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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보는 공녀님 (38)화 (38/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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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늘 아버지께 맞았어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너도?”

[아뇨, 전 맞은 적 없어요. 이 상처는 형이 맞는 게 싫어서 감싸다가…….]

한 번 터진 아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시에르와 달리 아르시안은 다섯 살 때부터 늘 같은 시간에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고 한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신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대요.]

미움, 증오, 원망.

그런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야만 신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거치는 시험.

[3개월 동안 갇혀 있었어요.]

‘살고 싶으면 죽여라.’

가장 가까운 이를 죽여라. 그 죽음을 두 눈에 똑똑히 새겨라.

어둡고 좁은 공간에 집어넣어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꺼내 주지 않는다고 한다.

[형은 제가 죽고 나서야 풀려났어요.]

와, 또라이 집안이네.

‘정말 할 말이 없다.’

대충 모든 얘기를 들은 카밀라의 결론이었다. 세프라는 미친 가문이다.

‘신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역대 가주직에 오른 모든 이들이 그런 방식으로 키워졌다는 말이잖아.’

이게 말이 돼?

그제야 카밀라는 눈앞에 있는 시에르가 왜 저리 삐쩍 마르고 안쓰러운 모습인지 이해가 갔다.

카밀라는 들고 온 쿠키를 탈탈 털어 아이에게 열심히 먹였다.

* * *

그렇다 보니 솔직히 이 자리에 오는 게 좀 껄끄러웠다.

‘나야 사업 얘기만 하고 깔끔하게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아르시안의 곁을 맴도는 시에르, 그 아이가 자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버지와 대면하게 된다는 사실에 조금 마음이 쓰였다.

‘그런데…….’

저 모습은 대체 뭐냐고.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르시안의 곁에 있던 시에르가 쪼르륵 세프라 공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 부친을 향해 손을 뻗기에 원망스럽고 미워서 목이라도 조르려고 그러나 보다 했다.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자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한테 저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런데 카밀라를 어이없게 만든 건 다음 아이의 행동이었다.

시에르는 공작의 목을 조르는 대신 그를 꼭 감싸 안으며 슬픈 표정으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정말 계약만 깔끔하게 하고 떠나려고 했는데 찝찝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왜 저러는 걸까요?”

도대체 저 아이, 왜 우는 거예요?

카밀라의 말을 들은 세프라 공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묻어났다.

“시에르라고?”

“시에르가 울어?”

잠시 후 두 사람의 질문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카밀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역시 카밀라의 말을 듣기 전까지 시에르가 어느 곳에 서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다만 아르시안은 시에르가 세프라 공작을 원망하며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여겼고, 세프라 공작은 검은 연기의 정체가 시에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뿐이다.

이런 검은 연기, 죽은 자의 영혼이 주변을 서성이는 건 늘 있는 일이었으니까.

“정말, 시에르?”

세프라 공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세프라 공작은 이내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와 시에르가 있는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다야?”

그 모습을 본 아르시안이 조용히 물었다.

“할 말 없어?”

“없다.”

콰앙!

그가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진짜 없어?”

“…….”

“진짜 없냐고!”

콰아앙!

결국 탁자 한쪽이 부서져 나갔다.

“당신이 죽인 아들이 눈앞에 있다는데 정말 할 말이 없어?”

“있어야 하나?”

“하!”

주먹을 꽉 쥔 아르시안이 한 걸음 앞으로 몸을 내민다. 당장이라도 세프라 공작에게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잠시만.”

그런 그의 팔을 카밀라가 붙잡았다.

“놔.”

소름 끼치도록 나직한 음성이 바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카밀라는 그의 팔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도 집안싸움에 끼어들 생각 없어. 그런데…….”

카밀라는 다시 세프라 공작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안 보이니?”

“…….”

“시에르가 막아선 거.”

두 팔을 쫙 벌린 채 온몸으로 세프라 공작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미안해, 형. 미안해.]

조그만 입에서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하다네.”

에휴. 또다시 통역사 역할인가.

“네가 왜 미안해!”

아르시안이 세프라 공작을 향해 이를 갈았다. 저딴 인간을 대체 왜 감싸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내가…….]

그럴수록 아이의 눈에 눈물이 더욱 깊게 고였다.

[내가 한다고 했어. 내가… 내가 지하실에 들어가겠다고.]

‘뭐?’

말을 전하던 카밀라가 멈칫했다.

‘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딴 곳에 자청해서 들어갔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제 귀로 들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아냐.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르시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밀라에게 시에르의 말을 전해 들은 그는 더욱 분노 어린 눈빛을 세프라 공작에게 보냈다. 아이가 아버지를 감싸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거라 여긴 것이다.

[나 알고 있었어. 내가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거.]

이어지는 아이의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을 더욱 침묵으로 이끌었다.

[들었거든.]

아버지와 치료사가 나누는 대화를.

‘길어 봐야 반년입니다.’

‘…….’

‘짧으면 3, 4개월… 죄송합니다.’

그 소리를 우연히 들은 시에르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어릴 때부터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던 아이는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우.’

이런 신파 딱 질색인데. 카밀라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조만한 녀석이 무슨 죽음을 저리 담담하게 말한데?

[그래서 마지막 시험, 내가 먼저 받겠다고 했어.]

“…….”

[형이, 형이 가주가 되었으면 했으니까.]

자신의 죽음으로 형이 좀 더 빨리, 더 가까이 가주직에 오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형이 고통받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렇게 오랫동안 참고 견뎠는데, 막상 자신이 병으로 죽어 버려서 형이 마지막 시험을 치르지 못한다면? 그래서 가주직에 오르지 못한다면?

[지금껏 형이 버텨 온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물론 자신의 죽음으로 형이 무척 아프고 슬프겠지만, 그 감정 역시 신수의 선택을 받는 요소라는 걸 알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길어 봐야 반년이라고 했다. 그럴 거면 그 죽음이 작게나마 형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역시 또라이 집안이다.’

가주만 또라이인 게 아니라 애들도 다 또라이잖아!

카밀라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일곱 살에 저런 생각을 했다고? 그게 가능해? 사탕이나 빨고 있어야 할 나이에 저게 가능하냐고!

“…….”

할 말을 잃은 건 카밀라만이 아니었다. 아르시안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에르가 있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너…….”

[미안해, 형.]

“너 대체……!”

[정말 미안해.]

‘미안해, 형.’

지하실에 갇혔을 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아이가 죽던 마지막 순간, 그때도 저 말을 했었다.

그 말이 이런 이유였던 건가?

“시에르.”

[내 죽음은 아버지 잘못이 아니야.]

시에르는 어느새 다시 세프라 공작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아버지.]

지하실에서 풀려난 순간, 아르시안은 죽여 버리겠다고 악을 쓰며 제 아버지에게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단 한 번의 부딪힘으로 아르시안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건강한 몸 상태였어도 상대가 되지 않았을 텐데, 하물며…….

그 후 세프라 공작은 홀로 지하실로 가 시에르의 시신을 수습했다.

[아버지가 우시는 거, 처음 봤어.]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표정 또한 없었다. 그저 무심히 그의 눈에서 눈물만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지겨웠을 뿐이다.”

세프라 공작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다.”

아이의 죽음도, 역겨운 가주직도, 지긋지긋한 신수까지. 모든 게 다 지겨웠다. 그런 복잡한 감정이 그저 눈물로 배출되었을 뿐이다.

“다른 의미는 없다.”

아이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 자격 따위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그제야 알겠더군.”

전대 가주가 왜 그토록 빨리 죽여 달라고 했는지. 왜 그토록 자신에게 죽음을 갈구했는지.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가문의 신수는 늘 같은 자리에서 발견된다.”

세프라 공작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아르시안을 직시했다.

“바로 가주의 몸이지.”

“……!”

“가주의 몸을 다 파헤쳐야 알을 찾을 수 있다.”

세프라 공작은 굳어져 있는 아르시안에게서 조금의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 가문에 가장 쓸모없는 게 바로 감정이다. 네가 어릴 때부터 맞은 것도 동생의 죽음을 지켜본 것도 다 쓸데없는 감정을 없애기 위해서지. 오로지 필요한 건 나에 대한 원망, 분노… 그리고 날 죽일 거라는 증오심. 그것뿐이다.”

날 죽이고 알을 끄집어내. 그게 네가 할 일이다.

세프라 공작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에르는 여전히 울먹였고 아르시안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자신의 아버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와…….”

나 집에 가고 싶다, 진짜.

그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카밀라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딴 집구석,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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