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충주의 가을 (2)
“언제 왔어? 흐으윽~! 언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격렬하게 달려들던 신입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삼식이는 자신의 옷에 묻은 배설물을 털어내기 위해 땅바닥에 발을 쿵쿵 구르며 대답했다.
“오늘 새벽에 왔어.”
“아니, 미친…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한 달 가까이 되도록… 근데… 씨발, 이상한데? 너희들 얼굴 보면 한 달 동안 선로 위에서 걸어온 꼬라지가 아니야. 다른 사람들 보면 거의 얼굴에 뼈만 남아서 들어오더구만… 너희는 옷도 깔끔하고… 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던 신입이 유빈의 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 뭐야… 왜 한쪽 손에만 장갑을 끼고 있어… 그거 케블라 장갑도 아니잖아?”
“아아, 이거… 보여줄 테니까 너무 놀라지 마.”
유빈은 신입을 나무 그늘 뒤쪽으로 오게 한 뒤, 긴소매 옷의 왼 팔을 걷고 장갑을 쓱 벗었다.
“헉!”
바이오닉 핸드를 본 신입은 외마디 신음 소리를 흘리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동공만 흔들리던 신입이 말을 더듬는다.
“너… 너, 너 소, 손이… 아흐… 손이…….”
“아… 아니, 저기… 너무 그렇게 울려고 하지 마. 이미 다른 사람들 다 한 번씩 속상해하고 지나갔으니까. 그러니까 좀 진정해. 그리고 이거 손도 쓸 수 있어.”
유빈은 손가락들을 차례로 움직여가며 신입을 진정시켰다.
기이잉― 기이잉―
어두운 회색의 기계 손가락들이 굽혀지고 펴질 때마다 모터 작동하는 소리가 작게 울린다.
“야이 씨… 이게 뭐야? 팔이 다 날아간 거잖아…….”
신입은 당혹스러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팔은 멀쩡해. 그냥 여기까지 감싸도록 만들어진 거라서 그래. 그냥 팔목만 날아간 거야… 말해놓고 보니 좀 이상하기는 하네… 팔목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긴 한데…….”
유빈은 대충 설명을 마무리하고 다시 장갑을 꼈다. 괜히 기계손을 내보여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싶지 않다.
“대체… 어쩌다가… 근데 다, 다른 새끼들은?”
신입이 겁에 질린 눈으로 물었다. 유빈의 손을 보고 나니 모두의 안부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유빈은 기계손으로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 건강하게 잘 있어. 걱정하지 마. 다친 건 나뿐이야.”
“아니, 그러니까… 지금 어디 있냐고? 내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되지. 아, 그리고 테라는? 너희들 걔 구하러 갔었잖아.”
신입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녀석이 내팽개친 똥지게를 두엄 늪에 가져다 붓고 온 삼식이가 신입을 나무숲 쪽으로 더 잡아끌었다.
“응. 테라도 구했고, 다 잘 있다니까. 근데 지금은 우리 둘하고 혜주만 같이 왔어.”
“셋만? 야, 이 미친… 진우를 데려왔어야지… 그래야 몰래 빠져나갈 때 안심을 할 거 아니야. 그럼 걔네는 지금 코스트코에 있어?”
“코스트코에 안 있어. 그보다 신입, 모습 좀 숨겨. 우리랑 같이 담배라도 한 대 피우려면.”
삼식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신입은 비로소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슬슬 다시 배설물 양동이를 비우기 위해 사람들이 돌아올 시간이기는 하다.
“일단 물로 가서 좀 닦자. 이거, 냄새 너무 난다.”
삼식이가 손을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으면서 말했다. 신입이 끌어안고 비벼 대던 곳에도 온통 얼룩이 묻어 있다. 세 사람은 조금 떨어진 강가로 가서 얼굴을 닦고 옷을 빨았다.
“너, 그 손은… 어디에서 난 거야? 설마 이런 것도 어디에서 물건을 주워 와 네가 직접 끼웠어? 노가다 오래하면 그, 그런 것도 배우냐?”
“설마! 내가 이런 걸 끼울 줄 아나……. 좌우간 이거는 이야기하자면 굉장히 기니까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
유빈이 답했다. 삼식이가 다시 한 번 배설물 양동이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신입, 너 그동안 고생 많았구나… 이런 일 군말 않고 하고 있는 거 보면……. 규영이랑 수정이 누나는 잘 있어?”
물기를 짠 웃옷과 바지를 물가 바위에 걸쳐놓은 채 팬티 바람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삼식이가 물었다. 신입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잘 있다고 해야겠지. 근데 존나 힘들었어. 씨발, 진짜 말도 말아라. 시키는 일은 더럽게 많은데, 먹는 건 조막만큼 주고… 규영이는 규영이대로 불안해서 밤마다 너희 언제 오냐고 징징거리지…….”
“여기 돌아가는 거 보면 일이 많게 생겼어. 완전히 작은 도시 하나를 싹 다 청소하고 옮겨 와서 살려는 거잖아. 전기도 안 들어오는 데서… 담도 열심히 쌓는 것 같고. 오면서 보니까 이 주변에 논밭도 많더구만.”
강가 근처에 날아다니는 벌레들을 손으로 쫓으며 유빈이 대꾸했다. 신입은 질린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나는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여기가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 빡씨게 사는 거, 내 적성에 안 맞아.”
“그래그래, 고생 많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오늘 맡은 일은 끝내. 우리는 저녁때 너 만나러 다시 올게. 너 지금 터미널에 있는 거 맞지?
유빈이 녀석을 다독이며 일어났다. 삼식이도 젖은 옷을 다시 걸친다. 신입은 눈이 똥그래져서 묻는다.
“뭐? 오늘 맡은 일을 끝내라고? 지금 도망가는 게 아니야?”
“지금 어떻게 도망가? 군인들이 사방에서 지키고 있는데 너무 눈에 띄잖아. 굳이 잡거나 할 정신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일부러 얼굴을 팔고 다닐 필요는 없지.”
유빈이 대답했다. 신입은 한숨을 내쉰다.
“이 똥지게를… 또 지라고? 그 고생 끝났나 싶어서 좋아했었는데…….”
“이왕 참았던 김에 조금만 더 참아. 오늘 일과 길어봐야 앞으로 네 시간 정도나 남았을 건데, 뭐.”
“그래놓고 너희는 또 어디로 가려고?”
“규영이도 만나고, 수정이 누나도 만나고, 또 강 소위 아저씨랑 고 하사 아저씨한테도 간다는 말 정도는 해줘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너랑 규영이 없어져서 찾는다고 고생할 거 아냐.”
삼식이가 사방으로 찾아 헤매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신입은 갑자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들… 혹시 그냥 규영이만 데리고 도망가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응?”
“하하하하하, 들켰네! 아뿔싸!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나? 하하하, 신입,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 이따가 보자.”
“야! 야! 잠깐만! 저기 유빈이는 됐고… 삼식이 너는 이따가 나랑 같이…….”
뭔가를 요구하려던 신입이 말을 하다 말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아까 진우와 친구 사이라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던 계집애들에게 삼식이와 함께 찾아가서 보란 듯이 그 앞에서 친분을 과시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애들을 다시 만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워낙 여자들도 많고, 어떤 얼굴이었는지 이젠 기억도 잘 안 난다.
“아, 아니다. 됐어. 너희 이따가 꼭 와야 돼. 내가 씨… 한강에서 너희들 차에 태워서 구해준 게 나다! 너희, 그 은혜 잊으면 안 돼!”
끝까지 불안한지 신입은 바보 같은 소리를 진지한 표정으로 지껄여 댔다. 녀석에게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 유빈과 삼식이는 터미널 쪽으로 향했다.
가끔 ‘저것들은 왜 일을 않고 돌아다니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나면, 삼식이가 배가 아픈 연기를 하면서 유빈에게 기댔다.
“형! 형!”
2층 매장 안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규영은 유빈과 삼식이를 보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씩씩하게 잘 지냈지?”
“네! 와, 진짜 너무 걱정했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삼식이가 머리를 엉클어트려도 규영은 마냥 좋다고만 한다. 유빈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혜주는 아직 안 왔어?”
“네. 같이 온 거 아니에요?”
“아, 맞아. 충주까지는 같이 들어왔는데, 여기에서부터는 갈라져서 따로 찾아보자고 하더라고. 낯선 데 와서 무서운데, 우리 보호해 줄 생각도 않더라.”
“보호요? 흐흐흐흐.”
유빈이 농담을 하자 규영은 조금 여유를 찾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곧 유빈의 손을 보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아냐, 아냐. 그렇게 울지 마.”
유빈은 조용히 녀석의 등을 두드려주며 달랬다. 규영과 함께 매장 안에 남아 있던 부상병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맥없이 세 사람을 돌아본다.
전투 중에 팔이나 다리를 잃은 뒤에도 아무런 추가 조치를 받지 못하고 그저 방치되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유빈은 새삼 자신의 서글픈 기계손이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혜주 데리고 저녁때 올게. 걔 아마 수정이 누나 찾고 있나 봐.”
두 친구는 배낭에서 초콜릿 봉지를 꺼내 규영이의 손에 쥐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9월 중순의 충주 시내를 벗어나자, 도로의 양옆으로 논이 길게 펼쳐졌다. 누가 관리를 했을 리도 없는데, 그래도 용케 버티고 서서 이삭을 맺은 벼들이 보인다.
“저 정도로는 이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어려울 텐데…….”
도로변 난간에 기대서 아직 푸른색이 다 가시지 않은 논을 바라보며 삼식이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유빈은 걱정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저 쌀 아니어도 당장 올해 겨울 정도는 어찌어찌 넘길 수 있을 거야. 근처에 분명히 농협 창고도 있을 거고…….”
두 사람은 작업하고 있는 민간인들로부터 약간의 눈총을 받아가며 걸음을 옮겼다. 도로에서는 방치되어 있던 자동차들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거나, 배선을 뜯어내서 시동을 거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키리리릭― 키리리리― 부우웅―
힘겹게 시동이 걸리면 운전을 맡은 민간인이 자동차를 한쪽 구석으로 가져다 붙인다. 그런 후, 시동을 걸어두는 동안 차 내부와 트렁크에 있는 모든 쓸 만한 물건을 트럭에 옮겨 싣는다.
예전 서울에서 전차로 차량들을 짓뭉개 고철로 만들어 밀어놓던 때와는 다르다. 이제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으니 자동차 한 대, 한 대가 모두 소중한 자원이 된 것이다.
자동차 내부에 남아 있는 시체나, 전투 후 길거리에 방치된 좀비 시체를 수거하는 작업조도 마스크를 낀 채 바쁘게 움직인다. 다들 안간힘을 써가며, 곧 다가올 혹독한 겨울을 위한 대비를 하고 있다.
누구 한 사람의 생명도 잃지 않겠다는 지휘관의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작업 계획과 강도였다.
“멈춰! 두 분, 왜 작업 참여하지 않고 여기에 계십니까?”
작업 하는 민간인들을 호위해 주고 있던 병사들이 유빈과 삼식이에게 다가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묻는다. 유빈은 1초의 딜레이도 없이 삼식이의 옆구리를 툭, 치며 대답했다.
“아! 저희… 오늘 막 도착했는데요… 이, 이 친구가 계속 설사를 해 대는 바람에… 저기 의무대를 찾고 있습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지금 얘 옷에도 지려서 물에 대충 헹궈 입혔거든요.”
“아이고… 아이고… 죽겠네… 또 나올 것 같아요…….”
삼식이는 엉덩이를 부여잡고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군인들이었지만, 삼식이의 젖은 옷과, 아직도 군데군데 묻어 있는 갈색 얼룩, 그리고 초가을 바람에 은은하게 풍겨져 나오는 배설물 냄새는 유빈의 변명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대체… 얼마나 격렬하게 지리면 웃옷에까지… 멀쩡하게 생긴 놈이…….
“이 길 따라 계속 걸어가시면 대학교 건물이 나옵니다. 거기 입구에 의무대가 있으니까 검진 받으십쇼.”
병사는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삼식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행여 손이라도 닿을까 싶어 뒤로 물러났다. 단순한 배탈이 아니라 이질이나 심각한 전염병일 수 있으니 접촉을 금해야 한다.
“아아, 네, 고맙습니다. 아아아… 또 조금 나온 것 같은데… 나 좀 부축해 줘. 유빈아…….”
삼식이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군인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질 때쯤에야 걸음걸이를 정상으로 바꾸고 그들이 알려준 의무대로 향했다. 군인이 알려준 대학교 건물은 30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먼 곳이었다.
“일 안 하세요?”
의무대 건물 앞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던 고 하사를 발견하고 유빈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 하사는 깜짝 놀라며 두 친구를 맞았다.
“너희들! 와! 살아 있었구나! 대체 뭐야? 어디 갔었어? 너희들이 구해낸 사람들 다 도착할 동안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아아, 그게 이야기가 좀 복잡해요. 그보다 이거 선물입니다.”
유빈은 배낭 안에서 작은 박스들을 몇 개나 꺼냈다. 박스를 받아 든 고 하사가 중얼거린다.
“항생제네…….”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시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근데, 여기 와 보니까 약국도 많고 괜한 오지랖이었나 싶기도 하네요. 이렇게 도심으로 옮겨 오실 줄 몰랐었거든요.”
“아니, 아니… 고마워. 이런 약은 늘 모자라. 근데 이런 걸 어디에서…….”
“그냥 뭐… 오다 보니까 JL 창고가 있더라고요.”
대충 둘러댄 유빈은 정색을 하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날, 담장이랑 정문 날려주신 거,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많이 편했어요.”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할 일을 너희가 한 건데… 잠깐만 있어봐, 강 소위님 모셔올게.”
고 하사는 약품 상자를 안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며 말했다. 삼식이가 조금 놀라워하며 물었다.
“강 소위 아저씨도 여기에 같이 있어요?”
“다리에 총을 맞고서 계속 무리했잖냐. 상처가 도져서 지금 요양 중이야. 뭐, 꾀병이 한 반이긴 한데…….”
고 하사는 장난기를 섞어 대답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의 부축을 받아 절룩거리며 걸어 나오는 강 소위의 얼굴을 보니 결코 꾀병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와아~ 너희, 진짜! 어서 와! 어서 와!”
강 소위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두 팔을 벌려 친구들을 맞았다. 그의 몸은 열로 뜨끈뜨끈하다.
“나머지 친구들은? 그리고 테라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 소위가 물었다. 삼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잘 있어요. 아저씨는 다리 많이 아픈가 보네요.”
“아… 이거. 역시 너무 오래 걷는 게 무리였어. 좀 염증이 생겨서… 그런데 금방 나을 거야. 어, 그런데 유빈이 너…….”
다시 두 군인의 시선이 유빈의 손으로 향했다. 유빈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주고 장갑을 벗은 뒤 꽤나 멀쩡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보너스 삼아 팔 안쪽의 단추를 눌렀다.
위이잉― 위이잉―
모터 소리를 울리며 손목이 360도로 회전한다. 유빈의 딴에는 두 사람을 웃게 해주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는데, 강 소위도, 고 하사도 입을 굳게 다물고 비통한 표정을 짓는다.
군인이 나섰어야 할 일을 대신하다가 손을 잃은 이 어린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너 아까 약도 그렇고, 그 손도 그렇고… 대체 어디에서 그런 걸…….”
고 하사가 물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건 도저히 일반인 레벨에서 구할 수 없는 의수다. 유빈은 미안하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냥 지금 저희는 잘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안전한 데서 잘 먹고, 잘 자고 있어요. 다들 건강하고요.”
“그러면 다행인데…….”
강 소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삼식이도 그 옆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여기는 담배, 자유롭네요.”
“아, 뭐… 어차피 이 부근은 다 정리했거든. 산 너머까지 싹 다. 그리고 뒤쪽은 강이고. 이 정도야 괜찮겠지.”
강 소위가 길게 연기를 뿜어낸다. 유빈이 강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좀 의외였어요. 선로 따라 내려간다고 여기보다는 더 남쪽으로, 그리고 바다 쪽으로 가실 줄 알았었거든요.”
“뭐, 우리 여단장님께서도 처음엔 그럴 계획이었나 본데… 근데 괜찮은 자리 쪽에는 다들 누가 한자리씩 이미 차지하고 있더라고. 특히 해군들이랑 부딪치기 싫어서 이리로 올라왔지. 여기 주둔 부대는 다 어디로 차출되어 간 상태여서 무주공산이었으니까.”
“그러면 여기가 적임지여서 이리로 오신 게 아니네요.”
“음… 그래도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는 가장 낫다고 판단되지 않았을까? 뭐, 나 같은 쫄자가 이런저런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냥 괜찮아 보여. 주변에 호수가 많아서 물도 흔하고. 엄청난 규모의 좀비 무리들만 들이닥치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강 소위가 말했다. 한때 건대 쉘터의 700여 명을 책임지고 있던 막중한 무게를 벗을 수 있어서 꽤나 홀가분한 모양이다.
“총알은 어때요? 그만큼의 좀비들이 와도 막아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나요?”
유빈이 물었다. 강 소위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처음 한두 번이야 막아내겠지. 그런데 그게 세 번, 네 번 계속 이어지면 그때부터는 점점 힘들어질 거야. 어차피 더 이상 실탄 보급이 없을 테니까.”
“그러면 총알이 제일 아쉬운 거네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기름이나 식량은 아쉬운 대로라도 구해지지만, 실탄은 오로지 국방부를 통해서만 조달할 수 있는 거니까. 다른 부대 탄약고를 털지 않는 이상 안 생겨.”
그렇군요…….
유빈과 삼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보면 진우도 그 무거운 총알 가방을 늘 목숨처럼 짊어지고 다녔었다.
“친구들… 데려가려고 온 거지?”
고 하사가 물었다. 유빈이 그렇다고 하자 그는 다시 물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이야?”
그의 말투에 조금 우울함이 묻어 있는 이유는 임수정 때문이다. 겨우 다시 만났건만, 아직 그들은 둘만의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다.
특히 이곳으로 와서 정착을 위해 바쁘게 작업하는 동안에는 얼굴조차 잘 마주치기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 이 친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이제 그녀가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녀석들의 소식을 알고 얼굴을 본 건 반갑지만, 임수정과 영영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아리다.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이 어린 친구들은 완전히 잠적해 버릴 테니까.
“내일 새벽에 이동할 거예요.”
유빈이 대답했다.
“내일 새벽이라… 하, 이 친구들 진짜 행동력 하나는… 피곤하지도 않아? 오늘 여기 도착했다고 했잖아.”
머리를 긁적이며 웃던 강 소위가 손을 내밀었다.
“정말로 고마웠고, 대단했어. 너희를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건대에서 사람들을 구해주던 모습은 정말 잊지 못할 거야. 언제라도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뭐… 사실 너희를 도울 만한 재주 같은 건 없긴 하지만 말이야.”
유빈과 삼식이의 손을 차례로 잡으며 강 소위가 멋쩍게 말했다.
“벌써 많은 사람을 돕고 계시잖아요.”
유빈이 말했다. 두 친구는 강 소위와 고 하사에게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하고 의무대를 나섰다. 뭔가… 애잔한 기분이 드는 이별이었다.
“나는 떠나지 않을 거야.”
터미널로 돌아와 겨우 만난 임수정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코스트코보다 훨씬 안전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했는데도 여전히 고개를 젓는다.
“너희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안전해. 그리고 몸도 편하고. 정말이지 다 좋아. 너희처럼 멋진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흐뭇하기도 하고. 그 팀에 받아줘서 영광이야. 그런데… 여기에는 나를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 곁에 있어주고 싶어.”
“하지만 언니… 여기에서 너무 불편하잖아요.”
혜주는 안타까워하며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임수정은 이미 생각을 단단히 굳힌 모양이다.
“다른 친구들에게 안부 전해줘. 테라에게도 제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부탁할게.”
임수정은 늘 그렇듯이 평온한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어요. 잠깐만요.”
유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삼식이의 배낭에서 소형 태블릿과 이어폰을 꺼내 임수정에게 건넸다. 그녀가 이어폰을 끼자 유빈이 재생 버튼을 눌러준다.
제니와 나란히 서 있는 테라. 화면 속의 두 미소녀는 아주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다.
― 언니, 고마워요. 언니 덕분에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났어요.
제니가 손을 흔든다. 테라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 이걸 보신다는 게, 여기 오시지 않는다는 의미라서 좀 슬퍼요. 언니,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고마워요. 그리고 이건… 언니 거예요.
화면 속의 테라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카메라 쪽으로 내민다. 그 화면에 맞춰 삼식이가 주머니에서 테라의 시계를 꺼내 임수정에게 채워줬다.
“다행이야… 둘이 같이 있는 걸 보니까 정말 좋구나. 이런 일이 진짜로 가능하다니…….”
임수정은 눈물을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 거짓말 같은 모험의 해피 엔딩을 본 것 같아서 가슴이 뭉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