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겨울을 꿈꾸며 (4)
삐빗― 삐빗―
알람이 울린다. 제니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팔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있는 탁상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9월 11일, 오전 6시.
“으으음~!”
다시 고요를 되찾은 제니는 침대에 누운 채 쭈욱 기지개를 켰다. 방 안은 쾌적하고 평화롭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는 사랑하는 친구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테라의 숨소리가…….
방은 여유가 있지만, 그녀들은 한방을 쓴다. 침대를 나란히 두고 옆에 누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조잘대다가 잠에 빠져드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다.
특히 좀비가 되어버린 작은 회장의 소식을 테라에게 전할 수 있어서 제니는 기뻤다.
“으음… 벌써 여섯 시?”
옆 침대에서 자고 있던 테라가 눈을 깜빡거리며 졸음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묻는다. 제니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테라의 길고 까만 생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줬다.
“응, 졸리면 더 자. 너, 오늘 점심때부터는 좀 바쁠 거잖아.”
오늘 테라는 이곳으로 온 지 3주하고도 이틀 만에 처음으로 혈액 채취를 하기로 되어 있다. 그만큼 안정을 찾았고, 조금이기는 하지만 체중도 회복했다.
알렉스는 한 주 정도 더 쉬고 나서 진행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지만, 테라의 의지가 강했다.
제니의 허락을 받은 테라는 미소 짓듯 입술 끝을 올리며 다시 눈을 감는다. 제니는 그녀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 벽장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던 벽장 안에는 어제 보안관과 민구가 헬리콥터를 타고 나가 가져다준 옷가지들이 잔뜩 걸려 있다.
“우와…….”
그 소박한 사치스러움에 제니의 입에서 또 헤벌쭉 미소가 흘러나왔다. 입고 왔던 단벌옷을 빨면 그게 마르는 동안에는 헐렁한 면 티와 트렁크만 입고 버텨야 했는데… 이제는 여러 벌의 옷 중에서 골라 입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걸로 정했어?”
긴 옷걸이 한쪽에 따로 빼둔 새 검은색 미니 원피스와 새 구두를 보며, 제니가 테라에게 물었다. 테라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대답한다.
“응. 그게 제일 마음에 들어.”
“그런가? 흰 원피스도 괜찮아 보였는데…….”
“흰색은 혹시 피가 묻을까 봐.”
테라가 대답했다. 납득한 제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다. 그녀들이 이렇게 갑작스레 옷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민구의 고집 때문이다.
혈액 채취와 몇 가지 간단한 검진을 위해 테티스에서 헬리콥터로 의료진이 공수될 때, 민구는 선장과 두 명의 선원을 함께 데려오고 싶어 했다.
그들에게 테라를 보여주면 장기적으로 선원 그룹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연구진과의 거리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첫 상견례의 자리에 테라가 아주 그럴듯한 옷을 입고 나와줄 것을, 민구는 강력하게 요구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해도 허름한 옷을 입고 있으면 우습게 보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 막강 전투력이 한꺼번에 둘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아하던 유빈과 진우도, 결국 어느 정도 납득을 하며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어제 민구와 보안관은 폴의 도움을 받아 강남의 백화점까지 날아가서는 돈 한 푼 내지 않는 의류 쇼핑을 몇 박스나 해왔다.
정장, 트레이닝 복, 일상복에 속옷, 그리고 철이 조금은 지난 수영복까지… 소녀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다녀올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친 제니가 문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인사를 했다. 테라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며 말했다.
“나도 내일부터는 같이 뛸래. 이제는 운동화 생겼으니까.”
“보나마나 알렉스가 안 된다고 할걸? ‘우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조그만 벌레나 풀독도 널 키드인 테라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러닝머신에서 뛰라고 하겠지.”
제니가 알렉스의 말투를 흉내 내자, 테라가 가볍게 킥킥거린다. 제니는 조용히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어, 좋은 아침!”
이미 복도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기다리고 있던 태권소녀가 인사를 건넸다. 제니도 환하게 마주 웃어줬다.
“네,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 우와, 그 레깅스 잘 어울리네요. 확실히 새거라서 좋아 보여요.”
검은색 스포츠 탱크톱에 고기능 레깅스 차림의 태권소녀는 그야말로 매끈하고 늘씬하다. 스포츠 브랜드의 카탈로그에서 막 뛰쳐나왔다고 해도 믿길 것 같다.
“아아, 레깅스…….”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태권소녀는 짜증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젠장, 보안관 그 밥통 같은 놈. 일껏 백화점까지 가 가지고 내 옷은 트레이닝복만 한 박스를 꽉 채워서 가져왔어. 나도 짧은 치마 입을 수 있는데…….”
풋, 웃음이 픽 터졌지만, 제니는 얼른 그녀의 마음을 달래줬다.
“그만큼 언니가 레깅스 입은 걸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제 옷 중에 혹시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같이 입어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숙이가 반갑게 짖어 댄다.
얼―
그리고 녀석의 바로 옆에는 샘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 처음에는 꽤나 무섭기만 하던 얼굴이었지만, 3주 동안이나 보다 보니 이젠 귀여운 구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리고 워낙에 애교가 많은 개였다.
헥헥.
삼숙이가 계단 위쪽으로 마중을 올라오자, 녀석의 그림자처럼 샘도 계단을 뛰어오른다. 천생연분이랄까, 두 마리의 맹견은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삼숙이는 가끔 혼자만의 자유를 원하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이곳은 섬이다. 그것도 아주 좁은. 여자 친구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장소 따위는 없다.
“개장수 아저씨, 안녕!”
정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진우를 보며 태권소녀와 제니가 인사를 건넨다. 진우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지겨울 정도로 오랫동안 입었던 등산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지만, 그의 가슴팍엔 여전히 K―2가 걸려 있다.
삼숙이가 진우의 오른쪽 다리 옆에 달라붙자, 샘이 반대쪽 다리를 차지한다.
“그러게… 엉뚱한 쪽에서만 인기 폭발이네.”
진우가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원래 샘을 돌보던 크리스가 아무 걱정 없이 믿고 섬에 남겨둘 만큼, 샘은 진우를 잘 따랐다.
“보안관 오빠는요?”
늘 같이 조깅을 하던 보안관이 보이지 않자 제니가 물었다. 진우가 식당 쪽을 가리킨다.
“걔는 오늘 아침 식사 당번.”
“오늘은 어쩌냐, 네 애인 못 봐서?”
운동장 잔디 위를 천천히 달리기 시작해서 선착장을 향해 나 있는 오솔길 위로 접어들었을 때, 태권소녀가 놀리며 물었다. 진우가 되묻는다.
“애인? 누구? 설마 크리스?”
태권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가 유쾌하게 웃었다. 하긴, 그런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의 매일 붙어서 시간을 보내기는 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방문객이 너무 많아 크리스는 오지 못한다.
“그 사람이랑 총 쏘는 연습을 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아니면 통역해 달라는 핑계로 제니랑 같이 있는 게 진짜 목적인가?”
태권소녀가 물었다.
“아, 제니한테 미안하기는 한데, 정말 많이 배우거든. 그게 너무 재미있고 신기해서.”
진우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자, 태권소녀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진짜? 네가 총 쏘는 걸로 배울 게 있다고? 말이 돼? 너 완전 기계잖아. 그 사람이 너보다 잘 쏠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게… 종목이 좀 다르달까… 그 사람은 1킬로 이상 멀리 떨어진 목표를 정확하게 쏘는 법에 대해서 진짜 많이 알아. 내가 안 써본 총들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그… 총알 무게랑 총 종류 연계해서 풍속이랑 방향 같은 거 감안하는 법도 그렇고. 하여간 재미있어. 물론 제니는 지겹겠지만.”
진우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제니는 얼른 괜찮다는 말을 덧붙였다. 탄도학이니 뭐니, 조준경의 선이 어떻다는 둥, 자신이 이야기를 옮기면서도 막상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투성이라 여러 번 대화가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지만, 제니의 통역을 들으며 진우는 정말 진지하게 배웠다.
오른쪽 팔뚝에 각종 낯선 단위들을 미터법으로 환산해 놓은 표까지 붙여놓고 공부하듯 총을 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겹다는 말 같은 건 쉽게 나오기 어렵다.
여러 자루의 총을 죽 늘어놓은 채 먼바다에 떠 있는 부이를 맞출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모습은 그렇게 해맑을 수가 없다.
그리고 크리스와의 연습이 끝나면, 진우는 통역에 대한 보답처럼 제니에게 사격을 지도해 준다. 이곳에서 쉬고 있는 동안에도 진우의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싸움을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인 모양이다.
“그 걱정쟁이가 어제 두 명이나 내보내서 옷을 가져와도 좋다고 한 걸 보면, 이제 슬슬 여기가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거겠지? 규영이랑 수정이 언니도 곧 데리러 갈 수 있을까?”
태권소녀가 물었다. 이제 그들의 러닝 코스는 해변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니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유빈 오빠가 알렉스에게 말해두기는 했었어요. 데리고 와야 할 일행이 있는데, 두 명일지 세 명일지 정확하게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며칠 내로 출발할 생각 아닐까요?”
“알렉스는 뭐래?”
“세 명 정도야 상관없지만, 수가 점점 더 많아질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특히 혹시라도 다시 돌아가겠다고 할 사람이라면, 데려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여기가 알려지면 골치 아파진다면서요.”
“하긴… 태양 같은 새끼들이 있으니 신경 쓰기도 해야겠지.”
진우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린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오르막길을 만난 세 러너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질 무렵, 새로 만들어진 흙 봉분이 그들을 맞는다. 얼마 전, 용병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묻은 젠킨스의 무덤이다.
“이 일만 놓고 보자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이 큰 죄를 지은 인간인 것은 맞다만…….”
젠킨스를 묻을 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폴이 말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던 사람이란다. 여러 난치병의 특효약을 개발했었거든. 이렇게 악마가 된 채로 묻히는 걸 보니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구나.”
그런 이야기를 하며 폴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었다. 생전의 젠킨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세 사람이지만, 그런 사연을 듣고 나니 무덤 앞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왜 한때 착하고 똑똑했던 사람이 악마가 되어버린 걸까?
“속도 올릴까?”
해안과 오솔길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았을 때, 진우가 물었다. 태권소녀와 제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더 페이스를 올려 두 바퀴째를 돌고 나서, 세 사람은 오솔길을 거슬러 연구소로 돌아왔다.
매일 아침, 달리기로 섬의 둘레를 두 바퀴 돈다. 좁은 섬이니 대단한 운동은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뛰고 나면 한결 개운하다.
시절이 하도 수상하니 언제라도 전투 모드로 돌입할 수 있도록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혹시라도 편안한 생활 속에서 몸이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덥네. 9월이고, 여기는 섬인데…….”
나뭇가지 사이로 울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태권소녀가 중얼거렸다. 이른 아침인데도 달리기로 섬을 두 바퀴 돌고 나면 옷을 적실 만큼 땀이 솟았다.
“철로 따라서 내려간 사람들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기는 해. 그 사람들 아직 마땅히 숙소도 구해지 못했을 텐데, 날씨까지 추워지면 정말 고생스러울 거야.”
진우가 연구소 정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강 소위도 남쪽이라는 것 말고는 정확한 행선지를 모르던 긴 여정. 도착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편안할 리가 없다.
“삼식이 오빠, 일어났어요?”
컨트롤 룸 앞에 서서 엉덩이를 긁적이고 있는 삼식이에게 제니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컨트롤 룸 문에 붙은 칠판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제니야. 잘 왔어. 그렇잖아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삼식이가 제니를 향해 반갑게 손짓을 한다.
“뭔데요?”
“응, 이 중에 여자 이름 같은 거 있어?”
삼식이가 칠판을 가리킨다. 거기엔 잠시 후 이곳 빅 아일랜드를 방문할 사람들의 명단과 방문 예정 시간, 방문 이유, 체류 예정지 등이 적혀 있다.
보통 알렉스가 리그와 무전을 마친 뒤에 직접 적어놓는다. 평소에는 하루 방문할 수 있는 외부인의 수가 다섯 명 이하로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지만, 오늘은 예외적으로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꺼번에 찾아올 예정이다.
“음… 아마 이 사람이랑 이 사람, 그리고 어쩌면 이 마지막 이름까지도 여자일 것 같아요.”
다섯 명의 연구자 이름 중에 세 개를 제니가 찍고 있는 동안, 진우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여자 이름이면 뭐 어쩌겠다는 거야? 말도 안 통하는 놈이…….”
“하하하, 말이야 서로 친하게 지내다 보면 차차 익히게 되겠지, 뭐. 오오, 세 명이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하며 해맑게 미소를 짓는 삼식이의 머릿속에는 언어라는 커다란 장벽을 어떻게 넘을까 하는 걱정 같은 건 조금도 없어 보인다.
제니는 조깅 멤버들과 헤어져서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아기처럼 이불 속에서 아침잠의 마지막 단 맛을 즐기고 있던 테라가 실눈을 뜨며 맞는다.
“우와, 벌써 두 바퀴 다 뛰었어?”
“음, 먼저 씻을게.”
테라에게 인사를 해준 제니는 방에 붙어 있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머리 위로 쏟아지는 미지근한 물줄기. 이곳으로 옮겨와 누리는 여러 문명의 이기 중 제니에게는 이 샤워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호사다. 향기로운 비누로 몸을 씻고 마음껏 물줄기를 받고 있노라면, 약간의 죄책감까지 들 만큼 행복하다.
“자아, 이제 일어나요. 잠꾸러기.”
물기를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제니는 테라를 간질이며 일으켰다.
“꿈같아…….”
키득거리며 몸을 움츠리던 테라가 제니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잠실 쉘터의 1루 측 벽에 제니를 위한 메모를 써 붙이며 간절히 바라던 것들보다, 더 좋은 일들이 그녀들의 일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물론 불안한 바탕 위에서 억지로 균형을 잡아가며 누리는 행복이지만…….
두 미소녀가 손을 잡고 방을 나섰을 때, 복도에는 은은하게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미쳐 버리지 않는 데 크게 기여를 한다고 믿는 알렉스는, 아침부터 밤까지 꾸준히 클래식 음반들을 튼다. 민구의 말에 의하면, 리그 쪽에서도 계속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음악의 힘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좀비 울음소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던 지난 3주 동안 제니는 그간 자신들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으며 심각한 스트레스에 괴롭힘을 받아왔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요즘은 악몽을 꾸는 횟수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일도 확연히 줄었다.
“우와, 달걀 냄새! 고소해요!”
식당으로 들어서며 제니와 테라는 과장되게 메뉴에 대한 칭찬을 해줬다. 오늘의 식사 준비 당번이었던 보안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비록 진짜 달걀을 깨서 프라이팬에 굽는 것이 아니라 냉동 스크램블 에그를 전자레인지에 데운 어설픈 것일 뿐이지만, 그래도 요즘 도통 먹어보지 못했던 별미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신입은 아마 이걸 보면 미칠 거야. 얼마나 좋아할까.”
차가운 음료수와 맥주가 가득 채워진 냉장고의 문을 열고 주스를 꺼내던 삼식이가 중얼거렸다. 그 녀석은 줄곧 팥빙수 같이 차가운 음식을 먹고 싶은 1순위로 꼽곤 했었으니까……. 이곳이라면 얼음을 믹서에 갈아 시럽을 듬뿍 뿌려줄 수 있다.
“잘 잤니? 기분은 어때?”
접시에 자신의 몫의 음식을 담던 알렉스가 테라에게 물었다.
“푹 잤어요. 기분도 편하고요.”
테라의 대답을 들은 알렉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거 반가운 이야기구나. 오늘은 채혈할 양은 5온즈라서, 크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그러나 만약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는 기분이 든다면 주저하지 말고 알려줘. 언제든지 뒤로 미뤄도 되니까.”
“네, 그럴게요.”
테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스크램블 에그와 데쳐 낸 냉동 야채, 전자레인지에 데운 냉동 고기파이를 나눠 먹었다.
물론 이 식사 시간이 가장 힘든 것은 유빈이었다. 다친 부위의 통증도 여전히 남아 있는데다, 음식을 접시에 담아 자르고,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고, 냅킨으로 닦는 것 까지 모든 걸 한 손으로 다 해내야 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익숙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따금씩 자기도 모르게 분통이 치밀어 오르곤 한다.
“아아, 맞다! 바이오닉 핸드 말이야. 오늘 의료진이 네 바이오닉 핸드도 함께 가져올 거야. 어제 조립을 마쳤다고 하더군.”
포크를 내려놓고 음료수를 집어 들던 유빈에게 알렉스가 말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제니가 번역을 해주기도 전에 ‘바이오닉 핸드’라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유빈은 두근거리는 심정을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
“아… 근데 괜찮을까? 팔목 잘린 데가 아직 좀 아픈데…….”
“당연히 아프지. 얼마나 큰 상처인데… 그냥 일단 잘 맞는지 시험착용만 해봐. 그리고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에서 감각을 익히는 연습도 해보고. 일단 가장 출력이 약한 모델이니까 감을 익히고, 그다음 점점 더 출력이 큰 모델로 옮겨가자고.”
알렉스가 말했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알렉스는 교만하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식사를 끝낸 친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방문객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테라는 민구가 가져다준 검은 미니 원피스로 갈아입었고, 제니는 공을 들여 그녀의 머리를 윤이 나게 빗어주었다.
바텐더 역할을 담당하게 된 삼식이는 보안관과 태권소녀의 도움을 받아 식당에 방문객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 놓았고, 알렉스는 유빈의 잘린 팔목에 실리콘 패드를 대주고 테이프로 정성껏 감아줬다.
그리고 진우는… 테라가 방문객들과 만나고 채혈을 하게 될 식당의 구석에 테이블과 의자를 옮겨와 자신의 K―2를 숨겨두고 거기 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을 믿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래도 늘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 한다. 무방비로 낯선 이들을 맞이하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투투투투투투― 훙훙훙훙―
아침 식사를 마치고 테티스로 이동했던 폴의 헬리콥터가 다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테라가 의료진과 선원들을 맞으며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제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새 옷에 새 구두까지 갖춰 입은 그녀는 한 번도 상처 입어본 적 없는 귀족 아가씨처럼 보인다.
“오! 당신 여동생은… 아마 당신 어머니를 닮았나 보군! 아름다워!”
테라를 본 선장이 과장된 말투로 칭찬을 쏟아냈다. 선원들도 깜짝 놀라 민구와 테라를 번갈아 본다.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니는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여동생이라니… 민구 아저씨, 대체 족보를 어떻게 만들어놓은 걸까?
하지만 테라는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를 받아 민구를 ‘우리 오빠’라고 부르며 선원들에게 맞장구를 쳐줬다.
그 후로 제니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선원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받았고, 검진을 받는 테라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으며, 옆방으로 옮겨가서 바이오닉 핸드를 조립하는 법에 대해 담당 연구원이 일러주는 말들을 유빈에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오빠, 먼저 이 실리콘 튜브를 쭉 당겨서 끼워야 한대요. 그래야 이 손이 힘을 받는다고. 그리고 튜브 끝에 있는 나사에 이 조인트를 돌려서 끼워 넣으래요. 그런 다음에 조인트에 바이오닉 핸드를 부착한다고 했어요.”
“응! 응!”
상기된 표정의 유빈은 제니가 일러주는 말을 따라 열심히 손을 놀렸다. 윤기가 흐르는 짙은 회색의 기계손을 조인트와 팔꿈치 위쪽, 두 군데에 고정시키는 작업만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파요?”
상처에 바이오닉 핸드가 닿을 것이란 걱정을 하며 제니가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아니. 참을 만해. 괜찮아.”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상상을 하래요. 오빠 팔에 밀착된 센서가 오빠의 신경에서 나오는 전기신호를 감지하고 움직인대요.”
“어… 응, 그렇게 해볼게.”
유빈은 낯선 기계손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끼이잉―
살짝만 손을 벌리려 했는데, 손가락이 확 벌어진다. 다시 오므려 보려고 하면 두 손가락만 움직인다.
“후우우~”
유빈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신의 기계손을 노려보고 팔에 힘을 준다. 그래봐야 움직이는 모습이 영 불안하기만 하다.
“테라 옆에 있어줘, 제니야. 이제 네가 요령 다 알려줬으니까 나는 연습만 하면 되잖아.”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봐도 바이오닉 핸드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유빈이 말했다.
“아니… 난 오빠 옆에…….”
“피 뽑는 첫날인데다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왔잖아. 불안할 거야. 나는 괜찮아.”
유빈이 억지로 밝게 웃는다. 기대와 다른 바이오닉 핸드 때문에 그가 꽤나 실망했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은 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이따가 올게요. 오빠도 힘내요.”
“응.”
유빈은 짧게 대답하고 또 바이오닉 핸드에 매달려 땀을 흘리면서 씨름을 한다. 그 모습이 애잔하고 대견해서 제니는 키스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어때요? 테라 잘하고 있어요?”
식당으로 돌아간 제니는 구석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 진우에게 물었다. 수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태권소녀와 함께 앉아서 테이블 위에 영어로 된 책까지 한 권 떡― 펼쳐 놓고 있던 진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지금까지는 그냥 서로 인사하고 선원들이랑 이야기 좀 하고, 분위기 좋아. 아마 지금부터 건강 상태 확인하고 피 뽑을 건가 봐.”
테라의 옆에는 보안관과 민구가 호위무사처럼 든든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다. 지금 그들이 머무는 식당의 공기는 현재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이 느껴졌다.
서로의 역할이 필요해서 연대를 꿈꾸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언제든 야수나 악마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견제와 감시의 끈을 잠시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진우가 크리스와 사격 훈련을 할 때도, 보안관과 태권소녀가 에디, 마리오와 함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도, 알렉스가 잠자리에 들 때도, 그들은 꼭 보험의 수단을 한구석에 마련해 둔 채 움직여 왔다.
“제니야, 잠깐만…….”
테라의 건강이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채혈이 마무리되었을 때쯤, 삼식이가 뒤에서 다가와 슬며시 말을 건다.
“네?”
제니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삼식이와 오늘 의료진의 일원으로 따라온 한 여자 연구원이 서 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제니의 엄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 연구원은 삼식이가 자신을 왜 붙잡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하이! 나, 삼식이! 삼식이!”
제니가 오자 삼식이는 비로소 안심을 하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소개를 했다. 여자 연구원도 억지로 사회생활용 접대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알려준다.
“멜리사예요. 반가워요.”
“아항, 멜리사라고 하는구나. 제니야, 이 사람한테 지금 사귀는 사람 있느냐고 좀 물어봐 줘.”
삼식이가 말했다. 제니는 당황스러웠다.
설마… 지금 이 아줌마를 꼬시려는 건가? 아니, 도대체 이 뚱뚱하고 작달막한 아줌마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제니는 테라의 옆에 붙어서 있는 나머지 두 명의 여자 연구원을 돌아보았다. 둘 다 멜리사보다는 훨씬 젊다. 그리고 그중에는 꽤 늘씬한 북유럽형 미인도 있다.
저런 사람을 놔두고…….
어쨌든 부탁을 받았기에 제니는 삼식이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예상대로 멜리사는 적잖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 어린 친구가 그런 일을 왜 궁금해하는지 모르겠구나.”
“없으면 좋겠어서 물어보는 거라고 해줘. 예뻐서 저절로 관심이 간다는 말도 해주고.”
제니가 옮겨준 말을 듣고 나서도 삼식이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건 통역을 하는 제니다.
“허! 예쁘다니! 이게 뭐지? 이런 장난이 무례한 거라고 좀 말해주겠니? 내가 안 예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놀림을 받을 이유는 없어!”
멜리사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아니야, 예뻐. 바로 여기가… 이 두 겹의 턱이. 꼭 아기 같아서 사랑스러워.”
삼식이는 느긋하게 자신의 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여기까지만 할 거예요. 또 화내면 미안하다고 하고 보내줘요. 알았죠?”
제니는 미리 못을 박아놓고서 삼식이의 말을 옮겼다. 한데 멜리사는 의외로 약간 누그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흐음…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구나. 그래, 고맙다고 전해주렴.”
멜리사는 새침하게 고개를 모로 틀면서 삼식이를 돌아본다. 삼식이가 보드카 칵테일을 내밀자 한 모금을 마신 멜리사는 ‘일하는 중에 이게 무슨……’이라며 삼식이의 팔을 두들기고 웃는다. 그녀의 마음속 벽은 이미 80퍼센트 이상 함락된 모양이다.
점점 더 달아오르는 두 남녀를 더 이상 지켜보기가 두려워져서 제니는 슬그머니 테라가 보이는 테이블로 다시 돌아왔다.
그 후로도 한 시간 이상 간단한 다과를 나누며 테라에게 간단한 질문이 이어졌다. 테라는 조금도 싫은 내색 없이 미소를 유지하며 연구원들과 선원들의 궁금증에 답을 해주었다.
좀비 사이를 걸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테라의 목소리로 직접 들었을 때, 선원들은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저씨, 배에서 지내시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방문객들이 돌아갈 채비를 마치자, 테라가 민구에게 물었다. 민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음, 이 녀석들이랑 같이 노는 게 꽤 재미있어. 아마 오늘도 돌아가면 네 이야기로 난리가 나겠구만.”
“그래도 여기 가끔 들러주세요. 얼굴을 봐야 안심이 돼요.”
테라가 말하자 민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일단 좀 안정되고 나면. 오늘 용병 없이 두 그룹을 섞어서 데려오긴 했지만, 느껴지는 공기가 아직은 아슬아슬해.”
민구는 ‘오빠’답게 테라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준 뒤, 헬리콥터에 올랐다. 뒤쪽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멜리사는 삼식이를 향해 통통한 손가락을 흔들어 보인다.
그렇게 긴장 속에서 이뤄진 첫 번째 방문과 채혈은 무사히 끝이 났다.
“아아, 역시 꽤 괜찮은 사람이 있었어.”
하늘 높이 떠오른 헬리콥터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며 담배 연기를 뿜던 삼식이가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사연을 아는 제니로서는 어딘가 한숨이 나는 미소였다.
“아아, 늦었네. 민구 아저씨한테 인사를 못했는데…….”
뒤늦게 쫓아 나온 유빈이 머리를 긁적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당연히 바이오닉 핸드를 장착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유빈의 손은 잘린 모양대로 뭉툭하다.
“왜 그렇게 하고 나왔어? 로봇 팔은?”
보안관이 묻는다. 유빈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아, 그게… 아직 상처가 좀 아프더라고. 그래서 벗었어.”
“많이 아파? 어딘가 맞지 않는 거 아닌가?”
알렉스가 걱정스럽게 묻자,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꿰맨 데가 쓸리는 기분이라서요.”
“뭐, 차차 익숙해질 거야.”
알렉스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친구들은 유빈이 바이오닉 핸드를 장착한 모습을 보지 못한 걸 아쉬워했지만, 그의 속마음을 아는 제니로서는 가슴이 아팠다.
저 걱정쟁이가 첫 외부 방문객들을 온전히 친구들에게만 맡기고 몰입했을 만큼, 유빈은 바이오닉 핸드에 설레어 했고, 기대도 컸다. 하지만 암만 땀을 흘려도 그게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냥 벗어두고 나온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 그저 덜렁거리고 붙어 있기만 한 바보 같은 로봇 팔을 보여주기 싫었던 거다. 얼마나 실망스러웠으면…….
“그럼 오늘 남은 스케줄은 휴식인가?”
태권소녀가 기지개를 쭉 켜며 물었다. 진우도, 유빈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오늘 다들 고생 많았어. 다들 낯선 사람들이어서 꽤나 긴장됐을 거야.”
유빈은 애써 쾌활한 목소리를 꾸미며 말했다. 그렇게 빅 아일랜드의 9월 11일 공식 업무는 끝이 났다. 친구들은 선원들과 연구원들의 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를 기울였다.
알렉스는 여전히 테라의 상태를 관찰했고, 태권소녀와 진우는 그런 알렉스를 지켜봤다.
“슬슬 저녁 준비 해야겠다. 유빈이는 점심도 제대로 안 먹었는데…….”
식당의 유리창 밖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본 삼식이가 중얼거렸다.
“어, 그러고 보니 유빈이 어디 갔지?”
보안관이 주변을 둘러본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에는 분명 같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자기 방에 가서 자나?”
진우가 그를 찾아 나설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짚이는 것이 있었던 제니는 진우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
“제가 데리고 올게요. 저도 방에 가서 가져올 것도 있고.”
“어, 그럴래?”
진우는 별 고집 피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을 나온 제니는 일단 옆방부터 들어가 보았다.
역시… 바이오닉 핸드가 들어 있던 케이스가 통째로 사라졌다.
제니는 걸음을 서둘러 숙소동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노크도 건너뛴 채 유빈의 방문을 확 열었다.
“오빠!”
하지만 불 꺼진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니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일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바보처럼 자꾸 걱정이 된다.
높은 곳… 에 관련된 두려움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휩싼다.
제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도 그가 없으면 어쩌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유빈은 옥상 구석에 있었다. 맥이 탁 풀릴 만큼 눈에 띄기 좋은 장소에 앉아 테이블 위의 뭔가를 주물럭거리는 중이다.
“오빠…….”
제니는 천천히 유빈이 앉은 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까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유빈은 뒤를 돌아보고 조금 놀랐다. 하지만 이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제니를 맞았다.
“제니야, 왜?”
“왜라니요… 어디 간다고 말도 안 하고 없어지면 걱정되잖아요.”
“하하… 여기에 걱정할 게 뭐가 있다고. 그냥 이거 연습하고 있었어. 저녁 먹을 때는 두 손으로 먹는 거 애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유빈은 힘없이 웃으며 왼팔의 바이오닉 핸드를 들어 보인다.
“그거… 아파서 못 끼고 있겠다면서요?”
“에이, 그거야 거짓말인 거 빤히 알잖아. 그냥 알량한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는 거지.”
유빈은 땀에 흠뻑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제니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추웠어요? 바람이 꽤 차가워졌는데.”
“바람 부는지도 몰랐어. 저거 두 개 번갈아 집는 연습하고 있었거든. 그 정도도 꽤 어렵더라.”
유빈이 가리킨 것은 레몬 모양의 레몬주스 플라스틱 통과 음료수 캔이었다. 제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유빈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디 한 번 해봐요. 내가 보고 평가해 줄게요.”
“아아… 평가 받기 무서운데…….”
유빈은 또 진땀을 흘리면서도 순순히 손을 뻗었다.
기이잉―
아까 낮에 처음 부착했을 때와 달리, 유빈의 바이오닉 핸드는 꽤나 부드럽게 손아귀를 벌렸다. 그러고는 둥근 레몬주스 통을 잡고 들어 올렸다.
“옳지! 옳지!”
제니가 손에 땀을 쥐며 응원을 한다. 들어 올렸던 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유빈은 조금 인상을 쓰며 다시 손아귀를 벌렸고, 캔까지 집어 드는 데 성공했다.
제니는 짤깍짤깍 손뼉을 치며 유빈을 칭찬했다.
“와아아! 정말 열심히 연습했네요! 잘했어요! 금방 더 익숙해질 거예요. 겨울쯤에는 원래 손이랑 똑같아질지도 몰라요.”
“겨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하다는 듯, 유빈이 겨울이라는 단어를 되뇐다.
이런 손으로… 겨울이 올 때까지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물론 지금은 이렇게 평화로운 듯도 보이지만…….
“겨울이 되었을 때는 마음 편하게 눈 내리는 걸 볼 수 있었으면 좋기는 하겠다… 근데 내 손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서 말이지. 이 손 끝에 감각이 역으로 신경에 전달된다는데… 그게 영 서툴러. 볼래?”
유빈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다시 왼손을 뻗어 테이블 위를 찬찬히 더듬거렸다.
기이잉―
레몬주스 통에 손이 닿자 모터가 가동되는 소리가 울리고, 통의 둥근 모양대로 손가락의 관절이 변형된다. 유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느낌이 오긴 하는데, 확신이 안 생겨서…….”
“정말로 느낌이 있어요?”
느낌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반가워 제니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혔다.
정말로 그렇다면… 살아있는 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아아, 그걸 뭐라고 해야 되나… 집중하고 있으면 손가락 끝의 센서가 반발되는 힘을 알려줘. 그런데 그게… 익숙해지기까지는 정말 오래 걸릴 것 같아. 하아아~”
유빈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니는 눈물을 찍어내고는 유빈의 왼손을 잡아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기이잉―
유빈의 손끝이 금세 오므라든다. 유빈은 깜짝 놀라 말했다.
“저기… 위험해. 이게 제일 힘이 약한 모델이라고는 해도…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어. 내가 아직 서투르다니까.”
“펴서 대봐요. 정말로 느껴지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요.”
제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기세에 눌린 유빈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기이잉―
어정쩡하게 벌어진 손바닥이 제니의 가슴 위에 얹힌다. 유빈이 오늘 새로 얻은 그 손은… 차갑고 딱딱하다. 처음 만났을 때 속옷 가게의 계단에서 덜덜 떨고 있던 자신의 머리를 쓸어주던, 그 다정한 손이 지금은 없다.
그게 제니의 눈시울을 자꾸 뜨겁게 만든다. 하지만… 그가 똑같이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느껴져요?”
제니가 다시 눈물을 그렁거리며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새 주변 하늘은 온통 장밋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어떤 느낌이에요?”
두 손으로 그의 로봇 팔을 꼭 쥔 채 한동안 애절한 눈으로 유빈을 바라보고 있던 제니가 물었다.
내 심장이 이렇게 빠르고 간절하게 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나요?
유빈은 오른손으로 제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크고 부드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