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왜 혼자 착한 척이야?’
‘재수 없어.’
이렇게 되는 거다.
[너라도 도우면 되잖아!]
“고마워요.”
[뭐가?]
“절 그리 착한 인간으로 봐줘서.”
남을 괴롭히는 일에 동참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앞에 나서서 도와줄 마음도 딱히 없다.
방금 말했다시피 끼어드는 순간 아주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거다.
‘일개 학생이 학생회 전체를 상대하긴 힘들지.’
학생회장인 메리즈뿐만 아니라 그 밑에 있는 학생회 간부 모두가 한통속이다.
한마디로 학교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그들과 대립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중간하게 끼어들었다간 그 순간부터 학교생활이 지옥이 되는 거다.
[아씨! 아무리 그래도!]
“너무 열내지 마요. 오늘 본 그 학생은 곧 학교를 그만두니까.”
결국 괴롭힘을 참지 못한 케빈 브라이안은 학교를 자퇴하고 떠난다.
어떻게든 학교만은 졸업하고 싶어 했지만, 그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부모가 알게 돼 버린다.
브라이안 남작 부부는 케빈에게 학교를 그만둘 것을 권했다. 그리곤 모든 걸 청산하고 조용히 시골로 내려가 살기를 바랐다.
‘신고할 생각도 못 하지.’
괴롭힘을 주도한 이들의 신분이 너무도 높으니까.
학생회장인 메리즈만 해도 후작의 딸이고 학생회 다른 간부들 역시 제국 안에서 날고 긴다는 귀족가의 자제들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들이 항의를 해 봐야 돌아오는 건 더 큰 피해라는 걸 너무도 잘 안 것이다.
그가 떠난 후 학생회 간부들은 오히려 즐거워했다.
‘드디어 떠났네.’
‘그렇게 죽자고 붙어 있더니.’
[X 같은 것들!]
“선을 넘긴 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동하진 않는다. 여전히 학생회 일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타깃이다.
“조만간 새로운 대상이 정해 질 거예요.”
[새로운 대상?]
“케빈이 사라졌으니까요.”
[이런 미친 것들이!]
그리고 이번 타깃이 누가 되는지 카밀라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 *
“케빈, 그 녀석은 너무 순했어.”
“맞아.”
학생회 간부만 드나들 수 있는 학생회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책상에 놓여 있는 한 사람의 자퇴서를 두고 키득거렸다. 케빈 브라이안의 자퇴서였다.
“다음은 누구로 할까?”
가장 상석에 앉아 간부들의 말을 들으며 빙그레 웃고 있던 학생회장 메리즈가 본론을 꺼내 든다.
“다음 대상 정해졌어?”
“응, 여기.”
“이번에는 누구야?”
학생회장 메리즈의 물음에 간부 하나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곳에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 반 학생들이 단체로 뽑은 것 같더라.”
“아무래도 누가 손을 쓴 거 같던데?”
“흐음.”
이름을 본 메리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새로운 게임의 시작이었다.
* * *
“어?”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온 라일라는 책상에 가득 쌓여 있는 뭔가에 눈이 동그래졌다. 쪽지들이다.
누가 보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쪽지가 수북이 자신의 자리에 쌓여 있었다.
“뭐지?”
잠시 고개를 갸웃한 라일라는 쪽지들을 하나하나 펴 읽기 시작했다.
라일라, 너 보육원 출신이라며?
너희 부모님 농장에서 일한다던데? 정말이야?
너한테 가끔 이상한 냄새나.
학교에서 장학금 받으며 거지처럼 빌붙어 있는 게 너라며? 그 장학금 우리가 내주는 거 아니?
쪽지를 읽어 내려가는 라일라를 교실 안에 있는 모든 학생이 쳐다봤다.
키득거리는 이들도 있었고 그런 학생들을 한심해하며 외면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이 라일라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와…….”
쪽지를 다 읽은 라일라의 반응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너희들 나에 대해 아는 게 정말 많구나!”
“……?”
“관심 가져 줘서 고마워!”
그 말을 하며 활짝 웃는 라일라의 모습에 교실 안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일라는 자신의 옷소매를 킁킁거렸다.
“옷은 자주 빠는데……. 미안, 좀 더 신경 쓸게. 내가 기르는 농작물이 좀 많긴 해.”
“라일라.”
배시시 웃는 라일라 곁으로 한 무리가 다가섰다.
전에 숙제를 보여 달라고 했다가 카밀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났던 그레이스 영애와 그 친구들이었다.
“그거 알아?”
“어?”
“너희 어머니, 우리 집에서 일거리 받아 가는 거.”
그레이스 영애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물론 거짓말이다. 다만 소문으로 듣기는 했다. 라일라의 어머니가 주변 귀족가에서 바느질감 같은 소일거리를 받아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짜?”
“그럼 진짜지. 내가 거짓말을 할…….”
덥석!
“고마워!”
라일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레이스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가 안 그래도 요즘 일감이 잘 없다고 속상해하셨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
“나도 같이 돕고 있거든. 괜찮으면 나한테도 일감 좀 줄 수 있을까? 나도 바느질 잘해. 그레이스! 꼭 좀 부탁할게!”
놀리려고 한 말인데, 창피를 주려고 한 말인데.
“역시 그레이스, 넌 정말 좋은 친구야!”
타격감 제로.
오히려 그레이스가 붉어진 얼굴로 급히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다른 학생들도 다들 어이없는 눈빛으로 그런 라일라를 쳐다봤다.
“미안한데 이 종이는 버려도 되지? 너무 많아서 간직하기에는 좀 힘들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일라는 책상에 쌓여 있는 쪽지들을 빠르게 치워 나갔다.
‘푸웁.’
한편 그 모습을 슬쩍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카밀라였다.
혹시나 해 그녀의 교실 근처를 지나던 카밀라는 평소와 다름없는 라일라의 그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기에 마냥 웃고 있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망연한 표정을 보니 속은 좀 시원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되려나?’
처음에는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함으로 잘 대응하지만, 그 강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라일라도 힘들어한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돕는 이들이 있지.’
바로 페트로와 아르시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던 두 사람이 라일라로 인해 모든 걸 알게 되고 전면적으로 학생회를 붕괴시킨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 될지.’
그때야 두 사람이 라일라에게 아주 큰 관심을 보이는 상태였으니까. 그에 당연히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그녀를 도왔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르시안도 그렇고 페트로도 라일라와 별다른 접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라일라를 대하는 분위기가 전과 달리 아주 심드렁했다.
카밀라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쪽지들을 열심히 치우고 있는 라일라를 바라봤다.
“일단은 상황을 좀 지켜볼까?”
* * *
…계속 지켜봐도 되는 건가?
“에취!”
“감기 걸린 거 아냐?”
“괜찮아요.”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친구들이 실수로 물을 쏟아서요.”
“그 친구들은 매일같이 실수를 하네.”
“하, 하하…….”
“무릎도 또 까졌네.”
“아, 친구들 발에 걸려 넘어져서…….”
라일라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도 사라졌다.
아무리 둔한 그녀라도 이 정도가 되니 뭔가 이상한 걸 느낀 거다.
‘흐음.’
슬슬 괴롭힘의 강도가 세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쪽지나 편지, 등에 놀림감이 될 수 있는 문구를 적어 붙이는 등 유치한 짓거리로 시작이 됐다.
‘물론 그 내용은 전혀 유치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라일라야 덤덤하게 넘겼지만 다른 이들이 당했다면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주변 학생들이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리거나 낄낄거린다고 생각해 봐라. 그게 그저 유치하기만 할까?
그리고 그 강도는 점점 강해질 것이다.
라일라는 여전히 자신이 현재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대충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는 듯했지만, 그 이상은 짐작 가는 게 없는 듯했다.
‘저 인간들도 조용하고.’
예상대로 아르시안이나 페트로는 여전히 라일라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현재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이건 과거와 너무 다른데?’
카밀라는 머리가 복잡했다. 이대로 그냥 두고 봐도 괜찮을까?
물론 과거에도 아르시안과 페트로가 끼어든 건 라일라가 학생회에 직접적으로 폭력을 당할 때였다.
‘그때까지는 기다려 봐야 하는 건가?’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풀렸던 일을 굳이 자신이 끼어들어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상황이 과거와 좀 다르긴 한데 그렇다고 함부로 막 끼어들어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저 갈아입을 옷도 미리 준비해 왔어요. 잘했죠?”
별일 아니라는 듯 씩씩하게 웃는 라일라를 보며 카밀라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 * *
“이번 아이는 좀 특이하네?”
학생회장 메리즈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반응이 남달라.”
“자기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애들이 너무 살살 봐주면서 괴롭히는 거 아냐?”
메리즈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는 대상이 이번에는 좀 둔감한 것 같아. 오히려 웃었다는군.”
쓰레기 버려 달라고 말을 하지. 알았어. 내가 다 치울게!’
라일라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정리했다.
“재밌네.”
메리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학생들이 아주 골이 났겠어.”
“아무래도 그렇지.”
자신들의 괴롭힘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라일라를 보며 다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다.
“우리가 직접 겁을 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데…….”
즐겁게 키득거리던 메리즈의 시선이 부회장 루히스에게 향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 그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번 아이, 카밀라 영애와 친분이 있는 것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