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뭐가 달라진 걸까?’
전에는 그렇게 다들 난리였는데. 설마 카밀라가 라일라에게 부렸던 패악이 오히려 그들의 집착을 부추겼던 걸까?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고 해 봐야 그것밖에 없잖아.’
자신이 이번에는 라일라를 적대하지도, 딱히 괴롭히지도 않았다는 거.
“에휴, 모르겠다.”
카밀라는 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카밀라.”
라일라가 그런 카밀라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괜찮을까요?
“뭐가?”
“저 도와주신 거요.”
태평한 카밀라와 달리 라일라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다.
“저 때문에 괜히 카밀라까지…….”
이제 학생회가 어떤 곳인지 확실히 알게 된 그녀다. 혹여 이번에 자신을 도와준 일로 카밀라까지 학생회 간부들의 눈 밖에 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어, 어쩌죠?”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제가 다시 가서 용서를 비는 게…….”
말을 할수록 불안감이 밀려드는 듯, 그녀는 당장이라도 다시 그곳으로 찾아갈 기세였다.
“라일라.”
짧게 혀를 찬 카밀라는 그런 라일라를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차나 마셔.”
“하지만…….”
“식기 전에 마시라고.”
“아… 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라일라는 두 손으로 찻잔을 꼭 감싼 채 다시 차를 홀짝였다. 하지만 눈에는 여전히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걱정 마.”
카밀라는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보다 가진 게 좀 많거든.”
“네?”
“차나 마시라고.”
“……?”
* * *
“지금 뭐라고 했나!”
“마탑은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후작가와의 모든 거래를 중단한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다시 말씀드릴까요? 거래 중단이라고요.”
가브엘 후작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하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저자가 바로 마탑의 수뇌부 중 한 명인 카도르였기 때문이었다.
고작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그는 이미 수장 다음으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게다가 다음 대 마탑의 수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더 이상 마탑에 마력석을 공급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브엘 후작이 그러거나 말거나 카도르는 처음과 똑같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마탑과 우리 가문의 거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는 것인가!”
“충분히 잘 알죠.”
“그런데도 이런다고!”
“네, 그런데도 이러기로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그러게 말이죠. 세상에… 이딴 거래를 이렇게나 오래 해왔다니.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군요. 얼른 헤어집시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가브엘 후작을 보면서도 카도르는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텐데요. 매번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마력석을 저희에게 공급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네, 마력석을 유통하는 분이 후작님밖에 없었으니 다들 가격을 따질 엄두도 내지 못했지요.”
언제나 가브엘 후작이 부르는 대로 지급해야 했고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해 와도 다 들어줘야만 했다. 그런 거래를 수십 년 동안 해 온 것이다.
마탑이라고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오랫동안 새로운 루트를 뚫으려 했지만 늘 실패했다. 가브엘 후작이 언제나 방해해 왔으니까.
마력석을 판매하려는 곳을 먼저 알아내 그들의 판매권을 강제로 사들여 독점권을 절대 놓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와의 불공정 거래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죠. 마력석, 더 이상 후작님의 전유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드디어 이번에 변수가 생겼다. 새로운 판매처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최상급 마력석을 파는 곳이 말이다.
심지어 가브엘 후작이 손을 댈 수 없는 판매처였다.
세프라 공작가.
아무리 날고 긴다는 후작가라도 제국의 수호 가문이라고 불리는 그곳을 쉽게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에 얼마 전 가브엘 후작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마탑에 공급하는 마력석 가격을 대폭 인하했다. 다른 자잘한 조건들도 다 취소하겠다면서 최대한 꼬리를 내린 모습으로 거래를 유지하려고 용을 썼다.
그런데 지금 마탑에서 그마저도 거부하며 거래를 완전히 끊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단순한 계산입니다.”
“계산?”
“저쪽에서 통보해 왔거든요.”
“무슨…….”
“이쪽과의 거래를 끊지 않으면 자신들의 물건을 공급해 주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저희에게 필요한 건 싸구려 마력석이 아니라 비싸도 질 좋은 마력석인 것을요.”
그동안 가브엘 후작에게 쌓인 게 많았던 마탑은 별 고민 없이 세프라 공작의 손을 들어줬다.
“세프라 공작이 왜!”
뜻밖의 사실에 가브엘 후작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세프라 공작이 마력석 유통 사업을 시작한 건 알지만, 자신은 그의 사업에 조금도 관섭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어떻게든 방해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금으로도, 권력으로도 그를 압박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까.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국 세프라 공작에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않은 꼴이 되었다.
“그런데 왜!”
그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것까지는 제가 알 수가 없지요.”
“이, 이보게!”
카도르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를 가브엘 후작이 급히 막아섰다. 이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마력석 사업은 후작가의 가장 주축이 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이 흔들리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러건 말건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던 카도르가 문득 떠올랐다는 것처럼 툭 던지듯 한마디를 보탰다.
“제 제자 놈이 그러더군요.”
카도르의 제자라면 가브엘 후작도 아는 이였다. 소르펠 공작의 의붓아들인 라비라는 녀석이 그의 제자였다.
“요즘 해괴한 영상이 하나 돌고 있다던데.”
“영상?”
가브엘 후작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이 판국에 영상은 또 무슨 영상이란 말인가!
“따님과 관련된 영상이라 들었습니다.”
“무슨……!”
미간을 찌푸리는 가브엘 후작을 뒤로한 채 카도르는 그대로 응접실을 나섰다. 그런 그를 가브엘 후작은 더 이상 잡지 못했다.
“마탑, 이놈들이!”
절로 이가 갈렸다. 자신의 앞에서 굽실거리며 꼬리를 흔들 때는 언제고!
“하아.”
하지만 곧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력석 사업이 흔들리게 생겼다는 사실에 정말로 골치가 아팠다.
똑똑! 벌컥!
“후작님!”
그때 문이 세차게 열리며 후작의 보좌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뭔가를 꺼내 가브엘 후작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이게 뭔가?”
보좌관이 내민 건 영상 구슬이었다. 그는 이렇다 저렇다 설명 없이 바로 마법 영상 구슬을 틀었다.
─ 뭐해? 꿇어.
─ 메리즈, 내가 잘못했어.
영상 속에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영상 속 인물들의 얼굴은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괴롭힘을 당하는 이, 행하는 이들 모두 뿌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얼굴 부분이 흐릿했다. 목소리도 변조가 된 것처럼 이상하게 들렸다.
─ 계속해.
하지만 단 한 사람, 유일하게 정확하게 얼굴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리는 이가 있었다.
“메…리즈?”
자신의 딸인 메리즈였다.
“이게 뭔가!”
“지, 지금 귀족가에 돌고 있는 영상입니다.”
“뭐라?!”
퍼억!
가브엘 후작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영상 구슬을 집어 던졌다. 벽에 그대로 부딪힌 영상 구슬은 산산조각이나 부서졌다.
조금 전 카도르가 말한 영상이 이거였나?
바깥세상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마탑에서조차 이 영상에 대해 안다는 건 제국 안에 이미 쫙 퍼졌다는 말이다.
“당장 잡아들여!”
“네?”
“영상 푼 놈! 당장 잡아들이라고!”
메리즈가 학교에서 무슨 짓을 했든 그건 상관없었다. 힘없는 놈들이 힘 있는 이들에게 당하는 게 뭐가 문제겠는가.
다만 그걸 다른 사람들, 특히 귀족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괜히 논란이 되고 책잡힐 일을 왜 만드느냐는 말이다!
“바보 같은 게!”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이런 영상이 나돌게 해!
당장 영상을 푼 놈부터 잡아야 할 것이다. 메리즈를 혼내는 건 그 뒤의 일이다. 일단 수습이 먼저였다.
영상 푼 놈을 잡아 이 영상이 모두 가짜라고, 자기가 거짓으로 꾸민 일이라고 자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또 뭐야!”
보좌관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영상을 푼 사람이 카밀라 영애입니다.”
“누구?”
“소르펠 가문의 카밀라 영애…….”
가브엘 후작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너무도 뜬금없는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아니, 그 아이가 왜 그런 짓을 해!”
최근에야 평판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최악의 영애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메리즈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그래서 이번 일로 제 딸의 평판을 떨어트리려고 하는 건가? 카밀라가 갑자기 왜 이딴 짓을 저지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 아가씨께서 건드린 이가 아무래도 카밀라 영애와 잘 아는 자인 듯합니다.”
가브엘 후작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세프라 공작가와 소르펠 공작가, 이 두 공작가와 갑자기 엮인 지금 이 상황이 그저 우연일까?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단 하나다. 그녀를, 영상을 배포한 자를 마음대로 잡아들일 수 없다는 것.
“하…….”
감이 왔다. 일이 뭔가 왕창 꼬이고 있다는 감이!
“메리즈, 당장 데리고 와!”
* * *
“저런 걸 보고 뭐라는 줄 알아?”
“뭐라고 하는데?”
“뿌린 대로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