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숨에 멱살을 낚아채는 카밀라의 손길에 젤라드는 다시 흠칫해야 했다.
‘내가 성격이 좀 더러워서 말이야.’
나 싫다는 인간, 나도 싫다. 이유 없는 비난과 조롱을 계속 참아 줄 정도로 착하지도 못하다.
전에, 자신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카밀라가 이 인간에게 뭔가 작은 잘못이라도 했다면 이런 비난, 어느 정도는 참아 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한 카밀라가 주방장 젤라드에게 그런 행동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 저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건 말 그대로 저자 멋대로 저지르고 있는 지랄이라는 거다.
꽈악!
‘내가 연기로 멱살잡이만 수백 번을 해 본 여자야.’
멱살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 몸이 자신의 몸은 아니지만 그 실력이 어디를 간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멱살을 찰지게 잡을 수 있는지는 도가 텄다.
젤라드의 몸이 자연스레 앞으로 숙여졌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곧 정신을 차린 젤라드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주방 안에서는 자신이 왕이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멱살잡이라니!
“잘 들어.”
하지만 카밀라는 분노하는 젤라드의 멱살을 더욱 바짝 잡아당겼다.
“이 높이야.”
“…네?”
“내가 내기에서 이겼을 땐 딱 이 높이라고.”
카밀라는 자신의 얼굴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한 번만 더 그딴 눈깔로 날 내려다보면…….”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젤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예 무릎을 박살 내서 평생 기어 다니게 만들어 줄 거야.”
“고, 공작님께서 가만 계시지 않……!”
“응, 알아. 혼 좀 나겠지. 며칠간 방 밖으로 못 나올지도.”
“그러니까 이것 좀……!”
“그게 뭐?”
“네?”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닌데, 그게 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공작님께서……!”
“벌 좀 받지 뭐.”
카밀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자신이 소르펠 공작의 눈치를 보고 있긴 하지만 그걸로 다른 이들에게까지 협박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너 하나 박살 낸다고 죽이시기야 하겠어?”
“……!”
“내가 못 할 것 같아?”
하… 하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입만 달싹이는 젤라드를 보며 카밀라는 싱긋 웃어 준 뒤 그의 멱살을 툭 놓았다.
하지만 젤라드는 온몸이 굳어진 것처럼 굽혀져 있는 자세를 바로 펴지 못했다. 지금 자세를 바로 했다간 정말 무릎이 박살 날 것 같았다.
“그럼 주방, 잘 쓸게.”
그런 젤라드를 뒤로한 채 카밀라는 자리를 다시 잡았다. 그러곤 아주 작게 혼잣말을 하듯 누군가를 불렀다.
“페롤.”
[그래.]
그녀의 부름에 카밀라 곁으로 주방장 유령 페롤이 가까이 다가섰다.
“준비되셨죠?”
[물론이지!]
“시작하죠.”
카밀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페롤의 두 손이 그녀의 두 손과 스르륵 겹쳤다.
* * *
“루드빌 님께서 이번 작전에 아주 큰 공을 세우셨답니다. 활약상이 대단했다고 하네요. 여기 관련 서류들입니다.”
보좌관의 설명을 들으며 소르펠 공작은 찬찬히 서류들을 읽어 내려갔다.
“잘하고 있군.”
“네, 역시 루드빌 님답습니다.”
소르펠 공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
그런 그의 시선이 이내 습관처럼 한곳으로 향했다. 안개꽃이 가득 꽂혀 있는 화병. 카밀라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자주 보던 풍경이었다. 유독 안개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집무실이나 방에 저렇게 안개꽃을 손수 꽂아 가져다 놓곤 했다.
‘딱히 꽃을 좋아하진 않지만.’
집무실에 놓인 안개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얼마 전에 산책을 나갔던 아침, 안개꽃을 품에 가득 안은 채 자신을 보고 해맑게 웃던 카밀라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앞에서 그리 웃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게다가 벌써 일주일이 넘었군.’
하루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카밀라는 일주일이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의 집무실과 침실에 안개꽃을 장식해 주고 있었다.
“나쁘지 않아.”
“네?”
“카밀라는 요즘도 식사를 제대로 안 하나?”
“아…….”
뜻밖의 질문에 보좌관 잭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카밀라가 저지른 실수나 문제에 대해 물어본 적은 있어도 지금처럼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건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해 주라고 명을 내릴지언정 그 결과에 대해선 다시 물어본 적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로 잭터는 급히 대답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30대 초반의 남자, 집사 루브였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다.
루브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쟁반에 올려져 있는 음식들을 탁자에 빠르게 내려놓았다.
“그게 다 뭐지?”
“시장하실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집사의 말에 시계를 바라본 소르펠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집무실에 오래 머물 때면 루브는 종종 간단히 음식을 챙겨 들고 왔다.
“잘 먹겠습니다.”
소르펠 공작보다 보좌관 잭터가 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저녁을 대충 먹었더니 안 그래도 조금 전부터 배에서 자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공작님도 드셔 보시죠.”
“음?”
소르펠 공작은 의아한 눈빛으로 집사를 바라봤다.
평소엔 음식을 내려놓으면 바로 나가던 그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옆에 서서 음식을 먹길 종용하고 있었다.
집사 루브를 잠시 말없이 응시하던 소르펠 공작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이 놓인 탁자로 향했다.
“수프군.”
수프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갓 구운 빵이 놓여 있었다.
“…….”
그런데 수프를 바라보던 소르펠 공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그는 답지 않게 서둘러 스푼을 들어 수프를 한입 크게 떠 입으로 가져갔다. 음식을 삼킨 그의 표정이 더욱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 수프는…….”
예전에 먹던 그 수프다. 자신이 무척 좋아했던!
공작가에 오랫동안 일하던 주방장이 사고로 죽은 후 두 번 다시 먹지 못했던 음식이었다.
죽은 주방장의 제자이자 현 주방장인 젤라드가 어떻게든 그 맛을 재현해 보려고 했지만 늘 실패했다.
그런데 지금 그 수프가 자신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예전 그 맛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말이다.
“와… 이거 정말 맛있네요. 수프에서 어떻게 이런 깊은 맛이 나죠?”
황금빛이 도는 맑은 수프는 건더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입으로 넣는 순간 그 맛의 풍부함은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드디어 그가 맛을 재현해 냈나 보군.”
소르펠 공작은 현 주방장이 드디어 스승의 맛을 재현해 낸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집사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젤라드 주방장이 만든 게 아닙니다.”
“주방장이 만든 게 아니라고?”
“네.”
“그럼?”
집사 루브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밀라 아가씨입니다.”
“…누구?”
“크… 흐흡!”
소르펠 공작의 눈은 더욱 커졌고 수프를 들이켜던 잭터는 카밀라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마른기침을 연신 쏟아 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수프를 살폈다.
“이걸 카밀라 아가씨가 만드셨다고요?!”
이미 예상한 반응인 듯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이는 집사의 모습에 소르펠 공작과 잭터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 * *
“이… 이건……!”
주방장 젤라드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카밀라가 완성한 수프를 보는 순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저 황금빛의 수프! 저 수프를 어찌 모르겠는가!
‘햐… 향까지!’
똑같다! 자신의 기억 속의 그 수프와 너무도 똑같다!
젤라드는 떨리는 손길로 수프를 국자로 크게 떠 입으로 가져갔다.
“……!”
타악!
그가 들었던 국자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늘 주방 도구는 청결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떠들던 그가 국자를 땅에 떨어트리고도 그걸 주울 생각을 못 했다.
그 맛이다! 분명 그 수프가 맞다!
‘스승님…….’
오래전에 스승 페롤이 만들었던 수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국 이 수프의 레시피는 전해 받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 수프가 자신의 눈앞에 떡하니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다른 이가 아닌 저 카밀라의 손에 의해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수프 맛이 어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밀라가 슬쩍 그에게 다가섰다.
“어, 어떻게……!”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이걸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대체 어떻게!”
카밀라를 바라보는 젤라드의 눈에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이 수프를 재현하기 위해 그동안 수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늘 참담했다. 흉내를 아무리 내려고 해도 그 맛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높네.”
“…네?”
“높다고.”
“무슨…….”
당황하는 젤라드를 향해 카밀라는 손가락 두 개로 그의 두 눈을 콕 가리켰다. 그러곤 그대로 손을 아래로 내린다.
“눈 깔아야지.”
“……!”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카밀라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은 젤라드의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목이 아파지려고 하는데.”
카밀라는 짐짓 목이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
스르륵.
부릅떠졌던 눈이 아래로 향한다. 무릎 역시 살짝 굽혀졌다. 카밀라가 고개를 들지 않아도 될 높이로 말이다. 자연스럽게 두 손도 공손히 앞으로 모였다.
“이, 이제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수많은 주방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취하기 무척 부끄러운 모습이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뭘?”
“이 수프의 레시피 말입니다.”
“내가 왜?”
“…예?”
“난 요리법까지 전수해 준다고는 안 했는데?”
“……!”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경악하는 젤라드를 보며 카밀라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풀어 한쪽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카, 카밀라 아가씨!”
주방 밖으로 향하는 카밀라를 젤라드가 다급히 불렀다.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 없다. 저 레시피를 어떻게든 얻어야 한다!
“뭐, 가르쳐 줄 수도 있고.”
“저, 정말입니까?”
“예뻐 보이면.”
“예?”
“자네가 예뻐 보이면 나중에 가르쳐 줄지도 모르지.”
카밀라는 그 말을 끝으로 옷을 툭툭 털며 주방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젤라드는 한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쪽에 주르륵 서 있는 주방 식구들을 바라봤다.
“…이 얼굴이 예뻐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그건 불… 윽!”
눈치 없는 주방 막내의 옆구리를 찔러 입을 막은 이들은 그저 어색한 미소만 흘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