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The Negotiation(1)
전설 혹은 유령에 대한 소문은 부산에서 시작되어 남부 전체로 번졌다.
분명히 영상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 살아 있는지 이미 죽었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그 행방은 더욱 묘연한 아이.
테라, 좀비들 사이를 걷는 여자.
테라가 좀비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은 그날 태양 그룹의 헬기로 이송 중 오 박사에 의해 모두 추락사 당한 터이므로, 살아 있는 실제 증인은 없다. 그리고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영상이라는 것조차 구경도 못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열망에 기대 더욱 빠르게 퍼졌고, 실체를 모르기에 기대는 점점 더 크게 부풀었다. 누구나 꼭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현재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런 추가 소식도, 단서도 없이 9월이 어느덧 다 지나가고, 10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좀비들에게 보이지 않는 면역자의 이야기가 그렇게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한 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모든 이들의 애를 태울 무렵,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발단은 해운대구의 한 고급 술집이었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한 중령은 안락의자에 푹 기대앉으며 웨이터가 전해 준 물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았다.
“고단하시죠?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은빛 쟁반을 받쳐 들고 있던 웨이터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듯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한 중령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라 지키는 일이 다 그렇지. 겉으로 일해놓은 표는 안 나는데, 속으로는 아주 몸이 곯는다. 아후~ 그래도 좀비 새끼들 없는 나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그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도 장난 아니게 쌓이지.”
“어유, 그럼 안 되죠. 오늘 아주 편안하게 푹 쉬시다 가실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중령님!”
웨이터는 재차 허리를 굽히며 아부를 떨어 댄다. 한 소령은 태양 그룹에서 발행된 전표 10만 원권을 테이블 위에 툭, 던지며 말했다.
“그래. 나도 잠시만 나라 걱정 좀 잊어 보자. 아주 새끈한 애들로 넣어.”
“감사합니다!”
웨이터는 세 번째로 인사를 하며 전표를 주머니에 챙겼다. 태양 그룹과 관련된 모든 매장에서 우대를 해주기 때문에 남부 지방에서는 현금 지폐보다도 이 태양 그룹 전표가 더 환영 받는다.
태양 그룹은 그런 전표를 주변 군벌의 고급장교들에게 넉넉하게 선물하는 것으로 인심을 얻는 중이었다. 한 중령도 예외가 아니다.
신 중장 휘하 정보장교인 그는 요즘 살아오는 동안 최고로 호사스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태양 그룹에서 공급해 주는 전표의 액수는 그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단위였고, 덕분에 예전 같았으면 상상할 수도 없을 사치와 환락이 가능해졌다.
현재는 회원제로만 운영되는 이 고급 룸살롱도 한 중령과 같은 군인들이 수입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좀비 덕에 호강하는 군인이 그 혼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서로 다른 군벌의 고급 장교들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이 욕망의 분출구에서 사고를 일으키는 바보는 없었다. 어차피 한두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깨끗이 천하통일이 이뤄지는 상황도 아닌데, 공연히 시끄러운 일을 만들어봐야 제재를 받게 될 자신들만 손해다.
그러느니 여기에서 좋은 술 마시고 여자들을 양팔에 낀 채 즐겁게 놀아나는 게 훨씬 이득이다.
“야야야! 잠깐만!”
담배를 피워 물던 한 중령이 웨이터를 부른다. 문을 닫고 나가려던 웨이터는 다시 룸 안으로 들어와 두 손을 모았다.
“부르셨습니까?”
“이거 뭐냐?”
한 중령이 유리 재떨이 옆에 쌓여 있는 종이들 중 한 장을 들어 펄럭이며 물었다.
“아, 그거…….”
웨이터는 멈칫하며 말을 더듬었다. 한 중령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종이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는다.
“면역자 혈청 판매… 치유 확률 100퍼센트… 절차, 에… 부산역 9번 출구에 광고판을… 뭐래, 뭐가 이렇게 길어? 어디 보자. 가격… 개별 상담. 네고 가능… 야, 이거 뭐야? 이거 씨발, 배포한 새끼가 누군지, 연락처도 없고… 이거, 너희가 사기 치는 거야?”
프린트된 내용을 대충 훑던 한 중령은 종이를 펄럭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에 기차역 화장실에 붙어 있던 ‘신장․안구 삽니다’ 스티커보다 오히려 더 수상하고 구려 보인다. 웨이터가 손사래를 친다.
“아유, 저희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가당치도 않죠. 그게… 오늘 오픈하기 전에 매니저님이랑 저희 모여 있을 때, 어떤 사람 둘이 들어와서 그걸 몇 박스나 놓고 갔습니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테이블마다 올려놓으라고…….”
“놓고 간다고 그걸 그냥 받았어? 그리고 이걸 버젓이 룸 테이블 위에 올려놔? 너희가 등신이냐?”
“그게… 당연히 저희도 처음엔 거절을 했습니다. 여기를 어떻게 보고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회원제 고급 가게다. 대기업 간부님들이랑 최고 훌륭하신 장교님들만 오신다… 뭐, 이렇게.”
“그런데?”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죽이겠다고 하더라고요.”
웨이터가 말했다. 그의 말투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창피해하는 것 같았다.
“허풍이잖아, 이 새끼야. 노란 물 장사를 한다는 놈들이 그딴 헛소리에 놀아났다고?”
한 중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자, 웨이터는 이마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일단 정문 통과해서 가게 안까지 들어온 시점부터 완전히 허세라고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한 중령의 표정도 조금은 심각해졌다. 정문에서 양복을 갖춰 입고 그를 맞이하던 덩치들… 말이 좋아 직원이지, 누가 봐도 한가락 하는 기도들이다.
그리고 그런 기도들이 계단과 지하의 문 앞에서도 늘 여러 겹으로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도 수상한 잡상인 놈들은 그놈들을 다 제압하고 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 애들이 다 손도 못 썼다, 이런 이야기야?”
한 중령이 물었다. 웨이터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부끄럽습니다. 낮에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때여서… 하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경비를 두 배로 늘렸으니까 안심하시고 편안하게 드셔도 됩니다.”
이렇게까지 되면 거짓말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세상에 어떤 유흥업소도 자신들의 보안이 허술하다는 걸 알리지 않는다. 그런 불안한 곳에서 마음 놓고 술을 퍼마실 손님은 없으니까. 한 중령은 다시 전단지를 집어 한 자, 한 자를 유심히 살펴봤다.
* 면역자 혈청 판매 *
좀비에게 물렸을 때, 치유 확률 100퍼센트!
―구입 신청 방법―
1. 부산역 9번 출구 상단에 10×10m 크기의 광고판 설치.
2. 광고주는 광고판에 구입 의사와 자신의 신분, 성명을 밝힐 것.
3. 광고판은 일주일간 유지 후, 자진 철거.
4. 광고주 본인이나 대리인이 비너스에서 대기하면 일주일 내에 개별 연락.
5. 가격 : 개별 상담 요망. 네고 가능.
6. 장난 사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중령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기도들을 다 제압했다는 소리만 아니면, 유치한 문장으로 가득 채워진 이 전단지야말로 장난 같았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이렇게 사기가 어려워서야…….
하지만 이런 내용을 알리고 싶은 대상이 누구인지는 아주 명확히 드러난다. 힘 있는 사람들.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오기는 했다.
전시에 준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부산역에 커다란 광고판을 설치할 수 있는 사람은 태양을 비롯한 몇몇 대기업과 군벌들 정도뿐이다. 한 중령은 종이를 두드리며 물었다.
“여기 4번에 적혀 있는 비너스… 이거, 너희 가게 이름이잖아. 그럼 광고하고 나서 이 가게에 와 있으라는 말이야? 그러면 어떻게 한다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웨이터가 조금 머뭇거린다. 뭔가 알고는 있는데 지금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리라.
그렇다면 이놈도 한패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그 두 놈의 협박에 완전히 굴복한 걸까?
한 중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도 치유 확률 100퍼센트라고? 저 태양에서 희귀한 거라며 건넸던 혈청도 겨우 50퍼센트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긴 놈들이었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한 중령이 물었다.
“얼굴은 모릅니다. 모자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한 놈은 덩치가 아주 컸고, 또 한 놈은 냉기가 팍팍 돌았다는 정도…….”
“냉기가 돌아? 큭큭큭. 그게 또 뭔 개소리야, 이 새끼야.”
“그냥…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저희 매니저님도 그놈들 가자마자 순순히 시키는 대로 이걸 방마다 깔았겠습니까. 사정이 그러니까… 그냥 모자란 놈들이 바보짓 한다고 생각하시고 며칠만 너그럽게 봐주십쇼, 중령님!”
웨이터가 다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녀석이 나가고 나서 자주 보던 여자애들 둘이 들어와 양주 두 병을 다 비우는 동안에도 한 중령은 마음을 온통 전단지에 빼앗겨 있었다.
여자들의 허리를 감고 위층의 호텔 방으로 올라갈 때, 그는 전단지 한 장을 자신의 군복 주머니 안에 챙겨 나왔다. 아무래도 너무 거짓말 같아서 오히려 진지하게 고민이 된다.
다음 날, 부대로 복귀한 뒤에도 그는 계속 전단지를 노려봤다. 100퍼센트의 치유 확률이라는 문장을 보고 있으면, 그 커다란 유혹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아직 이 나라의 그 어떤 군벌도, 그 어떤 재벌도 가지고 있지 못한 마법 같은 약… 그것을 소유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현 상황에서는 상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부산역에 광고판을 세우고 거기에 자신의 지위와 이름을 기재하기란 어렵다. 분명히 무슨 미친 짓이냐고 위쪽에서 물어올 것이다.
‘문책을 받으면 그때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신 중장님께 꼭 이 약을 구해 드리고 싶었다고 하면 믿어줄까?’
줄담배를 피우며 고민을 하던 한 중령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오후를 맞았다. 그러면서도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바보 같은 전단지에 속아 그렇게 큰 광고를 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놈은 없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그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근거였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과 모험심은 한 중령이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강했다. 신 중장이 급하게 호출한 오후 작전 회의에서 한 중령은 벌써 부산역에 첫 번째 광고판이 붙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낙동강 주변 다섯 군벌 중의 한 사람, 정 중장이 그 광고의 주인공이었다. 더 이상 숨기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느낀 한 중령은 그 전단지를 꺼내놓았다.
“그에 관한 첩보는 이미 입수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다만, 몇 가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서 사실 확인을 모두 끝낸 후에 보고드릴 계획이었습니다.”
“늦어, 이 새끼야. 늦다고! 정보를 입수했으면 일단 보고부터 했어야지! 응? 이 멍청한 새끼야. 정 중장이 가로챘잖아! 그 욕심 많은 새끼가 아도 쳐서 싹 다 가져가 버리면 어쩔 건데?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신 중장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책상을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한 중령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쪽에서 먼저 움직일 것 같은 조짐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이 전단지가 누군가의 고약한 음모가 아닌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끄음……!”
정 중장을 모르모트로 삼았다는 변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 중장도 더 문책을 하지는 않았다.
“좋아, 네 말도 일리는 있어. 대신에 두 번째 광고는 놓치지 마. 일주일 뒤에는 우리 광고를 걸 수 있는 거잖아? 맞지?”
신 중장이 전단지를 짚으며 말했다. 한 중령은 그렇다고 했다. 먼저 스타트를 끊은 놈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정 중장이 뛰쳐나가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 일은 시간을 다투는 경쟁이 되어버렸다. 전단지에 적힌 내용의 진위 파악 같은 건 뒷전이다.
“그럼 두 번째 광고한 다음에 약속까지 정하고 와. 뭘 하더라도 뒤처지지 말라고, 이 새끼야. 알겠어? 게다가 이거 보나마나 테라라는 그 계집애와 관련이 있어. 그 계집애를 데리고 있는 놈들이 낸 광고라고.”
신 중장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특명을 받은 한 중령은 병사들과 함께 헬리콥터 편으로 부산역으로 향했다.
부산역 앞의 광장에는 오가던 행인들이 의미를 알 수 없는 광고판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광고판을 지키고 있는 정 중장의 부하 장교들에게 다가가 일주일 뒤, 몇 시에 광고판을 뗄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대화하고 있는 동안에 또 다른 광고 희망자들이 뒤쪽에서 다가온다. 무장한 군인들 수십이 한꺼번에 몰려들고 나니, 부산역 앞 광장에는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 어차피 남 좋은 일 하는 건데, 질서 지켜서 순서대로 진행하면 되잖아. 괜히 애들 끌어들여서 여기에서 총질해 봐야 아무것도 안 생긴다.”
각 군벌의 참모들은 피 튀기는 싸움 대신 합의를 택했다. 제주도 강정 기지의 교훈을 잘 아는 터라 다른 장군들도 결국은 납득을 할 것이다.
어차피 목숨이 걸린 일도 아닌데다가 따지고 보면 이 전단지의 내용을 믿을 만한 근거는 제로다. 그런데도 힘을 가진 장군들이 아무도 갖지 못한 것을 가져 보겠다는 원초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아무 명령이나 내리고 있는 것뿐이다.
역 앞에는 각 군벌들의 병력이 상주하는 천막이 펼쳐졌고, 긴장감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 일주일이 지나갔다.
합의를 해놓은 상태지만, 여전히 다른 부대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한 중령은 부산역 주변에서 거의 매일을 보냈다. 언제 광고판 바꿔치기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 중장의 광고판이 철거되자마자 한 중령은 신 중장을 위한 광고판을 세웠다.
“근데 이거… 정말로 물건이 있기는 한 거야? 응? 연락은 어떻게 해? 얼마 부르던가?”
한 중령은 광고판을 철거하기 위해 나와 있는 정 중장 측 장교들에게 몇 번이나 같은 걸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꼭 다물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이거야, 뭐야?’
처음엔 못마땅해서 놈들을 노려보던 한 중령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거래에 대해 침묵하라는 것이 하나의 거래 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광고 봤습니다. 이거 받으십쇼.”
한 중령이 비너스를 찾아가자 웨이터는 쟁반에 무전기를 받쳐 들고 나타났다. 그냥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무전기였고, 충전 키트까지 달려 있다. 그리고 노트와 볼펜까지…….
한 중령은 웨이터와 무전기를 번갈아 노려보다가 물었다.
“…너 뭐냐? 너도 한패인 거냐? 전에 내가 연락 어떻게 받느냐고 할 때, 모른다고 아가리 다물고 가만히 있었지?”
“어휴, 중령님… 그냥 맡겨놓고 간 겁니다. 광고하신 분에게만 알려 드려야 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고 협박을 해서 그냥 따르고 있습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다른 마음을 먹겠습니까?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쇼. 못난 놈이 한 번 살아보려고 제 딴에는 애쓴다고 생각해 주십쇼.”
웨이터와 지배인이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이쯤 되니 이놈들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건지, 아니면 한패여서 자신들을 가지고 노는 건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당장 급한 것은 연락을 받는 일이어서 한 중령은 무전기를 가지고 룸에 들어갔다.
무전기는… 좀처럼 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각을 잡고 앉아서 초조하게 무전기에서 소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던 한 중령이지만, 몇 시간이 지난 뒤에는 결국 술을 시켰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초조함이 슬슬 그의 이성을 마비시킬 무렵, 드디어 무전기의 표시등에 불이 들어왔다.
― 치이익, 신 중장님? 치익.
“어, 나! 내가 대리인이다! 여기 있어! 말해!”
한 중령은 급하게 무전기를 잡고 소리쳤다. 상대방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어왔다.
― 치익, 다짜고짜 반말이네? 당신 부하인 줄 알아? 광고판 떼고 다음 사람에게 넘기라고 할까?
“엇, 미, 미안합니다. 버릇이 돼서…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쇼.”
한 중령은 일단 사과하고 말투를 바꿨다. 신 중장이 욕심을 내고 있는 마당에 이런 일로 거래가 틀어지면 곤란하다.
― 치이익, 예의를 갖춰요. 사람 욱하게 하지 말고. 혈청 사고 싶은 거잖아? 치익.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 중령은 이를 꽉 깨물고 비굴한 태도를 유지했다. 목소리를 듣기에 건너편의 상대는 이제 겨우 이십 대 초중반. 그와는 두 바퀴를 돈 띠 동갑 정도의 나이 차이다. 하지만 이미 대화의 주도권은 저쪽에 넘어가 버렸다.
― 치이익, 먼저 조건을 알려줄게요. 중요한 문제니까 적었으면 좋겠는데… 하나라도 어기면 거래는 그걸로 쫑이거든. 쓸 준비 됐어요? 치이익.
“자, 잠시만 기다리십쇼!”
한 중령은 서둘러 노트를 펼치고 볼펜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제 말씀하시라고 했다.
― 치익, 먼저 이동은 헬리콥터로만. 그 외에 다른 거 타고 다니는 사람들하고는 거래 안 합니다. 치이익.
“네! 헬리콥터!”
한 중령은 메모하며 대답했다.
교통편으로 헬리콥터만 인정한다니… 애초에 이놈들은 최상위 권력층하고만 거래를 할 심산이었던 거다.
― 치이익, 올 때는 몇 대가 호위해서 와도 좋은데, 약속 시간에 맞춰 착륙할 때는 한 대만 내려야 돼요. 거래하고 싶은 사람들 다 내린 다음에는 헬리콥터는 전부 프로펠러 소리 안 들릴 만큼 멀리 물러나 있어야 하고. 무슨 의미인지 알죠? 치익.
“네… 헬리콥터는 한 대만 착륙 가능. 그 후에 완전히 후퇴.”
― 치익, 내릴 수 있는 인원은 최대 다섯 명. 총기 휴대 금지. 광고판에 이름 적은 당사자가 와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치이익, 신 중장님이라는 분이겠죠? 치익.
“…신 중장님은 이런 거래에 직접 나서시지 않습니다. 아마 제가 대리인으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한 중령이라고 합니다.”
한 중령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고작 이런 술수로 신 중장 본인을 불러내려 하다니… 현재 남부 최대의 군벌을 이끄는 수장을…….
어지간히 건방진 놈들이다. 하지만 무전 건너편의 놈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뻔뻔하게 나왔다.
― 치이익, 대리인이면 그냥 조건을 잘 적어서 전달해요. 오든 안 오든 신 중장 본인이 알아서 하게. 생각까지 대신 해주려고 하네. 치이익, 적었어요? 광고 당사자가 와야 한다고? 치이익.
“아… 네. 요구 사항 전달은 하겠습니다만 그게… 만약에 안 되면, 그때는 아마 제가 나갈 겁니다.”
― 치익, 그때는 거래고 뭐고 없는 겁니다. 다시 광고판을 세워도 앞으로 그쪽하고는 절대 거래 안 해요. 치익.
“아니…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람이 좀 융통성도 있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치이익, 에… 여기까지 알아들었으면, 약속 시간이랑 좌표를 적어요. 불러줄게요. 치이익.
놈은 한 중령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려 한다. 상대방이 뭐라고 떠들어 대든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식이다. 한 중령은 찜찜한 마음으로 놈이 불러주는 좌표와 시간을 적었다.
“저기 근데… 서울인 거 아닙니까? 이 좌표? 그 먼 데까지 내일 오전 아홉 시면… 너무 빠듯한데…….”
한 중령은 자신의 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밤 11시가 넘었다.
― 치이익, 전단지 다시 잘 읽어봐요. 치익.
“네? 그게 무슨 말인지…….”
― 치이익, 가격에만 네고 가능하다고 써놨잖아요. 다른 조건은 협상하려고 하지 마요. 치익.
후우우~!
한 중령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뭐 이렇게 싸가지 없는 개새끼가 다 있을까 싶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가격은? 그… 단위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맞을 혈청 값은 얼마요?”
― 치익, 얼굴 보고 이야기하죠. 치이익, 그건 흥정 가능하니까. 그럼 이제 궁금한 거 없죠? 치칙.
상대방이 조건을 다 확인했냐고 물어볼 때, 한 중령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게… 암살 기도가 아니라는 걸 내가 신 중장님께 어떻게 설명드릴 수 있겠소?”
― 치칙,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다섯 명만 내리라고 하지를 않지. 치이익, 그리고 당신들 몇 명 죽인다고 우리한테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하겠어? 치익―
너무 돌직구 같은 대답이어서 한 중령은 아무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윗대가리를 쳐내봐야 그 자리로 기어 올라올 놈들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 치이익, 물어보고 싶은 건 그게 답니까? 치익.
“아니, 아니,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혈청! 그건 확실하게 갖고 있는 거 맞습니까?”
― 치익, 장난이면 당신들이 우리 가만 놔두겠어? 내일 봅시다. 치이익.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무전은 끊어졌다. 한 중령은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무전기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야말로 좆같은 협상이다.
이쪽에는 가혹한 조건들을 잔뜩 따르라고 해놓고서, 정작 믿을 만한 이야기 같은 건 단 하나도 제시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신 중장의 몸이 달아 있으니 그로서는 이 조건들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 한 중령은 메모해 둔 노트를 들고 서둘러 비너스를 빠져나왔다.
다음 날 오전 8시 40분, 서울 상공에는 두 대의 코브라 공격 헬리콥터와 세 대의 블랙호크가 떠 있었다. 모두 보조 연료 탱크를 달고 있고,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현재 막강한 세력을 가진 군벌의 행차다운 위용이다.
“아무것도 없구만, 정말 여기가 맞기는 한 건가…….”
헬리콥터 창문을 통해 아래쪽 벌판을 내려다보며 신 중장이 이마를 찌푸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제멋대로 자라나 버린 잡초와 갈대뿐. 사람들이 오간 흔적도 없고, 당연히 값비싼 물건이 있을 만한 곳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인공적인 물건이라고는 널찍한 나무 탁자와 거기에 붙어 있는 긴 나무 의자가 전부다.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놓은 걸 보면 전해 들은 조건과 일치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너무 허술하다.
“좌표는 맞습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조철웅이 대답했다. 신 중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해가 안 돼. 사람을 이 먼 곳까지 굳이 오게 하기에 나는 뭐 정말 대단한 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게 뭐야? 허허벌판이잖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냥 한 중령 정도를 보내시는 게…….”
옆자리에 앉은 참모가 물었다. 요구 조건을 채울 것인지, 아니면 실없는 소리라 판단하고 그냥 돌아갈 것인지 결정해 달라는 말이다.
으음… 신 중장은 작게 신음하며 고민에 빠졌다.
이건 악의적인 장난인가… 또는 라이벌의 암살 기도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그 테라를 소유하고 있는 세력의 괴팍하고 조심스런 취향인가…….
하지만 그냥 철없는 장난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점들이 있다. 이렇게 복잡한 조건을 내걸고 수고를 하면서까지 장난을 칠 만큼 미친놈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리고… 이왕 한 시간이 넘게 날아오는 수고를 한 마당이니, 마지막 조건 하나를 더 충족시킨다는 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닐 터였다. 신 중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 보자. 근처에 위험 요소는 없나?”
“좀비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매복은… 크게 걱정되지 않습니다. 사실 암살 기도를 이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하는 놈들은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조철웅이 대답했다. 잠시 후, 그들이 타고 있던 블랙호크가 벌판 위에 착륙했다. 지시 받은 대로 모두 다섯 명이 내렸다.
조철웅, 두 명의 707특임대원, 한 중령, 그리고 신 중장. 특임대원 중 한 명은 신 중장의 대역을 맡아 그의 군복과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신 중장은 방탄헬멧과 방탄조끼를 단단히 갖춰 입은 채 그 뒤를 따른다.
나무 탁자에 다가가며 주변을 확인한 조철웅이 신호를 보내자, 상공을 유영하던 다섯 대의 헬리콥터는 천천히 북쪽으로 날아갔다. 고막을 흔들던 프로펠러의 소음이 사라질 무렵, 탁자 아래에서 무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 치이익, 신 중장님! 신 중장님! 응답하십쇼, 오버. 치칫.
조철웅은 탁자 아래에서 무전기를 집어 들고 송신 버튼을 눌렀다.
“약속한 대로 다 지켰다. 이제 거래 시작하지.”
― 치익, 수고 많았습니다! 잘 봤고요. 거기에서 북쪽으로 700미터 정도 직진하시면, 짓다 만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무전기 가지고 그리로 오세요. 치익.
“장난질은 그게 다지?”
― 치이익, 장난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치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