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사우스 에어리어 (2)
에어컨이 열심히 가동되고 있었지만, 거제도의 태양 호텔 스카이라운지 내부는 더웠다. 태양 그룹에서 준비해 둔 여흥에 취해 후끈 달아오른 군인들의 몸에서는 뜨끈한 욕망이 확확 뿜어져 나온다.
“하하하하, 요거, 요거, 요 계집애 말하는 것 좀 봐. 예끼, 요것아! 어른을 놀리면 쓰나, 하하하!”
“아잉, 왜요? 진짜라니까요. 오빠가 제일 어려 보여요. 저는 그래서 대장님인 줄도 몰랐어요.”
사방에서 달라붙어 아양을 떠는 미녀들에 취해 신 중장은 연신 술잔을 기울이며 호탕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젊어 보인다는 영혼 없는 칭찬 한마디에 그의 입은 또 헤벌쭉 벌어졌다. 그의 주변에 앉은 참모들도 미녀들이 권하는 술에 아주 녹아 들어간다.
군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해졌지만, 이런 여흥은 야전에서는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호사다. 어디에 주둔하든 간에 이만큼 젊고 매력적인 여자들을 끌어모은다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또 어찌어찌 사람을 모은다고 해도 태양 그룹이 관리하는 것처럼 그녀들이 아양을 부리게 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접대를 위해 와 있는 면역자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흥미로웠다. 수십 차례 이상 좀비에게 물어뜯긴 뒤에도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이 미스터 배라는 인간을 보고 있으면, 좀비란 놈들을 곧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근데 저 오빠는 되게 무서워. 엄청 무게 잡고 있어서… 가뜩이나 칼자국 때문에 무시무시한데… 대장 오빠, 오빠가 저 오빠보다 더 높은 사람 맞아요?”
신 중장의 무릎에 앉아 러브 샷을 나누던 여자가 테이블의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속삭인다. 그녀가 지목한 것은 왼쪽 이마부터 광대뼈까지 길게 난 칼자국이 아직 생생한 707특임대 소령 조철웅이다.
소령은 조용히 온 더 락 잔을 기울이며 이따금씩 시간만 확인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파트너로 지명되었던 두 명의 여자도 주변의 분위기와 다르게 축 처져 있다.
“어이, 조 소령! 각 좀 풀어! 아가씨들이 무섭다고 하잖나! 자네 파트너들도 좀 예뻐해 주고!”
신 중장이 소령에게 말했다. 소령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뻣뻣하게 양쪽으로 팔을 뻗어 아가씨들을 한차례 끌어안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저 시늉일 뿐이다.
군 수뇌부가 한순간에 동귀어진해 버린 제주도의 그밤 이후, 그는 신 중장을 그의 상관으로 택했다. 대가리가 사라져서 엉망으로 쪼개져 버린 군부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한 사람,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이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로서는 신 중장이 그가 접촉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군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통합을 위한 최적의 시기는 지나가 버린 뒤였다. 그리고 신 중장은 채 장군이 가지고 있던 배짱의 절반도 갖지 못한 인물이었다. 포부의 크기는 더욱더 작았다.
신 중장은 명운을 걸고 싸움을 벌여서 쟁취하겠다는 선택 자체를 하지 않으려 들었다. 대신에 천천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가 언젠가 미군이 복귀하면 그들이 흘리고 갔던 핵미사일을 고이 되돌려줌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인정받는 걸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인물이었다.
그런 한계를 보고 난 뒤, 소령은 채 장군이 회수했던 미군의 전술 핵미사일의 행방을 그에게 알리는 일을 미루고 있다. 이 인간이 군의 정점에 서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수색 중이니 잠시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로 시간을 벌고는 있지만, 그 방법이 얼마나 더 먹힐지는 모르겠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소령은 신 중장의 허락을 받고 노랫소리가 왕왕 울려 대는 스카이라운지에서 벗어나 복도로 나왔다. 창문 너머 멀리 거제도 북쪽의 공단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조 소령님, 무슨 불편하신 거라도…….”
복도를 지키고 서 있던 경호 병력들이 다가와 묻는다.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담배 한 대 피우러 나온 거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주변 경계 계속해.”
병사들을 물린 소령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공단의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곳과 울산, 포항 지역의 공단은 묘한 완충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군벌들은 보급품의 생산과 배급을 민간 기업에서 담당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서로 간 힘의 균형이 어느 한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지 않을 거라는 계산 때문이다.
그것이 군 병력으로 둘러싸인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공단의 운영을 대기업들이 맡아 할 수 있는 이유다.
말하자면 이곳이 욕망의 소용돌이로 뭉쳐진 거대한 태풍의 눈이기에 고요하달까…….
이 장사치 놈들을 제압하고 모든 시설을 압수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생산 시설을 어느 한 군벌이 독점하려는 순간, 그는 곧바로 주변의 모든 군벌들로부터 필사적인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실탄의 보급은 생존과 직결된 아주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 도태되는 것은 순식간일 터였다. 애초에 이 싸움은 누가 먼저 피를 흘리느냐에 따라 물어뜯을 대상이 달라지는 기묘한 구도로 짜였고, 그래서 다들 더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특히 상대방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기 때문에 섣부른 움직임을 보이기란 피차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가장 필요한 시설인 공단은 역설적으로 민간의 손에 남겨졌다. 모든 군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의견 수렴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생산 시설을 민간에 맡기는 것에 대해 무언의 합의를 이룬 상태였다.
그들이 취하는 액션이라야 태양 그룹과 친분을 쌓아서 다른 세력들보다 더 많은 실탄과 무기를 확보하는 정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좀비들로 덮인 활주로를 방치함으로써 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하는 것에도 해군과 육군은 암묵적인 동의를 이루고 있었다.
현대의 전투기라는 놈은 떠오르는 순간부터 골치 아파진다. 그러니 처음부터 싹을 밟아놓을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모든 전략적 결정의 근본적인 배후에는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좀비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낙천적인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좀비들 때문에 세상이 온통 뒤집혔다고는 하나, 그 기간은 이제 겨우 두 달.
예상 기간은 각기 다르지만,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더라도 좀비들이 자연 소멸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모든 장성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60년 이상의 장기 휴전을 계속해 온 나라의 군인이면서도 한 번도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는 장성들답게 안일한 태도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소령은 담배 연기를 창문에 뿜으면서 생각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겉보기로만 허장성세를 꾸미고 있는 군벌들의 태도가 답답하기만 하다.
이럴 거면 애초에 뭣 때문에 독립적인 세력을 표방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 누군가 ‘지금 가장 절실히 해야 할 일이 뭐냐?’고 질문을 던진다면, 조철웅 역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직 그 대답을 찾지 못했다.
해군 기지 습격 때 잃은 왼쪽 눈, 그 좁아진 시야처럼 그의 사고 역시 어떤 틀 안에 갇혀 있다. 그것은 평생을 누군가의 도구로서 살아온 군인이 홀로 광야에 나서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혼란이었다.
그는 자신과 특임대원들, 그리고 SEAL 대원들과 같은 정예 병력들이 제대로 된 상관을 만나 국가를 위해 올바로 쓰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런 등신 같은 술자리의 보디가드 노릇도 좆같고, 마냥 시간만 보내며 전투력에 녹이 스는 상황도 짜증스럽다.
어딘가에… 정말 제대로 된 장성은 없는 걸까…….
띵―
그렇게 조 소령이 어지러운 마음을 담배로 달래고 있을 때, 중앙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리고 예전에 뉴스나 신문에서 보았던 여자가 경호원들과 함께 내렸다.
태양 그룹 황 회장의 장녀 황나연.
‘제 나이처럼 보이지는 않는군.’
도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을 스쳐 가는 파멸의 마녀를 보며 조 소령은 생각했다. 풍성한 머리카락도 그렇고, 어린아이의 것처럼 팽팽한 피부도, 정장을 돋보이게 하는 날씬한 몸매도…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긴 여자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조금 억지를 부리면 그보다 열 살 아래로까지도 봐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엄청난 비용을 들여 관리를 받은 덕분이겠지만, 그래도 나름 대단하다.
“아, 조 소령님. 저희가 늦었습니다. 공단에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만 예의를 갖추지 못했네요. 자, 같이 들어가시죠.”
이전에 한두 번 본 적이 있는 임원이 조철웅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조철웅은 그들을 따라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쿵짝― 쿵짝―
최상층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넓은 연회장을 꽉 채우고 울리던 음악이 귀를 울린다. 술과 미녀들에 취한 군인들은 파멸의 마녀가 들어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음악에 맞춰 되는대로 블루스를 추며 낄낄댔다.
“신 중장님, 황 사장이 도착했습니다.”
참모 중 하나가 일러준 뒤에야 신 중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즐거우셨습니까? 저희로서는 언제나 베스트를 다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늘 너버스해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미스테이크가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요.”
마녀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신 중장은 의식적으로 위엄을 꾸며내며 술잔을 기울였다.
“큼, 큼, 미스테이크는 여기가 아니라 서울에서 하셨지. 암만 준전시 상황이라고는 해도 그게 대체 무슨 짓이오? 황 사장, 난 정말이지 크게 실망했어. 그런 건 대태양 그룹이 할 일이 아니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좀 더 스트레이트하게 말씀해 주세요.”
마녀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다리를 바꿔 꼬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신 중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뱉듯이 말했다.
“어린 아가씨들 있는 자리여서 내가 굳이 입 밖에 내긴 싫었는데,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수 없지. 당신들 서울에서 뭔 짓을 한 거요? 왜 멀쩡한 사람을 잡아다가 이상한 실험을 해? 그냥 실험도 아니고 좀비들에게 잡아먹히는 실험을!”
“하, 하하… 이거 제가 굳이 리스폰스해야 하는 이야기인가요? 누가 그런 말을 트랜스퍼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김 준장님이?”
마녀는 아주 뻔뻔한 얼굴로 대응했다. 신 중장의 얼굴은 차츰 딱딱하게 굳는다.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실수였나 보다 하고 나도 묻어버려 줄 수 있었구만… 이런 식으로 나올 거요? 태양 그룹 서울 빌딩에서 구출해 나온 민간인만 수천이라고 하던데 말이야.”
“그럼 김 준장 하는 말을 모두 트러스트하신다는 거네요? 시빌리언 수천을 우리가 가둬두고 있었다고요? 아니… 어떻게요? 서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었을까요? 좀비들이 매일 스트리트를 꽉 채우고 돌아다니는 도시에서요? 그 이야기가 로지컬하다고 생각하세요? 그 민간인들… 다 위탁 받아서 프로텍트하고 있었던 거예요. 바로 잠실 쉘터에서 부탁 받아서요! 애초에 거기가 아니면 그만한 생존자들이 있는 스페이스가 없어요!”
마녀가 곧바로 받아쳤다. 신 중장은 담배를 피워 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 이야기는 김 준장이 거짓말을 하고 누명을 씌웠다는 투잖소? 왜? 무슨 이유가 있어야지! 그 인간이 아무리 또라이 같기는 해도 다짜고짜 가만히 있는 태양 그룹에 싸움을 걸고, 있지도 않은 죄를 덮어씌울 만큼 미치지는 않았어.”
“이유야 있지요. 올웨이즈… 이유는 있어요.”
마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은근한 말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미스터 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태양 그룹은 계속해서 좀비들에게서 서바이브하는 법과 그것들을 격퇴할 가장 이펙티브한 방법을 리서치해 왔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게 꽤 완성된 레벨까지 이르렀죠. 혹시 신 장군님께서는 파이널 레벨 에볼루션 면역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생소한 단어에 대해 묻자 신 중장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마녀가 조금 전에 막 지어낸 신조어니까.
하지만 마녀는 ‘그것도 모르다니’ 하는 식의 웃음을 슬쩍 흘리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미스터 배는 환타스틱한 면역자예요. 좀비들에 아무리 여러 차례 물려도 그 크리티컬한 박테리아들의 어택을 모두 블록하고 이렇게 생존해 있죠. 하지만 우리 리서치팀 멤버들은 더 딥하고 시리어스하게 상상력을 발전시켜 봤어요. ‘이것이 정말로 궁극의 면역일까? 더욱 진화, 그러니까 에볼루션시킬 수는 없는 걸까?’ 하는 퀘스천을 가슴속에 품고 말이죠. 그랬더니 정말로 넥스트 레벨의 진화가 있더군요. 어이!”
거기까지 말하고 난 뒤, 마녀는 뒤쪽에 서 있던 경호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경호원 중 하나가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낸다.
“아니… 황 사장, 지금 뭘 하려고… 열심히 연구한다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그런 건 서울에서 있던 일이랑 무관하잖소? 암만 좋은 일이라고 해도 멀쩡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하면 누가 그걸 용납하겠냐는 말이오.”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샌다고 느낀 신 중장은 귀찮아하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경호원은 군인들의 가까이로 다가가서 태블릿의 동영상 파일을 재생시켰다.
“케어풀하게 잘 보세요. 짧지만 쇼킹한 영상이니까.”
마녀가 말했다. 화면에서는 가만히 서서 위쪽을 두리번거리는 테라의 모습이, 그리고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다니는 좀비들이 재생되고 있다.
희생자들의 피가 튀는 대목부터는 잘라내는 것으로 편집했기 때문에 영상의 길이는 짧았다.
그러나 신 중장을 비롯한 군인들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처음에는 테라의 아슬아슬한 옷차림에 홀려 화면을 바라보던 군인들은 좀비가 등장한 이후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황 사장… 이게 대체 뭐요?”
신 중장이 물었다. 마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누군지 아실 텐데요? K―Pop 스타잖아요. 테라라고 베리 페이머스한 아이돌이에요.”
“아니, 쟤가 아이돌인 건 아는데… 왜 좀비들이 저 여자애만 피해서…….”
“아! 어머, 제 정신 좀 봐요. 미리 저 시추에이션에 대해서 익스플레인한다고 해놓고 그걸 그만 포갓했네요.”
마녀는 한바탕 너스레를 떨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고서 생으로 지어낸 이야기들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 리서치팀이 이 아이에게 파이널 레벨 에볼루션 유전 인자를 주입한 뒤의 영상이에요. 미스터 배의 면역 체계에서 특정 유전자만 익스포트해서 그걸 변형 이식한 거죠.”
냉정한 상태의 평균적인 지능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장황설에서 뭔가 이상한 구석을 발견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신 중장과 그 참모진들은 술에 취해 있었고, 방금 전 말도 안 되는 놀라운 영상을 본 터라 이성이 반쯤 마비된 상태였다.
“그럼… 당신들이 저 애를 저렇게 만들었다고?”
“네. 여러 번의 익스페리먼트를 거친 뒤에 가까스로 석세스한 첫 번째 과실이랄까요? 그런데 지금 이 아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후후 아마 못 믿으실 거예요. 네, 바로 김 준장이 빼앗아갔죠. 우리 용산 빌딩에 브레이크 인해서 그냥 스틸한 거예요. 이 영상을 레코딩하던 바로 그날 말이에요.”
마녀는 그 말을 하면서 쓸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비극을 만난 주인공처럼…….
계산된 몇 초간의 침묵이 지난 뒤, 마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아까 신 중장님, 저에게 뭐라고 하셨죠? 김 준장이 왜 아무 이유도 없이 저희 빌딩을 어택하겠냐고요? 자, 이제 리즌을 보여 드렸어요. 김 준장은 저희에게 특별한 트레저가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저희는 기본적으로 군을 트러스트하고 있으니까 모든 인포메이션을 공유하고 헬프하기 위해서 노력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보답으로 이런 결과가 리턴되더라고요. 이걸 보세요. 조금 호러블하기는 한데…….”
마녀는 핸드백 속에서 몇 장의 인화된 사진을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수색 영상에서 캡처한 장면들을 출력한 것이다.
“으음~!”
사진을 들어서 눈가로 가져간 신 중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군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였지만, 그 정도로 끔찍하게 훼손된 시체를 본 적은 거의 없었다.
폭발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긴 시체들은 이 사진 속 남자에 비하면 편안하게 눈을 감은 축이다.
“심하군. 이게 누군데 굳이 이런 사진을… 술맛 떨어지게시리.”
신 중장이 물었다. 마녀는 비장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대답했다.
“저희 서울 본사 빌딩의 시큐리티 슈퍼 바이저였어요. 하지만 저희가 건물을 수색하면서 기록한 영상에 그런 모습으로 잡혔더군요. 사실… 아웃핏이 아니라면 누군지 알아낼 수도 없었을 거예요. 어떻게 사람을 그 정도로까지 크루얼하게… 그 사람도 한때 군인이었는데…….”
파멸의 마녀는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을 하며 잠시 말을 멈췄다. 메이저가 어쩌다가 저런 꼴로 뒈져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끔찍한 몰골을 보여주면 뭔가 조금이라도 동정의 여론이 생길 것 같다는 계산에서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건 좀비의 소행이 아니에요. 좀비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분명히 아주 샤프한 나이프로 정교하게 커팅한 거죠. 단지 고통을 맥시마이즈하려고요… 자, 그럼 누가 그렇게 했을까요? 김 준장의 말대로라면 붙잡혀 와서 모르모트 신세가 되어야 했던 미저러블한 민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특수부대 출신의 이 머슬맨을… 그에게는 총으로 무장한 부하들도 많았는데…….”
마녀가 지껄이는 동안 신 중장의 표정은 조금씩 미묘하게 바뀌어갔다. 마녀는 그 표정을 살펴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건 다 테라라는 파이널 레벨의 면역자를 욕심낸 김 준장의 디스거스트한 만행이었어요. 그리고 오히려 거짓말로 우리를 크리미널로 만들어 버렸죠. 왜냐면, 우리가 배드한 집단일수록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해도 다 포기브가 되니까.”
“그… 테라라는 여자 말인데, 그 여자로 뭘 할 수 있는 거요?”
신 중장이 물었다. 마녀는 슬픈 연기를 계속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네이밍은 파이널 레벨이라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아직 최종완성 단계에 들지 못했어요. 원 리틀 스텝이 남아 있었죠. 그 단계까지만 갔으면, 여기 계신 모든 VIP분들에게 항체를 만들어 드릴 수 있었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면, 여기 사우스 에어리어에도 그녀의 블러드 샘플이 아주 조금 남아 있다는 거예요. 저희가 며칠 내로 제공해 드릴 혈청은 딱 한 분만 사용하실 수 있어요. 위급하실 때 사용하시면 소생하실 확률은 피프티, 피프티! 이그젝틀리 50퍼센트예요. 100퍼센트가 아닌 게 아쉽지만, 그래도 제로보다는 머치 베터한 거죠.”
“한 사람분이라고?”
신 중장이 미간을 찌푸리자, 마녀는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낫 이너프해 보인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실험을 위한 미니멈의 양을 제외한 모든 걸 다 신 중장님께 드리는 거란 점만 리멤버해 주세요. 이게 신 중장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서 저희가 할 수 있는 베스트입니다.”
마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잘도 지껄였다. 그곳에 있는 아무도 그 피가 진짜 테라의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왜냐면 너무 커다란 거짓말은 오히려 꾸며낸 것처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김 준장은 그녀의 피를 계속 뽑아서 그… 치료약으로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신 중장은 테라를 빼앗긴 것이 못내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마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거기 테크놀로지 레벨로 잘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띠오리 상으로는 파서블하죠. 그뿐인가요. 매일 밤 끼고 자겠죠. 보약 먹듯이 말이에요. 그 많은 이노센트한 사람들을 죽여가면서까지 그녀를 납치한 건 어쩌면 후자가 더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히 어트랙티브하기는 하잖아요.”
“그… 그럼 그런 파이널 머시기를 더 만들어내면 되잖소. 한 번 성공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아뇨, 어려워요. 그걸 이뤄낸 지니어스 닥터 오도 이번 김 준장의 어택에 휘말려 브루탈하게 목숨을 잃었거든요. 물론 다시 재현할 수는 있지만, 타임이 좀 필요해요. 좀비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적의 군대를 만들 수도 있었는데…….”
마녀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말했다.
반신반의하는 신 중장의 마음을 혈청 선물 예고로 풀어 돌려보낸 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신 중장 측에서도 함부로 병력을 움직여 김 준장을 치러 갈 수는 없겠지만, 이제 적어도 불신의 싹은 틔워놓았다. 앞으로 신 중장이 김 준장의 고발 때문에 태양과 적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또 모레, 각기 다른 군벌을 불러서 똑같은 이야기로 해명을 하고 똑같은 엉터리 선물로 환심을 사면, 이 위기는 그냥 지나가 버릴 것이다.
“대디하고 연결해.”
소파에 기대앉은 마녀는 답답한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나 잘 마무리를 지었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기가 확 꺾인 미스터 배가 바닥을 노려보고 앉아 있다.
“저는 이제 쓸모없어지는 겁니까? 그런 특별한 면역자가 나오면…….”
미스터 배가 물었다. 무전기가 연결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파멸의 마녀는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노노노! 절대 그렇지 않아. 네버! 미스터 배는 우리 태양 그룹의 소중한 패밀리야. 가족이라고!”
그렇게 마녀가 떠들어 대고 있을 때, 경호원이 무전기를 두 손으로 받고 나서 마녀에게 넘긴다. 황 회장이 연결된 것이다.
마녀는 신이 나서 오늘 자신이 본 것과, 그것을 이용해서 어떻게 군인들을 달랬는지에 대해 떠들어 댔다.
― 치익, 그러니까… 어떤 계집애가 좀비에게 보이지 않는 면역자인 걸 알자마자… 그걸 사방팔방 떠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냐? 그 계집애는 우리 수중에 있지도 않은데? 치이익.
황 회장이 특유의 숨 막히게 만드는 쇳소리를 내며 묻는다. 마녀는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변명을 해보았다.
“회장님, 그게… 워낙 여기의 상황이 시리어스하고 프라블럼이 커서…….”
― 치이익, 왜 나한테 보고부터 하지 않았나? 그렇게 중요한 변동사항이 있었는데… 치익.
황 회장이 물었다. 평온한 어조였지만 이미 마녀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제 생각에는 그렇게 대처하는 게 베스트 웨이라고 판단했습니다.”
― 치이익, 미련한 년! 너 같은 돌대가리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년. 치익. 삐리릭.
잠시 침묵하고 있던 황 회장은 몇 마디의 욕설을 내뱉은 뒤, 일방적으로 무전을 끊었다. 마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이야기하지 말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관계는 테라를 황 회장의 눈앞에 데려오기 전까지 개선될 것 같지 않다.
“가까이 와.”
마녀는 경호원을 불러 조용히 속삭였다.
“경호팀 중에서 좀 똘똘한 애들 몇 명 골라서 난민으로 위장시킨 다음, 김 준장이 옮겨갔다는 곳으로 잠입시켜.”
“그런 다음에 뭘 하라고 할까요?”
경호원이 물었다. 마녀는 이를 바득 갈며 대답했다.
“테라, 그년을 잡아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