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긴 뭘 속여. 그저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그게 그거지!”
“안 물어봤잖아.”
“뭐?”
“내가 마력석 주인이냐고 물어본 적 없잖아.”
“…말이라도 못하면.”
자신이 마력석을 못 구해서 발을 동동 구를 때도 모른 척한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하는 말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전에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아르시안 새끼한테 잘 보여야 마력석을 구할 수 있다며! 어?”
“오라비가 다른 이들과 잘 지내라는 뜻으로 내가 좋게 충고를… 아, 아!”
“아주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난다. 어?”
“아파! 아……!”
양 볼을 잡힌 카밀라가 고통을 호소했지만, 라비는 한참 후에야 손을 내렸다. 한 발 뒤로 물러선 그녀는 양손으로 볼을 감싼 채 라비를 지그시 노려봤다.
“씨…….”
“씨? 씨이? 네가 혼이 덜 났지?”
“마력석 하나 더 드릴까요? 오라버니?”
아우! 내가 진짜! 착한 동생 둔 걸 다행으로 알아!
“게다가 간도 크다.”
“뭐가?”
“이번에 광산은 또 왜 산 거야?”
이번 경매에 나온 광산 낙찰가가 어마어마하다 들었다. 그 금액을 떡하니 지불한 게 다른 이도 아닌 이 녀석이라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공작가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기 힘으로 그 큰돈을 지불하다니.
“왜긴 왜야?”
“……?”
“내가 우리 오라비 평생 놀고먹게 해 주려고 샀지.”
“…….”
“딱 기다려. 내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 줄 테니까.”
“…지금도 딱히 물 묻히고 살지는 않는데?”
카밀라를 잠시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라비는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 허세 가득한 녀석의 말이 왜 기분 좋게 들리는 건지 참 이해 불능이다.
우르릉!
그 순간 창밖이 번쩍거렸다. 이어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카밀라와 라비의 시선이 동시에 창 쪽으로 향했다.
“한바탕 쏟아지겠네.”
“그러게.”
여름 장마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쏴아아.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밤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천둥과 번개가 울어대는 창밖을 감상하며 따뜻한 밀크티 한잔을 해치운 카밀라는 곧 잠자리에 들었다.
“아, 좋다.”
오늘 아주 잠을 잘 잘 것 같았다. 천둥소리에 잠을 설칠 나이는 이미 지났으니까. 이상하게 언젠가부터 이런 날씨에 잠이 더 잘 오더란 말이지.
‘상대적 안도감이라고 해야 할까?’
밖과 달리 이불 속은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평소보다 더 잘 잔다.
뚜욱… 뚝, 뚜욱-
그런데 침대 속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카밀라의 귀로 아주 거슬리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뚝뚝… 물이 떨어지는 소리.
비가 쏟아지고 있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 소리가 다른 곳도 아닌 방 안에서 들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집이 낡은 초가집도 아니고, 비가 온다고 물이 샐 리가 없지 않은가.
뚝… 뚜욱…….
그리고 그 소리가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면?
“…씨.”
카밀라는 눈을 뜨자마자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비 와서 습한데.”
쯧, 혀를 차며 짧게 투덜거린 그녀는 그대로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불을 뒤집어썼다.
[저기…….]
카밀라 곁에 서 있던 이, 물귀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너 자니?]
“어.”
[그냥 잔다고?]
“어!”
[…….]
전에 계곡에서 봤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아주 간덩이가 부은 인간이라는걸.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등장한 자신을 보고도 저리 태연하게 다시 잠을 청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적어도 왜 왔는지는 물어봐 줘야 하는 거 아냐?
[야! 진짜 자냐고!]
“…야?”
이게 언제 봤다고 야야.
“이걸 그냥 확!”
[……!]
“떠들지 마라.”
물귀신을 바라보는 카밀라의 눈빛이 아주 살벌하다. 예전부터 밤에 찾아와 잠을 방해하는 것들에겐 가차 없었다. 그것도 그 존재가 별로 친분도 없는 귀신이라면 봐줄 용의가 조금도 없었다.
“누가 밤에 찾아와 소리치래. 죽었다고 예의도 저세상으로 보냈니? 어?”
[아, 아니, 안 궁금해? 내가 찾아온 이유가?]
“전혀.”
[그래도…….]
“지금부터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저번처럼 질질 끌려 나가고 싶어 발악하는 걸로 간주하겠어.”
[하지만……!]
“쓰읍.”
[…….]
결국 물귀신은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여기저기 물 뿌리고 다니지 말고 얌전히 구석에 있어.”
카밀라는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귀신에 대해 신경을 끊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물귀신의 얼굴에 다시 당혹감이 서렸다.
진짜 자는 거야? 진짜?
하지만 정말로 저번처럼 다른 유령들에게 잡혀서 질질 끌려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질문 따윈 할 수 없었다.
[그만 좀 노려보면 안 돼? 네 말대로 밤새 얌전히 있었잖아.]
“난 꿉꿉한 거 딱 질색이야.”
[그건 밖에 비 와서 그런 거잖아!]
“거기에 너까지 한몫하고 있는 거지.”
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한동안 맑은 날씨를 바라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왜 왔어?”
카밀라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물귀신을 향해 귀찮음이 가득 묻어 있는 목소리로 용건을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
“왜?”
[그 전에 나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뭔데?”
[너 왜 갑자기 반말이야?]
물귀신의 물음에 카밀라는 헛웃음을 날렸다.
물귀신은 익히 안면이 있는 이였다. 저번에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갔을 때 계곡 물속에 있던 그 까칠한 물귀신이었다. 제노와 데린의 손에 질질 끌려갔던…….
“그때는 내가 너의 공간을 침범한 상황이었고.”
지금은 네가 내 공간을 마음대로 찾아온 상황이니까. 내가 왜 굳이 존대까지 해 줘야 하는데?
“반말 듣기 싫은 당장 꺼지시던가.”
솔직히 이대로 정말 그냥 꺼져 줬으면 좋겠다. 귀신이 자신을 이렇게 찾아오는 이유는 늘 한결같으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줘.]
이것 봐, 이것 봐!
“비도 오고 기분도 꿀꿀하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언제나처럼 카밀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이 맺혀 물귀신까지 된 존재의 부탁이 얼마나 성가실지 감이 딱 왔으니까.
[내 부탁 좀 들어 달라니까!]
“비가 언제쯤 그치려나.”
[야!]
“차나 한잔 마실까?”
[아이 좀 찾아 줘.]
딴청을 피우던 카밀라가 멈칫했다.
“…아이?”
[응, 내 아이.]
물귀신의 눈가에 순식간에 물기가 차올랐다.
[내 아이, 제발… 제발 좀 찾아 줘.]
간절함이 진득하게 느껴지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카밀라의 입에서 결국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영애, 이번에 저희 집에서 파티가 열리는데 시간 되시면…….”
“차 좋아하세요? 집에 아주 귀한 차가 들어왔는데…….”
“카밀라 영애! 저희 아버지가 아주 신기한 동물을 구해 오셨거든요. 이번 주에 다들 모여 구경하기로 했는데 오시지 않겠어요? 영애도 보시면 아주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영애! 내일…….”
달콤한 향을 풍기는 음식에는 벌이나 날파리, 꼭 벌레가 꼬인다.
돈이라는 달콤한 향에 이끌려 온 수많은 이들을 보며 카밀라는 속으로 연신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이 끝도 없다. 수업 시간 중에도 편지와 선물들이 수도 없이 날아들었다.
“카밀라 영애, 저희 아버지가 전부터 영애를 꼭 만나고 싶다고…….”
투욱.
“뭐야?”
카밀라에게 말을 건네던 한 남자가 순간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에 짜증 섞인 손길로 손을 쳐냈다.
툭툭.
하지만 다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남자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 진짜! 내가 먼저 말하고 있잖아!”
바빠 죽겠는데 대체 누가……!
“허억!”
한바탕 싸울 기세로 뒤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비켜.”
낮고 굵은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 파장은 무척 컸다. 카밀라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 모두가 우르르 한쪽으로 순식간에 물러섰다.
“안 가?”
그 말을 건넨 상대가 바로 아르시안이었으니까.
“더 볼일이 남았나?”
“아, 아뇨!”
“없습니다!”
혹시나 싶어 미적거리고 있던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다급히 사라지는 이들의 모습에 카밀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인간 살충제.”
“뭐라는 거야?”
짧게 웃음을 터트린 카밀라가 물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시간 됐잖아.”
“시간?”
“클럽 갈 시간.”
“…….”
“왜?”
진짜 한번 물어보고 싶다.
‘너, 클럽 활동에 왜 이렇게 진심인데?’
자신이야 전공 수업 대신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지만.
“아르시안.”
“왜?”
“검술 선생이 아무 말 안 해?”
아르시안이 봉사 클럽에 가입한 사실을 이미 알 사람은 다 안다. 당연히 아카데미 선생들의 귀에도 분명 들어갔을 것이다.
“뭔 말?”
“검술에 집중하라는, 뭐 그런 말?”
“아무 말 안 하던데?”
하긴. 잔소리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지.
‘검술 선생도 자기 목숨 귀한 줄은 알 텐데.’
짧은 한숨을 내쉰 카밀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교실을 나서니 그 앞에 페트로가 서 있었다.
“같이 온 거?”
“미쳤냐.”
“저 역시 카밀라를 모시러 왔다가 저 인간이 먼저 들어가기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
“왜 또? 이름도 안 불렀는데?”
…너희들 아직까지도 호칭 가지고 싸우냐?
살며시 고개를 내저은 카밀라는 그들과 일행이 아닌 척 최대한 거리를 둔 채 걸음을 옮겼다.
달칵!
“……! 카, 카밀라!”
잠시 후 클럽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카밀라는 당황한 라일라의 음성을 제일 먼저 들을 수 있었다.
“왔어요?”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가 왜 저리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어쩐 일이야?”
“저도 여기 클럽에 가입하려구요.”
라니아. 그녀가 클럽실에 앉아 있었다.
“가입? 여기 클럽?”
“네.”
이미 이곳 회원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들을 맞아 주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죄송하지만 더 이상 신입을 받을 생각이 없어서요.”
“아, 정말요?”
“그렇죠, 부장님?”
“어? 아… 그, 그렇지?”
늘 유한 모습만 보이던 라일라의 단호한 어조에 클럽 부장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