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저 인간, 카밀라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게 맞다.
자기 동생이 그렇게 카밀라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온갖 짓을 다 하고 다녔는데 저 반응 좀 봐라. 전혀 그 사실을 모르는 눈치지 않은가.
“갑자기 왜…….”
페트로가 다시 물었다.
카밀라의 예상과 달리 페트로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자신의 동생이 카밀라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그는 단순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카밀라가 늘 그런 엘리샤의 장난을 잘 받아 줬으니까.
그리고 그런 엘리샤의 장난을 그녀가 받아 주는 이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카밀라,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 그러는 것이라는걸.
그런데 갑자기 왜? 엘리샤와 왜 척을 지려고 하는 걸까?
“이제 상관없으니까요.”
“…….”
“이제 더 이상 잘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뭘까? 왜 저 말에 가슴이 이리 아릿할까?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의 관계를 차갑게 정리하는 그녀의 말에 페트로는 순간 답답함을 느꼈다.
“언니.”
그때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드는 음성이 있었으니, 바로 조금 전 파티장을 도망치듯 나갔던 엘리샤였다.
“미안해요, 언니.”
그녀의 눈가가 아주 촉촉하다. 한참을 운 듯 붉게 충혈된 눈이 누가 봐도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또 뭔데?’
물론 카밀라는 그 모습에 속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자신에게 다가온 사실 자체에 카밀라는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아는 그녀는 이렇게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이가 절대 아니었으니까.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나에게.
“제 친구들도 사과하고 싶대요. 조금 전에 너무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그래?”
“같이 가 주시겠어요?”
“물론이지.”
카밀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한 번 더 놀아 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으니까.
“그럼 이만.”
카밀라는 여전히 말이 없는 페트로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후 엘리샤의 뒤를 따랐다. 페트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냥 무시했다.
저벅.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카밀라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앞서 걷는 엘리샤를 보며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사과를 하겠다더니.’
저 주먹은 뭐래?
‘주먹은 좀 풀고 가지 그러니?’
양손 모두 주먹을 꽉 쥔 채 입을 꾹 다물고 걷고 있는 엘리샤의 모습은 사과는 고사하고 분을 참지 못하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풉.”
순간 터진 카밀라의 웃음에 엘리샤의 걸음이 뚝 멈췄다.
“왜요? 언니?”
“그냥 좀 궁금해서.”
“뭐가요?”
“뭘 또 꾸미고 있는 건지.”
“…네?”
이번에도 역시나 표정 관리에 실패한 엘리샤다.
'미안하다. 여우라 불러서.’
지금 보니 새끼 여우도 안 되는 녀석이었구나.
‘고작 이런 말에 바로 당황하는 꼴이라니.’
정말 날 잡아 연기 공부라도 따로 시켜 주든가 해야지. 보는 이가 다 민망하다.
카밀라는 작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하긴. 머리에 똥만 가득 찬 녀석들이 꾸미는 짓이야 뻔하지만 말이야.”
“이익!”
엘리샤의 표정이 다시 한번 무너졌다. 분노가 가득 담긴 눈빛과 함께 질끈 깨문 입술 사이로 당장이라도 욕설이 튀어나올 듯했다.
“천박하게!”
역시나 거친 말이 바로 쏟아진다. 평생을 귀족 여식으로만 산 그녀가 내뱉을 수 있는 가장 거친 말이겠지?
“미안.”
그래 봐야 카밀라에겐 전혀 타격감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천박한 애들을 상대해 주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같이 천박해지네.”
오히려 그녀는 히죽 웃었다.
“다… 당신! 정말!”
엘리샤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녀의 말대로다. 카밀라를 이렇게 따로 불러낸 건 절대 사과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조금 전에 파티장에서 당한 일을 그대로 대갚음해 주기 위해서다.
거짓 연기는 거짓 연기로!
현재 자신의 방 안에선 친구들이 모두 옷을 여기저기 찢고 서로의 뺨을 몇 차례 때린 상태였다.
자신도 올라가 그대로 같은 짓을 할 생각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그리 만든 이로 카밀라를 지목할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진심으로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밀라, 그녀가 행패를 부렸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연기를 이어 나가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자신을 살살 긁는 그녀의 말에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실실 웃으며 약을 올리는 카밀라가 그리 얄미울 수가 없었다.
‘미치기라도 한 건가!’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다. 늘 자신의 말이라면 바닥을 기는 시늉도 서슴지 않던 그녀의 예전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약이 오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딴 게!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제이빌런 가문의 응석받이.”
“……!”
“나잇값도 못 하고 여전히 철없이 구는 공작 영애.”
“카… 카밀라!”
“아, 중간고사 117등?”
“이, 이!”
퍼억!
결국 폭발해 버린 엘리샤는 그대로 카밀라를 있는 힘껏 떠밀었다. 다른 곳도 아닌 2층 계단 끝자락에서 말이다.
카밀라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피했으면 엘리샤가 대신 아래로 떨어질 상황이었으니까. 위치가 딱 그랬다.
그녀가 다치는 건 상관없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살 가능성이 너무도 높았다. 자신이 그녀를 떠밀어서 일어난 사고라고 말이다.
엘리샤가 진실을 말할 인간도 아니고. 옳다구나 거짓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겠지.
‘내가 다치면 다쳤지.’
그딴 억울할 누명을 받을 생각, 조금도 없었다.
‘저 철딱서니 좀 보소.’
여기서 날 떠밀면 완전 끝이라는 생각은 안 드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거란다, 이 새끼 여우야.
카밀라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연신 혀를 찼다. 그제야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당황하는 엘리샤의 모습이 그리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전치 몇 주는 나오겠는데?’
카밀라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제발 팔이나 다리에 금이 가는 정도의 부상으로 끝나기를 바라면서.
‘…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몸에 별다른 통증이 일지 않았다. 대신 단단한 근육과 산뜻한 향이 자신을 맞아 줬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페트로였다. 언제 온 것인지 그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감싸 앉은 채 당황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요.”
카밀라의 말에 짧은 한숨을 내쉰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카밀라는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페트로의 얼굴이 아주 무섭게 굳어지는 것을.
“엘리샤!”
그의 입에서 큰소리가 나오는 모습 또한 처음이다.
그 분노 어린 모습과 마주한 당사자, 엘리샤 역시 처음 보는 오라비의 화난 모습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러게 넌 아직 멀었다니까.’
카밀라는 그런 엘리샤를 보며 속으로 연신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