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증오해야 하잖아. 밉고 소름 끼치도록 싫어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그 미친놈에게도 사정이 있더라고.”
그렇다고 살인이 용납되는 건 절대 아니다.
“사정은 알겠는데,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자신이 당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미움 감정이 그리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
“그래서 내가 뭐라고 조언해 줬게?”
어느새 아르시안의 초점이 조금은 뚜렷해져 있었다.
“놔두라고.”
“…놔둬?”
“네 감정, 그냥 내버려 두라고.”
그래, 그렇게 난 스스로에게 조언을 했다.
굳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려 노력하지 말라고. 그냥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라고.
“지칠 때가 있지 않을까?”
미워하다, 미워하다… 또 미워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레 지쳐 멈추겠지.
“아니면 말고.”
평생 미워하고 원망해도 상관없지 않나? 피해자가 그러겠다는데 누가 욕할 거야?
말을 끝맺은 카밀라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슷한 일을 겪었다 해도 각자가 받은 고통의 강도가 다 다른 법인 것을, 어찌 그 마음을 다 이해하겠는가.
‘다만…….’
성질나서. 평생 남을 상처를 받은 건 우린데, 왜 이딴 고민까지 해야 하냐고!
카밀라는 슬쩍 아르시안을 바라봤다.
확실히 눈빛이 조금 전보다 훨씬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르시안의 주먹을 본 카밀라는 새삼 혀를 찼다. 상대방의 피가 잔뜩 묻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르시안의 손도 찢어져 있었다.
카밀라는 손수건을 꺼내 아르시안의 상처를 임시로 묶었다.
“시에르 그만 좀 울려. 너 다치면 쟤가 울어.”
카밀라는 그 말을 끝으로 그에게서 돌아섰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아르시안은 오래도록 응시했다. 손수건의 끝자락이 그의 손 위에서 살랑살랑 바람에 흩날렸다.
* * *
“아, 걔 마법 쓸 수 있지.”
마력으로 치료하면 금방인 걸 괜히 줬어. 비싼 건데.
뒤늦은 깨달음에 카밀라가 탄식을 내뱉었다. 뭐, 나중에 돌려주겠지.
방금 일로 떠오른 것을 정리할 생각에 손수건을 찾으러 가는 시간도 아까웠다.
‘세프라 공작이 죽은 게 이맘때였나?’
지병도 없었고 특별한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세프라 공작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아르시안이 작위를 받으며 학교를 그만뒀기에 교내 분위기도 한동안 어수선했던 기억이 난다. 가주직을 물려받은 아르시안이 입을 꾹 다물어 이를 두고 온갖 말이 돌았다.
[아버지가 늘 그랬어요. 어서 빨리 힘을 키워 자신을 죽여 달라고요.]
이전에 시에르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아마 아르시안이 공작을 죽인 것 같았다.
‘역시 또라이 집안이라니까.’
아들에게 매일같이 죽여 달라 외치는 아버지라니.
어쨌든 세프라 공작이 죽고 난 후 미쳐 날뛰는 아르시안을 통제하고 말릴 수 있었던 이는 단 한 사람이었다.
‘라일라.’
모든 남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인물답게 아르시안 역시 그녀 앞에서는 나름 순둥순둥해졌다.
“아무래도 보험을 하나 들어놓는 게 좋겠지.”
* * *
“야, 얘기 들었어? 쥬이드 그 새끼, 학교 그만뒀다며?”
“집안이 쫄딱 망했다던데?”
“진짜? 갑자기 왜?”
“모르지. 갑자기 동업하던 사업자들이 다 손을 뗐대.”
“웬일이래?”
“잘됐지, 뭐.”
“맞아. 그 새끼, 진짜 재수 없었는데.”
나무 그늘 아래서 홀로 책을 읽고 있던 라일라는 고개를 들었다. 옆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쥬이드라면…….’
그때 그 인간이다. 숲속에서 자신에게 행패를 부렸던 인간!
다친 발목이 아직도 시큰거리긴 했지만, 그리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을 끌고 가려던 쥬이드의 앞을 막아섰던 한 사람을 떠올린 라일라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눈빛도 반짝반짝거렸다.
라일라는 최근에도 그분의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듣고 있었다.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혹여 민폐가 될까 선뜻 걸음을 하기 힘들었다.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리고 싶은데.”
뭔가 선물을 하나 드리면 좋을 텐데. 뭐가 좋을까? 뭘 좋아하시려나?
“라일라,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그때 같은 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라일라를 발견한 이들이 그녀를 빙 둘러싸며 환하게 웃었다.
라일라도 덩달아 미소를 지어 줬다. 전학을 온 후 가장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었다.
“여기서 뭐 해?”
“책 읽고 있었어.”
“그래? 한가하네.”
“과제는?”
“과제?”
“응. 오늘 오후까지 역사 과제 내야 하잖아.”
“아. 그건 어제 다 마무리했어.”
“정말?”
“와… 좋겠다. 우린 하나도 못 했는데.”
“그러니까.”
라일라를 둘러싼 세 명의 여학생들이 동시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겼거든.”
“나도.”
“과제할 시간이 전혀 없었지 뭐야.”
“우리 어쩌지?”
“그냥 혼나야지 뭐. 이번에 낙제하면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에휴.”
울상을 짓는 친구들을 본 라일라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도와줄게.”
“어?”
“정말?”
“응, 내가 한 과제를 참고하면 되지 않을까?”
“라일라!”
“너무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세 학생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라일라를 덥석 끌어안았다.
친구들이 즐거워하자 라일라 역시 미소를 지으며 옆에 놓아둔 가방에서 자신의 과제를 꺼냈다.
“저번처럼 그대로 베끼면 안 돼. 다 같이 혼나니까.”
“응!”
“이번에는 절대 안 그래.”
“걱정 마.”
그녀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시선은 이미 라일라의 손에 들려 있는 과제에 향해 있었다.
라일라는 그것을 웃으며 건넸다.
“정말 고마… 어?!”
그러나 손을 내밀기 무섭게 과제가 갑자기 위로 솟구쳤다. 그에 덩달아 고개를 든 이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너 호구니?”
“아!”
라일라 역시 고개를 들었다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러다 곧 반가움이 가득한 미소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카밀라 영애!”
뭐야? 왜 이렇게 반가워해? 카밀라는 잠시 라일라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세 여학생이 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카, 카밀라 영애, 오랜만이에요.”
“우리가 아는 사이였나?”
미안, 기억에 없어서.
고민도 없이 이어진 카밀라의 대답에 제일 먼저 말을 건넸던 그레이스 영애가 얼굴을 붉혔다. 당연히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그거 돌려주시죠.”
“네 거야?”
“네?”
“네 거도 아니면서 뭐가 그리 당당히 돌려 달래?”
“아, 아니! 그거 우리가 받기로 한…….”
“왜 바빴는데?”
카밀라는 바로 그녀 말을 잘랐다.
“과제도 못 할 정도로 바빴다며? 왜 바빴는데?”
조금 전 그들이 나눈 대화를 언급하자 그레이스는 더욱 당황했다.
“그, 그걸 제가 왜 말씀드려야 하죠?”
“혹시 말이야.”
잠시 말을 멈춘 카밀라는 그녀들을 놀리듯이 라일라의 과제를 펄럭펄럭 흔들었다.
“내 소문 들은 적 없어?”
카밀라는 한 걸음 앞으로 더 다가갔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숙여 그레이스 영애와 눈을 맞춘 뒤 빙그레 웃었다.
“소르펠 공녀가 점괘 좀 본다는 말.”
“……!”
“아. 이거는 소문이 안 돌았나?”
카밀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내가 가끔 과거의 행적까지 맞추기도 하는데.”
“무, 무슨!”
“어제 수업이 끝나고 몇몇 영식들과 밤새 놀지 않았어?”
“헉!”
“노느라 정신이 팔려서 새벽에서야 집에 들어갔을 텐데? 아마 그래서 과제를 못 했을 거고.”
이어지는 말에 그레이스 영애를 비롯한 나머지 영애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자신들의 행적을 말하는 카밀라의 말에 몸이 떨려왔다. 그녀의 이상한 능력에 대해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정말이었던 건가?
“더 말할까? 어제 그대들이 뭘 하고 놀았는지. 누구랑 뭘 했는지.”
“시, 실례할게요.”
세 영애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갔다.
‘다행이네.’
나도 그 이상은 아는 게 없었는데 말이야.
카밀라는 자신의 옆에서 깔깔 웃고 있는 여학생 귀신 에이미를 힐긋 곁눈질했다.
자신에게 이 정보를 제공해 준 게 바로 에이미였다. 자신을 졸래졸래 따라오더니 세 영애를 본 에이미는 오늘 아침 그녀들이 나눴던 대화 내용을 말해 줬다.
어제 밤새 술 먹고 남자들과 노느라 과제를 전혀 못 해 걱정하던 세 사람이 이내 라일라가 있는데 뭔 걱정이냐며 웃었다는 거다. 말만 잘하면 저번처럼 자기 과제를 그대로 쓰게 해 줄 거라면서.
‘짜증 나는 것들.’
저런 인간들이라면 신물이 난다. 온갖 미사여구로 친한 척 다가와서는 자기가 필요한 것만 쏙쏙 빼먹는 것들.
거절하면 너를 너무 친하게 생각해서 한 부탁인데 서운하다고 오히려 피해자 행세를 한다.
‘연예계에 그런 인간들이 어디 한둘이었어야 말이지.’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탓에 그런 이들을 내쫓는 것쯤이야 이제 식은 죽 먹기다.
“넌 어찌 볼 때마다 당하고 있냐?”
“카밀라 영애는 볼 때마다 도와주시네요.”
“그러게.”
내가 이런 캐릭터가 절대 아닌데 말이지.
인간관계도 좋고 뭐든 잘하는 똘똘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엄청 허당이다.
‘은근히 당하고 사는 캐릭턴데?’
다만 본인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도 자신의 과제를 아주 즐거워하며 넘기지 않았던가.
세상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라일라의 모습이 영 못 미더웠다.
아니지. 혹시 이런 허당미에 남자들이 다 넘어간 게 아닐까?
“그런데 정말 예지 능력이 있으신 거예요?”
반짝반짝. 전보다 더욱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정말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사탕 줄까?”
“네!”
…보험이 아니라 왠지 애완동물 하나를 더 주운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