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여름 안 오면 좋겠다.”
[아가씨…….]
“농담이에요, 농담.”
호숫가를 지나 걷던 카밀라는 자신의 말에 울상을 짓는 집사 유령 데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렇게 꼭 아카데미까지 따라와야겠어요?”
[헤르셀 님이 정말 목 빠지게 기다리십니다.]
그렇겠지. 그토록 오랫동안 한이 맺혀 기다리던 일인데 얼마나 애가 타겠어. 하루가 일 년 같을 거다.
‘그 마음이야 잘 알겠지만…….’
정말 할 수 있을까?
물이 찬 것도 찬 거지만 정말로 수영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호수가 제법 깊어 보였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돌을 무사히 찾아 꺼내 올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물속 어디쯤 신수의 알이 있는지 이미 제가 다 확인했습니다. 절 따라만 오시면 됩니다.]
“…….”
카밀라의 생각을 짐작한 듯 데린이 한 번 더 그녀를 안심시켰다.
‘물을 무서워한 적은 없긴 한데…….’
물속에서 광고나 영화 촬영도 여러 번 했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제발 하루라도 빨리 물속에 들어가 알을 꺼내 오자는 데린의 눈빛을 슬쩍 외면하며 카밀라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얘기 좀 해.”
“전 할 얘기 없습니다.”
음?
우거진 숲을 막 벗어나려던 카밀라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붙잡고 대화 중이었다.
“차 한잔하자니까.”
헐.
‘저 구시대적인 대사는 뭐지?’
야, 요즘 동네 양아치도 그런 대사는 안 쳐. 왜 내가 다 부끄럽냐.
카밀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줄여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타악!
“전 그럴 생각 없습니다.”
남자가 잡은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여자는 단호하게 외쳤다. 그러는 사이 카밀라는 그들에게서 점점 더 멀어졌다.
“하! 주제도 모르고.”
멈칫.
주제?
‘여기서 그 단어가 왜 나와?’
카밀라의 걸음이 뚝 멈췄다.
단순히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상황인 줄 알았는데? 그녀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에게 향했다.
“가문도 한미한 게 어디서 뻗대?”
남자는 다시 강하게 여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남자의 과격한 언사에 조금 겁을 먹은 듯 순간적으로 여자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이거 놓으세요!”
여자의 거부에도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그 난폭한 행동에 여자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다리를 삐끗했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를 알아차린 남자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맺혔다.
“우리 가문이 어떤 곳인데, 감히…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따라올 것이지.”
“가문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지 않니?”
“……!”
“너 언어 수업 시간에 자지? 그러니 언어 선택 능력도 그렇고 이해 능력도 이리 딸리지. 가문이 싫은 게 아니라 네가 싫은 거잖아.”
그 순간 들려오는 담담한 음성.
급히 고개를 돌린 남자, 쥬이드는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하고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카, 카밀라 영애?”
“알아봐 줘서 고맙다고 안 해도 되지?”
당황한 쥬이드가 황급히 카밀라의 주변을 살폈다. 그러길 잠시, 이내 무언가 알아차렸는지 남자의 얼굴에 여유가 돌아왔다.
“혼자 오신 겁니까?”
“그게 뭐.”
대답을 들은 쥬이드의 얼굴에 비웃음이 맺혔다.
“나 참, 여기저기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들 천지네.”
보는 눈이 없다면 카밀라 따윈 문제 될 게 없었다. 성질만 더럽지, 공작가 안에선 거의 내놓은 존재이지 않은가.
“네 처지를 아직도 모르냐? 신경 끄고 꺼져.”
“처지라…….”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나보다는 네 처지를 더 걱정해야 하지 않니?”
“뭐?”
“쥬이드 헤블리, 헤블리 백작의 차남. 나이는 스무 살… 진짜 스무 살? 완전 노안이네. 본처가 아닌 첩의 자식으로 어릴 때부터 망나니 기질이 아주 다분했음.”
“너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여유로웠던 쥬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카밀라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3년 전 3월 15일. 세이블리 자작가의 딸을 죽자고 쫓아다니다 강제 추행으로 신고당함. 이런 찌질한… 어쨌든 그 일을 무마하기 위해 백작가에서 엄청난 돈을 씀. 작년 7월 3일. 자일룬 남작가의 둘째 딸을 친구들과 함께 납치하려다 딱 걸림. 너 인생 참 한심하게 사는구나.”
“…너 뭐야.”
쥬이드의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아버지와 자신의 가문 사람들만 알고 있는 얘기를 그녀가 어찌 알고 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모든 사건은 엄청난 돈을 들여 모두 조용히 무마시켰던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카밀라는 슬쩍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데린을 바라봤다. 남의 집 자식 신상 명세를 어쩜 그렇게 잘 알고 있지?
[저… 저 몹쓸 놈이……! 아가씨, 저놈이 사실……!]
아까보다 흥분이 가라앉은 것 같기는 했지만, 데린의 표정은 여전히 험악했다.
‘데린, 정체가 뭐예요?’
원래 집사는 다 이런가?
“내가 묻잖아!”
와… 재활용도 안 되는 게 성질까지 내네.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쥬이드와 시선을 마주하고도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주제도 모르고.”
“뭐?”
“가문도 한미한 게 어디서 뻗대니?”
“……!”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쥬이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공작가에 빌붙어 사는 고아 주제에!”
와… 유치한 놈. 그러면 나도 유치하게 나가야지.
“이른다.”
“뭘!”
“그 고아를 데려다 길러 주고 계신 아주 고마운 분에게 이른다고.”
표정 봐라. 공작님 무서운 줄은 아는구나.
그동안은 카밀라가 입도 벙긋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안심하고 괴롭혔던 모양이지만.
‘그런데 어쩌나.’
난 그녀가 아닌걸.
공작에게 오늘 일을 이를 거라고 하니, 아니나 다를까 쥬이드가 바로 움찔했다.
“하…….”
하지만 잠시 후 쥬이드의 표정이 다시 여유로워졌다.
“내가 저지른 짓을 잘 알고 있다면… 이것도 잘 알겠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남자가 카밀라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단 한 번도 내가 그 죗값을 치른 적이 없다는 거. 이번이라고 다를까?”
와… 한 사람한테 세 번이나 감탄해 보긴 처음이네. 아무리 멍청해도 어찌 저리 멍청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그만두세요! 그분은 아무 잘못 없잖아요!”
뒤에서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카밀라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 개아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나.”
이놈을 어찌 처리할지 고민하기도 바쁜데 무얼.
‘뭐, 보는 눈도 없고.’
더 떨어질 평판도 없는 것도 인정.
그래서 카밀라는 던졌다. 무엇을? 팔찌를.
“…어? 어어… 아!”
“오.”
팔목에 딱 맞던 팔찌가 쭉쭉 늘어나더니 쇠사슬처럼 변해 쥬이드의 몸을 꽁꽁 묶었다.
사실 라비의 선물이라 던지고 나서도 긴가민가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결과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이, 이게 뭐야! 당장 풀어! 이거 당장 풀라고! 야! 으아아아!”
아휴, 시끄러워.
“아… 아아아! 뭐, 뭐 하는 거야! 으아아!”
그녀가 팔을 들어 올리자 쥬이드의 몸이 위로 쑥 올라갔다. 이내 근처 나무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남자는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푸, 풀어 줘! 풀어 달라고!”
“자꾸 시끄럽게 굴면 진짜 푼다.”
“풀라고!”
“정말? 풀어 줘? 거기서 풀리면…….”
“……!”
뒷말을 삼켰지만 바로 알아들은 쥬이드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꼴에 죽기는 싫나 보네. 그건 그렇고…….”
저거 진짜 어떻게 푸는 거지?
사용법과 활용법─팔찌에 묶인 상대를 공중에 띄우기 등─은 들었지만, 정작 푸는 방법은 듣지 못했다.
‘이 오라비야. 사용법을 제대로 알려 줬어야지.’
하긴 이렇게 바로 사용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마는.
속으론 당황했지만 쥬이드를 바라보며 카밀라는 언제든 풀어 버릴 수 있다는 듯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쥬이드? 너 거기서 뭐 해?”
“하도 안 와서 와 봤더니…….”
“너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냐?”
그때 또 다른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명의 남자였다. 그들의 등장에 나무에 매달려 있는 쥬이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야! 저 여자 잡아! 당장!”
눈치는 빠른지, 남자들은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하고 카밀라를 에워쌌다.
“이런 씨…….”
설마 동료가 주변에 있을 줄 몰랐던 카밀라는 팔찌를 너무 일찍 쓴 걸 후회했다. 팔찌를 풀어내는 방법을 라비에게 미리 묻지 않은 자신의 어리석음도 탓했다.
‘오늘 돌아가면 라비 놈한테 사용법 제대로 알려달라고 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이 상황을 무사히 넘겨야 한다.
카밀라는 남자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이 상황을 어찌 해결할지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망친다고 저들에게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까? 수업이 이미 모두 끝난 시간이라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헉!”
“으!”
“……?”
생각에 잠긴 채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던 카밀라는 순간 의아해졌다. 토끼몰이를 하듯 느긋하게 자신을 향해 다가서던 세 남자가 동시에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표정도 잔뜩 굳어진 채다. 저놈들 왜 저래?
‘뭐지?’
의아해하면서도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최대한 그들과 거리를 벌리고 싶었다. 그런데.
투욱.
“……?!”
순간 뒤에 있는 무언가와 부딪쳤다.
나무인가 싶어 급히 고개를 돌린 카밀라의 눈이 빠르게 커졌다. 너무도 뜻밖의 존재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루드빌이었다.
“여기서 뭐 해?”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지나가는 길.”
대체 어디를 가던 길이어야 이곳을 지나갈 수 있는데?
카밀라는 잠시 황당한 눈빛으로 루드빌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등장이 지금처럼 반가울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덥석!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그러자 이를 힐끗 본 루드빌이 침착한 목소리로 묻는다.
“쟤들이야?”
“네?”
“네가 운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