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않겠습니다.”
자신이 그를 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이유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듯 페트로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묻지 않을 테니 피하지 마십시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린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아픕니다.”
입가는 습관처럼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더욱 처량해져 있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말씀해 주실 때까지.”
“아니, 뭐… 딱히 피한 건 아닌데…….”
일단 거짓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카밀라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굴지?’
사람 신경 쓰이게. 나한테 뭐 죄지은 거라도 있는 건가? 카밀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슬쩍 보냈다.
“그런데 두 사람, 웬일로 같이 있어?”
카밀라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사냥터에 있었던 일을 자꾸 언급해 봐야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다.
늘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같이 길을 걷고 있는 게.
“우연이야.”
“어?”
“우연이라고. 내가 미쳤냐? 일부러 저런 인간과 같이 걷게?”
“검술 수업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요즘 아르시안도 수업에 빠지지 않고 성실히 참석하는…….”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랬지.”
“그럼 뭐라고 불러 줄까? 저 인간? 네. 저 인간이 요즘은 수업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거든요.”
“야!”
“저 인간님은 뭐가 또 불만이신지.”
맞다, 검술 수업.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카밀라는 한 가지 사실을 자신이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 전공을 뭐로 하지?’
얼마 전에 검술과를 관둔 카밀라는 새삼스레 고민에 빠져야 했다.
* * *
“클럽?”
“네!”
새로운 과를 뭐로 선택할까, 며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카밀라 곁으로 라일라가 슬쩍 다가섰다. 그녀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클럽.
카밀라처럼 처음 입학할 때 선택한 전공 수업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다른 과를 선택하는 게 애매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선택의 폭을 좀 더 넓힐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가 바로 클럽 활동이었다.
그에 아카데미에는 수많은 클럽이 존재했다. 전공 수업을 듣는 이들도 자유롭게 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다.
다만 전공 수업을 듣는 이들은 클럽 활동이 무척 자유로웠다. 활동하고 싶을 때만 참가해도 상관없었으니까.
반면, 전공 수업을 받지 않고 대신 클럽 활동을 선택한 이들은 수업을 받는 시간만큼 클럽에서 활동한 내용을 확인받아야 했다.
그렇게 클럽 활동 시간을 채우면 똑같이 수업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였다.
“클럽이라.”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딱히 눈에 들어오는 과가 없었던 카밀라의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다.
“저희 클럽에 들어오시는 건 어때요?”
“너도 클럽 활동해?”
“네!”
카밀라가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라일라의 눈빛이 더욱 반짝거렸다.
“아주 좋은 클럽이에요! 보람도 있고 너무 즐거워요. 아이들도 만날 수 있고 어르신들과도 종종 어울리죠.”
“무슨 클럽인데?”
“봉사 클럽이요.”
“…뭔 클럽?”
“봉사 클럽!”
“…….”
역시 고대어 수업이 나으려나? 아니면 수학과?
카밀라는 바로 클럽에 대한 관심을 끄고 다시 손에 들린 수업 안내서를 훑었다.
“저, 저희 클럽 정말 좋아요!”
“응, 아냐.”
봉사라니, 나한테 봉사하기도 바쁘거든.
“애들 엄청 예쁘고 귀여워요! 저희가 가면 정말 좋아해요!”
“응, 내가 애들을 안 좋아해.”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저희를 완전 친손자 친손녀처럼 대해 주세요.”
“응, 새로운 가족 필요 없어.”
역시 고대어 과로 가서 쉬엄쉬엄 노는 게…….
“저희 클럽 정말 재밌어요! 노래도 하고 연극도 하고 또…….”
“연극?”
수업 설명서를 넘기던 카밀라의 손길이 멈칫했다.
“네! 연극도 해요! 아이들과 어르신들, 연극 보여 주면 엄청 좋아하거든요.”
“흐음.”
아주 조금 솔깃했다.
‘나도 연극 좀 했었는데.’
무대에 서는 건 스크린 연기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발성법도 다르고 연기하는 방법도 많이 달랐지만, 한때 그 재미에 빠져 시간 날 때마다 설 수 있는 무대를 찾아다녔었다.
“오늘 아이들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오늘?”
“네! 당장 가입하라는 건 아니고, 일단 견학! 어때요?”
“견학…….”
“같이 가요! 네?”
“…뭐, 구경 정도라면.”
“잘 생각하셨어요!”
* * *
“와아!”
“언니!”
“형!”
“어서들 오세요.”
보육원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안면이 있는 곳인 듯 수많은 이들이 입구까지 달려 나와 클럽 사람들을 반겼다.
“루니, 잘 있었어?”
“네!”
“메이는 저번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아.”
“헤헤.”
역시나 가장 인기가 많은 이는 라일라였다.
아이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다 불러 주며 인사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다정한 이웃집 언니, 누나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정말 많군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카밀라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서는 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 시선에 빙그레 웃음을 날려 주는 이, 바로 페트로였다.
“클럽 활동도 해요?”
전공 수업을 받는 이가 클럽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말 그대로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닌 이상 굳이 학과 점수에 플러스 되는 것도 아닌 일에 노력과 열정을 쏟는 이는 드물었으니까.
친분이 있는 이들이 이름만 명단에 좀 올려 달라고 해서 서류상으로만 가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봉사 클럽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어 가입했습니다.”
…뭐, 그럴 수 있지.
카밀라는 너무 페트로다운 대답이라 그러려니 했다.
라일라와 페트로, 두 사람 다 ‘봉사’라는 단어와 참 잘 어울리는 이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고.’
라일라가 활동하는 클럽에 늘 가입해서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던 페트로다. 그 모습에 카밀라는 더욱 질투심에 날뛰었었고.
‘라일라는 그런 페트로를 멀리하고 외면했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은 카밀라를 더욱 열받게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를 밀어내는 라일라의 모습이 엄청 얄미웠으니까.
‘어쨌든 낯선 일은 아니긴 한데.’
이제야 라일라에게 관심이 생긴 건가? 카밀라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그를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시선에 페트로의 눈가가 더욱 곱게 휜다.
“라일라 영애와 친하시다더니 정말이군요. 이렇게 빨리 이런 곳에서 카밀라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뭔 뜻이지? 봉사와 내가 전혀 안 어울린다고 비꼬는 건가?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게 신기하다는 뜻?
“역시 이 클럽에 가입하시는 거군요.”
“아뇨.”
“아닙니까?”
살며시 고개를 젓는 카밀라의 모습에 페트로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가 잠시 흐릿해졌다.
“오늘은 그냥 견학하러 온 건데요.”
“아, 견학.”
그러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다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직 희망은 있는 거군요.”
희망? 뭔 희망? 카밀라의 의아한 시선에도 페트로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잠시 후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라일라와 클럽 사람들은 준비해 온 간식들을 각자 구역을 맡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와!”
“난 저거!”
“나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간식 앞으로 조르륵 달려가 줄을 섰다.
라일라는 직접 만들어 온 게 분명해 보이는 알록달록한 컵케이크를 줄을 선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페트로는 예쁜 포장지에 싸여 있는 작은 사탕을 원하는 만큼 아이들의 손에 가득 쥐여 줬다.
“사탕 주세요!”
네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도도도- 달려와 페트로 앞에서 양손을 쫙 펼쳤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페트로는 무릎까지 굽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이름이 뭐야?”
“리오!”
“그래, 리오. 사탕 몇 개 줄까?”
“다섯 개!”
다시 양손을 쫙 피며 큰소리로 외치는 아이의 머리를 그는 연신 쓰다듬었다.
그리곤 정확히 사탕 다섯 개를 아이의 손에 쥐여 줬다.
“…….”
“……?”
그런데 사탕을 받은 아이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자기 손에 올려진 사탕과 페트로를 연신 번갈아 봤다.
“으…….”
“……?”
“으… 으…….”
“……??”
“으… 으아앙!”
“……!”
갑자기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의 모습에 페트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급히 다시 무릎을 굽혔다. 내가 뭘 잘못했나?
“리오, 왜? 왜 울어?”
“으… 다섯… 으으, 으아아앙!”
자신의 물음에 더욱 크게 우는 아이를 보며 페트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사탕을 달라고 해서 줬는데 왜 우는 거지?
스윽.
그때였다. 누군가 사탕을 가득 집어 아이의 손에 쥐여 줬다. 작은 아이의 두 손에 넘치도록 가득.
“이제 다섯 개 맞지?”
카밀라였다.
“응!”
그녀의 물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여전히 눈물이 가득 맺힌 얼굴로 페트로를 바라봤다. 자신의 말도 못 알아듣는 답답한 형아를 보는 눈빛이었다.
“아니…….”
그 시선에 억울함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페트로를 보며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저 나이 때 아이는 다섯이 가장 큰 숫자예요.”
“네?”
“자기가 아는 가장 큰 수가 다섯이라는 거죠. 다섯을 달라는 건 아주 많이 달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달랑 작은 사탕 다섯 개만 손에 쥐여 준 페트로의 행동에 울음보가 터져 버린 거다. 형과 누나들은 양손 가득 사탕을 받아 갔으니까.
“아, 그런 거군요.”
페트로는 언제 울었냐는 듯 다른 간식을 받으러 도도도- 달려가는 아이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에 대해 잘 아시네요.
그러다 카밀라를 새삼스럽게 바라봤다.
“그냥, 뭐…….”
오랫동안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다.
이시아로 살 때, 엄마가 죽고 아빠라는 인간도 감옥에 들어간 후 자연스럽게 보육원에 맡겨졌다.
당연하게도 자신을 입양하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사진을 보고 입양할 마음을 먹었다가도 자신을 막상 대면한 이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거부했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