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싸늘해졌다. 하지만 곧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다시 미소를 머금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
“루브가 거기 수장인 거 알아.”
블랙 쉐도우. 소르펠 가문이 생겨날 때부터 함께한 조직.
말 그대로 어둠 속에서 온갖 일을 다 하는 이들이 모인 조직이라 할 수 있었다.
주 업무는 정보를 모으는 것.
대륙 곳곳에 퍼져 온갖 정보를 다 이곳으로 보내오고 있었고 소르펠 가주의 명에 따라 은밀한 일들을 행하기도 했다.
은밀한 일이 대체 뭔지 무척 궁금했지만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아가씨.”
루브의 표정이 아주 복잡미묘해졌다. 뭔가 할 말이 많은데 당장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이다.
“나중에 나 좀 봐.”
그 말을 끝으로 카밀라는 지친 몸을 힘겹게 움직여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집사 루브의 끈질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냥 무시했다.
‘피곤하다, 피곤해.’
* * *
“왜 불렀어?”
“같이 차나 한잔하자고.”
“뭐?”
“차 한잔하자고 불렀다고.”
“점심으로 뭐 먹었냐?”
분명 저 인간, 뭘 잘못 먹은 거다.
제이빌런 공작은 연신 혀를 찼다.
“그 나이에 벌써 노망이라도 든 거야?”
급히 연락이 와서 보자기에 뭔가 중요하게 의논할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서둘러 달려왔다. 그런데 뭐?
“차?”
고작 차나 마시자고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한 거야?
“오늘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
“학교?”
제이빌런 공작은 바로 혀를 찼다. 요즘 좀 얌전히 지내는 것 같더니. 카밀라, 그 아이가 또 무슨 사고라도 친 게 분명하다.
“이번에는 또 뭐야?”
“뭐가?”
“또 영애들 머리라도 잡아챈 거야?”
“우리 딸이 뭐 매번 사고만 치는 줄 아나!”
“그럼?”
버럭 하던 소르펠 공작은 표정을 다시 가다듬었다.
“글쎄, 우리 딸이 말이야.”
“뭐.”
“우리 딸이 1등을 했다는군.”
“뭐?”
“중간고사에서 1등을 했다고.”
“…….”
제이빌런 공작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1등?”
“그래, 1등!”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저놈이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설마 그거 자랑하려고 나 부른 건 아니지?”
“1등이라니까.”
“그래서?”
“1등이라고.”
…미친 거 맞네.
제이빌런 공작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고작 저딴 거 자랑하려고 자신을 그리 급하게 부른 거란 말인가? 진짜로?
당장 달려오라고 난리, 난리, 생난리를 다 피우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왜 미쳐.”
“진짜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정말 날 부른 이유가 고작 그거 자랑하기 위해서였냐?”
“1등이라니까.”
“내 아들은 매번 1등이다! 그딴 걸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마! 자식이 좋은 성적 받은 게 뭔 큰일이라고!”
제이빌런 공작은 자리에서까지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기가 막히다 못해 뒷골이 확 당겼다.
“자랑하면 안 되는 건가.”
그 순간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에 제이빌런 공작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담았다.
아까부터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차만 마시고 있던 세프라 공작이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5등이면 상위권인데…….”
“뭐?”
뭐라는 거야, 저 자식은?
그에게서 바로 신경을 끊은 제이빌런 공작은 삿대질까지 하며 소르펠 공작을 향해 다시 고래고래 소리쳤다.
“유치하게 그런 걸로 기뻐하지 마! 우리 나이가 몇인데!”
이런 한심한 족속을 봤나. 루드빌이 소드마스터가 됐을 때도 덤덤했던 녀석이!
‘정말 노망이라도 든 건가?’
제이빌런 공작은 연신 혀를 찼다.
“기뻐하면 안 되는 건가.”
그때 또다시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보다 더욱 분위기가 다운된 세프라 공작이 여전히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다.
“5등인데… 5등이면 잘한 건데…….”
오늘 다들 왜 이러냐? 5등은 또 뭔데!
제이빌런 공작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꾹꾹 손으로 눌러댔다. 주변에 있는 친구 녀석들이 왜 다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 *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이의 등장에 카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집사… 아니, 블랙 쉐도우의 수장인 루브였다.
그 역시 이 자리에 집사로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평소 같은 정중한 인사 따윈 없었다.
블랙 쉐도우가 따르는 이는 오직 한 사람, 소르펠 가문의 가주뿐. 다른 이에게까지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절 찾으신 이유가 뭡니까?”
그는 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카밀라 역시 얘기를 길게 할 생각이 없었기에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이들 좀 조사해 줘.”
카밀라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 든 루브는 빠르게 안의 내용을 훑었다.
“이들이 누굽니까?”
“죽은 자들.”
“예?”
“어떻게 죽었는지, 그들이 죽은 후 주변 상황은 어땠는지 자세히 알아봐 줘.”
카밀라가 건넨 건 제이비 교수의 손에 죽은 여자들의 신상 명세서다.
여학생 귀신 에이미와 나눈 대화를 떠올린 카밀라의 입에서 연신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빠라고?’
[응.]
‘네 오빠가 저 여자들 다 죽인 거 맞아?’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