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이비 교수
[자네, 지금 지도를 보는 건가?]
“네.”
요리사 유령 페롤의 물음에 카밀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봤잖아.]
“그랬죠.”
아무래도 이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갈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어제 시장을 다녀온 후 한 번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고.
‘어떻게 된 게 주변에 온통 정신 나간 인간들뿐이야!’
페트로. 더럽게 재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정상인이라 생각했다.
남들에게 늘 친절했고 어려운 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좋은 사람.
그게 자신이 그동안 그를 보아 온 모습이다. 주변 모든 사람에게, 특히 여자에게 유독 친절한 그 부분이 너무도 재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어제 그 모습을 대체 뭐지?
‘완전 소름.’
얼굴에 피를 묻힌 채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은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했다.
“하아.”
다행히 죽은 이들이 주변 평판이 아주 거지 같아서 별문제가 되진 않았다.
주변 상인들의 적극적인 증언으로 페트로는 별다른 법적 조치를 당하지 않았다.
‘공작가의 자제라는 것도 한몫했고.’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이라 불리는 세 공작가는 다른 이들에 대한 즉결 처분이 가능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더욱 끔찍한 건 그들이 죽은 뒤다. 확실히 살아 있을 때 악행을 많이 저지른 듯, 죽은 남자들의 영혼은 떠나가는 모습도 남달랐다.
땅에서 솟아난 수많은 검은 손이 그들을 그대로 잡아채 아래로, 아래로 끌고 들어갔다.
[으아아아악!]
[안 돼! 싫어어어어!]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를 맴돈다. 그들이 처절하게 울부짖던 소리가.
‘본능적으로 안 거겠지.’
자신들이 끌려가는 곳이 결코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지옥 같은 게 아닐까?
‘어쨌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네.’
산 사람의 비명도 싫지만 죽은 자들의 울부짖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지 더러웠다.
“아가씨.”
“응?”
잠시 후 집사 루브가 카밀라를 찾아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잠시 고개를 갸웃한 카밀라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 * *
“카밀라 영애!”
“…….”
뜻밖의 인물이 응접실에 있었다. 바로 라일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조르륵 달려왔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어요!”
감사 인사?
“어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일단.”
아무리 손절하고 싶은 상대라지만 집까지 찾아온 이를 바로 쫓아낼 수는 없는 법. 자리를 내줬다.
“아… 저기…….”
“……?”
“오늘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요?”
“그런데?”
“혹시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떠세요? 제가 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
그러고 보니 라일라의 손에 제법 큰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뭔가 먹을 것을 챙겨 온 것 같았다.
“그럼 정원으로 가자.”
그녀의 말대로 날씨가 무척 좋았기에 카밀라는 선뜻 그녀의 의견에 따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응접실을 나와 근처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간단히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도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 정말 예쁘네요.”
주변에 가득 핀 꽃들을 보며 라일라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잠시 그렇게 정원을 감상하던 그녀는 곧 자신이 들고 온 바구니를 열어 안에 든 것을 차례차례 꺼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먹을 것이 바구니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호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페롤이었다.
싱싱한 딸기가 가득 올려진 케이크와 블루베리 파이, 갓 구운 듯한 포근한 빵과 딱 봐도 질이 좋아 보이는 버터, 거기에 얼음이 첨가된 생과일주스까지.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
“그동안 도움받은 것도 많고 뭔가 해 드리고 싶은데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요.”
“네가 만든 거야?”
“네! 여기 버터도 오늘 아침에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딱 봐도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카밀라는 제일 먼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빵에 버터를 발라 한입 먹었다.
“……!”
뭐야? 풍미가 장난 아닌데?
자신이 딱히 요리 평론가처럼 고급스러운 입맛을 가진 건 아니지만 이건 누가 먹어도 감탄할 맛이었다.
저쪽 세계에서도 그렇고 이쪽 세계에 넘어와서도 제법 많은 버터를 먹어 봤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버터만큼 고소하고 맛이 진한 건 없었다.
“맛있어.”
“저, 정말요?”
카밀라의 평에 라일라가 아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금 전 카밀라가 빵을 입에 넣기 전까지만 해도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라일라는 그제야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딸기랑 블루베리도 제가 재배한 거예요.”
“너 농사도 짓니?”
“네! 농사라 거창하게 말할 단계는 아니고요. 그냥 저랑 식구들이 먹을 사소한 건 직접 재배하고 있어요. 곧 다가오는 여름에는 감자랑 옥수수도 맛볼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잔뜩 심어 놨거든요!”
농작물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라일라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
카밀라는 그런 라일라를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은 알겠네.’
남자들이 왜 그토록 그녀를 아끼고 좋아했는지.
순진하고 바보처럼 착한 모습에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던 자신조차 지금은 묘하게 그녀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편안함. 그녀와 함께 있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카로워져 있던 신경이 살짝 누그러드는 느낌이다.
“이번에 날씨도 너무 좋아서 다들 너무 잘 자라고 있어요.”
작물이 잘 자란다는 사실 하나에 너무도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그냥 같이 웃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 고민은 다 쓸데없는 것 같네.’
확실히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매번 저 때문에 안 좋은 일만 겪으시는 것 같아서…….”
라일라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뭔가 더 귀한 걸 해 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맘에 들어.”
“네?”
“이런 거 좋아해.”
정말이냐고 묻는 듯 눈이 동그래진 라일라를 보며 카밀라는 다른 디저트들도 하나하나 맛을 봤다.
[나도 먹어 보고 싶은데! 크윽! 안타깝군.]
아까부터 살짝 흥분해 소리치고 있는 페롤을 보며 카밀라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페롤이 보기에도 라일라가 만든 음식들이 심상치 않아 보였나 보다.
‘음식을 좀 드려야 하나?’
자신이 직접 전해 주면 귀신도 음식을 맛볼 수 있다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페롤이 앞으로 자신을 아주 귀찮게 할 것 같았다.
[나도 먹고 싶다…….]
…아무래도 좀 챙겨 드려야 할 듯하다.
‘내 팔자야.’
훌쩍이는 페롤을 보며 결국 마음이 약해지고 만 카밀라다.
* * *
“마, 말도 안 돼.”
“저거 진짜야?”
“어떻게…….”
중간고사가 끝나고 성적이 나왔다. 복도에 떡하니 붙은 중간고사 순위표를 본 학생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입을 쩍 벌렸다.
너무도 뜻밖의 결과가 앞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가장 위에 적혀 있었다.
<2학년 수석-카밀라 소르펠>
만점이라는 믿기 힘든 점수로 수석 자리를 차지한 카밀라의 이름을 다들 눈을 닦고 몇 번씩 다시 확인했다.
“밑바닥에서 놀던 사람이…….”
“저게 가능해?”
“말도 안 돼!”
그전까지만 해도 카밀라의 성적은 늘 하위권에 속했다. 노력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수석이라니! 게다가 만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니들도 같은 시험지만 수십 번 받아 봐.’
그럼 저런 점수, 받고도 남을 테니.
자신을 뜨악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에도 카밀라는 태연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으니까.
[와! 갑자기 성적이 오른 방법이 뭐야?]
언제 온 것인지 여학생 귀신 에이미가 옆에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유령들 이용해서 커닝이라도 한 거야? 아닌데? 시험 칠 때 내내 내가 교실에 있었는데?]
그런 에이미의 질문을 무시한 카밀라는 이미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난 저게 더 놀랍다.’
3학년 성적표가 걸린 곳이다. 그곳에도 익숙한 이름들이 보인다. 수석 자리에 놓여 있는 이름이야 별로 놀라울 것도 없었다.
<3학년 수석-페트로 제이빌런>
‘저 인간이야, 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수석 자리를 한 번도 놓쳐 본 적 없는 인간이니 그러려니 했다.
카밀라의 시선을 낚아챈 건 5등 자리에 적힌 이름이다.
<아르시안 세프라>
카밀라보다 더 밑바닥에서 놀던 인간이다. 늘 백지 답안지를 내서 교수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던 인간이 처음으로 상위권 등수를 획득한 것이다.
“웬일이래?”
“누구? 나?”
언제 온 것인지 아르시안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머리 나쁜 마법사 본 적 있어?”
“너.”
“…….”
미간을 찌푸리는 아르시안을 보며 카밀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최근 아르시안은 수업도 빠지지 않고 나름 성실한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물론 여전히 까칠한 성격은 그대로라 주변에 사람이 꼬이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그의 등장에 학생들이 어느새 멀찍이 떨어졌다.
“그런데 네 옆에 있는 건 뭐야?”
아르시안이 에이미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가 등장할 때부터 자신의 뒤에 숨은 에이미가 그의 말에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전에 네가 없애려고 했던 녀석.”
“왜 자꾸 너한테 붙어 있는 건데?”
“글쎄.”
귀신들과 가까이 지내는 자신을 의아하게 여기는 아르시안의 모습에 카밀라는 다시 웃었다.
‘남들 눈엔 네가 더 이상한 것 같은데.’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 학생들이 조금 전보다 더욱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시안이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행위 자체가 아주 생소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