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충주의 가을 (3)
“미리 나가 있자.”
임수정과 작별 인사를 마친 뒤, 친구들은 신입과 규영이를 데리고 터미널 밖으로 빠져나왔다. 저녁 식사 이후에는 건물의 셔터가 내려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만큼 여기에서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일행은 장갑차와 발전기 따위가 즐비하게 늘어선 터미널의 버스 승차장을 지나 큰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슬슬 저녁 식사 배급이 시작될 무렵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덕분에 다섯 명의 남녀가 따로 움직이는 정도는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눈치껏 몇 번의 도로 횡단을 마친 그들은 아파트 단지 옆의 인가 골목 안으로 숨어들었다. 오늘 낮에 임수정과 여자들이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청소를 하고 옷이나 살림살이 같은 물건들을 수집해 왔던 장소다.
“건축 개발 사무소 2층이라고 했어. 거기는 아직 일을 하는 중이라 열려 있대.”
태권소녀가 임수정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며 앞장을 섰다. 규영이를 업은 삼식이와 유빈, 그리고 신입이 그 뒤를 따랐다.
“자, 이제 여기에서 좀 기다려. 새벽 올 때까지. 피곤한 사람은 몇 시간 정도 자도 될 것 같다.”
2층에 올라갔을 때, 유빈이 오른 팔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일행은 창가에 소파를 옮겨놓은 뒤, 그곳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 아주 조금 열어둔 창문 사이로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근데… 카트를 가져오지 않아서 그게 조금 걸리네. 얘 업고 걸어서 서울까지 어떻게 가?”
신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규영이를 가리켰다. 규영에게 물을 챙겨주고 있던 태권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 푹 놓고 쉬어.”
“뭐야, 선로에다가 카트라도 숨겨놨냐? 근데 너희 배낭에 먹을 거는? 서울까지 금방 못 갈 텐데… 저녁이라도 먹고 나올 걸 그랬네, 젠장. 똥 푸느라 구역질나서 점심도 거의 못 먹고, 조금 있으면 배고파질 것 같은 기분인데… 아까 지나오면서 보니까 이 짠돌이 군인들이 오늘은 웬일로 초코파이랑 과자도 한 봉지씩 주는 모양이더구만.”
“옛다! 이거라도 먹어라.”
삼식이가 가방에서 칼로리 바 두 봉지를 꺼내서 신입에게 건넸다. 칼로리 바를 한입 뜯어 먹고 나서 포장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신입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야, 근데 말이야… 너희 새로 둥지 틀은 데가 무슨 이태원이나 미군 부대 근처냐? 아까 삼식이 저 새끼 담뱃갑에도 순 영어 경고문만 적혀 있더니, 이 과자 껍데기도 한국말이라고는 없네.”
“하하하, 엄청 예리한데? 확실히 신입은 명탐정이네. 우리가 이태원에 집 얻은 것도 알고. 거기 외국 물건 많더라.”
삼식이가 재미있어 하면서 펌프질을 해주자, 신입은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소파 난간에 기댔다.
“새끼, 그 정도 촉은 기본이지. 용산에서 가까운데 외국 물건 많은 동네면 이태원. 딱 빤한 거잖아. 너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다 내 손바닥 안이다, 새끼들아. 후후후.”
그렇게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유빈은 벌써 의자에 기대 잠이 들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팔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도 힘이 들고, 부상당한 뒤에 한동안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았던 몸이라 아직 체력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이 그가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움직였던 건지 보여준다.
“에취!”
해가 지기 시작하는 창밖을 보고 있던 규영이 재채기를 하고 나서 자신의 팔을 문지른다. 녀석의 옷차림은 8월 19일에 장갑차를 타고 선로를 내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얇은 반팔 티셔츠 한 장뿐이다.
“이제 몇 주 더 지나면 꽤 쌀쌀해지겠어.”
태권소녀가 트랙 톱을 벗어 규영이의 어깨에 걸쳐 준다. 삼식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아마 비 한 번 쫙 내리고 나면 그다음 날부터는 공기가 좀 달라질 거야. 단풍 물들었던 나뭇잎들도 싹 다 떨어질 거고.”
“그렇게 되면… 여기 사람들 사는 거 더 힘들어지겠네. 지금도 맨바닥에 박스 깔고 그 위에서 자던데. 어린 애기들도 꽤 있었고. 겨울은커녕 가을도 못 넘길까 봐 걱정된다. 어휴우~”
태권소녀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빅 아일랜드의 물질적 조건이 너무 풍요롭다 보니, 이곳에서 고생하며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에이, 괜찮아. 생각해 봐. 이 동네에 원래 살던 사람들 머릿수가 지금 여기 와 있는 사람들보다는 많았을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입던 옷, 깔고 자던 이불… 다 그대로 쓸 수 있는데 뭐. 시간이 좀 걸린다 뿐이지, 점점 안정이 될 거야. 집도 이렇게 많잖아. 좀비들만 아니면 사람이 사는 데는 아무 문제 없어.”
삼식이는 언제나처럼 긍정적인 태도로 말하며 태권소녀를 안심시켰다. 물론 대전제부터 온전히 만족되지는 않는 이야기이다.
회전 운동을 하며 돌아다니는 좀비들이니, 언젠가는 이곳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때 좀비들에게 얼마나 효율적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이곳 사람들의 운명은 갈릴 것이다.
휘익―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의 그늘이 흔들리자 신입이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린다. 이미 몇 차례나 군인들이 소탕을 하고 지나간 뒤라 좀비 걱정은 크게 없을 거라고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려운 마음은 남아 있다.
“근데… 이렇게 나와 있다가 좀비들 떼거리라도 들이닥치면 우리만 너무 위험해지는 거 아니냐? 씨발, 좀 후달리는데?”
신입이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태권소녀가 가방에서 3단봉을 꺼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한두 마리는 내가 잡으면 되고, 그보다 많은 건 아예 나타날 일이 없어.”
“그걸 어떻게 장담해? 다른 동네에서 밀려올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도 확인 안 하고 왔을까 봐? 위에서 보니까 당분간 이 근처에 새로운 좀비들 나타날 일은 없겠더라.”
“위?”
신입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변에서 ‘위’라고 부를 만큼 높은 곳이 어디인지 둘러봤다. 20층은 족히 될 법한 아파트 단지들이 제일 유력해 보였다.
“에휴, 인마! 뭘 그렇게 의심이 많아!”
태권소녀는 신입의 엉덩이를 한차례 찰싹 때려준 후, 배낭에서 칼로리 바를 꺼내 씹었다. 그러고는 규영의 옆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새벽에 움직이려면 쉴 수 있을 때 좀 쉬어둬야 한다.
찌르륵― 찌르륵― 찌륵찌륵―
캄캄해진 사무실 주변에 귀뚜라미 소리가 꽉 채워졌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벌레 울음소리는 매미의 것이었는데, 어느새 계절이 바뀐 것이다.
“아… 이 사무실 안에 귀뚜라미 있으면 싫은데… 바퀴벌레는 괜찮은데 걔네는 아무 데로나 막 튀어서 질색이거든.”
태권소녀가 레깅스 차림의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친구들은 귀뚜라미 소리에 마음을 조금 빼앗긴 채 차례로 잠이 들었다. 불침번을 자처한 삼식이만이 문 앞을 서성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밤이 깊어 충주시 거의 전체가 잠 속에 빠져들 무렵, 친구들은 건물을 빠져나왔다. 굳이 플래시를 켜지 않아도 될 만큼 달빛이 환한 밤이다.
“야… 너희 지금 길 알고 가는 거야?”
빠른 걸음으로 골목 사이사이를 통과할 때, 신입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삼식이가 고개를 끄덕여 준다.
“응. 걱정 마, 신입. 아까 아침에도 이 길로 왔으니까.”
“정말 확실하게 알고 가는 거 맞아? 씨발, 아무래도 기분이 영 이상하고 안 좋아.”
신입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멈춰. 대기.”
태권소녀가 손을 들어 모두를 정지시킨다. 큰길에서 순찰을 도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들이 몸을 숨긴 골목 입구를 훑고 지나간다.
“탈옥하는 기분이네요. 이렇게 라이트를 피해서 숨어 있으니까…….”
삼식이의 등에 업혀 있던 규영이가 긴장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삼식이가 녀석의 허벅지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근데 이거는 잡히더라도 벌 안 받아. 그러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밤에 순찰을 도네, 이 새끼들… 전혀 몰랐어.”
자동차가 지나간 뒤에 다시 빠르게 걸어가면서 신입이 말했다. 삼식이가 녀석에게 대꾸해 준다.
“길에서만 저러는 게 아니야. 강에도 보트 타고 계속 돌아. 그리고 그 한참 너머에서도 철조망까지 치고 있고. 여기 대장 누군지 몰라도 엄청 꼼꼼해.”
대로를 가로지른 일행은 벼가 드문드문 자라나 있는 논으로 내려갔다. 질척한 바닥을 밟게 되자, 신입은 또 우는소리를 한다.
“야, 너희 정말 이 길로 온 거 맞아? 이 씨발… 아닌 거 같은데… 길 까먹었으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그냥 선로로 가자. 앞도 잘 안 보이잖아…….”
“앞은… 이걸로 보고 있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하고 따라와. 그리고 오늘은 달이 워낙 밝아서 굳이 이런 거 없어도 될 뻔했네.”
태권소녀가 뒤를 돌아보며 대꾸한다. 그녀가 머리에 쓰고 있는 걸 보며 신입은 또 한차례 놀랐다. 머리띠에 고정된 한 줄짜리 긴 렌즈가 두 눈의 가운데로 뻗어 나와 있다.
“야! 그, 그거 뭐야… 그거… 야투경인지 야시경인지, 그런 거 아니야?”
“아, 그놈 참, 엄청 부산스럽고 시끄럽네. 조용히 좀 해. 자꾸 소리 지를 거야? 다 보고 있으니까 그냥 믿고 따라오라고.”
태권소녀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다시 앞장을 섰다. 신입은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여전히 질문 공세를 멈추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게 어디에서 났어? 쓰는 법은 어떻게 또 알았고? 그냥 눈에 대고 켜면 되는 거야?”
“빌렸어. 여기 오는 동안에 쓰려고.”
“빌려? 원래는 누구 건데?”
“진우 거라고 해야겠지. 걔가 선물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선물은 또 누구한테서 받았냐고… 뭐 이렇게 수수께끼가 많아?”
어리바리하게 중얼거리고 있는 신입의 뒤통수를 유빈이가 꾹 눌러서 고개를 숙이도록 만든다. 모두가 납작 엎드렸다.
잠시 후, 남한강을 지나는 배에서 비춘 서치라이트가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배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일행은 다시 질척한 논바닥을 밟고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가까이 논과 밭, 비닐하우스 사이를 걸었고, 무릎까지 물이 차는 작은 개천도 건넜다. 그래도 태권소녀는 아직 멈춰 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형… 괜찮아요? 저 때문에 힘들죠?”
규영이가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엉덩이 받침이 달린 벨트와 어깨끈으로 그를 고정해 짊어지고 있는 삼식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35킬로그램 이상의 무게를 더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삼식이의 등을 흠뻑 적신 땀이 규영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든다.
“아니, 이 정도는 뭐, 예전에 일할 때에 비하면… 그리고 너 요새 좀 말랐나 보다.”
삼식이는 언제나처럼 여유 있게 웃으며 자신의 어깨에 얹힌 규영의 손을 또 다독여 준다.
“야… 이거 이상하잖아… 씨이~ 이게 진짜 너희가 왔던 길이라고? 아니… 선로 따라오면 되는 걸 왜 이런 데로 지나와? 정글 투어하는 것도 아니고…….”
신입이 다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보안관이나 진우도 없이 낯선 동네, 낯선 길을 걷고 있는데다가 깜깜한 밤중이니까 안심할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다. 유빈은 녀석을 돌아다보며 평안한 어조로 말했다.
“선로로는 못 가. 우리가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려오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불안해해서 안 된다고.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어.”
하지만 유빈의 그 말 이후에도 일행은 또 꼬박 30분 이상을 논두렁, 밭두렁을 걸었고, 버스와 철조망으로 입구를 막아둔 좁은 폭의 다리도 건넜다.
그러고 나서도 신입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까지 하이킹은 계속되었다. 이제는 간간이 비치던 서치라이트의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젠장… 진우가 왔어야지… 너희들만으로는 불안하다고. 하아~ 하아! 좀비 있으면 어쩌지…….”
풀숲 사이로 걷는 내내 신입은 못마땅하다는 듯 울먹였다.
“시간에 거의 맞춘 것처럼 왔네. 여유 있게 출발한다고 했는데… 올 때 길이 더 험한가?”
양쪽으로 초록색 벌판뿐인 도로위에 멈춰 선 뒤, 태권소녀가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하필이면 왜 이런 곳에 와서 서는지, 신입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멀리 보이는 농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이젠 길도 아주 좁아져서 자동차 두 대가 마주 지나가지 못할 정도다.
“저기, 삼식아… 이게 진짜, 너희들이 오고 싶었던 데가 맞니?”
짜증을 부리다가 지쳤는지, 아니면 자신을 버리고 갈까 봐 두려워졌는지 이제 신입의 말투는 예의 바르게 변했다. 삼식이는 배를 꽉 움켜쥔 채 소리 죽여 웃었다.
“아, 아이고, 배야. 저 버릇 또 나왔네. 긴장하면 동방예의지국 사람이 되는 우리 신입. 그래, 맞아. 걱정하지 마. 여기가 목적지였어. 그러니까 마음 푹 놔.”
“목적지가 여기면… 여기에서 산다고?”
신입은 더욱 위축되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름달 빛 아래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허름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정착하느니, 당장이라도 다시 터미널의 덩치 큰 아저씨 옆자리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다. 삼식이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건 아니지. 너희가 깜짝 놀랄 만한 게 있어. 그때 팍― 하고 터뜨려 주고 싶어서, 일부러 계속 말을 안 하고 비밀로 했어. 그 뭐라더라, 엄청 유식한 말 있잖아. 막 감동이 폭발하는 거. 그… 카, 카리스마인가?”
“…카타르시스?”
“아, 그래, 그거! 그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우리가 다 입을 맞췄지. 조금만 더 기다려. 기대해도 좋으니까.”
신입은 이 멍청한 놈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타르시스 느끼려다가 좀비에 물려 뒈지게 생겼는데, 혹시라도 버리고 갈까 그게 무서워서 마음대로 화도 못 내겠다.
“자, 이거 봐. 이거 보면 내가 그냥 아무렇게나 걸어온 게 아니라는 거 알 수 있을 거야.”
신입이 계속 불안에 떨고 있자, 태권소녀가 야간 투시경을 벗어 그에게 내민다. 신입은 그걸 눈에 가져다 댔다.
“어?”
온통 녹색과 검은색으로 바뀐 세상의 풍경에서 그들이 지나온 길의 전봇대마다, 혹은 도로의 가드레일마다 빛나는 흰 줄이 보인다. 정면의 도로 위에는 소용돌이처럼 여러 겹의 동그라미가 크게 그려져 있다.
“봤지? 이거야. 야광 마커로 그은 건데, 그걸 쓰면 그렇게 빛이 나는 것처럼 보여.”
삼식이가 크레파스 비슷한 모양의 물건을 손에 쥐고 내밀며 씨익 웃었다. 야간 투시경을 쓰고 보는 건데도 이 개새끼는 잘생겼다.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다.
“그래… 애먼 데로 데려오지 않았다는 건 알겠어. 그럼 그다음엔 뭔데?”
신입이 야간 투시경을 규영이에게도 한 번 씌워주며 물었다. 유빈이 대답했다.
“약속한 시간이 됐을 때, 우리가 와 있다는 걸 표시하면 돼. 이렇게.”
말을 마친 유빈은 배낭에서 꺼낸 동그란 물건에서 핀을 뽑아 좌측의 풀밭 안으로 집어 던졌다.
“오! 오오!”
퉁― 하는 작은 소리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야간 투시경을 쓰고 있던 규영이만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 감탄사를 연발한다.
“왜? 왜 그래?”
신입이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빛이! 빛이 쫙 나요! 환한 빛이! 이 주변 전체에! 뭐가 폭발한 것 같아!”
“안 나는데? 아무것도 없어!”
규영이가 야간 투시경을 넘겨주자, 신입도 또 감탄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우와! 다 하얗게 변했어!”
“적외선 그레네이드라던데. 제니가 통역해 준 말이라서 어차피 한국말로는 뭐라고 하는지 몰라.”
“적외선 그레네이드… 뭐에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쩐다.”
신입은 이미 카타르시스를 느낀 사람처럼 야간 투시경을 눈에 딱 붙이고 힘없이 웅얼거린다. 하지만 아직 놀랄 일은 더 남았다.
먼 하늘에서 유영하며 대기 중이던 폴이 유빈이 보낸 신호를 확인하고 헬기를 몰아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투투투투투투― 훙훙훙훙―
조용한 새벽의 대기를 흔들어 깨우는 프로펠러 소리!
신입은 깜짝 놀라 허리를 굽힌다. 규영도 화들짝 놀랐다. 그들이 어디로 숨을까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헬리콥터의 반짝이는 불빛이 낮은 산들을 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야이!”
다급해진 신입은 일단 삼식이의 등 뒤로 숨으려 든다. 헬리콥터에는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삼식이는 유쾌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어때, 신입? 카타르시스 느껴져? 우리 저거 타고 갈 거야!”
“진짜?”
신입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숨을 헐떡였다. 어째서 저런 걸 손에 넣게 된 건지, 아무리 상상해도 잘 연결이 안 된다. 아니, 애당초에… 저게 생겼다고 해서 그냥 몰고 다닐 수는 있는 물건인가?
“저거 운전은 누가해?”
“폴 할아버지가.”
“…뭐? 누구?”
신입이 얼이 빠져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동안 헬리콥터는 이미 원을 그려둔 도로 위에 내려앉는 중이었다. 프로펠러가 일으킨 바람 때문에 사방으로 마른 풀들이 날아올랐다.
드륵―
헬리콥터의 문이 열리고 총으로 무장한 사람이 내린다. 처음에 신입은 그게 진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내 덩치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저, 저건 또 누구야? 한국 사람 아니잖아!”
검은 피부, 건장한 체격의 짐을 보고 신입은 또 기겁을 한다. 유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후회했다. 삼식이의 의견을 따라서 서프라이즈 작전을 썼더니, 카타르시스는커녕 애가 겁에 질려서 오줌을 쌀 지경이다.
“안심해! 저기… 우리랑 같이 지내는… 에… 동료야! 짐이라고! 미군 특수부대 출신이랬어!”
“저 사람들이랑 같이 지낸다고? 하아~ 하아! 나, 나는 그거 별론데…….”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신입이 엉덩이를 뒤로 뺀다. 삼식이와 태권소녀가 녀석을 억지로 끌고 헬리콥터에 올랐다.
“하이!”
짐이 규영과 신입을 향해 미소를 지어준 뒤, 유빈에게 손가락을 펴며 물었다.
“투?”
유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스! 예스! 투!”
임수정이 합류할지 어떨는지 확신이 없었기에 애초에 출발할 때부터 제니를 통해 두 명 혹은 세 명이라고 이야기를 해놨었다. 짐은 고개를 끄덕이며 폴과 라파엘에게 말했다.
“돌아갑시다, 폴.”
헬리콥터는 순식간에 떠올라서 크게 한 바퀴 선회한 뒤, 서해 바다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신입은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헬리콥터의 내부와 짐의 개인 화기와 얼굴, 그리고 조종석의 두 백발 외국인 조종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 군인 아저씨는 우리랑 같은 데에서 안 지내! 거기 가면 우리들이랑 알렉스, 그리고 저 조종사 아저씨들뿐이야!”
유빈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설명을 하며 신입을 안심시킨다. 그래봐야 여전히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알렉스? 그건 또 누구야? 그리고… 그럼 이 사람은 어디 있을 건데?”
“에… 그게 배가 있어! 시추선인데! 가만있어 봐… 일단 선원들하고 문제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게 더 이해하기가 편하려나…….”
유빈이 설명을 하려다 말고 왼손으로 턱을 괴며 고민에 빠졌다. 조금 어설프지만, 이제 이 바이오닉 핸드로도 자세를 잡을 수는 있게 되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너무 복잡해. 내가 제일 간단하게 설명할게… 신입! 우리 있잖아!”
삼식이가 끼어들어서 신입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전보다 훨씬 편해졌어! 코스트코보다 100배는 더 안락한 데서 먹고 자고 쌀 수 있어! 너 팥빙수 있지! 그것도 실컷 먹을 수 있어! 제빙기도 있고, 믹서도 있어! 보안관이 저번에 나갔을 때, 팔 통조림도 가져다 놨어! 네 소원 성취할 수 있다고, 이제!”
“팥빙수? 갑자기 팥빙수는 왜? 그게 왜 내 소원이야?”
“왜긴! 폐쇄된 경전철역 계단 올라가면서 했던 이야기 기억 안 나? 제니가 뭐먹고 싶냐고 물었을 때, 네가 팥빙수라고 했었잖아.”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신입은 삼식이의 이야기에 홀려서 조금은 긴장이 풀어진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규영은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밤하늘과 밤바다를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다.
“누나… 지금이 음력으로 7월이에요, 아니면 8월이에요?”
둥글고 탐스러운 달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던 규영이 물었다. 태권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 아마 8월?”
“아… 그럼 저거 어쩌면 추석 보름달일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내일이 추석일 수도…….”
규영이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태권소녀도 창문에 바짝 다가가 닿을 듯이 가까운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추석…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추석이라고 하니까… 식구들 생각나네… 우리 가족… 만날 고스톱 쳤었는데… 이젠 아마 다 죽었겠지만.”
신입이 허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규영이가 태권소녀의 볼에 얼굴을 바짝 붙이며 말했다.
“다 죽긴 왜 다 죽어요. 가족 여기에 이렇게 잘 있는데… 우리가 다 가족이잖아요. 리처드 바크도 말했죠. ‘가족을 연결해 주는 끈끈함은 피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해 주는 기쁨이다. 모든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자란 집은 없다’라고.”
규영이 잘난 척을 하는 동안, 헬기는 보름달을 스치듯이 날아가며 빅 아일랜드에 더욱 가까워졌다.
그 섬에서는 얼음과 팥,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모두 한 지붕 아래에서 자라지는 않았던 가족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