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밑밥 뿌리기
라일라.
예쁘다. 착하다. 성격도 좋다.
모두가 기피하는 카밀라에게 유일하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고 웃어 준 사람이었지만.
“난 네가 정말 싫어!”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꺼져!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카밀라는 그런 라일라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니, 증오했다.
‘내가 보기엔 질투였지만.’
라일라는 카밀라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어릴 때 부모를 여의었고, 다른 귀족 가문에 입양되어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다만 결과는 너무도 달랐다. 소르펠 공작가처럼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입양한 남작 부부는 라일라를 친딸처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쾌활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란 그녀의 주위엔 늘 사람이 넘쳐났다. 모두가 라일라를 좋아했다. 심지어 카밀라가 쫓아다녔던 페트로까지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똑같은 처지인데. 똑같이 친부모가 아닌 양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라일라는 왜 다르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사람들의 애정을 너무도 쉽게 가져가는 라일라가 미치도록 부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러움을 인정하긴 싫었겠지.’
그걸 인정하는 순간 더욱 비참해질 테니까.
카밀라는 라일라를 괴롭히고 아픈 말을 쏟아 내는 것으로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럴수록 그녀를 향한 배척은 더욱 심해졌으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카밀라 끝내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
‘…….’
‘사, 살려 주세요!’
“…아 진짜 짜증 나.”
자연히 떠오르는 장면에 그녀는 다소 거친 손길로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카밀라에겐 주어지지 않았던 애정. 그러나… 이 모든 걸 가진 라일라.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카밀라는 라일라를 납치해 죽이려고까지 하지만, 오히려 그 사실을 들켜 아주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 선이었다. 그 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카밀라에게 등을 돌렸다.
소르펠 공작 역시 그나마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쥐꼬리만 하게 남아 있던 정까지 아주 탈탈 털어 버렸다.
이는 유일한 혈육인 라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루드빌을 죽이기 위한 계획을 세우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카밀라를 끌어들였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실상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카밀라는 자신에게 그나마 손을 내미는 라비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매번 그 꼬락서니를 보고 나서 사이다를 급히 찾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갑갑해서 살 수가 없었거든.
“카밀라 영애 맞으시죠?”
카밀라는 발목의 고통도 애써 참으며 화사한 미소를 날리는 라일라를 잠시 무심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 전학을 왔었구나.’
카밀라를 끝도 없이 자극하는 인물인데,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저기…….”
카밀라가 아무런 말이 없자 라일라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런 그녀에게 카밀라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스윽.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라일라는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하얗고 가느다란 카밀라의 손을 바라봤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아!”
다시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라일라가 카밀라의 손을 그제야 조심스럽게 잡았다.
“윽!”
어느새 퉁퉁 부어오른 발목에서 큰 통증이 이는 듯 일어서던 라일라가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를 카밀라가 다른 손으로 마저 부축했다.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앞으로 저런 인간이 보자고 해도 이런 곳까지 따라오지 마.”
딱 보면 모르겠니? 뭘 믿고 이런 으슥한 숲까지 졸래졸래 따라와?
“저 사람을 따라온 게 아닌데…….”
“그럼?”
“전 카밀라 영애를 따라왔어요!”
그녀의 수줍은 미소에 카밀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봤다고 날 따라와?
“숲으로 가시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혼자 가는 건 위험할지도 모르잖아요.”
이런 오지라퍼를 봤나.
“너, 나 알아?”
“네! 알아요!”
안다고?
“다들 카밀라 영애 얘기만 하던걸요?”
“내 얘기?”
“오늘 영애가 어떤 옷을 입었더라. 장신구는 어떤 걸 했더라. 머리 모양이 이랬더라, 저랬더라. 심지어 수업 시간에 어떤 행동을 한 것까지 오후가 되면 다 들을 수 있어요.”
“…….”
“다들 영애에게 관심이 무척 많더라고요.”
시선이 전보다 더 쏠리고 있음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주변의 무시와 외면을 전과 달리 아주 편하게 즐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남들 눈엔 무척 이상해 보였을 거다.
‘머리 모양까지 거론하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자신의 의상과 장신구를 책임지고 있는 가게들이 요즘 장사가 무척 잘 된다는 얘기를 얼핏 듣긴 했다.
“무척 뵙고 싶었어요.”
“날?”
“네.”
“…….”
뭔가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하다.
‘저 눈빛 아주 익숙한데.’
연기 초보들이 자신을 처음 볼 때 딱 저런 눈빛이었지.
“카밀라.”
그때 카밀라의 곁으로 루드빌이 천천히 다가섰다. 그제야 카밀라는 주변 상황에 다시 시선을 줬다.
“크윽.”
“흑…….”
“으…….”
네 남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훌쩍훌쩍 우는 놈도 있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뼈가 부러진 듯 팔과 다리가 너덜거리는 놈도 있었지만, 다들 무릎 꿇은 자세를 절대 풀지 않았다.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듯이 말이다.
‘쟤는 언제 내려왔대?’
자신이 나무에 매달아 놓았던 쥬이드 역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끙끙 앓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그가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가 아주 깔끔하게 잘린 걸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루드빌이 자른 것 같았다. 저 높은 곳에 있는 걸 도대체 어떻게 자른 거야.
“이거.”
카밀라가 루드빌을 바라보는 순간 그가 앞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어?”
팔찌였다. 자신의 팔찌. 그런데.
“부서졌네.”
쥬이드를 묶고 있던 팔찌를 강제로 푼 듯 팔찌는 도로 작아져 있었지만, 한쪽 끝이 끊어져 있었다.
“미안.”
간단히 사과의 말을 내뱉는 루드빌을 보니 이것 역시 그의 솜씨인 듯했다.
대체 이 단단한 걸 어떻게 부셨지? 라비가 웬만한 몬스터도 꽁꽁 묶을 수 있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죠. 라비 오라비한테 고쳐 달라 해야겠네요.”
“라비가 준 거야?”
“네.”
“왜?”
왜? 굳이 왜라고 물으면…….
“저도 모르죠.”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동생이라고 챙겨 준 게 아닐까요? 오빠잖아요.”
답지 않게 어색해하며 팔찌를 던져 주던 라비의 모습이 새삼 떠올라 카밀라의 눈이 곱게 휘었다.
“…….”
콰드득!
‘응? 콰드득?’
이게 무슨 소리… 야!
팔찌를 도로 받기 위해 손을 내밀려던 카밀라는 별안간 루드빌의 손에서 들려온 낯선 소음에 눈을 부릅떴다.
반짝반짝한 무언가가 가루가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손아귀에서 힘을 푼 남자는 그것을 카밀라에게 내어 주며 당당히 말했다.
“미안.”
다시 사과의 말을 내뱉는 루드빌을 카밀라는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 시선을 슬쩍 회피한 루드빌이 부서진 팔찌를 그녀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 * *
“이상하네…….”
잠자리에 든 카밀라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오늘도 잠을 설치는 중이었다.
라일라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의 등장 이후로 카밀라 주변 상황들이 더욱 미묘하게 변화기 때문이다.
‘특히 루드빌.’
사람이고 물건이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별 관심이 없는 그가 처음으로 집착이라는 감정을 드러내는 존재가 바로 라일라다.
그런데 오늘 두 사람의 모습은 아주 의외였다. 데면데면, 서로를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반복되는 삶에서 자신이 보았던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강한 끌림을 느끼며 서로에게 큰 관심을 드러냈었다.
거기에 라비와 페트로를 위시한 다른 남자들이 합세해 아주 난장판을 이루는 애정 전선이 펼쳐질 예정이었지만.
‘첫 만남이 예정된 곳이 아니라 그런가?’
오늘 두 사람의 만남은 그간 카밀라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 신수의 알을 찾기 위해 정령의 호수를 찾은 일로 인해 이루어진 일이다.
‘원래는 시장에서 처음 만났었지?’
오늘처럼 나쁜 놈들에게 딱 걸려 곤란에 처한 라일라를 루드빌이 우연히 보고 구해 주게 된다. 그 후 급격하게 가까워지는데…….
“…모르겠다. 잠이나 자야지.”
길게 하품을 내뱉은 카밀라는 잠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곧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보게.]
“으, 음…….”
모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카밀라는 자신의 깨우는 익숙한 목소리에 스르륵 눈을 다시 떠야만 했다.
[좀 일어나 보지?]
“아, 저리 가…….”
[일어나 보라고.]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침대 머리맡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사람, 아니, 한 귀신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귀신이나 다른 귀신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이렇게 밤에 갑자기 등장하는 귀신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그런데 그 상대가 지박령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카밀라를 찾아온 이는 바로 헤르셀이었다.
본인 무덤의 지박령이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던 이가 갑자기 눈앞에 떡하니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는지라 무척 놀라웠다.
[자네의 소식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늘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더군.]
…귀신도 무게가 있나요?
카밀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신수를 드디어 찾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한이 좀 풀린 게 아닐까 싶었다.
‘신수를 빨리 찾으라는 말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도 한몫했을 것이고.’
매일같이 집사 유령 데린을 독촉하는 것으론 부족했던 거다. 본인이 직접 이곳에 와 독촉하고 싶었던 거겠지.
본인을 평생 묶고 있던 지박의 힘까지 풀어 버리면서 말이다.
[대체 언제 신수의 알을 꺼낼 생각이냐.]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장소까지 가르쳐 줬는데 힘들 게 뭐 있어.]
“하아.”
카밀라는 다시 짧은 한숨을 토해 냈다.
이젠 데린에 이어 헤르셀까지 자신을 매일 이렇게 찾아올 게 아닌가. 어서 빨리 신수의 알을 찾으러 호수에 들어가라고.
‘앞으로 잠은 다 잤네.’
벌써부터 피곤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