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하얀 안개꽃이 만개한 정원을 거니는 소르펠 공작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평소에 이곳만 오면 마음이 편안했는데, 오늘은 영 그렇지 못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였나?’
그 아이에게 제대로 정을 주지 못한 것이.
“가짜라서…….”
본능적으로 느꼈던 걸까?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걸. 그 아이가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마다 늘 께름칙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그 얼굴은 진짜 자신의 딸이었겠지.
라니아를 죽이고 자신을 속인 존재들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죽은 딸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릿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녀는, 안나는 왜 아이와 함께 자신의 곁을 떠났던 걸까? 대체 왜?
“아… 아, 아버지.”
그 순간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자연스럽게 걸린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카밀라였다.
“여기 계신다고 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낀 그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두 손이 카밀라의 뺨을 살며시 감쌌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어디 몸이 안 좋은 게냐.”
괜찮다는 말을 믿지 말고 역시 치료사를 바로 부를 걸 그랬나? 소르펠 공작의 얼굴에 금세 근심이 가득해진다.
“…….”
그런데 카밀라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카밀라?”
자신의 물음에 그저 빤히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소르펠 공작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가득 담겼다.
납치가 그냥 단순한 일이 아닌 것을. 얼마나 무서웠을까. 역시 좀 더 세심하게 아이의 상태를 살펴 줬어야 했는데…….
덤덤한 모습에, 괜찮다는 말에 그냥 넘길 게 아니었다.
“죄송해요. 그냥…….”
“마음고생이 많았구나.”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소르펠 공작은 카밀라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버지…….”
“그래.”
“아버지.”
어리광을 부리듯 자신을 연신 불러대는 목소리에 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퍼졌다.
“한 번만…….”
“음?”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요?”
뜻밖의 부탁에 소르펠 공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먼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딸이 아버지를 안는데 뭔 허락이냐.”
소르펠 공작의 품에 안긴 카밀라의 눈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버지…….”
한참을 그렇게 그를 애달프게 부르던 카밀라가 애써 한 걸음 그에게서 물러섰다.
“카밀라?”
“이제 괜찮아요.”
“방까지 데려다주마.”
카밀라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이러다 정말 욕심이 생길 것 같아서…….”
“욕심?”
의아해하는 소르펠 공작을 보며 카밀라는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아버지.”
“그래.”
“어머니는 아버지를 정말 많이 사랑하셨어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꼭 해야 할 말을 전했다.
“정말… 정말 많이…….”
“갑자기 무슨 말이냐.”
소르펠 공작의 물음에 카밀라는 다시 붉어진 눈가를 급히 훔치며 빙그레 웃었다.
“전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
“정말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겠니?”
“네.”
“그래. 저녁때 보자꾸나.”
“…네.”
마지막으로 그를 잠시 바라본 카밀라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소르펠 공작이 눈으로 끝까지 쫓았다.
뭘까? 이 이상한 기분은?
“…….”
왠지 모를 아련함에 소르펠 공작은 쉬이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고마워요, 카밀라.]
정원을 벗어나는 순간 카밀라의 몸에서 스르륵 누군가 빠져나왔다. 바로 라니아였다.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해 주어서…….]
“휴우.”
역시 이런 건 몇 번을 해도 적응이 안 되네.
귀신이 들어왔다 나가면 스산한 기운이 남아 몸이 영 좋지 않았다. 한기가 든다고 해야 할까?
“아버지와 함께 산책이라도 하지 그랬어.”
하지만 카밀라는 힘든 내색을 바로 감추었다. 라니아가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게 싫었으니까.
여전히 눈가가 붉어져 있는 라니아를 보며 카밀라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좀 더 같이 있지.”
아쉽겠지. 처음으로 만난 아버지와 고작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녀가 아버지라는 말을 연신 토해낼 때 솔직히 좀 짠했다. 태어나 처음 내뱉어 보는 그 단어가 얼마나 낯설고 애틋했을까.
그나마 인사라도 하라고 빙의를 허락한 거지만 그 아쉬움이 다 채워지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더 있다간 떠나기 싫어질 것 같아서요.]
처음 느낀 아버지 품이 너무도 따뜻해서…….
“그래.”
귀신이 인간의 몸을 탐내는 건 늘 있어 온 일이니까. 그녀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있다간 이 몸에서 나오기 싫어질 스스로를 경계한 거다.
물론 자신은 신수의 가호를 받고 있기에 빙의를 허락하지 않는 한 귀신들이 마음대로 몸을 뺏을 수 없었다.
“하벨.”
카밀라의 나직한 부름에 아까부터 그들 주변을 연신 서성이고 있던 사신 하벨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섰다.
“이제 가도 되는 거냐.”
[네.]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라니아가 마지막으로 소르펠 공작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을 한참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카밀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스륵.
“……!”
자신을 품에 꼭 안아 주는 그녀의 행동에 카밀라의 얼굴에 오랜만에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좋은 자매가 될 수 있었을 텐데.]
“…….”
[잘 지내요, 카밀라.]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물러섰다.
[아버지… 잘 부탁해요.]
“…응.”
그딴 부탁 나에게 하지 마, 라고 평소처럼 투덜거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편한 마음으로 떠났으면 했으니까.
그 마음을 이미 다 안다는 듯 라니아의 입가에 다시 진한 미소가 맺혔다.
그렇게 하벨과 함께 사라지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카밀라는 언제나처럼 끝까지 지켜보았다.
* * *
타앙!
“……?”
으슬으슬 한기가 가시질 않아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방에 난로를 피웠다.
이불까지 덮고 잠시 쉬고 있던 카밀라는 누군가 세차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루드빌 오라버니?”
기사들을 이끌고 훈련을 떠났던 그가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며칠은 돌아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저벅.
“훈련이 벌써 끝난 거……!”
스윽.
인사를 건네려던 카밀라는 성큼 다가와 말없이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리는 그의 행동에 멈칫했다.
“약은?”
“먹었어요.”
미열을 감지한 그의 물음에 그녀는 바로 대답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카밀라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
붕대가 감겨 있는 그녀의 손을 본 그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살짝 긁힌 거예요.”
카밀라는 급히 손을 뒤로 감추며 애써 밝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니, 나 왜 변명을 하고 있지?’
죄지은 것도 없는데? 이 상처도 가짜 라니아, 그것이 칼로 벤 거잖아! 난 피해자라고! 피해자!
‘하지만…….’
잔뜩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더 분위기가 다운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미안하다.”
“네?”
“노크 없이 들어와서.”
“아…….”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어떤 인간은 매번 노크 없이 들어오는 걸요 뭐.”
지금 이 자리에 라비, 그놈이 있어야 했는데. 제발 저 인간 좀 본받으라고 한마디 해 줘야 하는데!
“다른 데 다친 곳은?”
“없어요.”
아마 집에 오자마자 이번에 있었던 일을 다 들었나 보다. 아니면 훈련받다가 소식을 전해 들은 걸까?
“그런데 훈련은 벌써 끝난 거예요?”
“…….”
어라?
‘저기요?’
갑자기 제 시선을 왜 피하시는 건지?
“쉬어라.”
뭔가 대답을 회피하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던 그가 카밀라를 다시 자리에 눕힌 뒤 빠르게 방을 나섰다.
“루드빌 님!”
“역시 여기에 계셨군요.”
그런데 문이 다 닫히긴 전, 집사 루브와 몇몇 시종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루드빌 님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부관이 난리입니다.”
“말도 안 하고 오셨던 겁니까?"
“지금 다시 돌아갈 거야.”
“지금 바로 가신다고요?”
“아니, 그러면 굳이 왜 오신…….”
타악.
“…뭐지?”
카밀라는 눈을 껌벅였다. 훈련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온 거야? 대화 내용은 딱 그건데?
“하긴…….”
라니아가 가짜였다는 사실은 그냥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니긴 하지. 소식 듣고 바로 달려왔나 보네.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어서 나를 바로 찾아온 건가?
“음?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묻고 그냥 가지?"
조금 전 그에게서 이번 일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밀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아무래도 자신의 몸 상태가 나빠 보여 제대로 질문도 못 하고 나간 게 아닐까 싶었다. 내 상태가 그렇게 안 좋아 보이나?
“에휴, 모르겠다.”
카밀라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 * *
“얘기 들었어요?”
“라니아 공녀요?”
“가짜였대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카밀라 영애를 죽이려고 납치까지 했다잖아요!”
“세상에…….”
“가짜 공녀의 몸이 완전히 그 자리에서 부서져 내렸다면서요?”
“으으… 끔찍해라!”
가짜 공녀, 납치.
제국이 다시 한번 발칵 뒤집어졌다. 다른 곳도 아닌 소르펠 가문에 사특한 무리가 침입하려고 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흐음.”
그렇게 밖은 소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정작 그 사건의 중심에 있는 카밀라는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빙의 후유증으로 잠시 몸 상태가 안 좋았을 뿐인데, 이를 납치 사건 후유증으로 오해한 소르펠 공작과 다른 식구들이 철저히 감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외출 금지를 당했다는 말이다.
당연히 아카데미는 고사하고 방 밖으로도 나갈 수 없었다. 그에 오랜만에 방 안에서 한가로이 이리저리 뒹굴뒹굴하는 중이었다.
“역시 너무 광범위했나?”
그렇다고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앞에 놓여 있는 서류 뭉치를 읽어 내려가는 카밀라의 미간이 연신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