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The Negotiation(2)
그 말을 끝으로 무전은 끊어졌다. 다시 송신해 봐도 아무 대꾸가 돌아오지 않는다. 조철웅은 시계에 달린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풀들이 워낙에 높이 자라 있어서 걷기가 좀 불편했지만, 까짓 700미터 정도이니 큰 문제는 없다.
“이런 외딴 데에 건물이 있구만…….”
신 중장이 목덜미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미 11월이 시작된 아침이라 꽤나 쌀쌀하지만, 긴장 때문에 그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다.
철책 너머 보이는 허름한 3층 건물. 페인트칠도 되어 있지 않고, 창문도 없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조차도 없이 사다리만 걸쳐져 있다.
“올라가겠다!”
선글라스를 고쳐 쓴 조철웅이 2층을 향해 외쳤다. 콧등 위를 가로질러 커다란 흉터가 나 있는 사내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슥 내밀더니 아무 말 없이 올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그들 다섯 명은 특임대원을 앞세워 사다리를 올랐다.
“차례대로 저리 가서 앉아.”
사다리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널찍한 2층의 가운데 놓여 있는 테이블을 가리킨다. 조금 전,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던 그 놈이다.
“이게 전부야? 세 명?”
한 중령이 어이없어 하며 물었다.
지금까지 고작 세 명에게 놀아나고 있었단 말인가.
흉터사내가 차갑게 대꾸한다.
“앉기 전에는 거래 시작 안 해. 머릿수가 무슨 상관인데?”
한 중령부터 차례로 의자에 앉자 세 놈 중 가장 만만해 보이고 키도 조그만 놈이 반대편의 의자를 빼고 제일 먼저 앉는다.
“아, 멀었죠?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혹시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맥주? 음료수? 그냥 생수? 뭐 여러 가지 있는데요.”
아무도 놈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놈이 무전으로 그렇게 사람 열 받게 하던 자식인가… 목소리나 말투가 비슷해… 근데 그러기에는 너무 별 볼일 없이 생겼는데…….
한 중령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동안 유빈은 바닥의 아이스박스에서 이온 음료를 꺼내 꿀꺽꿀꺽 시원하게 마시고는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뭐, 언제라도 목이 마르면 말씀하세요. 이렇게 멀리에서 거래하러 오셨으니, 박카스 정도는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그런 건 됐으니까, 혈청 이야기나 하지. 지금 가지고 있나?”
한 중령이 물었다. 그때, 커다란 덩치가 의자에 앉으며 특임대원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야! 너 달려들고 싶어서 눈치 보나 본데, 아서라. 좋게 안 끝나. 두 손은 항상 탁자 위에 올려둬.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두 손 탁자 위!”
무시 받은 것 같아 특임대원의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조철웅이 녀석을 제지했다. 조철웅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 고릴라는 단순히 근육만 기른 놈이 아니다. 아무 준비 않는 것 같아도 자세에 허술한 구석이 없고, 강자 특유의 자신감이 넘친다.
그들의 뒤쪽에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는 저 흉터남자도 마찬가지다.
헬리콥터에 타기 전, 조철웅은 틈이 보이면 일단 제압하라고 두 명의 특임대원에게 명령했었다. 물리적 힘을 격차를 보여주고 나면, 그 후에 있을 협상에서도 훨씬 유리한 고지에 선 채 대화를 전개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덩치와 흉터 콤비를 본 이후, 그는 마음속으로 그 작전을 취소해 버렸다. 3:2의 싸움이라고 해서 우위를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상대방 역시 고도로 단련된 육체다.
동행하고 있는 신 장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정말 불가피하고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몸싸움은 벌이지 않을 생각이다.
“크아! 시원하다!”
보안관도 맥주 캔을 하나 다 들이켜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끄윽, 트림을 한다. 예절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막돼먹은 놈들 같다.
“이분이 대장인가요? 군복에 뭐가 줄줄이 달려 있는 것 보면 그런 것 같은데, 근데… 그러기에는 너무 옆의 눈치를 보시네. 연세도 젊으시고.”
유빈이 신 중장의 대역으로 꾸미고 있는 특임대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유빈은 피식 웃으며 맨 끝에 앉은 신 중장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오히려 저분이 대장 같아. 제일 두껍게 뭘 둘렀어. 저번에 정 중장님이라는 분도 그러더니, 군인들은 다 생각하는 게 비슷비슷한가 봐요?”
“후후후…….”
신 중장은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무것도 아닌 조그만 새끼가 발칙하게 떠들어 대는 꼴이 하도 같잖아서다.
게다가 이놈의 왼손, 의수다. 장갑으로 감춰보려 했지만, 어정쩡하게 벌려진 채 움직이지 않는 저 모습은 의수 티가 확연히 난다.
“그래, 네가 너희 중에 제일 말주변이 좋은 놈이냐? 응? 그렇게 인물이 없나? 너 같은 병신까지 동원해야 할 만큼?”
신 중장이 유빈을 향해 경멸의 표정을 드러내며 물었다. 유빈은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아아, 마음 아파라… 병신이라니… 그런 말은 상처가 된다고요. 에이, 우울해졌네, 그냥 장사나 해야지. 자, 이게 면역자의 혈액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냥 피랑 똑같죠?”
유빈은 아이스박스를 뒤적거려 얼음 조각을 몇 개나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작은 혈액 봉지를 꺼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용량은 박카스 반 병 정도. 일반적으로 보아온 혈액 주머니보다 아주 작다. 하지만 신 중장의 눈에는 욕심이 어린다.
“이건 그냥 혈액이잖아? 혈청이라더니?”
한 중령이 물었다. 유빈은 무심히 말했다.
“피로 혈청 만드는 것도 못하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직접 만드셔서 영하 70도에 보관하세요. 70도가 여의치 않으면 영하 20도도 괜찮아요. 이게 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유빈은 오른손으로 혈액 봉지를 톡톡, 두들기다가 턱을 짚었다. 신 중장이 물었다.
“이게 그… 테라의 피냐?”
“누구 건지 이름은 묻지 마세요. 어차피 항체만 있으면 면역자 피는 다 똑같아요.”
“비밀이 많은 놈이군. 가격은?”
“5.56㎜ 나토탄 3만 발.”
“뭐?”
신 중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가… 돈이 아니라 실탄이라니… 그것도 3만 발이나?
“지금 같은 전시 상황에서 실탄 3만 발이 얼마만한 가치를 가지는지 알고나 지껄이는 건가?”
“네, 잘 알죠.”
유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신 중장이 다시 물었다.
“그래, 어디 말해봐. 어떤 가치인데?”
“면역 혈청 1인분이요.”
“이 병신 새끼가… 장난을 치는 거냐?”
유빈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신 중장의 목소리가 노기를 띤다. 유빈은 신 중장을 빤히 쳐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비싸다고 생각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런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좀비에 물렸어요. 그래서 죽어간단 말이에요. 그럴 때, 누군가 총알 3만 발을 주면 그 사람을 살려주겠다고 한다면… 그 상황에서도 그게 비싸다고 생각하실까요? 아닐걸요? 그렇게 다급할 때에는 아마 그 두 배를 불러도 기꺼이 지불하실 겁니다. 그러느니 보험 든다 생각하시고 미리미리 사서 쟁여두세요.”
신 중장은 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놈이 요구하는 대로 호락호락 끌려가고 싶지는 않다. 신 중장은 거짓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내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값을 내고 이걸 살 거라고 생각하나? 네 생각에는 다들 면역자 혈청을 구하고 싶어서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냐고.”
“이게 뭔 소리야? 그 먼 길을 마다않고 귀한 분께서 직접 오셨잖아요. 그럼 그걸로 이미 80퍼센트는 넘어온 겁니다. 자꾸 현실을 부정하지 마세요.”
“오해하지 마. 대체 어떤 놈이 이런 희한한 장난을 치는지 그걸 보고 싶었던 거다. 하나 알려주지. 면역자 혈청은 나도 가지고 있어. 너처럼 족보도 없는 잡 피가 아니라, 테라라는 특수 면역자의 피로 만든 거야. 하지만 태양에서는 그걸 선물로 줬지. 공짜로.”
신 중장이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유빈은 킥킥거리며 대꾸했다.
“그거… 확률 50퍼센트라고 하는 거 말이죠? 정 중장님도 그 말 하시더니. 큭큭, 근데… 그 말을 정말로 믿으신다면 왜 다들 그렇게 열심히 부산역에 광고를 하시고, 서울까지 300킬로미터를 날아오실까요?”
정곡을 찔린 신 중장이 쉽사리 대꾸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유빈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신 중장님은 50프로 확률에 인생을 걸고 싶으세요? 적어도 51퍼센트는 되어야 승산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지금 보시는 이건, 이길 확률이 100퍼센트입니다.”
“하하하, 허세가 몸에 밴 놈이군.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너는 지금 이 나라 제일의 대기업 말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네 말만은 믿어달라고 하고 있어. 이런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그게 이율배반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100퍼센트라는 표현이 감당해야 하는 무서움을 잘 모르시는군요.”
유빈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00퍼센트라는 건 말 그대로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걸 사서 부산으로 돌아가신 다음에 곧바로 태양 그룹 건물로 가셔서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도 당장 기적을 목격하실 수 있다는 거죠. 잘 아시겠지만, 태양 그룹에는 좀비 밥으로 쓰려고 붙잡아 온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있잖아요.”
“태양이 인체 실험을 민간인들에게 한다는 건 헛소문이야. 김 준장이 꾸며낸 날조지. 이미 태양의 최고위층으로부터 해명을 들었어.”
한 중령이 곧바로 끼어들어 태양을 두둔한다. 유빈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그 귀한 혈청 선물의 치유 확률이 50퍼센트인지는 어떻게 알았답니까? 설마… 아무 실험도 하지 않고 그냥 막 되는대로 지껄인 걸까요? 어휴~ 그러면 너무 위험하고 무책임한 거 아닌가?”
“후후후, 잘도 지껄이는군. 그래, 흥미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여전히 비싸. 그 조그만 피 한 봉지에 실탄 3만 발이라니… 너희들, 전단지에다가는 가격이 네고 가능하다고 적어놨었잖아? 그건 헛소리였나?”
신 중장이 헛웃음을 웃으며 물었다.
“설마요. 저희 전단지에 적힌 이야기는 다 사실입니다. 암만 매혈로 근근이 살아가는 어려운 형편이라고는 해도 상황이 안 좋으신 분들에게 무리하라고는 못하죠. 근데… 차비로 헬리콥터 다섯 대 연료를 그렇게 쓰시는 분들께서 형편이 안 좋다고 하면 곤란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도 네고가 필요한가요? 허, 이것참…….”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던 유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병신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에누리를 해드리려고 하니까 영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흥정은 해보죠, 뭐. 좋습니다. 그럼 얼마 정도면 적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하세요?”
큼큼, 막상 가격을 제시해 보라고 하자 신 중장은 선뜻 대답을 못한다. 잠시 아랫입술을 내민 채 근엄한 척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신 중장이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혈액은 얼마나 되나?”
“지금 당장이요? 세 봉지입니다.”
“왜… 그만큼밖에 가져오지 않았어?”
“조금 아쉬운 듯해야 관계가 오래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한 100봉지 가져왔으면 미련 없이 우리를 죽이고 그냥 강탈해 가실 거 아닙니까. 아, 물론 신 중장님은 그러실 분은 아니겠지만, 요즘 세상이라는 게 워낙 흉흉해서…….”
유빈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양이 적어 신 중장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입맛을 다졌다.
“세 개면… 좋아! 3만 발에 세 개를 다 주면 적당하겠군…….”
“하하하… 아, 정말 유쾌하신 분이네. 저는 그냥 아이스박스 값이나 빼달라는 줄 알았는데, 그냥 아주 다 달라고 하시네요. 근데요, 신 중장님, 제가 그 값에 맞춰 드리면, 저한테 뭘 주시겠습니까?”
유빈은 이마를 짚은 채 허탈하게 웃다가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물었다.
“뭘 주냐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니… 왜 하다못해 시장에서 싸구려 물건을 깎을 때도 뭔가 조건을 달잖아요. ‘이모, 제가 여기 소문 많이 내드릴 테니까 5천 원만 깎아줘요’ 하는 식으로. 협상이라는 게 서로 주고받는 거니까요.”
유빈의 말을 들은 신 중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대체 뭘 받고 싶어서 그런 소리들을 길게 늘어놓는 거지? 말해봐. 지금 네 마음속에 이미 정해놓은 게 있잖아?”
“태양 그룹이요.”
유빈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거기를 수색해서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 구출해 주세요. 그것만 해주시면 첫 거래는 신 중장님이 원하시는 가격으로 드리겠습니다.”
유빈이 말을 마치자 긴장 속에 불편한 침묵이 잠시 이어진다. 보안관과 민구의 시선도 신 중장에게 쏠려 있다.
“후후후후~ 역시 김 준장네 놈들이었구만. 실탄 달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 김 준장, 그 사람 참… 그렇게 안 봤었는데, 음흉한 구석이 있네. 어디 이런 시정잡배들을 보내 가지고 협잡질을 하나. 그건 그렇고, 김 준장이 어째서 그렇게 태양 그룹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건지 너희들은 아나? 무슨 개인적인 열등감이 있어?”
신 중장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면서 물었다. 그의 대각선 뒤쪽에 서 있던 민구가 콧방귀를 뀐다.
“그거 봐. 내가 안 될 거라고 했잖아. 결국은 다 한패야. 이것들이 봐주지 않으면 태양이 그렇게 마음대로 미친 짓을 할 수 없지.”
‘이것들’이라는 말에 한 중령이 민구를 향해 눈을 흘긴다. 유빈은 다시 신 중장에게 물었다.
“우리를 누구 부하로 생각하든 그건 신 중장님 마음이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답… 그건 거절하신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요?”
“너희 같은 놈들 말만 믿고 그런 짓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꿈 깨.”
“훗, 후후후! 네… 그러시구나. 뭐… 어쩔 수 없죠. 그럼 네고도 없어요. 혈액 한 봉지에 3만 발. 세 봉지에 9만 발. 그리고 아이스박스까지 패키지로만 판매해서 총액 10만 발. 정가로 갑니다.”
잠시 쓸쓸히 고개를 끄덕이던 유빈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신 중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병신 새끼. 어린놈들 재롱이거니 하고 귀엽게 봐주려고 했더니, 한도 끝도 없이 까부는구나. 대체 뭘 믿고 그렇게 건방을 떨어 대는 거냐? 네가 지금 누구랑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해? 3만 발이나 주겠다고 하면 고맙다고 하고 조용히 꺼질 것이지…….”
“싫으시면 억지로 권하지는 않습니다.”
유빈이 천천히 오른손을 혈액 주머니 쪽으로 내민다. 마치 여기서 장사를 접겠다는 듯한 태도다. 아쉬운 마음에 신 중장도 녀석보다 빠르게 그걸 낚아채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신 중장의 손이 닿기 직전에 의수인 녀석의 왼손이 잽싸게 움직여 먼저 혈액 주머니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멀쩡한 오른손에만 신경 쓰고 있었기에 전혀 예상도 못했다.
“아하하하! 어쩝니까? 장군님! 병신한테 지셨네. 하하하!”
유빈은 유쾌하게 웃으며 팔 관절 안쪽의 버튼을 눌렀다. 혈액 주머니를 움켜잡은 손이 기이잉―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360도 회전을 한다.
“끄으음!”
녹아버린 얼음물을 손바닥에서 털어낸 신 중장은 얼굴이 빨개져서 뒤쪽으로 기대앉았다. 상관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한 중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야! 거래를 하려는 거냐, 성질을 건드리는 거냐? 그따위 태도로 까부는 걸 언제까지 봐줄 거라고 생각해? 정말 혼이 나봐야 정신을 차릴래? 무장하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정말로 빈손으로 온 줄 알아? 조 소령!”
한 중령은 악을 써 대지만, 조철웅은 오히려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멍청한 새끼.’
조철웅은 한 중령을 한심하게 여기며 속으로 혀를 찼다. 기습을 하려는 놈이 저렇게 큰소리로 주의를 끌고 온갖 생색을 다 내다니.
이건 미리 적에게 대비하라고 알려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 중령 덕분에 총을 꺼낸다고 해도 기습의 성공 가능성은 절반 이하로 떨어져 버렸다.
지금 그들이 마주하고 앉은 커다랗고 묵직한 테이블. 그 자체로서는 아무 문제 없는 이 테이블이, 맞은편의 저 덩치 때문에 아주 골치 아픈 변수가 되었다.
그와 특임대원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리기만 해도 저 덩치 녀석은 당장 테이블을 들어 엎을 것이고, 그것에 깔려 이쪽이 버둥대는 짧은 순간 동안 뒤의 흉터와 함께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러면 혼전이 된다.
지금 이 순간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긴박한 상황도 아닌데, 그런 등신 같은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
3만 발이니, 10만 발이니 흥정을 하는 자체가 조철웅에게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10만 발이라고 해봐야 1개 사단에 탄창 하나씩 지급하는 정도도 안 된다. 그 정도는 얼른 줘버리는 편이 서로 깔끔하다.
“…조 소령?”
조철웅이 움직이지 않자 한 중령은 다소 기가 죽어 다시 한 번 조철웅을 부른다. 보안관은 두 손으로 탁자를 꽉 움켜쥔 채 건너편의 군인들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팽팽했던 긴장이 조금 풀리고 나자 유빈이 민구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아, 무장하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이분들 총을 가지고 오셨네… 그래놓고서 그걸 믿고 오히려 막 소리를 지르시네요. 형,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죠?”
“예의를 가르쳐 줘라.”
언제라도 쿠크리를 뽑고 달려들 채비를 하고 있던 민구가 말했다. 유빈은 다시 군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신기한 걸 보여 드릴게요. 마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데요, 제가 이 왼손을 어깨보다 높이 들어 올리면 캔이 날아가요. 물론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총에 손을 대려는 분이 있으면, 그분 머리도 날아갑니다. 자, 일단 캔부터.”
말을 하는 동안 유빈의 의수가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순간!
쐐애앵―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싶더니, 조금 전 보안관이 내려놓았던 맥주 캔이 날아갔다. 그것에 채 놀라기도 전에 유빈이 마셨던 이온 음료 캔도 거의 동시에 날아가 버렸다.
테이블 위는 터져 나온 음료수와 맥주로 흠뻑 젖었다.
파아아아, 파아아아앙―
그제야 창문 밖에서부터 총소리가 들려온다.
컥― 한 중령과 신 중장이 뒤늦게 신음을 삼키며 의자를 뒤로 물리려 한다.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조철웅의 얼굴도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저격? 저기에서?’
발사 지점이라고 여겨질 만한 곳이 딱 한 군데뿐이다. 1,200미터 이상 떨어진 전철역 건물 옥상. 그 외에는 모두 평지였기에 2층 창문 높이보다 낮게 세워져 있던 음료수 캔을 맞출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세미 오토라고 해도 1.2킬로미터 떨어진 목표물 두 개를 거의 딜레이 없이 맞춘다고? 그것도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흥미와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끼며 조철웅은 전철역 옥상 쪽을 노려보았다.
‘이런 일을 할 만한 놈이… 김 준장 휘하에 있었던가…….’
조철웅 자신이 지휘하고 가르쳤던 최고의 엘리트 군인들에 견주어봐도 뒤지지 않을 실력이고, 배짱만 보면 그 엘리트들을 몇 배나 웃도는 수준이다.
그리고 어딘가… 예전에 한 번 보았던 녀석을 떠오르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혀, 협박이냐? 우리에게는 무장하지 말라고 한 놈들이? 우리를 건드렸다간 어떻게 될 것 같아?”
한 중령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물었다. 유빈은 혈액 주머니를 아이스박스에 넣으며 고개를 젓는다.
“이런 건 억제력이라고 부르죠. 폭력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막아주는 힘. 우리도 저 총으로 사람을 겨누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다시 냉정을 찾고 서로 예의를 갖춘 상태에서 거래 이야기를 할까요? 구매하실 건가요?”
“…사지. 피도 욕심이 나지만, 신 중장이 이 정도 진기명기를 공짜로 봤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옷에 튄 맥주를 훑어내며 신 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래도 군인. 이런 상황에서 총알이 날아올 만한 곳이 어디인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미션인지 정도는 잘 안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유빈이 고개를 꾸뻑 숙였다. 신 중장은 헛웃음을 웃고 나서 물었다.
“하지만 거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총알 10만 발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없어.”
“혈액은 지금 가져가시고 실탄은 사흘 내에 이 좌표로 배달해 주시면 됩니다. 거기에 가시면 건물 옥상에 노란 원이 보일 거예요. 배달이 완료되면 문형식 대위가 뭐라고 메모를 남겨줄 겁니다.”
유빈은 주머니에서 좌표가 인쇄된 작은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신 중장이 턱을 끄덕이자 한 중령이 받았다.
“동경 127.9706116… 북위 36.9796506… 역시 충북이군. 김 준장 부하들인 게 확실해 보입니다.”
한 중령이 좌표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유빈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으며 신 중장에게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희를 누구 부하라고 생각하시든 그건 자유지만, 신용이 깨지면 거래는 더 이상 없습니다.”
“만약 내가 실탄을 배달해 주지 않으면? 그럼 어쩌려고 혈액을 미리 주지? 너같이 의심 많은 놈이?”
“다음에 광고판을 세우는 사람에게 말할 거예요. 신 중장님이 물건만 받아 간 뒤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는데, 그걸 받을 때까지 모든 거래는 잠정적으로 중단된다고. 다른 장군들에게도 알려 달라고요.”
“헛! 허허! 미친…….”
신 중장은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실탄 10만 발을 떼어먹으려다가는 천하의 좀생이, 남들 거래까지도 망친 도둑놈이라는 낙인을 면치 못하게 생겼다.
후불제라…….
신 중장은 유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어떻게 봐도 절대 군인은 아니다. 뒤에 기대서 있는, 양복 입은 흉터남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김 준장의 수하는 아닐 것이다.
“왜 이런 짓을 하지? 실탄은 너희에게 아무 이득이 없잖아? 김 준장으로부터 뭘 약속 받았나?”
“몇 번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까… 김 준장이 누군지도 몰라요. 얼굴도 못 봤고요. 그냥 거기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도우려는 겁니다.”
유빈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조철웅은 그런 말을 지껄이는 유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놈이다.
유빈은 평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 거래는 잘 마무리됐으니까 이제 헤어지는 방법을 알려 드릴 게요. 아까 오실 때의 역순입니다. 그 벌판의 빨간 테이블 기억나시죠? 거기까지 가셔서 대기하시면 제가 무전을 보낼 거예요. 헬리콥터를 호출하셔도 좋다고. 깔끔하죠? 앞으로도 계속 서로 이득이 되는 거래가 되면 좋겠습니다.”
“만약 내가 이걸 태양 그룹에 넘기면, 너는 더 이상 피 장사를 할 수 없을 텐데? 거기에서 이 피로 백신을 만들 테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
아이스박스를 넘겨받고 나서 신 중장이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태양이 가진 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걱정은 안 합니다.”
“하나만 더 묻지. 정 중장도 이만큼을 이 가격에 샀나?”
“그건… 개인 정보니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섭섭하시겠지만, 제 입이 무거워야 신 중장님도 앞으로 거래하시기에 더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유빈은 공손히 대답해 줬다. 신 중장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뀐 뒤, 사다리를 붙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마지막까지 2층에 남아 있던 조철웅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유빈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저기 저 녀석. 혹시…….”
창문 너머 전철역 건물을 가리키며 뭔가를 물어보려던 조철웅은 이내 마음을 바꾸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삼척 방어 대대 전체가 전멸했다고 했었는데… 용케 탈출을 했다고 해도 거기에서 서울까지 어떻게… 그 거리가 대체 얼마인데.
“아니야. 잊어버려.”
조철웅은 다시 선글라스를 걸치며 말했다.
“후아아아~ 힘들다. 사람들하고 흥정한다는 거…….”
신 중장 일행 다섯 명이 벌판 쪽으로 멀어진 뒤, 유빈은 테이블에 엎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탈진 직전이다.
“그래도 첫 거래 할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버벅거리지도 않고…….”
보안관이 녀석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던 민구도 고개를 끄덕인다.
“음, 너 깐족거리는 데에 소질이 있더라.”
“하하하… 그것도 재주인가요? 힘도 없이 깐족거릴 줄만 알면 두들겨 맞기 딱 좋은 인간이잖아.”
유빈은 떼꾼해진 눈을 비비며 웃었다. 자신이 이렇게 죽을 만큼 힘이 드는데, 정작 육탄전을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보안관과 민구는 얼마나 더 많은 체력이 소모될 것인가.
물론 협상하는 내내 미동도 못한 채 조준경을 노려보고 있어야 하는 진우는 말할 것도 없다. 녀석은 아마 지금도 신 중장 일행이 혹시 딴마음을 먹지나 않는지 노려보고 있을 터였다.
“세상에… 여기에서 머리 싸매 쥐고 덜덜 떨던 게 엊그제 같은데…….”
유빈이 복지센터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7월 14일 공포의 밤, 좀비에 할퀴어진 보안관의 발목을 보며 함께 걱정했던 그밤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여기에서 친구들과 힘을 합쳐 좀비들을 죽였고, 제니를 구해와 함께 생활을 했고… 그리고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우려 하고 있다.
“진우는 이제 슬슬 빠지라고 해야겠다. 30분 후면 그 앞으로 좀비들 지나갈 시간이야.”
시계를 확인한 보안관이 창문 앞에서 라이트를 반짝여 진우에게 신호를 보냈다.
“잘 끝났구나…….”
신 중장 일행을 끝까지 눈으로 쫓던 진우는 보안관의 철수 신호를 확인하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헥― 헥―
미동도 하지 못하고 있던 동안 그의 바지를 젖게 만든 범인이 다시 다가와 코를 엉덩이에 들이밀려 한다. 진우는 얼른 다리를 오므리며 나지막하게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삼숙아!”
<1부-完>
=독자님들께 드리는 편지=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박스오피스입니다.
<좀비묵시록 82―08>의 연재를 정식으로 시작한 지 어느덧 일 년이 되었습니다.
모니터 앞에 앉은 채 어둠이 빛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많은 날들은 제겐 고되고 힘들다는 생각보다, 좋은 독자님들과 만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마음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 시간이었습니다.
제 글을 아껴 읽어주시고 서사 안에 존재하는 주인공들 하나하나에까지 훈훈한 생명을 부여해 주시는 분들과, 이렇게 가까운 소통이 가능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경이로웠습니다.
장르 소설 집필은 저로서는 처음 뛰어든 긴 레이스였지만, 온통 낯설고 익숙지 않은 그 공간에서 넘어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던 힘은, 독자님들께서 기꺼이 내밀어 붙잡아주신 따뜻한 손이었습니다.
부족한 점 많던 작가에 대한 질책 대신 한결같은 응원과 독려로써 이렇게 완주까지 이끌어주셨습니다. 과분한 사랑에 대해 고개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재충전을 하고 새 원고를 정리하는 동안 그간 독자님들께서 꼭꼭 눌러 써주셨던 수천 개의 고운 이야기들을 저는 읽고 또 읽으며 자꾸만 지난 시간을 추억하겠지요.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목이 메네요.
독자님들과 함께 만들어갔던 예쁜 순간들이 아주 많이 그리울 거라서… 그리워 힘이 들 거라서 무척 두렵습니다.
정말로 행복한 작가네요, 저는. ㅎㅎ
이제 독자님들께 <좀비묵시록 82―08>의 완결 인사를 올리려 합니다.
아직 많은 여정과 모험이 남아 있는 우리 주인공들의 뒷이야기는, 조금 더 준비하고 멋진 모습으로 다듬어서 <좀비묵시록 화이트아웃> 편으로 너무 머지않은 때에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아울러, 가을부터 연재될 차기작 <슈퍼(Super)>에도 독자님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큰 사랑 주셨던 독자님들께 엎드려 절하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고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2016. 7. 30.
박스오피스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