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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보는 공녀님 (83)화 (8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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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순순히 물러선다고? 한바탕 싸움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예전 같았으면 머리채를 잡고도 남을 일이다.

소르펠 공작이나 다른 두 도련님 앞에서만 얌전했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자리나 물건을 넘보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그녀였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공작님이 싫어하는 게 뭔지를 잘 알려 주라니…….

그런 당부의 말까지 남기는 카밀라의 모습에 다른 주방 식구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수고.”

카밀라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후 주방을 유유히 나섰다. 그런 그녀를 다들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

그건 라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카밀라가 주방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 *

“하아암.”

“뭐야? 어제 못 잤어?”

“어, 책 좀 보느라.”

반쯤 눈이 감긴 채 걸음을 옮기는 라비의 모습에 카밀라는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마법 연구에 매진하던 그였지만, 저번 사냥 대회를 기점으로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다만, 이전처럼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삽질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날의 일을 자극제로 삼고 있는 것 같아 그냥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면 더 자지.”

밤을 새운 것 같은데, 식사를 매끼 챙겨 먹는 스타일도 아니고. 굳이 아침 식사 자리에 나온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애도 있을 거 아냐.”

“그 애?”

라니아?

“그게 왜?”

“왜긴 왜야. 나 없이 너 혼자…….”

“어?”

“…됐다.”

말을 하다 말고 라비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카밀라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웃음에 살짝 귀가 붉어지는 그를 애써 모른 척하며 식당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셨어요?”

잠시 후 식당 입구에 다다랐을 때 루드빌과 마주할 수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 어서들 오세요!”

식당에는 자신들보다 먼저 와 있는 이가 있었다. 라니아였다. 그녀는 환한 미소로 자신들을 반갑게 맞아 줬다.

그런데.

“야!”

“너…….”

그녀의 인사에 제대로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네가 왜 거기에 앉아 있어?”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가 문제였다. 라니아가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바로 카밀라가 늘 앉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네?”

“일어나라.”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니아를 향해 루드빌의 나직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여, 여기 앉으면 안 되는 거였나요?”

화가 난 듯한 두 사람의 반응에 라니아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죄, 죄송해요.”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당장이라도 서럽게 엉엉 울 것 같은 기세였다.

스윽.

“……!”

하지만 그 순간 그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누르며 도로 자리에 앉히는 손길이 있었으니 바로 카밀라였다.

“괜찮아.”

“네?”

“여기에 앉아.”

“하지만…….”

라비와 루드빌이 미간을 찌푸리는 걸 무시한 채 카밀라는 빙긋 웃었다.

“여기가 앞으로 네 자리야.”

“야!”

“카밀라.”

표정이 더욱 굳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카밀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자리야 아무 데나 앉으면 어때요. 곧 아버지 올 시간이에요. 괜한 소란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카밀라의 말에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여기서 소란을 더 일으켜 봐야 좋을 게 없어 보였으니까.

“식사 맛있게 해.”

“저기! 혹시 이 자리가…….”

“앞으론 네 자리야.”

“아니에요! 제가……!”

“쉿.”

카밀라는 라니아의 입도 막았다.

“식사 맛있게 해.”

다시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카밀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라니아 역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카밀라는 그런 그녀를 잠시 말없이 응시했다.

[내가 분명히 들었어. 조금 전에 저 여자의 시녀가 말하는걸. 이 자리는 너의 자리라고. 그런데도……!]

조금 전부터 자신의 옆에서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고 있는 요리사 유령 페롤의 말을 들으면서 말이다.

‘이것 봐라?’

라니아에게 얼마 전에 배속된 시녀가 분명 그녀의 자리를 지정해 줬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는 거다. 시녀는 식당에서 완전히 내보낸 뒤에.

‘그래 놓곤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거네?’

자기는 전혀 몰랐다는 듯이.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카밀라는 바로 라비와 루드빌을 조용히 시켰다.

눈물을 터트리며 사과의 말을 내뱉으려는 라니아의 행동도 막았다. 그녀가 무슨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건지 대충 감이 왔거든.

카밀라는 라니아, 그녀가 하려고 했던 일을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봤다.

라니아가 울며불며 사과하고 있고 라비와 루드빌, 그리고 자신까지 합세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면?

‘그 모습을 아버지나 다른 이들이 봤다면?’

자신은 고작 자리 하나 때문에 공작의 친딸을 압박하고 이런 소란을 일으킨 욕심 많고 막돼먹은 의붓딸이 되는 거다.

‘소문이라는 건 이런 작은 일로 시작되는 거거든.’

전에 살던 세계에서 이미 소문의 무서움을 충분히 경험한 그녀다.

들고 있던 물을 살짝 바닥에 흘리기만 해도 그다음 날 자신이 다른 이에게 물을 끼얹었다는 소문이 도는 게 연예계였다. 여기라고 다를 게 없었다. 사교계 역시 일종의 연예계와 비슷했으니까.

카밀라는 속으로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라니아가 계획한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내일 당장 사교계에 하나의 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친딸을 압박하고 구박한 의붓딸!

…이런 타이틀을 단 소문이.

‘물론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카밀라의 시선이 다시 라니아에게 향했다. 연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상황을 살피고 있는 그녀는 누가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베테랑 연기자였던 카밀라의 눈에는 보였다. 지금 이 상황이 마뜩잖은 듯 조금 전과 달리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는 것을.

‘얘 진짜 뭐지?’

뭐, 간단히 생각한다면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한 행동이라 볼 수도 있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가 엄청 꼴 보기 싫을 수도 있으니까.

“흐음.”

일단은 그냥 좀 지켜볼까?

순간 라니아와 눈이 마주친 카밀라는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멈칫하는 라니아의 표정을 즐기면서 말이다.

* * *

“카밀라! 정말 미안해요!”

이건 또 뭐래?

그날 오후, 방에서 편히 쉬고 있던 카밀라는 자신을 찾아온 라니아를 보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이는 그녀의 모습은 카밀라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슨 말이야?”

“들었어요.”

“뭘?”

얘는 뭘 맨날 듣는데? 나에 대해 캐고 다니니?

“카밀라와 아버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

“최근에 간식을 만들어다 주며 간신히 회복 중이라던데……. 미안해요!”

라니아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제가 그 시간을 가로챘으니…….”

어느새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 식사 자리도 정말 몰랐어요! 그 자리가 카밀라의 자리였던 거!”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의 진심을 어필하듯 두 손을 꼭 모았다.

“전 정말 카밀라와 잘 지내고 싶어요! 카밀라가 비록 아버지의 친딸은 아니지만…….”

뭐?

“전 그 자리를 뺏을 생각이 전혀 없어요.”

와, 요거 봐라?

“미안해요. 정말… 흑…….”

한 대 때릴까? 억울하지나 않게.

누가 보면 자신한테 한 대 맞은 줄로 오해할 표정으로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하는 라니아의 모습에 카밀라는 실소를 흘렸다.

“불쌍한 카밀라…….”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라니아는 자신을 올려다봤다.

“저 때문에 안 그래도 불안할 텐데…….”

“…….”

“제가… 제가 아버지께 잘 말씀드릴게요!”

“뭘?”

“카밀라, 쫓아내지 말라고요!”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쥔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친딸의 부탁을 거절하시진 못할……!”

“너 해.”

더 이상 듣고 있기가 힘들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네?”

“너 하라고.”

“무슨…….”

그녀와 지금 대화를 나누며 확실히 깨달았다.

라니아, 소르펠 공작의 친딸이 나타났음에도 자신이 왜 이토록 태평한 마음이었는지. ‘뺏긴다’라는 단어가 왜 그리 거슬렸는지.

“이 자리, 너 해."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웃긴 일이다.

애초에 가진 적도 없는 것을.

이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친딸이 나타났다는 말에도 별다른 감정이 일지 않았던 거다. 뺏길 자리가 없는데 뭘 걱정해야 하는 거지?

“이 자리 지키고 싶은 마음,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카밀라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 라니아의 어깨를 다정히 다독였다.

“주인이 돌아왔으면 당연히 돌려줘야지. 안 그래?”

“그, 그게…….”

당황하는 라니아의 얼굴에 묻어 있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가볍게 닦아 줬다.

왜 당황할까? 내가 뺨이라도 때릴 거라고 생각했나?

‘예전의 카밀라였다면 그랬겠지.’

친딸, 친부모.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뺨뿐만 아니라 머리채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자리, 너 해.

[아가씨.]

그 순간 집사 유령 데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카밀라는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카밀라.”

소르펠 공작이었다.

‘역시 이런 건가?’

아침에 식당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타이밍이 참 절묘했다.

소르펠 공작이 나타날 때쯤 눈물을 흘리며 사과의 말을 내뱉고 있는 라니아의 행동이 그저 우연일까?

마치 자신이 화를 내고 뺨이라도 때리기를 바라듯 살살 긁어대는 말을 내뱉으면서.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차를 마시자고 해서.”

“라니아가요?”

“그래.”

역시나.

“들어오세요.”

“그보다 방금…….”

“아버지.”

소르펠 공작의 말을 막은 카밀라는 최대한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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