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아르시안이었다.
“맞다. 아르시안, 너도 마법과였지.”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르시안이 검술과에 이어 마법과에도 소속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듣기로 마법과에서도 압도적으로 탑을 달리고 있다던데.
‘다재다능한 놈.’
신이라는 놈은 저 인간에게 인간다운 성격 빼곤 다 준 것 같다.
“나 만나러 온 거야?”
“아니.”
“…그럼 어떤 놈 만나러 온 건데?”
여기 오면 무조건 누굴 만나야 하는 거야?
잠시 어이없는 눈빛으로 아르시안을 바라보던 카밀라는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저 아이 좀 데려다준다고.”
“안녕하세요. 라니아라고 합니다.”
라니아가 총총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바로 갈 거야?”
문제는 아르시안이 그녀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는 거지만 말이다.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럼 바로 가지 뭐 하게?”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라니아를 잠시 바라본 카밀라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자신이 그녀의 교우 관계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잠깐만.”
그런 카밀라를 아르시안이 급히 붙잡았다.
“손 왜 이래?”
그녀의 손에 가볍게 감겨 있는 손수건을 발견한 것이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닌 게 뭔데?”
“좀 긁혔어.”
조금 전, 교무실에 라니아와 함께 방문했다. 입학 서류를 작성해야 했으니까. 그러다 라니아가 무심코 휘두른 펜촉에 손등을 좀 긁혔다.
‘잠시 방심했지.’
미안하다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녀는 교무실을 나서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손 줘봐.”
“됐어.”
“되긴 뭐가 돼.”
“이 정도는 그냥 약 바르면 나아.”
“치료 마법 한 번이면 끝날 일이야.”
“싫어.”
“뭐?”
“싫다고.”
“왜?”
급히 손을 뒤로 숨기는 카밀라의 모습에 아르시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 피곤하잖아.”
“…뭐?”
“방금 검술 수업받고 온 거 아냐?”
그러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아르시안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피곤한데 괜히 마법 쓰지 마.”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급히 다시 붙잡았다. 아르시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녀석은 정말…….
“이 정도는 괜찮아.”
카밀라가 다른 말을 더하기 전에 아르시안은 빠르게 마법을 시전해 그녀의 상처를 감쌌다.
순식간에 밝은 빛이 흘러나와 그녀의 손등 상처를 치료했다.
임시로 묶어 둔 손수건을 풀어 보니 손이 말끔하다. 상처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좋네.”
“싫다 할 땐 언제고.”
“어쨌든 고마워. 나도 곧 수업 시작이야. 진짜 간다.”
카밀라는 가볍게 손을 흔든 후 그 자리를 떠나갔다.
“마법과 건물이 정말 크고 넓네요. 전 고급반에 편입했는데, 혹시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카밀라가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던 아르시안의 귀로 라니아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
그제야 처음으로 아르시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라니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저벅.
“어……!”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르시안은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의 뒤를 라니아가 급히 뒤쫓았다.
“저기!”
그녀가 급히 아르시안을 불렀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죄송해요.”
라니아는 언제나처럼 사과의 말부터 건넸다. 특유의 간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제가 뭔가 실례되는 말이라도 한 건가요? 카밀라와 친하신 것 같길래 저도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건데…….”
라니아의 말이 계속 이어졌지만, 아르시안은 여전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아르시안의 뒤를 쫓고 있는 라니아를 보며 다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몇몇 이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아르시안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잘 아니까.
“아르시안 님 맞으시죠? 카밀라에게 얘기 많이…….”
“조용히 해.”
“…네?”
“짜증 나니까 내 옆에서 그만 쫑알거리라고.”
“아니, 전……!”
“씨X. 요즘 좀 얌전히 지냈더니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다 말을 걸고 지ㄹ… 아, 진짜. 야.”
“……!”
“경고하는데.”
아르시안의 눈빛이 순식간에 스산해졌다.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죄, 죄송…….”
“입 다물라고 했지.”
“흐읍!”
순간적으로 내뿜어진 아르시안의 진득한 살기에 라니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카밀라와 같이 사는 걸 다행으로 알아. 안 그랬으면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미 팔 하나는 부러트렸을 테니까.”
라니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딱 여기까지야. 아무리 그 애와 아는 사이라도 더 이상 안 봐줘.”
아르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 모든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기에 다들 고개를 살며시 내저었다. 오히려 라니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다들 신기해했다.
“하…….”
하지만 라니아는 아르시안이 사라진 뒤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저 그가 사라진 곳을 여전히 얼어붙은 모습으로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 * *
“소풍?”
“네!”
“뜬금없이?”
“아이들과 약속했거든요. 조만간 같이 물놀이 가기로.”
클럽실에 방문한 카밀라는 갑자기 계곡이 있는 산으로 놀러 가자는 라일라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 봉사 활동을 매번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만 가는 것 같네.”
“아, 그게… 제가 보육원 출신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더 신경이 쓰이네요.”
“…….”
“다음에는 다른 곳도 소개해 드릴게요!”
뭐, 자신이야 어디든 상관없었다. 수업 시간만 채워진다면 말이지.
“그러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뭐라도 준비했을 거 아냐.”
우리끼리 가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과 함께 가는데 그냥 아무것도 없이 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제가 다 준비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페트로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먹거리부터 안전 요원까지, 제가 다 준비해 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밀라는 그저 함께해 주시기만 하면 된답니다.”
“…고생하셨네요.”
“지금 칭찬해 주시는 겁니까?”
“네, 뭐…….”
카밀라는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요즘 이 인간, 영 부담스럽다.
“……?”
그러다 라일라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자신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카밀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물놀이 준비는 페트로가 다 했는데 아무 준비도 안 한 날 왜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면 이제 슬슬 출발할까요? 아이들이 엄청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누구보다도 신나 보이는 라일라를 따라 다들 클럽실을 나섰다. 카밀라 역시 따라나서려 했지만, 그 순간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너도 가는 거야?”
“왜? 가면 안 돼?”
“…좋아서.”
매번 뭘 그리 살벌하게 되묻니, 넌?
“너…….”
“어?”
“그렇게 아무한테나 쉽게 칭찬하는 인간이었어?”
“뭐?”
“씨… 나도 저딴 거 준비할 수 있는데…….”
…뭐라는 거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미간을 찌푸리는 그를 데리고 카밀라도 서둘러 다른 이들의 뒤를 따랐다.
* * *
“카밀라는?”
“오늘 클럽 활동이 있으셔서 늦는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 클럽.”
소르펠 공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최근 카밀라의 새로운 모습을 참으로 많이 접하고 있었다.
검술과를 그만두었다는 소리에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사냥 대회에서 그 아이가 아주 놀라운 검술 실력을 보여 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기대했다. 루드빌에 이어 또 다른 검의 천재가 나온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막상 본인이 그쪽으로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
아쉬움은 잠시였다. 그 또한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카밀라가 딱히 검술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러려니 했다. 검술과를 그만두었다는 말에.
그런데 이후 카밀라의 행보는 그를 더욱 놀라게 했다.
“봉사 활동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이었다. 카밀라와 친한 아이가 그곳 클럽에 들어가 있다더니, 혹 그 아이 때문에 들어간 게 아닐까 짐작했다.
“잠시 경험을 하고 나면 금세 질려 그만둘 거라 생각했는데.”
카밀라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클럽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밀라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법 착실하게 클럽 활동을 하고 있었다.
듣기로 창고에 쌓여 있던 물건들까지 정리해 보육원에게 가져다줬다지 않은가.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지원해 주게.”
“네, 공작님.”
집사 루브가 물러나자 소르펠 공작은 함께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이에게 시선을 줬다.
“수업은 받을 만하니?”
루드빌과 라비, 두 사람 다 오늘 밖에 일이 있어 식사 자리에 빠진 상태라 현재 라니아만이 소르펠 공작과 함께하고 있었다.
“네, 재미있어요.”
소르펠 공작이 아카데미 생활을 물어봐 준 것이 기쁜 듯 라니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 미소를 본 소르펠 공작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어려웠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라니아의 존재가 여전히 어색했다. 저 아이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의심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 아이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는 순간 묘하게 거슬렸다. 기분이 촥 가라앉으며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다.
‘낯설어서 그렇겠지.’
아직은 저 아이가 낯설어서, 어색해서.
차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소르펠 공작은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들이 다 맛있어 보여요. 어서 드세요.”
“그래.”
스푼을 들어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소르펠 공작의 모습을 바라보는 라니아의 입가에 다시 한번 밝은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