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왜?”
“공작님께서 같이 차를 마시지 않겠냐고 사람을 보내오셨어요.”
“차?”
“네.”
“알았어.”
최근 소르펠 공작과 자주 차를 마셨다. 꽃을 놓아주려 집무실에 들를 때마다 그와 함께 다과를 즐겼다.
나쁘지 않은 현상이었기에 카밀라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꺼이 반겼다. 어떻게든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 호감을 사야 하니까.
“어서 오렴.”
“…….”
그런데 저 녀석은 왜 여기에 있는 거래?
잠시 후 공작을 찾아간 카밀라는 자신보다 먼저 와 공작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왔어?”
라비였다.
“뭐 해? 이쪽으로 와 앉아.”
가증스러운 놈.
단둘이 있을 때와 달리 미소까지 지으며 자리를 권하는 라비의 모습에 카밀라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기분 좋아 보이네?’
차를 마시고 있는 라비의 표정이 평소보다 밝아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뭔가 수상했다. 소르펠 공작과 따로 시간을 만들면 만들었지 굳이 자신과 함께 차를 마실 놈은 아니지 않은가.
“아버지.”
“음?”
역시나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라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애써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 제가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어요.”
‘아.’
그날이구나.
카밀라는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했다. 이 일은 자신이 이곳 세상을 지켜볼 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일어났던 일이었다.
마탑은 1년에 한 번씩 성과가 좋았던 이들을 뽑아 수많은 마법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발표를 하게 한다. 마법사들에겐 아주 명예롭고 중요한 자리였다.
‘저 여우 같은 놈이 공작 앞에서도 저리 표정 관리를 못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지.’
뿌듯해하는 게 아주 눈에 보였다.
그런데 어쩌나. 카밀라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녀는 힐끔 문 쪽을 바라봤다.
벌컥!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문을 급히 열며 들어섰다. 노크하는 것도 잊은 채 들어선 이는 바로 공작의 보좌관인 잭터였다.
“공작님!”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함박웃음을 터트릴 것처럼 환했다.
“무슨 일이지?”
“대승입니다! 대승!”
“뭐?”
“루드빌 님께서 반란군의 본거지를 드디어 찾아내 모두 소탕하셨다는 소식입니다!”
“……!”
“그것도 루드빌 님이 직접 세운 작전으로 말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소르펠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밝게 웃었다.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이던 반란군과의 전쟁이 드디어 그 끝을 보게 된 것이다.
“네! 지금 황실에 먼저 보고가 들어갔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며 루드빌 님께 친서를 직접 보내셨답니다!”
“하… 하하!”
“역시 우리 공자님이시라니까요. 하하!”
소르펠 공작과 잭터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이렇게 되거든.’
속으로 다시 한번 쯧 혀를 찬 카밀라는 고개를 슬쩍 돌려 라비를 바라봤다.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조금 전과 달리 축 가라앉아 있었다. 애써 침착하려고 하지만 미세하게 손끝이 떨리는 게 보였다.
‘새삼 뭘 기대한 거니?’
늘 그래 온 것을.
‘지지리 운도 없는 놈.’
공작의 첫째 아들인 루드빌이 일부러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라비 저놈이 더럽게 운이 없을 뿐.
‘하필 발표회와 축하 파티도 같은 날이라는 게 더 슬프지.’
라비가 나서는 마탑의 발표회와 루드빌의 승전 축하 파티가 하필 또 같은 날에 열린다.
당연히 공작가 내 모든 사람의 이목이 발표회가 아닌 승전 축하 파티에 쏠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음? 아니, 왜? 좀 더 있다 가지 그러니.”
“아닙니다. 할 일이 생각나서요.”
“그래, 그래.”
소르펠 공작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라비를 배웅했다.
“저도 이만.”
카밀라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는 사이에도 소르펠 공작과 잭터는 웃음을 주고받기 바빴다.
타악.
“…….”
집무실 문이 닫히는 순간 라비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이런 걸로는 역시 무리였던 건가?’
몇 달 동안 그딴 연구에 시간을 소비한 게 허무했다. 자신도 그냥 전투 마법이나 배워 전장이나 돌아다녔어야 했던 건가?
한심하다.
“오라비, 생각보다 대단하네.”
기분이 점점 더 다운되어 가던 그 순간, 익숙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발표회도 하고 말이야.”
어느새 라비 곁으로 다가선 카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리는 거야?”
“진심인데?”
“…….”
“그거, 정말 성과가 좋고 노력한 마법사들만 할 수 있는 거잖아.”
“네가 뭘 안다고……!”
투욱.
“고생했어.”
“…….”
자신의 어깨를 툭 가볍게 토닥인 후 지나쳐 가는 카밀라를 라비는 멍하니 바라봤다.
“저거 요즘 진짜 왜 저래?”
* * *
“아가씨! 이것도 너무 잘 어울리세요!”
“어쩜… 이 옷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분은 처음이에요!”
공작가를 찾은 의상실 디자이너와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기 바빴다.
카밀라는 그들의 입에 발린 말을 들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내가 봐도 예쁘긴 하네.’
석양처럼 붉은 드레스가 유독 핏기 없는 카밀라의 하얀 피부와 대조가 되어 아주 묘한 매력을 풍겼다.
“이번 파티에서 카밀라 님이 가장 아름다우실 거예요!”
공작가는 현재 갑작스럽게 잡힌 파티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공작의 첫째 아들인 루드빌이 반란군에게서 대승을 거두고 곧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쉴 틈도 안 주고 바로 파티라니.’
전장에서 돌아온 이를 편히 쉬게 해 줘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카밀라는 루드빌이 돌아오는 날에 맞추어 파티를 준비하는 이들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뭐, 이것도 정치의 일종인 것 같긴 하던데.’
파티가 열리는 날, 영지 안에선 축제도 열릴 예정이었다. 이번에 소르펠 공작가가─특히 루드빌이─ 이룩한 성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인 듯했다.
더불어 전장에 나가 죽은 이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이런 파티와 축제는 필요하다고 들었다.
“보석들도 너무 예뻐요!”
드레스와 함께 준비된 보석들도 하나같이 디자인이 특이하고 아름다웠다.
“그날 제가 정말 아름답게 꾸며 드릴게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도나를 보며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부탁할게.”
확실히 그날은 눈에 좀 띄는 게 좋을 듯했다.
“사고나 치지 마.”
그때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 온 것인지 라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괜히 찾아와서 왜 시비야?”
“전적이 있잖아. 너 저번 파…….”
“인정.”
“뭐?”
“인정한다고. 내가 한때 머리채 좀 잘 잡았지.”
머리채를 잡는 것처럼 두 손을 조물조물거리는 카밀라의 모습에 라비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확실히 이상해졌다.
예전 같으면 자신의 이런 말에 얼굴을 붉히며 짜증 어린 표정을 짓거나 시무룩해지는 그녀였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실실 웃어댔다.
“오라비는 옷 맞췄어?”
“무슨 옷?”
라비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지금 나한테 승전 파티에 입고갈 옷을 준비했냐고 묻는 건가?
내게 그날 무슨 일이 있는지 그새 까먹은 거야?
“발표회에서 입을 옷.”
“…됐어.”
하지만 바로 이어진 카밀라의 말에 라비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미쳤구나.’
황당했다. 카밀라가 자신의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그녀조차 자신의 발표회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순간 마음이 상하려고 한 스스로의 모습이 어이없었다.
저 녀석이 그걸 까먹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비교될 텐데.”
“됐다고. 옷이 뭐가 중요해.”
“그러던가. 난 분명 말했다.”
“너나 파티장에서 망신당할 짓 하……!”
“인정.”
조물조물.
“…….”
피곤하다.
라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자신이 여기에 왜 온 것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카밀라는 그런 라비에게서 신경을 끄고 다른 드레스와 보석들을 살폈다.
* * *
“어이, 라비.”
발표회가 있는 당일.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와 마탑으로 향한 라비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발표회장으로 들어섰다.
“…….”
라비가 안으로 들어서자 한 사람이 빠르게 다가섰다. 실실 웃는 얼굴로 다가서는 이는 이번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발표회에 나서는 쟈일이었다.
늘 자신만 보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 녀석이 갑자기 왜 친한 척 다가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준비는 잘했냐?”
“뭐, 대충.”
“네 녀석이 잘도 대충했겠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비의 물음에 쟈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저쪽에 우리 부모님.”
그가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하더니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건 내 동생.”
누가 봐도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중 여동생으로 보이는 이는 제법 미모가 뛰어나 주변 남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너희 집에선 오늘 누가 와? 다들 오는 거지? 아직 아무도 안 왔나 보네.”
짐짓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란 듯이 히죽 웃는 녀석의 모습에 라비는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설마 아무도 안 오는 건 아니지? 가족이라면 이런 중요한 자리에 당연히 와야 하는 거잖아.”
뻔히 다 알면서, 오늘 소르펠 공작가에 어떤 일이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뭐야? 정말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전혀 몰랐다는 듯 온몸으로 놀라움을 표하는 쟈일의 행동에 라비는 화도 나지 않았다. 유치한 새끼.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왜 상관이 없어? 이런 중요한 자리에 가족조차 초대하지 못한 친구가 너무도 안쓰러워서 그러지.”
“…….”
“하긴.”
쟈일의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진짜 아들이 돌아왔는데 가짜 아들 따위에게 쓸 신경 따윈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