어왔다.
“…어?”
몰래 안을 살필 생각이었던 듯, 조심스레 머리만 들이밀었던 아이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에 눈이 커다래졌다.
“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함박웃음이 아이의 얼굴에 걸렸다.
“밥 먹으러 왔어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꾸벅 고개를 숙인 아이가 조르륵 달려와 꺼낸 첫마디였다.
“앉으렴.”
“네!”
씩씩하게 대답한 아이가 높은 의자에 낑낑거리며 올라서려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빙그레 웃은 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이를 안아 의자에 앉혔다.
“고맙습니다.”
아이의 인사에 집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 집에서 이런 해맑은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게 얼마 만인지… 아니, 있었던 적이 있나 싶다. 돌아가신 시에르 도련님은 너무도 조용조용한 분이었으니까.
이내 식탁 위로 음식들이 빠르게 놓였다. 음식을 본 아이의 입이 살짝 벌어지더니 이내 환하게 웃는다.
“맛있겠다!”
손뼉까지 치며 좋아한 아이는 이내 포크를 집어 들었다. 미리 지시가 있었던 듯, 아이의 앞에 놓여 있는 고기는 이미 한입 크기로 작게 잘려 있었다.
“어…….”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식탁이 아이에게 너무도 높아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의자를 새로 주문해야겠군.”
“네, 공작님.”
그 모습을 본 세프라 공작이 명을 내렸고 집사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미처 신경 쓰지 못해 죄송하다는 듯.
“으차.”
“……?”
아이의 식사를 돕기 위해 다가서던 집사는 잠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리오가 폴짝 아래로 내려섰기 때문이다.
이내 도도도- 아이가 달려간 곳은 바로 세프라 공작의 앞이었다.
“안아 주세요.”
순간 여기저기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세프라 공작을 향해 두 팔을 벌렸기 때문이다.
“…….”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세프라 공작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반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변 이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들이 모시는 세프라 공작이 얼마나 냉정한 사람인지 다들 너무도 잘 아니까.
스윽.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가 별다른 말 없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러곤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아무렇지 않게 앉혔다.
“고맙습니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이 그제야 제대로 다 보이자 아이가 다시 환하게 웃는다.
세프라 공작이 아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그냥 받아 주는 모습에 다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
아이가 제 작은 입을 최대한 벌린 채 세프라 공작을 빤히 바라봤기 때문이다.
음식을 넣어 달라는 듯 보채는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것도 그럴 것이 보육원에선 혼자 음식을 먹기 힘든 아이들은 늘 선생님들이 무릎에 앉혀 음식을 먹여 줬기 때문이다. 리오도 그런 경험이 아주 많았다.
“…….”
세프라 공작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아이를 빤히 바라볼 뿐이다.
그 모습에 주변에 서 있던 이들 모두 다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스윽.
“……!”
하지만 곧 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가, 세프라 공작이 고기 한 점을 집어 아이의 입에 넣어 줬으니까.
자기 자식들에게조차 해 주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맛있어요!”
고기를 한참 우물거리던 리오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야.”
한쪽에서 그 모든 상황을 어이없는 눈빛으로 지켜보던 아르시안이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널 자주 본 건 나야.”
자주 본 자신을 두고 처음 보는 저 인간한테 왜 친근하게 구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보통은 그래도 안면이 있는 이에게 먼저 도움을 청하지 않나?
“누나가 그랬어요.”
“누나? 카밀라?”
“네!”
고개를 크게 끄덕인 아이는 자신이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가면 그 집에서 가장 힘센 사람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마, 라고 했어요.”
“…힘센 사람?”
“응! 그래야 사는 게 편해, 라고도 했어요.”
참 좋은 것도 가르쳤다.
대체 저런 꼬맹이한테 뭘 가르친 건지.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그녀답다고 해야 할지.
“그래서 내가 아니라 저 인간한테 붙은 거다?”
“네! 누나가 이 집에서 아저씨가 제일 센 분이래요.”
“…….”
뜻하지 않게 일 패를 당한 아르시안은 한동안 입만 뻐금거렸다. 뭔가 반박하고 싶은데 저런 꼬맹이를 데리고 뭐라 할 수도 없고.
스윽.
반면 세프라 공작은 다시 고기 한 점을 집어 아이의 입에 넣어 줬다.
“그 아이는 늘 옳지.”
“응! 누나는 늘 옳아요!”
아주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씨X.’
결국 아이 앞이라 속으로만 연신 욕설을 토해 내는 아르시안이었다.
* * *
딸랑.
“어서 오… 카밀라!”
진열대에 분주하게 디저트를 내려놓던 라일라가 안으로 들어서는 이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요.”
“일은 할 만해?”
“네!”
카밀라가 찾은 곳은 얼마 전에 오픈한 디저트 카페였다.
“카페가 너무 예뻐요.”
“당연하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이 디저트 가게가 고스트 상회에 이어 카밀라가 소유하게 된 두 번째 가게였다. 가게 인테리어부터 메뉴까지, 관여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특히 인테리어! 현대식으로 꾸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당연히 저쪽 세계처럼 다양한 자재들이 없었기에 그 느낌을 최대한 살리느라 엄청 고생했다.
“이렇게 꾸며진 가게는 처음이에요!”
“그렇지?”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통유리창부터 시작해 디저트를 고를 수 있는 유리 진열대까지. 가게 운영 방식도 직원이 직접 주문을 받는 게 아니라 셀프 주문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손님은?”
“…아직요.”
라일라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담겼다.
“지배인, 얼굴 펴. 오던 손님도 도망가겠어.”
카밀라는 가볍게 농담을 건네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 카페를 차리며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바로 라일라였다. 봉사 활동을 할 때 본 그녀의 성실함과 빠릿빠릿한 행동력을 높이 샀다.
평소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서 그런지 계산 능력도 좋고 이런 일에 매우 능숙하단 점도 플러스 요소였다.
특히 디저트!
라일라의 솜씨야 그 누구보다도 카밀라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그녀와 함께 메뉴를 개발하면서 다시 한번 속으로 감탄했다.
“이번에 마카롱 색이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
“응, 곱네.”
저쪽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디저트를 이쪽 세계에서도 팔고 싶었다.
하지만 먹어 봤다고 해서 레시피까지 아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아예 똑같이 만드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일라는 해냈다!
대충 들어가는 원재료와 맛과 식감을 설명해 주었을 뿐인데, 그걸 그대로 재현해 낸 것이다.
그 결과물 중 하나인 색색별로 진열된 마카롱을 보자 무척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