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라?”
메리즈는 의외라는 듯 눈이 살짝 커졌다.
“카밀라 영애와 친하게 지내는 인간도 있어? 확실히 이번 아이는 좀 특이하구나.”
그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딱히 상관이 있을까? 카밀라 영애와 친하다고 해서 그녀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리 간단하게 여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뭐?”
“카밀라 영애, 이번 사냥 대회에서 어땠는지는 들었지? 요즘 평판이 그리 나쁘지 않…….”
“루히스.”
메리즈의 부름에 루히스가 멈칫했다.
“뭐야? 카밀라 영애가 신경 쓰이는 거야?”
“그게 아니라…….”
이번 사냥 대회에 참석했다가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다. 적의 공격에 큰 부상을 입을 뻔했을 때 그녀가 자신을 구해 줬다.
목숨의 빚을 진 그녀와 척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좀 찜찜했다.
“루히스, 네가 데리고 와.”
“뭐?”
“그 아이.”
“……!”
“네가 그곳으로 데리고 와.”
* * *
‘하아.’
라일라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자신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짝!
스스로의 뺨을 몇 대 찰싹찰싹 때리며 라일라는 굳어 있던 표정을 급히 풀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는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가 걸렸다.
“다녀왔습니다.”
씩씩하게 외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크지 않은 집이지만 마당은 넓었다.
그 넓은 마당에는 수많은 야채와 과일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일라의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가 퍼져나갔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만 오면 마음이 편안하다.
“왔니?”
“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어머니가 반갑게 그녀를 맞아 줬다.
“어?”
그런데 집에는 어머니만 계시는 게 아니었다.
“손님이 왔단다. 친구라던데.”
“친구요?”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돌아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
“어…….”
아는 얼굴이긴 했다. 학생회 부회장 루히스였다.
종종 학생회 알림 상황을 전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여긴 어떻게…….”
“할 얘기가 있어서.”
루히스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잠시 시간 좀 내줄래?”
“아, 네.”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니라는 듯 밖을 가리키는 그의 모습에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식사라도 하고 가면 좋을 텐데.”
“아닙니다. 맛있는 차로 충분합니다.”
그는 예의 바른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먼저 밖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뒤를 라일라가 따랐다.
“얘기 들었어.”
“얘기요?”
루이스는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요즘 학교생활이 힘들다며?”
“네?”
“아이들이 괴롭힌다고 들었는데.”
라일라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역시 이건 괴롭힘이 맞는 거겠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아니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부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 학생회가 도움을 좀 주려고.”
“도움이요?”
“응. 이런 일을 돕는 게 우리 학생회에서 해야 할 일이니까.”
지금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같이 갈래?
친절한 루히스의 물음에 라일라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들어가.”
“여긴…….”
학생회실이 아니었다. 라일라가 루히스를 따라가 도착한 곳에는 으리으리한 건물이 서 있었다.
“학생회장 소유의 건물이야. 학생회실보다는 여기가 편한 것 같아서.”
“아.”
라일라는 문을 열어 주는 루히스의 친절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안으로 들어섰다.
촤아아악!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물이 자신에게 쏟아졌기 때문이다.
“큭.”
“저 멍청한 표정 좀 봐.”
“어때? 여전히 이게 실수 같아?”
멍해 있던 라일라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익히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학생회장 메리즈와 그 외 학생회 간부들.
“저기, 지금 뭐 하는 거야?”
잠시 멍해 있던 라일라는 물기를 대충 털어 낸 뒤 차분히 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편안해져 있었다.
“역시 특이하네.”
“내가 말했잖아. 이번 대상은 무척 둔한 것 같다고.”
학생회 간부들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학생회장 메리즈에게.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한 건 메리즈였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였어.’
따분한 일상에 작은 유희를 위해 행한 일이었다. 마침 눈에 거슬리는 인간도 있었고.
하지만 일이 진행될수록 부수적인 이득이 생겼다.
‘학생들의 중심이 내가 되는 거.’
놀이를 주도하니 당연히 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자신을 따랐다. 알게 모르게 생겨난 권력은 황홀했다.
다음 타깃이 자기가 될까, 자신에게 밉보이는 순간 투표고 뭐고 바로 다음 장난감이 된다는 사실을 안 이들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에 당연히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이가 사라졌다.
당하는 아이들을 보며 학생들은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안도감.
묘한 안도감. 자기가 저 대상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
“일단 무릎부터 꿇게 해.”
메리즈의 말에 몇몇 학생들이 라일라에게 다가섰다.
풀썩.
“뭐, 뭐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반응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라일라였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다가오기 전에 자기 스스로 먼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빙그레 웃는다.
“미안. 내가 뭔가 실수한 게 있는 거지? 뭔지 모르겠지만 사과할게. 무릎 꿇어서 용서받을 수 있으면 꿇어야지.”
순간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아이는 확실히 처음이었다. 정말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건가?
“하.”
메리즈도 어이없는 웃음을 흘렀다. 전혀 겁을 먹지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라일라의 모습에 메리즈는 작게 혀를 찼다.
“머리 모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된다.
“머리카락 좀 잘라 봐.”
탐스러워 보이는 머리가 눈에 거슬렸다.
“아주 짧게.”
익숙한 일인 듯 주변에 있던 한 학생이 금세 가위 하나를 들고 와 라일라에게 다가섰다.
가위를 본 라일라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왜들 이러는 거야?”
라일라는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메리즈의 미소가 다시 짙어졌다.
“그냥 놀이야. 노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해?”
“놀…이?”
“그래, 놀이.”
뭐 해? 잘라.
라일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머리는 다시 자랄 거야. 울지 마. 쉽게 울지 않기로 했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스윽.
가위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
하지만 이후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 머리카락이 잘리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에 라일라는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위를 쥐고 있는 이의 손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손이 보였다.
“너희 선 넘은 거 알지?”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 카밀라였다. 그녀가 연신 혀를 차며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가위 계속 들고 있을 거야?”
쨍그랑.
가위를 쥐고 있던 이가 순간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가위를 떨어트렸다. 그제야 카밀라는 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하아.”
카밀라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아르시안과 페트로, 두 사람은 끝까지 이번 일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제노를 붙여 놓길 잘했네.’
혹시나 싶어 제노를 라일라 곁에 붙여 뒀었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바로 알려 달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조금 전, 제노가 자신을 급히 찾아왔다. 라일라를 부회장이 데리고 나갔다고.
그들이 어디서 모일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영상을 찍는 장소는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에 어렵지 않게 라일라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쯧.”
카밀라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라일라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흠뻑 젖은 채 쓰레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진작 도와줬어야 했던 걸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 물어본다.
“여전히 괜찮아?”
그동안 늘 걱정 말라며, 괜찮다고 씩씩하게 외치던 그녀다.
“여전히 도와주지 않아도 돼?”
자신을 바라보는 라일라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도와줘…….”
결국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도와줘, 카밀라.”
언제나처럼.
아주 오래전,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