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점괘보는 공녀님 (19)화 (19/215)

1658420978693.jpg 

“오랜만이구나, 루드빌. 승전 소식은 아주 잘 들었다.”

제이빌런 공작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리며 연신 루드빌의 어깨를 두드렸다.

루드빌은 말없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넨 안 먹어도 배부르겠어. 아들이 이리 잘 커 주니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들어가기나 해.”

타박을 하면서도 아들을 칭찬하는 소리가 듣기에 나쁘지는 않은 듯 소르펠 공작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러지.”

제이빌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시선이 힐끔 카밀라와 라비에게 향했다.

“…….”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라비와 카밀라를 보면서도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결같네.’

카밀라는 그런 그의 모습을 덤덤한 표정으로 눈에 담았다.

제이빌런 공작은 그 어떤 귀족들보다 핏줄과 가문을 중요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우린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거겠지.’

소르펠 공작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라비와 카밀라는 그에게 있어 그저 이곳에 빌붙어 사는 존재일 뿐이었다.

‘지금 제정신인가!’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어. 라비와 카밀라는 내 자식이야. 나와 소르펠의 영광을 함께할 걸세.’

‘자네는 분명 후회할 거야!’

‘예언자네, 완전.’

그의 말이 다 맞긴 했다. 결국 라비와 카밀라는 소르펠 공작의 친아들인 루드빌을 죽이려 들지 않았는가.

어쨌든 당시의 소르펠 공작은 제이빌런 공작의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라비는 마법사로서 인정을 받는 존재라 눈인사 정도는 받아 주는 것 같았지만 카밀라는 아니었다.

그녀를 보는 제이빌런 공작의 눈에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보다 카밀라가 자신의 아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누굴 넘본단 말인가!

‘네, 네. 저도 이제 사양이거든요.’

그쪽 아들 이제 줘도 안 가지니 걱정하지 마세요.

카밀라는 제이빌런 공작의 못마땅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전과 달리 표정을 굳히지 않았다. 오히려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

그 모습에 제이빌런 공작의 미간이 잠시 꿈틀했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자신이 신경을 쓸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는 바로 소르펠 공작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영애.”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소유한 미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페트로 제이빌런.

‘저러니 끔뻑 넘어갔지.’

너무도 친절한 미소, 호감 어린 눈빛. 카밀라가 태어나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호의.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생각도 못 했겠지.’

선뜻 먼저 내밀어 준 손을 덥석 잡아 버린 거다.

‘잘생기기도 했고.’

정말 백마 탄 왕자님처럼 보였을 거다. 그 왕자라는 새끼가 모든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구는 놈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겠지.

‘아우.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

연예계에도 저런 놈, 진짜 많았다.

본인의 친절함에 여자들이 어떤 오해를 하는지 아주 잘 알면서도 그걸 오히려 즐기는 놈.

혹여 여자가 먼저 고백이라도 하면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고 바로 발을 뺀다.

그러면서 자신을 좋아해 줘서 고맙다며, 기획사에서 연애 금지만 강요하지 않았다면 당장 사귀었을 거라고 여지까지 남긴다.

‘에라이!’

눈앞에 있는 이놈이 딱 그런 타입이었다.

먹는 감이든 못 먹는 감이든 무조건 찔러보고 갖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놈.

“파티장에서 뵙고 처음인가요?”

“그렇네요.”

“그땐 죄송했습니다. 영애를 도와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마침 그때 그 자리에 없어서…….”

너 사라지는 거 봤거든?

싸움이 이는 순간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듯 슬쩍 파티장을 벗어나는 걸 똑똑히 봤건만,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러셨군요.”

화도 나지 않았다. 저 인간이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화라는 것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에게나 내는 거다.

카밀라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페트로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에이씨.’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저러니 여자들이 다들 넘어가지.

“소르펠 저택의 정원이 아주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그 아름다움을 느껴 보고 싶군요.”

“네, 무척 아름답지요.”

카밀라가 다시 한번 해사하게 웃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카밀라였다면 얼씨구나 좋다고 그를 정원으로 직접 안내했을 것이다.

“루브.”

하지만 난 그 녀석이 아니라서. 카밀라는 한쪽에 서 있던 집사 루브를 불렀다.

“네, 아가씨.”

“여기 페트로 공자께서 정원을 구경하고 싶다시네. 안내해 드려.”

“알겠습니다.”

페트로의 표정이 멍해졌다.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루브를 보며 눈이 커졌다.

“그럼 구경 잘하고 오세요.”

카밀라는 그런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곤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나갔다.

“…….”

날 버리고 그냥 간다고?

페트로는 멍한 표정이 되어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큭.”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라비가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루드빌 역시 말없이 페트로를 잠시 바라보다 라비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럼 가실까요? 정원은 이쪽입니다.”

“…….”

이어 들려오는 집사 루브의 목소리에 페트로는 다시 어벙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하.”

잠시 후 그런 그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이번에도 별 성과가 없었나 보군.”

제이빌런 공작이 놀리듯이 말했지만 소르펠 공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 녀석이 신수 찾는 걸로 그를 놀린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거짓으로도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는커녕 아주 대놓고 고소해하고 있었다.

“왜 왔냐.”

“말했잖아. 사업차 의논할 게 있다고.”

“그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사업 얘기나 해.”

“이번에 자네가 소유한 광산에서 나온 이상한 광물 말이야.”

“그건 왜?”

“그거 우리 쥬타 상회에서 한번 조사해 보려고.”

“자네가 왜?”

“아직 어떤 용도로 써야 할지 찾지 못했다며.”

“그래서?”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대신 그 광물을 판매하게 될 때 우리 쥬타 상회를 통해서 하…….”

“싫어.”

“뭐? 왜 싫어? 광물 유통은 자네보다 우리가 더 유통망이 크잖아.”

“그래도 너한테는 안 맡겨.”

“쪼잔한 놈. 그새 또 삐졌구만.”

“삐지긴 누가 삐져.”

“삐진 거 맞잖아.”

“시끄러!”

오랜 친구라는 걸 보여 주듯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말투가 무척 편안했다.

평소의 근엄하고 날카로운 모습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동네 어린 친구들이 토닥거리는 모습이었다.

똑똑.

그때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듣기 좋은 미성이 방 안에 울렸다.

“다과를 준비해 왔어요.”

카밀라는 직접 차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들고 와 탁자에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차구나.”

“요즘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신다면서요? 수면에 도움이 되는 차예요.”

동서고금, 시대에 상관없이 부모들이 가장 뿌듯함을 느낄 때가 바로 자식이 자신의 몸을 걱정해 줄 때다.

‘그것도 다른 이들 앞에서 말이야.’

카밀라가 손수 찻잔에 찻물을 따르며 빙긋이 웃었다.

“주무시기 전에 한 잔 더 가져다드릴게요.”

“그래.”

소르펠 공작 역시 제 딸아이의 말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잠을 못 자는 건 또 어떻게 안 것인지 아주 기특해하는 눈빛이다.

‘어떻게 알긴.’

집사 유령 데린이 알려 줬지.

최근 공작님께서 밤에 잘 주무시지 못한다며 데린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이 차를 알려 줬다.

“너도 앉거라. 같이 마시자꾸나.”

“그래도 될까요? 방해가 되는 건…….”

“방해는 무슨.”

제이빌런 공작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소르펠 공작은 카밀라에게 자리를 권했다.

카밀라는 양해를 구하듯 제이빌런 공작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제이빌런 공작은 조금은 의외라는 듯 카밀라와 소르펠 공작을 번갈아 바라봤다.

‘제법 사이가 좋아진 것 같은데?’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데면데면, 아니, 카밀라의 존재 자체를 골치 아파하던 소르펠 공작이었지 않은가.

그러게 진작 내 말을 들었어야지! 하고 핀잔을 주려다 꾹꾹 참았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제법 좋아 보였다. 내가 안 오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드셔 보세요.”

카밀라가 그에게도 차를 권했다.

“맛이 나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제이빌런 공작 역시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래.”

제이빌런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살짝 당혹감이 맴돌았다.

예상과 달리 차 맛이 무척 좋았다. 차에 대해 제법 민감한 입맛을 가진 자신의 입에 딱 맞을 정도였다.

‘당연하지.’

내가 끓인 게 아니거든.

집사 유령 데린의 도움을 받았다.

집사라는 직책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린이 가진 차에 대한 지식은 아주 방대했다. 차를 우려내는 솜씨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카밀라는 차가 입에 맞는 듯 연신 홀짝이는 제이빌런 공작을 가만히 응시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어깨에 앉아 있는 한 존재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붉은 독수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염처럼 붉은빛을 띠는 새 한 마리가 제이빌런 공작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저게 신수?’

제이빌런 가문을 상징하는 신수가 붉은 독수리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카밀라는 현재 눈앞에 있는 저 새가 사람들이 말하는 신수임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지금 나만 보이는 거야?

카밀라는 슬쩍 소르펠 공작을 바라봤다.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이 나름 편안해 보였다. 신수 따윈 신경도 안 쓰는 모습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이빌런 공작의 곁을 맴돌고 있는 신수에게 시선을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저렇게 화려한 색을 띠고 있는 커다란 새가 어깨에 앉아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