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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보는 공녀님 (21)화 (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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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보자 새삼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정원을 산책하자는 자신의 청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시하고 떠났던 그녀의 모습…….

오늘도 그랬다.

아카데미에 왔지만 지금 이 시간까지 카밀라의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가 연무장 근처를 지나가는 일이 없었더라면 오늘 카밀라와 마주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예전에는 그의 주변에 늘 그녀가 먼저 와 있었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네.’

페트로는 피식 웃었다.

“그만들 가지.”

카밀라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런데 카밀라 영애,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수업 시간에 저리 태평하게 자는 성격이 아니……!”

툭!

“에이씨, 뭐……!”

대화를 나누며 걷던 페트로의 친구, 로이는 누군가와 강하게 어깨를 부딪치며 비틀거렸다.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치던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에이씨?”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야?”

“아…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길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한 로이는 그대로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미, 미안해! 아르시안.”

아르시안 세프라.

소르펠, 제이빌런과 함께 3대 공작가로 불리는 세프라 가문의 장자.

일반 성인 남자보다 훨씬 마른 체형이라 겉으로 보기엔 무척 여리여리했다.

하지만.

“사과하지 마.”

“아, 아르시안.”

“나도 사과 안 할 거거든.”

아르시안의 비틀린 웃음을 본 로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잔혹함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대마법사를 배출한 마법 가문, 세프라의 장자답게 아르시안이 가진 마력 또한 엄청났다.

거기에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운동 신경까지 뛰어났으나…….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아르시안 세프라에게 부족한 딱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인성이었다.

작년에 아주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아르시안에게 뭣도 모르고 시비를 걸었던 전학생 하나가 정말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그에게 두들겨 맞았다.

방대한 마력을 이용해 치료 마법을 펼쳐 그를 원상 복구시킨 아르시안은 또다시 그를 패기 시작했다.

치료와 구타.

그 과정이 수도 없이 반복됐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도 당하는 이도 모두 정신을 놓아야 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선생들조차 아르시안이 내뿜는 독기에 선뜻 나서서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 정말 미안해!”

그러니 아르시안과 부딪힌 로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자자, 그만들 해. 이렇게 싸울 일이 아니잖아.”

순간 그런 두 사람 사이로 페트로가 끼어들었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야. 아르시안, 사과도 받았으니 그만하는 게 어때?”

페트로가 언제나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중재에 나섰다.

“광대냐.”

하지만 아르시안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빛날 뿐이었다.

“광대?”

“궁금하네.”

“…….”

“처맞을 때도 그리 웃고 있을지.”

“…그건 나도 좀 궁금하긴 하네.”

페트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도 여기서 그만하자.”

“싫다면?”

“아르시안.”

후욱!

터억!

“…….”

“…….”

순식간에 주먹이 날아들고 그런 주먹을 빠르게 막아서는 페트로.

두 사람은 주먹을 맞댄 채 서로를 잠시 말없이 응시했다.

“함부로 부르지 마. 내 이름.”

나직하게 들려오는 아르시안의 목소리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듣기 싫으니까.”

목소리만으로도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거기! 뭐 하는 거야!”

소란이 커지자 멀리서 교수들이 달려왔다.

“아깝네.”

툭.

아르시안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평소 이런 일은 본 척도 않던 교수들이 공작가의 아들인 페트로를 건드리자 달려오는 게 우습기만 했다.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서는 아르시안을 페트로는 가만히 바라봤다.

“빠르네.”

그는 그와 마주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아직도 손이 얼얼하다. 방금 겪은 한 번의 부딪힘으로 그와 자신의 격차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평생 검을 손에 쥐고 몸을 써온 자신보다 빠른 몸놀림. 게다가 그에게 더 큰 힘이 있지 않은가.

마력.

방금 자신을 압박한 그에게서 마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본인이 가진 육체적인 힘만으로 자신을 압박했다는 거다.

저벅.

“…….”

한편 연무장을 지나치는 아르시안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의 눈이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있는 카밀라에게 머물렀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카밀라가 무언가를 보곤 흠칫하며 급히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흐음.”

아르시안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설마 보이는 건가?”

* * *

“이 정도면 아카데미가 아니라 귀신 천국이지.”

검술 수업을 마치고 일반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로 들어선 카밀라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교실 뒤쪽 빈자리에 학생 귀신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주인도 없는 책상이 왜 교실에 있는 건데?’

남아도는 책상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치우지도 않는 건 역시나 귀신 때문이겠지?

저렇게 귀신이 붙은 장소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기피하고 외면하기 마련이었다.

‘에휴.’

다만 교실 안에 귀신이 저 학생 한 명뿐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쪽은 뭔 수업까지 하고 있는 건데?’

한참 열을 올려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교수 옆에서 똑같이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귀신도 있었다. 두 개의 사운드에 머리가 어질했다.

‘학구열도 대단들 하시지.’

죽어서까지 아카데미에 있고 싶니? 공부가 그렇게 좋아?

카밀라는 귀신들과 최대한 눈을 안 맞추기 위해 책상에 엎드렸다. 아무래도 교실에서도 그냥 잠이나 자야 할 것 같았다.

“카밀라 영애.”

하지만 검술 선생과 달리 지금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는 카밀라의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못했다.

아카데미에는 두 분류의 교수가 있었다. 카밀라를 철저히 외면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교수들이 그 첫 번째 분류. 그리고.

“아무래도 영애는 제 수업이 재미없나 보군요.”

벨렛 교수처럼 어떻게든 카밀라를 깎아내리려는 교수들은 두 번째 분류였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것으로도 모자라 책상에 엎드리기까지 한 건 분명 그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지금 교실엔 카밀라 못지않게 딴짓을 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심지어 대놓고 자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다 내버려 둔 채 카밀라만 콕 집어 지적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저열한 쾌감.

정작 소르펠 공작 앞에서는 고개도 들지 못하는 자들이 그녀를 깔아뭉개며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었다.

“제 수업이 들을 가치가 없다고 시위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아니면 이 정도 문제는 수업 따위 듣지 않아도 풀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결론 한번 아주 쌈박하게도 내리시네. 카밀라는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럼 나와서 이 문제들 좀 풀어 보실까요?”

벨렛 교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교실 안 다른 학생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칠판 앞에 서서 쩔쩔맬 카밀라를 구경할 생각에 딴짓을 하던 이들까지 모두 고개를 들고 상황을 집중하고 있었다.

‘유치하긴.’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칠판에 적혀 있는 문제들을 대충 훑은 그녀는 성큼 앞으로 향했다.

‘제가 이래 봬도 S대 나온 여자거든요.’

그것도 수능 만점으로 수석 입학해서 뉴스에도 나왔다.

연예인이 수능 만점으로 S대에 입학한 건 정말 큰 뉴스였다. 연예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떠들썩했었다.

‘듣기 싫었으니까.’

고아라서, 부모가 없어서 저 아인 공부도 못한다는 소리, 정말로 듣기 싫었으니까.

악착같이 공부했다. 연예계 생활을 하며 잠잘 시간도 부족했지만 절대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한 시간도 못 자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상관없었다. 대본과 공부거리를 늘 항상 같이 들고 다녔다. 다행히 타고난 머리도 나쁘지 않았고.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지.’

대본도 몇 번 보면 통째로 다 외웠으니까.

어쨌든 수능도 봤고 만점이라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점수로 세간의 이목도 집중시켰던 게 자신이다.

대한민국 수능생의 수학 능력을 우습게 보면 쓰나. 이 정도 문제쯤이야.

무엇보다 카밀라의 학창 시절은 지난 20여 년간 정말 지겹도록 지켜보지 않았던가. 이제 저 책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달달 외울 지경이었다.

‘그쪽이 내는 중간시험 문제만 10번은 넘게 풀었거든.’

칠판 앞에 선 카밀라는 스슥 별 어려움 없이 문제를 풀어나갔다.

기본적인 수학 공식 하나만 집어넣어도 풀 수 있는 문제를 적어 놓곤 의기양양하던 벨렛 교수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제 엎드려 자도 될까요?”

순식간에 칠판에 적힌 세 개의 문제에 답을 적어 넣은 카밀라는 벨렛 교수를 향해 싱긋 웃었다.

“…….”

벨렛 교수의 표정이 멍해졌다.

저 문제를 저리 단숨에 푼다고?

그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리로 돌아온 카밀라가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을 청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 * *

“하아…….”

피곤하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마차에 오른 카밀라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고작 한나절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각기 다른 드라마를 연속으로 3편은 찍고 온 기분이다.

수학 수업도 그랬지만 다른 수업 역시 어려울 게 전혀 없었다. 정말 수업 내용이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따돌림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게 구는 이들이 없어 아주 쾌적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역시.

“귀신들이지.”

뭔 놈의 귀신이 그리도 많은지 아카데미 곳곳에 귀신이 있었다.

자기들만의 아카데미 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귀신들을 보며 카밀라는 연신 한숨을 토해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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