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점괘보는 공녀님 (85)화 (85/215)

16584890268003.jpg 

“카밀라는?”

“외출하셨습니다.”

“또?”

집사 루브의 말에 라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최근 들어 카밀라의 외출이 무척 잦았다.

예전에는 제발 좀 나가라고 해도 그리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던 녀석이 요즘은 툭하면 밖으로 나가고 없다.

‘그 애 때문인가?’

라니아, 그 아이가 집에 온 후 카밀라의 외출이 잦아진 게 영 신경이 쓰였다.

바보 녀석이 또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건 아닌지…….

“식사를 준비할까요?”

“그래.”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끼도 아직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 창밖을 보니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부러 찾아온 거야?”

루브가 자신의 연구실을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라비가 의외롭다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집사 루브가 가주인 소르펠 공작 외에는 세심히 누군가를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밀라 님께서 부탁을 하셨습니다.”

“카밀라가?”

“저녁때까지 나오지 않으시면 찾아가 보라고 하더군요. 식사를 챙겨 드리고 연구실에서도 좀 나가게 하라 하셨습니다.”

“뭐?”

“바깥 공기도 좀 쐬라고, 인간아! 그러다 온몸에 곰팡이 생겨도 나 몰라!”

“……!”

“…라는 말 또한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기, 성대모사까지 할 필요가.

잠시 황당한 눈빛으로 집사 루브를 바라보던 라비는 곧 자리에서 일어서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애도 아니고…….”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럼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부탁할게.”

먼저 밖으로 향하는 루브를 바라보던 라비 역시 보고 있던 책들을 마저 정리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음?”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풀며 걷던 라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 안녕하세요!”

라니아였다. 자신을 본 그녀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라비는 그대로 라니아를 지나치려 했다. 딱히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녀를 특별히 미워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투욱.

하지만 그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는 뭔가를 발견한 라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

라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책……!”

라니아가 급히 다시 집어 드는 책에서 그는 쉬이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거, 네 거야?”

“네? 이거요? 아, 네.”

라니아가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예전에 아시던 분이 주셨어요.”

“마법 서적을?”

아주 오래전에 대륙에 널리 이름을 날렸던 마법사가 저술한 책이다. 라비 역시 전부터 구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늘 허탕만 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라니아가 그 책을 떡하니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제가 마법에 관심이 좀 많거든요.”

“마법에?”

“네!”

“마법을 쓸 줄 알아?”

“아주 조금요.”

환하게 미소를 지은 라니아가 순간 마력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작은 얼음덩어리 하나가 생겨나더니, 이내 파사삭- 하고 깨어져 사라진다.

“이런 마법은 아직 초보 수준이에요. 제 마력은 치료에 특화되어 있거든요.”

왜 미처 몰랐을까?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마력을 말이다.

‘하긴…….’

그동안 그녀를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이 책, 보셨어요?”

“…아니.”

“아! 그럼 빌려 드릴까요?”

“그래도 돼?”

“물론이죠!”

라니아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 * *

“받으렴.”

“이게 뭐예요?”

상회에서 돌아와 방에서 쉬고 있던 카밀라는 소르펠 공작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들고 온 작은 상자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너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카밀라는 그가 건네는 상자를 바로 받아 열었다.

“이건…….”

상자 안 물건을 확인한 카밀라는 어색한 미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순간이었다.

“요즘 유행이라고 하더구나.”

그가 들고 온 건 바로 고스트 상회, 즉 자신이 운영하는 상회에서 파는 마력이 담긴 목걸이였기 때문이다.

“요즘 다들 이거 하나쯤은 갖고 있다던데.”

“그렇다고 들었어요.”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다. 조금 전에도 판매량을 확인하고 왔으니까.

카밀라의 미소가 더욱 어색해졌다.

“왜? 마음에 들지 않니?”

“아뇨. 무척 마음에 들어요.”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너무 비싼 걸 받은 것 같아서…….”

“비싸긴. 아비가 딸에게 이 정도도 못해 줄까.”

카밀라는 바로 푸른 마력석이 아름답게 세공된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목걸이를 거는 순간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가 반질반질 빛이 나는 듯했다.

“예쁘구나.”

“고맙습니다.”

카밀라를 바라보는 소르펠 공작의 눈에 흐뭇함이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꼬리가 아래로 서서히 처졌다.

“미안하다.”

전에, 방에서 라니아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자신의 기분을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그였다.

아마도 이 목걸이 선물 역시 자신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사신 거겠지?

‘뭐 나쁘지 않네.’

라니아의 목적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봐선 자신을 내쫓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자긴 착하고 불쌍한 이로 남고 난 친딸을 괴롭힌 악녀로 만들어 쫓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지금까진 그녀의 뜻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소르펠 공작은 그녀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을 더 안타깝게 여기고 있으니까.

이왕 시작한 거, 하나 더 보태 볼까?

“아버지.”

“그래.”

카밀라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리곤 그 어느 때보다 처량하고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건… 라니아가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뭐?”

예상대로 소르펠 공작의 표정이 대번에 안쓰럽게 변했다.

“라니아를 두고 제가 어떻게 감히…….”

“카밀라!”

소르펠 공작이 단호하게 외쳤다.

“이건 널 위해 산 거다. 감히라니! 네가 왜 그런 단어를 쓰는 거냐.”

“하지만…….”

“그 아이 건 나중에 내가 따로 사도록 하마. 네가 그런 신경 쓰지 않도록.”

“죄송해요, 아버지.”

“네가 왜 사과를 해.”

“라니아에게 제가 너무 미안해서…….”

소르펠 공작이 자신을 위로하듯 어깨를 다정히 다독였다. 그런 그를 향해 카밀라는 다시 애처롭게 웃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자리에 미련 따윈 없다. 그렇다고 쉽게 내줄 생각도 없었다.

라니아, 그녀가 자신을 자꾸 걸고넘어진다면, 넘어질 땐 넘어지더라도 절대 혼자서는 안 넘어질 거다.

‘내가 원래 뒤끝이 좀 길거든.’

죽자고 붙잡아서 같이 넘어질 거라는 뜻이다.

“그나저나 상회 이름이 이상하더구나.”

“네?”

소르펠 공작이 분위기를 바꾸듯 화제를 돌렸다.

“고스트 상회라니… 쯧. 그 녀석은 상회를 넘겨도 이상한 놈에게 넘긴 것 같단 말이야.”

카밀라의 미소가 다시 어색해졌다.

‘그 이름이 그리 이상한가?’

젠장.

“게다가 그렇게 수입이 좋은 사업을 다른 이에게 넘기다니.”

세프라 공작의 결정을 연신 의아해하는 소르펠 공작을 보며 카밀라는 그 어떤 것도 맞장구를 쳐 줄 수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말씀드리자.’

고스트 상회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소르펠 공작에게 계속 숨길 수는 없었다.

마력석 채굴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소르펠 공작과 블랙 쉐도우의 눈을 계속 속이는 건 아무리 세프라 공작이라도 무리가 있었다.

현재야 세프라 공작이 모든 힘을 발휘해 감추어 주고 있지만…….

‘…어라?’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 엄청 도움받고 있구나.’

마력석 정화에 새로운 사업장도 만들어 줘, 게다가 비밀 유지까지.

그동안 세프라 공작에게 받은 도움들을 하나하나 떠올린 카밀라는 새삼 자신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 * *

“어쩐 일이지?”

세프라 공작은 연락도 없이 자신을 찾아온 카밀라를 조금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콩알만 한 양심이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요.”

“…양심?”

“받으세요.”

“……?”

“제 양심이에요.”

카밀라는 바구니 가득 준비해 온 간식들을 꺼내 탁자 위에 쫙 펼쳤다.

아침부터 손수 준비한 음식들이었다. 요리사 유령 페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게 맞다.

“이건…….”

탁자 위에 꽉 차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세프라 공작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달콤한 것들이군.”

순식간에 집무실 안에 단내가 가득 채워졌다.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직접?”

“네.”

“흐음.”

세프라 공작의 시선이 다시 달콤한 디저트로 향했다.

“미안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나눠 줘도 되겠나?”

“디저트 안 좋아하세요?”

“딱히 즐기지는 않지.”

“아, 그럼 아르시안 주세요.”

“…아르시안?”

“네, 이런 거 좋아하던데.”

전에 라일라가 싸 온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지만, 자신이 가져왔던 건 하나도 남김없이 늘 다 먹어 치우던 그다.

“은근히 입맛이 까다롭긴 한데, 저희 집에서 가져온 건 잘 먹더라고요.”

세프라 공작의 표정이 더욱 미묘해졌다.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아이가 잘 먹었단 말이지.”

“……? 네.”

대답을 내뱉던 카밀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자신이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건가?

“싫어하거든.”

“예?”

“이런 달콤한 음식은 아주 끔찍해하지. 나보다 더.”

“…누가요? 아르시안이요?”

“달다고 과일도 거의 안 먹는 녀석이야.”

…잘 먹던데. 무지. 엄청!

“아니, 그러면 왜…….”

“글쎄.”

세프라 공작은 뭔가 아는 듯했지만, 그저 희미한 미소를 잠시 머금을 뿐이었다.

“아르시안도 그렇지만 페트로나 루드빌도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세 아이가 음식 성향이 비슷하지.”

“아, 그 두 사람도 안 좋아하는……?”

잠깐, 잠깐!

“루드빌 오라버니도 단 음식 안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그랬지.”

그럴 리가.

그러면 매번 내가 만들어다 준 간식을 싹싹 비운 사람은 그럼 누군데? 딴 사람이야?

푸딩이고 케이크고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깔끔히 먹어 치우던 이가 바로 루드빌인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