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사우스 에어리어 (1)
“스탑! 여기 잠깐 멈춰.”
태양 호텔 전용 진입로로 들어섰을 때, 파멸의 마녀는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기사는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고, 최고급 승용차는 이내 멈춰 섰다. 그것에 맞춰 면역자 미스터 배를 태우고 있는 뒤의 차량도 같이 멈춘다.
마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거제도에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태양 호텔의 건물이 달빛을 받으며 도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저 태양의 마크가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만든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3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마녀가 주문했다. 기사가 CD 체인저를 조작하자 이내 차내는 현란하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로 꽉 찼다.
“후우우~”
마녀는 무거운 마음을 달래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자동차 내에는 그녀와 기사 외에도 두 명의 경호원이 더 타고 있었지만,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지금 태양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는 낙동강 주변을 장악한 채 서로 팽팽하게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다섯 장군 중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그런 따위의 이유로 마녀에게 잔소리를 할 수는 없다.
마녀는 집게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은 채 가만히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심란하다. 이 어지러운 협주곡처럼.
서울의 본사가 무너졌다. 물론 그냥 명칭뿐인 본사 건물인데다가 그 건물 내부에는 오너인 황씨 일족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는 해도, 대한민국 땅에서 태양 그룹이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은 여전히 컸다.
개들 주제에 감히…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을 향해서 이빨을 드러내?
더욱더 큰 문제는 그 사건이 닥터 오가 뒈져 버린 정도로 끝내 버리기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군 내부에 있는 그녀의 정보원에 의하면, 체포된 연구원들이 민간인들을 실험체로 썼다는 걸 자백했다고 한다.
등신 같은 새끼들… 그냥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냥 지나가 버릴 문제인데…….
김 준장은 당장 연락이 닿는 모든 군부 수뇌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강구하자고 요청했다. 만약 그가 직접 올 수만 있었다면, 분명 남부까지 탱크를 몰고 돌진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김 준장은 태양 그룹의 수뇌부와 오너 일가가 모여 있는 낙동강 이남 지역까지 올 수 없다.
좀비들과 버려진 자동차로 꽉 막힌 도로도 김 준장 여단의 장거리 진출을 가로막는 문제지만, 더욱 큰 벽은 이미 남부의 군사적 패권을 나눠 쥐고 있는 여러 장군들이다.
그들은 힘들게 구축한 자신들의 영역 안으로 김 준장이 함부로 비집고 들어오는 상황을 결코 허락지 않을 테니까…….
그러므로 김 준장의 직접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난 건 아니다. 남부의 장군들이라고 해서 그런 커다란 허물을 알고 난 뒤, 그냥 가만히 지나가 줄 리는 만무하다. 분명히 꼬투리를 잡고 뭔가 요구를 해 올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주는 대가에 대한 요구를… 그 요구는 분명 꽤나 큰 비용을 지출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이런 일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이 선공이라고 믿고 있는 황 회장은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부근을 장악하고 있는 군벌들을 차례로 한 명, 한 명 초대해서 환락이 가득한 접대를 하고,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하는 방법으로 현혹시키려는 것이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라. 그들이 우리를 한편이라고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야.”
오늘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황 회장은 마녀를 불러 그렇게 명령했다. 이것이 후계자의 지위를 결정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칠 중요한 시험 무대라는 걸 알기에 마녀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부터 끄덕였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불안하다. 똥별들이 아무리 멍청하고 탐욕에 사로잡힌 놈들이라고는 해도 이번에는 이쪽의 흠결이 너무 크다.
그녀의 특기는 명령하는 것이지, 사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쉬운 소리를 하며 고개를 조아리려고 스카이라운지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내가 오더한 대로 프리티 걸들이랑 모델들 많이 준비시켰지? 접대에 프라블럼이 있으면 안 돼.”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마녀가 옆자리의 경호원에게 물었다. 경호원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이 부근에서 얼굴이 좀 예쁘다 싶은 애들은 싹 다 긁었습니다. 지금 신 중장네 애들 제정신 아닐 겁니다.”
“파인…….”
마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경호원이 곧바로 불을 붙여준다.
처음에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지… 김 준장이 말한 인간 실험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려면 이쪽에도 뭔가 그럴듯한 근거가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마녀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민에 빠졌다. 물론 똥별 놈들이 바라는 건 정의 따위의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득일 게 빤할 테지만, 그래도 그걸 단박에 인정해 버리면 협상이 너무 골치 아파진다. 저쪽이 현혹될 만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
역시 미스터 배를 앞세워서 좀비에 물리는 쇼라도 한판 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이미 한 번씩은 다들 본 쇼인데다가, 그게 묘하게 인체 실험을 떠올리게 만들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마녀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무전기 소리가 울렸다.
― 삑, 삐리릭, 황 사장님 그쪽에 계십니까? 삐릭.
“무슨 일입니까?”
경호원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금 소속을 밝히지 않고 무전을 날리는 곳은 한 군데뿐이다. 부산 국제 크루즈 터미널의 화물 카고. 마녀가 서울 태양 본사의 물건들을 가져와서 정리하게 하도록 한 남부의 연구팀이다.
― 삐릭, 황 사장님 오셔서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중요한 겁니다. 삐릭.
“어떻게 할까요?”
경호원이 마녀를 돌아보며 묻는다. 마녀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무전기를 달라는 손짓을 했다.
“중요한 비지니스라는 게 뭐야? 나 지금 신 중장과의 비즈니스 미팅 때문에 거제도 태양 호텔에 와 있어. 서울 인시던트에 대해서 네고시에이션해야 한다고. 그것보다도 중요한 일이야?”
― 삐리릭, 에…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삐릭.
“…생각한다고?”
마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확인을 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때에 화풀이할 놈이 걸린 것 같아 다그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무전기 건너편의 연구원은 별로 흔들리지 않는다.
― 삐익, 확신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삐릭.
“대체 뭔데 그래? 텔 미! 왜 이렇게 나를 바더하는 건데?”
― 삐리릭, 직접 보셔야 합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다. 삑.
마녀가 언성을 높이고 짜증을 부려봐도 연구원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하려 들지 않았다. 이쯤 되면 둘 중 하나다. 이게 보안이 확보되지 않은 무전상으로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일이든가, 아니면 저 연구원이 뒈지고 싶어 환장을 했든가.
이번에는 전자에 해당되는 것 같다는 강한 촉이 마녀에게 전해졌다. 마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투웬티 미니트 내로 가지. 그러니까 레디하고 있어.”
말을 마친 뒤, 마녀는 무전기를 경호원에게 넘겨주며 명령했다.
“차 돌려. 헬리콥터로 가자.”
“저기… 그러면 신 중장을 너무 오래 기다리도록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경호원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마녀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미스터 배라도 조인해서 접대하라고 해. 어차피 브랜디랑 프리티 걸스가 있는데 그깟 몇 십 분이 무슨 빅딜이겠어? 나는 팩토리에 프라블럼이 있어서 거기 스톱 바이 한다고 전하면 되잖아.”
마녀를 태운 자동차는 뒤의 2호차를 두고 빠르게 헬리콥터 이착륙장으로 이동했다. 승용차 운행을 허락 받은 숫자가 애초에 지극히 적기 때문에 도로는 한산했고, 시속 150킬로미터 이상으로 내달린 자동차는 몇 분 만에 이착륙장에 도착했다.
“크루즈 터미널로 가요. 넘버 쓰리 화물 카고로.”
자신의 것이 된 흰색 헬리콥터에 오르면서 마녀가 말했다. 헬기가 이륙해서 동쪽으로 기수를 튼다. 밤늦은 지금까지도 환하게 불을 밝힌 채 가동되고 있는 공장단지의 모습이 발아래 펼쳐져 있다.
실탄도, 차량 부품도, 저 공장단지들이 가동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오 마이… 이게 다야?”
목적지에 도착해서 화물 카고 안에 들어선 마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카고 바닥에 늘어놓은 물품들이 너무 초라했다.
이런 걸 가지러 가기 위해서 무장까지 한 인원을 두 대의 헬리콥터에 나눠 태워 서울로 보냈던 건가…….
“그렇습니다.”
양복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마녀와 무전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수석 연구원이다.
“그 빌딩이랑 닥터 오에게 우리가 인베스트한 게 얼마인데… 홀 빌딩을 서칭한 게 맞아?”
“열심히는 했습니다만, 그게… 군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연구원들이 웬만한 자료는 싹 다 파괴를 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며칠이나 지나서야 저희가 수색을 시작한 거여서…….”
“홀리 쉣! 이건 그냥 번치 오브 크랩이잖아? 이런 잡동사니들을 뭐하러 여기까지 가져왔어?”
마녀는 바닥에 놓여 있는 몇 개의 서류 파일들과 하드디스크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양복 직원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다.
“설마 이따위 걸 보여주려고 거제도까지 가 있던 사람을 급하게 콜한 건 아니겠지? 스페셜한 인포메이션이나 데이터가 있었어? 백신을 위한 포뮬러라든가?”
마녀가 연구원에게 물었다. 연구원은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암호를 넣어서 잠긴 걸 풀기는 했습니다만, 남아 있는 데이터라는 게 대부분 제조법이라기보다는… 실패담 비슷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이런 방향으로 접근해 봤지만, 잘 안 됐다’, ‘이런 가설을 세워봤지만 결국 실현은 안 되었다’ 하는 식이었습니다. 오 박사… 소문만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더라고요.”
“쏘 왓? 나를 부른 리즌이 그게 전부야? 닥터 오가 실패했다는 걸 알려주려고? 당신 미쳤어? 당신이 닥터 오보다 수페리어 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면 이건 빅 미스테이크야. 오늘은 그런 잡담을 하기에는 아주 배드 타임이었어!”
마녀는 미친 듯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연구원은 오히려 배시시 웃는다.
“그럴 리가요. 만족하실 만한 걸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황 사장님이 계속 다른 걸 물어보셨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연구원은 손가락을 탁, 튕겼다. 다른 직원들이 노트북에 연결된 빔 프로젝터를 가져왔고, 연구원 본인은 옆의 책상에서 사무용 의자를 끌고 와 마녀의 앞에 놓았다.
“조명을 좀 끄겠습니다.”
마녀가 의자에 걸터앉고 경호원 둘이 그녀의 뒤에 병풍처럼 붙어 선 뒤, 연구원이 말했다. 경호원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구원은 불을 끄라는 손짓을 보냈다.
탁― 탁― 탁―
스위치가 내려가고 전등이 꺼지면서 넓은 카고의 거의 모든 영역이 어둠 속에 잠겼다. 그러고는 프로젝터는 전방의 흰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복원이 끝나자마자 황 사장님께 제일 먼저 알려 드렸고, 그래서 가장 먼저 보시는 거라는 점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군요. 제 충성심을 알려 드리는 지표랄까요?”
노이즈가 흐르는 화면이 뿌옇게 밝아지는 동안 연구원이 말했다. 잠시 후, 마녀에게도 익숙한 본사 8층의 식사실 전경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 아아, 마이크 테스트! 원투, 원투… 잘 들어갔나, 이거?
노트북에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 영상인 모양이다.
“길어? 내가 좀 시간에 쫓기는 시추에이션이라서…….”
아무것도 없는 식사실의 모습이 몇 초 동안 지속되자 마녀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연구원은 여전히 빙글거리며 대답했다.
“길다는 게 몇 분을 의미하시는지 모르니까 그 질문에 대답드리기는 어렵네요. 하지만 잠시 후부터 엄청나다는 건 확실합니다. 시간 같은 것쯤은 잊으시게 될 거예요.”
마녀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한 번 꾹 눌러 참았다. 이 정도로 펌프질을 하는 걸 보면, 뭔가 정말로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핏―
한 번 암전이 있은 뒤에 화면의 구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똑같은 식사실이긴 하지만 새로 시작한 촬영분인 것 같다. 그리고 화면의 가운데, 크레인 앞에는 방호복을 입은 직원과 계집애 하나가 서 있었다. 마녀도 알고 있는 낯익은 얼굴.
“저거… 아… 뭐였더라? 핑크 펀치, 그 계집애지? 테라… 그래, 그런 이름이었어. 쟤가 잡혀왔었구나. 흥, 옷 꼬라지하고는. 쯧!”
마녀는 화면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테라를 안은 방호복 직원은 크레인을 타고 식사실 아래로 내려간다. 어글리 몬스터로 변해 버린 동생 놈이 한 달가량 머물던 장소다.
식사실 아래층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테라의 머리카락과 와이셔츠 자락은 계속 펄럭거린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테라를 억지로 카메라와 마주 보게 한 뒤, 방호복 직원은 재빨리 크레인을 타고 다시 올라왔다.
“훗, 설마 테라가 마이 브라더에게 잡아먹히는 시추에이션을 찍은 거야? 스너프 필름은 퍼니하기는 해도 별 대단한 가치는…….”
“이건 8월 18일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작은 회장님이 남부로 내려오신 뒵니다.”
마녀가 미리 넘겨짚고 한마디 하려 하자 연구원은 얼른 그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불안하게 좌우를 둘러보고 있던 스크린 속 테라의 뒤쪽에서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테라는 불안해하며 달아나려다 넘어졌고, 좀비들은 그녀의 아주 가까운 곳까지 접근했다.
“후후후후.”
시간에 쫓기며 짜증이 나던 상황인데도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마녀의 입술 사이로는 실없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제 잠시 후 보게 될 장면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어리고 예쁜 년들이 고통 받는 모습은 언제 봐도 유쾌하다. 하지만…….
스크린에 펼쳐진 영상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좀비들은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기만 할 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물론 달려들어 깨물거나 잡아채는 좀비도 전혀 없다.
영상 속의 테라는 방 전체를 가득 채운 좀비들 사이로 기다시피 도망가 머리를 감싸 쥐고 구석에 틀어박혔다. 여전히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좀비들은 카메라를 향해 포효한다.
“이게… 뭐야? CG?”
마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상식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영상의 충격은 그녀로 하여금 현실을 부정하게 만든다.
“아닙니다. 이 영상에는 어떤 편집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럼… 대체 이 언유주얼한 현상은 왜 일어나는 거야? 설마… 닥터 오가 좀비들을 컨트롤하는 법을 리서치한 건가? 사람을 어택하지 않도록?”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지켜보시죠.”
연구원이 대답했다. 몇 초 뒤, 식사실의 크레인 아래에 모여 선 좀비들의 포효가 더 커진다. 아가리를 쩍 벌리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놈들도 있다. 그리고 놈들의 머리 위로 발가벗은 젊은 여자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 그롸아아악, 가아악, 끄롸아아!
‘여자의 몸이 뼈다귀밖에 안 남았군’ 하는 생각이 채 문장으로 정리되기도 전에 좀비들은 여자의 몸을 덮쳤고,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튄다.
“댐!”
파멸의 마녀는 외마디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십 마리 좀비들로부터 공격 받은 여자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목숨을 잃었고, 식사실 바닥은 피와 살점으로 붉게 물들었다.
좀비들은 다시 몸을 일으키고 피 묻은 주둥이를 벌리며 카메라를 향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흐흐응!”
그제야 이 영상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마녀는 절정에 올랐을 때와 유사한 신음을 내뱉었다.
너무도 짜릿한 지적 자극!
진정한 면역자가 어떤 형태인지 깨달은 마녀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숨을 헐떡였다.
그 후에 영상에서 이어진 몇 명의 추가적인 희생은 마녀에게 무의미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살육극의 한가운데에서 아무런 위험도 겪지 않는 테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줌인된 스크린 속 테라는 다른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울부짖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영상은 끝이 났다.
“하아아~! 하아아~!”
상영이 끝나고 카고 안에 조명이 다시 들어온 뒤에도 마녀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거친 숨만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백 안을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찰칵―
연구원이 불을 붙여준다. 마녀는 초조하게 담배 연기를 연거푸 들이마신 뒤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저 계집애는 면역자인 거겠지?”
마녀가 물었다. 연구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것 외에는 설명이 안 되죠. 그리고 어쩌면 최종 진화 형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좀비들 사이에서 저것보다 더 효과적인 생존 형태가 과연 있을까요?”
“…그래, 좀비에게 투명 인간이 되는 타입도 다 있군… 왓 어 서프라이즈… 그래서 저 셀러브리티는 지금 어디 있어?”
“그건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저희가 본사 빌딩 수색 영상을 검색해 봤는데, 거기 시체 중에는 없었습니다.”
연구원이 대답했다. 마녀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맥없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다면 아마도 구조하러 온 군의 손에 넘어간 것이 틀림없다.
“이 영상은 어떻게 겟했어?”
“노트북이 계단에 떨어져 있는 걸 수색팀이 회수해 왔습니다. 물론 하도 많이 짓밟혀서 노트북 자체는 물론이고, 데이터도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죠. 그런데 필수 회수 품목에 들어 있는 물건이더라고요. 독특한 무늬가 박힌 노트북. 오 박사 소유. 그래서 그걸 복원하느라고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꽤나 애를 썼습니다.”
연구원은 자랑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마녀는 떨리는 손으로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후우우~ 일단 시추에이션 정리를 좀 해보자. 먼저 저 계집애… 저 영상을 찍은 날, 바로 닥터 오도 죽었고, 태양 빌딩도 부서졌네. 그럼 혹시… 무슨 데이터나 다른 수비니어 같은 건?”
“그날 오 박사가 혈액 샘플을 채집한 게 몇 병이나 있었습니다만, 그쪽 직원들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것도 다 박살 내버렸더군요. 피 자체가 아니라 보존 장비를요. 저희가 수색하러 갔을 때에는 그냥 더 썩어 있었습니다.”
“퍽킹 스투피드…….”
마녀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분명 엄청난 걸 봤다. 미스터 배 같은 건 이제 눈에도 차지 않을 만큼 클래스가 다른 무언가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손안에는 없다. 하다못해 피 몇 방울조차도.
그렇다면 이걸… 이 정보를… 대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하면 지금의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이 상황을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거지?
“댓츠 롸잇! 그래,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였어…….”
한동안 고민에 빠져 있던 마녀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고민들이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이다.
“테라의 블러드 샘플이 다 썩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마. 네버! 아예 잊어버려!”
파멸의 마녀는 연구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연구원은 영문을 몰라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 계집애 블러드로 세럼을 만들었다고 소문을 내야겠어. 수퍼 파워의 면역력을 가진 혈청이라고 말이지.”
“하지만… 그런 소문이 난다고 해서 어떤 이득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처럼 누군가 투자를 할 것도 아니고.”
연구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거짓말을 지껄여 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텐데…….
하지만 마녀는 자신만만했다.
“베리 스페셜 프레젠트라고 말하면서 장군들에게 선물을 하면 되지. 아직 혈액 배양이나 카피가 안 되는 상황이라 리얼리 소수에게밖에 줄 수 없다는 말도 덧붙이고. 그러면 아마 깜빡 넘어갈걸? 바로 내 편이 되는 거지.”
“아니… 하지만… 애초에 우리에게 테라의 피가 전혀 없다니까요. 없어요. 그런 혈청을 만들 재료 자체가. 그게 문제인 거잖습니까?”
“노노노, 프라블럼이 될 이유가 없지. 세럼은 그냥 누구 블러드든 간에 대충 뽑아서 만들어. 그런 다음 에스케이프 플랜을 미리 깔아두면 돼.”
기세가 오른 마녀는 뻔뻔한 얼굴로 연신 도리질을 한다. 연구원은 슬슬 이 멍청한 인간이 무서워졌다.
“문제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당장 혈청을 써보면 효과가 전혀 없을 텐데…….”
“말했잖아! 스페셜하고 레어해서 많이 줄 수 없다고 하면서 딱 한 병만 주는 거야.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양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지. 그리고 좀비에게 물린 뒤 이 세럼을 주사했을 때, 큐어돼서 살아날 확률이 50퍼센트라고 하는 거야. 어때? 피프티, 피프티! 그러면 만일 누가 진짜로 그 세럼을 사용했을 때 서바이브하지 못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해할 거야. ‘오, 저놈은 럭키하지 않군’ 하면서 말이지.”
그렇게 말한 마녀는 제 신을 이기지 못해 계속 히죽거렸다. 자신의 현명한 방법이 몇 번을 다시 검토해 봐도 그럴듯하고 마음에 쏙 든다.
“올롸잇, 일단 오늘 신 중장부터 만나야겠어. 당신은 세럼 준비해 두고.”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난 마녀가 홍조를 띠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거제도의 태양 호텔로 가서도 당당하게 할 말이 생긴 것 같다. 그녀가 하도 광기를 띠자 연구원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만약에 테라가 김 준장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게 밝혀지면, 그러면 저희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미 그것도 다 마이 플랜 안에 인클루드돼 있어. 걱정하지 마. 돈 워리!”
마녀가 말했다. 하지만 연구원은 걱정이 됐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