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줄게요!”
팔찌를 건네며 아주 뿌듯해하는 아이의 얼굴을 잠시 빤히 바라보던 카밀라는 그것을 받아 손목에 찼다.
“어때?”
“예뻐!”
“당연하지. 이 누나는 뭘 걸쳐도 예쁘거든.”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데, 그 순간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아르시안과 페트로가 서 있었다.
“넌 자기 입으로 그런 말 내뱉으면 안 쪽팔리냐?”
“사실인데 왜 쪽팔려?”
다시 웃음을 터트리는 페트로와 어이없어하는 아르시안을 외면한 채 그녀는 재차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
콕.
어라?
자신의 손길에 더욱 화사한 웃음을 날리는 아이의 볼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콕 찌른 카밀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다시 콕콕, 살며시 볼도 당겨 보고.
말랑말랑.
“너 뭐 하냐?”
“마음의 안정을 찾는 중이야.”
“뭐?”
“애들이 왜 말랑한 장난감을 손에 들고 다니는지 알겠어.”
“뭐라는 거야?”
뭔 놈의 볼이 이렇게 부드럽지? 커다란 마시멜로를 만지는 기분이랄까?
자신의 손길에 아이가 다시 배시시 웃는다.
‘나 진짜 애들 싫어하는데.’
우는 것도 싫고 칭얼거리는 것도 짜증 나고 앙탈 부리면 한 대 꽉 쥐어박고 싶다고.
“헤헤.”
그런데 요 녀석은 묘하게 귀엽단 말이야.
콕콕. 말랑말랑.
“어… 어어?”
내 말랑이!
순간 아이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뭐 해?”
아르시안이었다. 그가 아이의 뒷덜미를 그대로 잡아 올려 카밀라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렸다.
“너 애한테 왜 이렇게 치근대.”
“치근댄다고? 내가? 너 단어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내가 언제 애한테 치근댔다고! 그냥 볼 좀 아주 살짝, 아니, 좀 많이!
“…….”
…내가 치근댔구나.
“난 누나가 쓰다듬어 주는 거 좋은데.”
리오가 카밀라에게 가려고 바둥거리자 아르시안이 다시 아이를 번쩍 들어 그녀에게서 떨어트렸다.
그가 아이를 향해 눈을 부릅뜨는 모습을 본 페트로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아르시안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젠 하다 하다 아이한테까지 질투하는 누군가가 웃겨서.”
“닥쳐.”
“형도 이거 줄까요?”
“뭐?”
“줄게요!”
아이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카밀라에게 줬던 것과 같은 팔찌를 아르시안에게도 건넸다.
“…….”
작은 손으로 팔찌를 꼭 쥐여 준 아이가 방실방실 웃는다.
아르시안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 그답지 않게 무척 당황한 모습이다.
그런 그를 보며 카밀라와 페트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어? 저기 카밀라 영애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정원 한쪽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카밀라를 발견한 몇몇 남학생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자고 있는 건가?”
“그러게.”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본 이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가까이 가서 말이라도 걸어 볼까?”
“그럴까?”
요즘 말 한 번 제대로 붙여 보기가 힘든 이가 바로 카밀라, 그녀였으니까.
수많은 화젯거리를 몰고 다니는 그녀를 이렇게 다른 이들이 없는 곳에서 한가로이 만날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자는 걸 깨워도 되나?”
“뭐 어때? 안 그래도 아버지가 카밀라 공녀와 친분 좀 쌓아 보라고 난리야.”
“우리 부모님도.”
잠시 망설이던 이들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순간 밀려드는 싸한 기분에 그들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헉!”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린 이들은 급히 숨을 삼켰다. 누군가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무심한 눈빛으로.
하지만 그 눈빛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이는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 상대가 바로 아르시안이었으니까.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빠르게 걸음을 옮겨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남학생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아르시안은 카밀라가 자고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쯧.”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섰음에도 전혀 깰 생각이 없는 그녀를 보며 아르시안은 가볍게 혀를 찼다.
대체 뭘 믿고 이런 곳에서 잠이 든 건지.
짧은 한숨을 내쉰 그는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또 다른 날파리들이 날아오지 못하게 살피면서.
“…어?”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후에야 카밀라가 눈을 떴다.
“아르시안?”
옆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한 카밀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들기 전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언제 온 거지?
“이런 곳에서 잘도 잔다.”
“내가 원래 아무 데서나 잘 자.”
너도 바쁜 연예인으로 오래 살아 봐라. 머리 기댈 곳만 있으면 거기가 다 침대요, 따뜻한 이불이 놓인 잠자리다.
카밀라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남은 잠기운을 마저 털어 냈다.
‘몸이 뻐근한 게 제법 오래 잔 것 같은데. 얼마나 잔 거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쉴 생각이었는데 너무 깊이 잠이 들었나 보다.
“목이 마르네.”
자면서 땀이라도 흘렀나? 목이 살짝 탔다.
“……? 너 어디 가?”
아르시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에 카밀라가 급히 그를 붙잡았다.
“목마르다며.”
“어?”
“음료라도 사 올 테니 기다려.”
잠시 멍해져 있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됐어.”
다시 그를 붙잡은 카밀라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넌 주스 안 좋아하잖아.”
“…….”
그녀의 말에 아르시안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얼마 전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과일 주스를 건넸던 가짜가 떠올라서.
“카밀라.”
그렇게 잠시 여유를 즐기는데, 저 멀리서 라일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 역시 그들을 보았는지 두 사람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무슨 일 있어?”
그런데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눈시울도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이 뭔가 일이 생긴 듯했다.
“그게요…….”
카밀라의 물음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 맺혔다.
“리오가…….”
“리오?”
“그 아이가 왜?”
며칠 전에도 만나고 온 리오의 이름이 나오자 카밀라의 표정이 살며시 굳어졌다. 아르시안 역시 관심을 보였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조금 전 부장님께서 연락을 받았는데, 어제 아침에 입양이 됐대요.”
“뭐?”
“좋은 일이긴 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녀의 말대로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물론 시기가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안다.
‘알지만…….’
그 아이가 리오라는 것을 듣자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잘된 일인 거 맞죠?”
애써 눈물을 삼키는 라일라의 모습을 보며 카밀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육원에 있는 아이가 새로운 부모를 만나 가정을 이루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었으니까.
예전의 자신처럼 나이가 찰 때까지 보육원에 붙어 있는 건 생각보다 엄청 눈치 보이는 일이다.
‘아니겠지?’
분명 축하할 일인데 불안감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물귀신 베스의 아들이 보육원에 있다 입양되어 그런 일을 겪은 모습을 직접 확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지 않은가.
하지만 카밀라는 곧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저번에 보육원에 찾아갔을 때 원장인 헤만에게 주의도 줬다. 입양을 원하는 이들의 신분을 좀 더 꼼꼼하게 확인해 달라고.
“이거요.”
밀려드는 불안감을 간신히 누르고 있는 카밀라에게 라일라가 꼬깃꼬깃 접혀 있는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리오가 카밀라에게 전해 달라고 했대요.”
종이에는 아주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카밀라 누나, 또 봐요.
삐뚤삐뚤. 제대로 읽기 힘들 정도의 엉성한 글자.
“…….”
자기 이름도 아직 못 쓰는 녀석이, 그런 아이가 그녀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적어 편지를 보낸 거다.
벌떡.
“카밀라?”
그 짧은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카밀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가요?”
“집.”
이럴 시간에 아이를 찾자! 이렇게 앉아서 불안해하느니, 아이를 데리고 간 이들이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직접 알아보고 말지.
“갑자기 집에는 왜요? 아직 수업도 다 안 끝났는데…….”
의아해하는 라일라를 뒤로한 채 카밀라는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 * *
“뭐라고?”
“아이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일이 없을까.
리오의 입양 소식을 들은 카밀라는 곧바로 집사 루브, 아니 블랙 쉐도우의 수장인 그에게 부탁했다. 리오, 그 아이가 간 곳을 찾아 달라고.
평소라면 무슨 일인지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을 그였지만 굳어 있는 카밀라의 표정을 본 루브는 바로 리오의 행적을 쫓았다.
그리고 하루 만에 리오를 입양한 이들의 조사를 모두 마쳐서 자료를 들고 왔다.
“가짜 신분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주소로 찾아가 봤지만 다른 이가 살고 있더군요.”
애초에 제국의 인장이 찍힌 신분증을 체크하는 것 외엔 상대의 신분을 확인할 방법이 없긴 했다.
가짜 신분증을 만들었다면 보육원 원장인 헤만이 아무리 꼼꼼하게 확인한다고 해도 딱히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 리오는…….”
“아이를 데려간 이들의 흔적을 계속 쫓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원장이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제국 곳곳에 퍼져 있는 블랙 쉐도우의 눈을 총동원 중이니까요.
하지만 루브의 말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작정하고 아이를 데려간 이들이 눈에 띄게 행동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공작님께서도 많이 신경 쓰고 계십니다.”
“알아.”
카밀라와 친분이 있는 아이가 사라졌다는 말에 소르펠 공작 역시 손을 거들었다. 블랙 쉐도우뿐만 아니라 공작가의 모든 힘을 쏟아 아이의 행방을 찾는 중이었다.
“그러니 좀 쉬시죠. 어젯밤에도 못 주무신 듯한데.”
루브의 말대로 어제 잠을 전혀 자지 못했다. 아무 곳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잘 자는 자신이라도 지금은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똑똑.
“아가씨.”
그때 문이 열리며 시종 도르만이 안으로 들어섰다. 저 눈치 없는 놈은 뭐가 좋아서 저렇게 실실 웃고 있는 거야?
“무슨 일이야?”
“아르시안 님께서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