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하겠네.’
이 어색한 공기 어쩔 거야?
이곳에서 깨어난 후 처음으로 모두가 함께 모인 식사 자리였다. 그런데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이 짧은 시간이 이렇게 숨 막힐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에휴.’
이제 저 인간 눈치도 봐야 하는 건가?
소르펠 공작의 명이 없는 한 자신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게 바로 저 루드빌이다.
누가 뭐라 해도 소르펠 공작 다음으로 공작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니까.
‘아우, 갑갑해.’
루드빌 저놈이야 원래 말수가 없다지만, 오늘따라 라비 녀석까지 너무 조용했다.
어제 파티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라비는 루드빌이 공작가로 돌아온 게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은근슬쩍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대화는 고사하고 루드빌이 있는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저 여우 같은 놈이 웬일이람?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진짜…….
‘밥 먹기 싫다.’
체하면 다 니들 탓이야!
그때 식탁 위로 음식이 차례차례 놓이기 시작했다. 카밀라의 앞에도 잘 구워진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가 놓였다.
스윽.
“……?”
그런데 접시가 막 놓이려는 순간, 그 접시를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급히 고개를 든 카밀라는 자신의 접시를 가져가 본인의 자리에 놓는 루드빌을 볼 수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니?’
지금 내 밥 뺏어 간 거야?
살다 살다 밥그릇을 뺏겨 보기는 처음인 카밀라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온갖 구박을 받던 어린 시절에도 밥그릇을 뺏겨 본 적은 없거늘!
타악.
기가 막혀 입만 뻐금거리는 카밀라의 앞으로 다시 접시가 놓여졌다. 루드빌의 몫으로 나왔던 접시였다.
‘내 고기가 더 커 보였던 거니?’
접시를 바꾸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는 루드빌의 모습에 카밀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르펠 공작과 라비는 루드빌의 그런 행동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신종 괴롭힘인가? 싶어서 고민하는 것도 잠시.
“어제 발표회는 잘한 거냐.”
식탁에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구나. 내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소르펠 공작은 라비의 발표회를 잊은 것이 진심으로 미안한 듯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라비의 뾰족했던 표정이 슬쩍 풀렸다.
“아닙니다. 덕분에 발표회는 잘 끝났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소르펠 공작과 라비의 대화를 지켜보던 카밀라는 표나지 않게 고개를 갸웃했다.
‘웬일이래?’
지금 이 자리, 발표회와 파티가 있던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를 수도 없이 지켜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소르펠 공작이 라비의 지나간 발표회를 이렇게 따로 언급하며 사과를 한 적이 있었던가?
늘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말 그의 발표회 따윈 조금도 신경 쓰거나 기억한 적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넘어갔었는데?
‘뭐지?’
왜 바뀐 거지?
“카밀라.”
“네, 아버지.”
소르펠 공작은 라비에 이어 자신에게도 시선을 줬다.
“이제 곧 개학이구나.”
“아.”
맞다. 이 녀석, 아직 학생이었지. 지금은 봄방학 시즌이라 잠시 쉬고 있는 것이었다.
“학과는 정말 바꿀 생각이 없는 게냐.”
그래, 학과.
‘이런, 씨…….’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이 녀석은 학과를 선택해도 하필 그딴 곳을 정해서!
‘실력도 쥐뿔 없는 게!’
하지만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카밀라가 왜 그 과를 선택한 건지 그 이유가 짐작이 갔기에 선뜻 바꾸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게요.”
“정말 괜찮겠니?”
“네.”
“그래.”
소르펠 공작은 더 토를 달거나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대신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 소르펠 공작은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카밀라를 바라봤다.
“초콜릿을 선물 받았단다.”
“네?”
갑자기 무슨 초콜릿? 카밀라는 의아한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그 모습에 잠시 헛기침을 내뱉은 소르펠 공작은 바로 말을 이었다.
“꽃도 좀 시든 것 같고…….”
아, 맞다. 오늘 집무실과 침실에 있는 꽃을 갈아 드리려 했는데…….
처음에는 매일 꽃을 바꿔 드리다가 아직 싱싱한 꽃을 매번 버리는 게 아까워 요즘은 2, 3일에 한 번씩 바꿔 주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꽃을 바꾸는 날이었지만 정원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는 바람에 꽃의 주인이 바뀌고 말았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루드빌을 잠시 바라본 카밀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정신이 없어서 다시 꽃을 가지러 가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죄송해요. 안 그래도 내일 꽃을 바꾸려고 했어요.”
“그래, 그래. 초콜릿이 차와 아주 잘 어울리겠더구나.”
“아, 네.”
꽃을 바꾸러 가겠다는데 왜 자꾸 초콜릿 얘기를? 평소 꽃을 놓아 드리고 늘 함께 차를 마시기는 했…….
‘음?’
차?
카밀라의 시선이 다시 소르펠 공작에게 향했다.
‘뭐지?’
뭔가 중요한 포인트를 놓친 것 같은데?
하지만 소르펠 공작은 이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카밀라의 고개가 다시 갸웃 옆으로 기울었다.
“…….”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라비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 *
식사가 끝나자마자 루드빌은 곧장 소르펠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보고드릴 것이 많았다.
그러다 그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서류 한 장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유명 디저트 가게 리스트>
30개 정도 적힌 가게 명단 중 가장 위에 올려져 있는 초콜릿 가게 이름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아마도 구매를 한 것은 체크해 두는 듯했다.
스슥.
슬쩍 펜을 든 루드빌은 리스트에 있는 가게 몇 곳에 줄을 그었다.
“뭐 하는 거냐.”
“그 아이, 사과 안 좋아합니다.”
그가 제외한 가게는 사과를 주재료로 하는 디저트 가게였다.
“그걸 네가 어찌 알아?”
“…….”
조금은 놀란 눈빛을 내보이는 소르펠 공작의 물음에 루드빌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바로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카밀라가 먹는 음식에 장난을 친 이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들은 거냐.”
“그냥 들었습니다.”
소르펠 공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밀라가 그날 먹은 음식도 그렇고 그 아이가 도둑맞았었다는 반지까지……. 그동안 카밀라가 이곳에서 겪은 일들이 새삼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의 처리는 어찌하셨습니까?”
“우리 영지는 물론이고 다른 곳에도 쉽게 발을 붙이기 힘들 거다.”
두 번 다시 귀족가에서 일하지 못하게 조치해 두었다.
“…….”
루드빌은 고작 영지에서 쫓아낸 것으로 그들의 처분을 끝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역시 그게 소르펠 공작이 내릴 수 있는 처벌 중에 최선이었다는 걸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공작가에서 일한 이들이 자신이 모시는 이의 물건을 훔치고 음식에 장난을 쳐 윗사람을 해코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공작가의 명성에 누가 될 것이다.
“그보다 이번에도 실패인 거냐.”
“네.”
루드빌은 짧은 대답과 함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꺼내 놓은 건 펜던트였다. 가운데 하얀 보석이 박혀 있는.
“하아.”
펜던트를 바라보는 소르펠 공작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실패구나.”
“죄송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
소르펠 공작은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신수를 찾지 못했으니…….”
신수.
이곳 페이블러 제국에는 세 개의 공작가가 존재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3대 공작가라는 단어보다 제국의 3대 수호신이라는 호칭을 더 자주 썼다.
3대 수호신.
공작가는 모두 신수의 가호가 내려진 가문이었다. 이는 소르펠 공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마찬가지였다.
몇 대 전까지만 하여도 소르펠 공작가 역시 신수의 보호 아래 있었다. 가주의 옆에는 늘 신수가 함께 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황궁 파티에 참석했던 소르펠 가주가 독살당했다. 손을 쓸 틈도 없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그 자리에서 바로 즉사했다.
문제는 신수라는 존재가 가주와 생을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가주가 죽게 되면 신수 또한 사라지게 된다. 그에 가주는 생을 마감하기 전에 새로운 신수가 태어날 장소를 신수에게서 직접 듣게 되어 있었다.
신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가주뿐이었다. 역대 소르펠 공작들은 이를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마지막 소임이라 여겼다.
하지만 독살로 죽은 소르펠 공작은 새로운 신수가 태어날 장소를 후손에게 전하지 못했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죽음이었으니까.
결국 3대 수호 가문 중 하나였던 소르펠 공작가는 신수를 부리지 못하는 가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현 소르펠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고.
다행히 소르펠 공작가가 가진 부가 크고 오랫동안 제국을 수호해 온 가문이라 불린 만큼 그 명성과 무력이 엄청났다.
그에 신수가 없어졌다고 하여 소르펠 공작가를 무시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신수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다른 두 가문과 계속 등등한 위치에서 비견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소르펠 가문이 지금껏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신수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얀 보석이 박혀 있는 펜던트.
이 보석이 바로 신수를 깨우는 열쇠였다. 또한 신수가 근처에 있을 때 서로를 끌어당기며 반응했다.
그에 오랫동안 이 펜던트를 가지고 신수를 찾아다녔다.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펜던트가 반응하기를 기다렸다.
현 소르펠 공작도 그렇고 그의 아버지도 그랬다. 그리고 루드빌 역시 새로운 곳에 가게 될 때마다 펜던트를 챙겼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을 투자한 것이 무색하게도 펜던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휴우.”
소르펠 공작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다시 새어 나왔다.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하는 걸까? 모래사막에서 바늘을 찾아도 수십 개는 찾았을 세월이다.
‘망할 놈!’
하지만 다른 두 공작가, 특히 어떤 한 놈을 생각하면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대놓고 말은 하진 않지만 자신의 앞에서 괜히 신수를 불러내 흐뭇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리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딴 신수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쯧!”
그러면서도 펜던트를 만지는 소르펠 공작의 손길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신수를 찾거나 깨우기 위해선 이 펜던트가 꼭 있어야 했다.
“에휴.”
결국 그의 입에서 다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