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39화 (439/449)

6장 겨울을 꿈꾸며 (2)

“거기에 며칠 더 있겠다고 했다는데? 선원들이랑 친해지는 중이라고…….”

HQ와의 무전 교신을 마친 알렉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 인간은 친화력 같은 게 제로잖아… 말도 안 통하는 주제에…….”

보안관이 뭔가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경쟁에서 진 기분이 든다.

“필락시스 진이라는 게 그거 맞지? 여러 번 물려도 안 죽는 사람. 좋겠는데… 그러면 좀비들이랑 정말 해볼 만하잖아. 아까 저 사람 말로는 확률이 낮네, 어쩌네 하더니.”

태권소녀는 민구의 항체 타입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에요. 이제 좀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테라는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아 꼭 쥐었다. 그에게 피를 주면서도 불안했었다. 이제 다음에 또 물리면 그때는 구해낼 수 없을까 봐.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다. 하긴 사람 홀리는 게 직업이었던 사람이니까.”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홀리는 게 직업이라고? 목을 따는 게 아니고?”

의문의 1패로 아직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보안관이 으르렁거린다.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봐. 아무리 대단한 조직이라도 매일 사람을 죽이고 다녔겠어? 본보기로 하나를 죽이고, 그걸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수백 명의 기를 죽이고 정신을 빼놨겠지. 그 아저씨가 그런 기술이 있더라고. 태양 그룹 쳐들어갔을 때도 그 아저씨가 그 보안 요원을 완전히 홀려서 가지고 놀았었잖아. 나중에는 저항할 생각도 못하는 것 같던데. 그런 거, 고지식한 너나 나는 절대로 흉내 못내는 종류의 재주야.”

진우는 민구가 엘리베이터에 시체를 가져다 놓았을 때 생겨난 놀라운 효과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남자는 유빈과는 다른 방향으로 비상한 구석이 있다. 다른 사람을 절벽 아래로 내모는 경험을 수도 없이 쌓아온 인간 특유의 여유랄까?

유빈이 밝고 절박하다면, 민구는 어둡고 느긋하다. 그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재주에는 솔직히 욕심이 난다. 그게 생존 확률을 높여줄 테니까.

“말해줬대요? 이제 좀비에게 또 물리더라도 죽지 않는다고?”

제니가 알렉스에게 물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런데 별로 기뻐하지도 않더래. 그런 실수 또 할 일이 없다고.”

“아으, 재수!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보안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어쨌든 리그 쪽에서 급한 불은 끈 것 같아 모두들 안도하는 분위기다.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물어봐 줘. 제니야… 아니, 테라야, 네가 물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이 사람은 네 말이라면 껌뻑 죽는 것 같으니까.”

진우가 말했다. 테라가 알렉스에게 그의 말을 통역했다. 알렉스는 구불구불한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조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이 섬은 너희들이 사용해. 다른 사람들이 너희들 허락을 받지 않고 이쪽으로 오는 일이 없도록 할게. 여기 있는 건 다 마음대로 사용해도 돼. 아… 아까도 말했지만, 레스큐 팀 숙소는 그냥 내버려둬 주면 고맙긴 하겠어. 그 사람들은 우리 연구팀이랑 또 다른 문화가 있더라고. 지향하는 바도 다르고… 그래서 나도 조금은 껄끄러워.”

“그 방들은 건드리지 않을게.”

“아, 그래주면 정말 고맙지. 너희가 조금 마음을 놓을 때까지는 헬리콥터 두 대도 다 여기에 둘 거야. 폴이랑 라파엘도 여기서 지내라고 부탁할 거고. 어차피 너희들도 저 노인들은 그리 경계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잠깐… 헬리콥터랑 조종사들을 다 여기에 두겠다고? 우리가 어딘가로 휙 사라지면 어쩌려고?”

진우가 놀라서 묻자 알렉스는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도 하려면 그렇게 할 수 있잖아. 내가 어떻게 말리겠어? 그 흉터남자가 리그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내가 결정한 것도 아니고. 말했잖아, 나는 너희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글쎄… 볼모라면 지금 잠들어 있는 친구에게 바이오닉 핸드를 최대한 늦게 제작해 주는 게 방법일 수 있을까?”

듣고 있던 제니가 그 부분에서 발끈하는 표정을 짓자, 알렉스는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물론 나는 그런 짓은 안 해. 교만하게 잔재주를 부리던 천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충분히 봤거든. 앱테크나야에서, 뉴욕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너희들은 아마 모를 거야. 너희들 친구, 앞으로 2주 정도만 지나면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 거고, 그때부터는 바이오닉 핸드를 맞출 수 있어. 그다음에… 너희들이 어딘가로 다녀오거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을게. 물론 연료를 주입하기 위해서는 테티스에 들러야 하지만, 너무 자주, 멀리 다니는 것만 아니라면 내가 잔소리를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전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뿐이네. 호화로운 별장에, 헬리콥터에, 친절한 조종사들까지……. 그럼 너희가 원하는 건 뭐야?”

알렉스의 제안들을 가만히 듣고 되새겨 본 후 진우가 물었다. 테라의 통역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알렉스가 빙긋 웃는다.

“딱 한 가지만 바라라고 한다면, 테라가 가능한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는 거야. 물론 그녀의 자유지만, 헬리콥터 비행도 절대적으로 안전한 건 아니거든. 또… 앞으로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내가 여기에 머무는 걸 허락해 줬으면 좋겠어. 처음부터 말했지만, 우리는 널 키드에 대해 몰라. 곁에서 건강 상태를 계속 확인하고 싶어. 기록도 하고. 그렇게 해두면 나중에 그녀를 위해서 반드시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결국 널 키드의 피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겠네.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는 네 피가 필요하단다, 테라 양.”

알렉스는 테라를 굽어보며 말을 마쳤다. 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세요. 저도 돕고 싶어요. 너무 많이만 아니면…….”

“아니, 아니, 지금 당장은 아니야. 내 눈대중으로 볼 때, 네 건강을 해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피의 용량은 많아야 10온스 정도일 텐데, 넌 이미 그 이상을 흘린 것 같아. 그러니 한 달 정도는 기다려야 할 거야. 그때도 5온스 이상은 채혈하지 않을게.”

둘의 대화 내용을 제니로부터 전해 들은 진우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테라는 협상을 위한 통역가로 쓰기에 너무 착해 빠졌다는 것. 이쪽에서 심사숙고하기 전에 혼자서 덜렁 승낙을 해버린다.

둘째, 알렉스가 그야말로 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주려고 한다는 것. 잃어버렸던 아들을 20년 만에 만났어도 이만큼 많은 걸 아까워하는 기색 없이 내줄 것 같지 않았다.

특히 두 번째 사실이 오히려 진우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이라니… 꼭 뭔가 함정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알렉스의 말을 들어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들은 지옥의 문 앞에서 구원의 천사를 만난 셈이다. 그러니 천사를 무조건 숭배하고 따르려고 할 수밖에…….

“백신을 만들게 되면… 그걸 팔 거야?”

진우가 물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어. 음… 아마 언제 완성되는가 하는 게 중요한 변수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연료도, 물품도 풍부하다면 그냥 배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물물교환을 시도할 수도 있고. 나중에 또 이야기 할 기회가 있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사람들은 어느 정도 가격을 지불한 물건을 더 아끼고 신뢰해. 그것이 종이쪼가리 돈이든, 아니면 피땀 어린 노력이든, 목마른 기다림이든… 우리를 보면 알잖아.”

“솔직히 이런 상황은 낯설어. 너희가 아무리 후회를 했다고 해도… 좀비를 퍼뜨릴 계획을 가지고 있던 회산데… 우리가 아는 어떤 기업이랑 너무 달라서 그것도 이상하고.”

진우는 한숨을 내쉬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알렉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하지 정확하게 모르면, 아직도 이윤을 추구할 수 있을 거야. 언젠가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같은 거에 취해 있으면 말이야.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키가 단 하나뿐이라는 걸 알아. 그리고 사실… 나도 그렇고 연구원들도, 그리고 선장도… 기업은 아니야. 이제 우리는 JL이 아니라 그저 낯선 곳에 버려진 소수의 사람들일 뿐이라고.”

“괜찮겠지? 너희들 생각은 어때?”

거기까지 듣고 나서 진우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다들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약속들을 꼭 지켜줘. 나는 적당히 경고만 하는 법 같은 건 몰라.”

진우는 상당히 싸가지 없이 들릴 만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했다. 나중에 얼굴을 붉히느니, 미리 확실하게 선을 그어두는 편이 낫다.

“그러지. 받아들여 줘서 고마워.”

알렉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진우도 녀석에게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며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제 버려두고 온 용병들 문제만 잘 풀어내면 당분간 걱정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좋구나…….”

밤이 찾아왔을 때, 긴 낮잠에서 깨어난 유빈이 어두운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낮의 뜨겁던 기온은 확연히 내려갔고, 이제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 방과 거실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베란다의 의자에 기대앉아 비누 냄새가 풍기는 친구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고 있다.

좀비 세상에서 아이스크림을! 그것도 하겐다즈!

실로 오랜만에 단 한 발의 총성도, 단 한 마리의 좀비 울음소리도 듣지 않고 흘려보내는 저녁이었다.

물론 아침에 알렉스와 서로 악을 써가며 협상을 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이 호화로운 연구소를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감내할 만하다.

“정말이지? 괜히 우리가 안 보는 사이에 비관해서 바다에 뛰어들고 그러면 안 돼.”

삼식이가 다정히 어깨를 끌어안는다. 유빈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큭큭큭, 내가 왜 그러겠냐. 조금만 기다리면 파란 불이 들어오는 로봇 팔이 생기는데, 이 미친 새끼야.”

“그래도 다행이야. 손을 고치기 전에 임시로나마 쓸 수 있는 게 생겨서.”

바닥에 앉아 있던 진우가 유빈의 허벅지에 팔을 기대며 말했다.

“어우, 무거워. 이것들아, 왜 이렇게 다 나한테 기대는 거야? 아파서 주사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느라 샤워도 못한 사람한테.”

유빈이 우는 소리를 해봤지만, 두 놈 다 비켜날 기미가 없다. 거기에다가 삼숙이 놈도 제 주인을 따라 유빈의 다리에 머리를 척 얹었다. 그렇게 따스한 시간이 흘러간다.

“그… 우리가 따돌리고 왔던 용병들 말인데, 내일 아침에 그 사람들 맞으러 내가 갈게. 나 혼자서.”

침묵을 깨고 유빈이 입을 열었다. 진우는 펄쩍 뛴다.

“뭔 소리야? 걔들 총 있어.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몸도 아픈 새끼가!”

“아니… 물론 내가 지금 제일 약하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누가 가더라도 걔들이랑 싸울 건 아니잖아. 저쪽 배에도 또 네 명이 있고, 걔들도 다 버려두고 온 팀 리더를 따른다며?”

유빈은 침착하게 설명을 했다. 진우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래서? 그게 네가 마중 나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이거지.”

유빈은 잘린 팔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암만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헬리콥터에 탔다고 해도 막 이렇게 된 사람이 사과를 하면 먹힐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것 같거든. 아… 애들도 절박했구나 싶어서.”

“자기 비하도 아니고, 그게 뭐야? 미친놈들이면 약한 사람들 만났을 때 오히려 더 못되게 굴 수도 있어. 태양 새끼들 못 봤냐?”

“아아, 그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지. 하지만 아무도 따라가지 않으면, 좀 그런데… 총을 따로 가방에 담아서 넘기라고 할 계획이거든. 저 조종사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의 목숨을 맡기고 싶은 생각은 아직 없어서 말이야. 그리고…….”

유빈은 잠시 자신의 잘린 팔목을 들여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 보고 싶었어. 이 손이 없어지던 날, 우리가 구해낸 사람들이 철로 위를 잘 걸어가고 있는지 말이야. 본전 생각이나 하는 치사한 놈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걸 보고 나면 좀 위안이 될 거 같아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녀석의 처연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진우의 가슴은 먹먹해진다. 뭐라 위로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후우~ 그래도 안 돼. 네가 혼자 따라가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커.”

진우는 한숨을 내쉬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유빈도 더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럼 그냥 확인을 두 단계 거치는 걸로 하자.”

그렇게 진우와 유빈이 내일의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불침번 순서인 보안관이 베란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너희들도 들어와서 자. 내일 새벽에 헬리콥터 떠서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 남지도 않았어.”

“어, 그래. 알았어.”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조명을 어둑하게 낮춘 널찍한 식당에는 안락의자마다 숙소에서 가져온 담요가 놓여 있다.

한 사람이 방 두 개씩을 차지해도 될 만큼 개인 공간은 충분했지만, 낯선 첫날이어서 다들 한곳에 모여자기로 했다. 그게 더 안전하고, 또 심리적으로도 나을 것 같아서다.

물론 인질 겸 관찰자인 알렉스도 식당 구석에서 담요를 돌돌 만 채 잠들어 있다. 폴과 라파엘의 코 고는 소리도 들린다.

“아, 오빠들, 들어왔어요?”

긴 의자 두 개를 붙이고 나란히 누워 속닥거리고 있던 제니와 테라가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 늘 서로를 그리워하던 핑크 펀치가 한자리에 모여 잠을 청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꿈처럼 아득하고 사랑스럽다.

“요정 나라에 온 것 같구나…….”

진우가 중얼거린다.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제 머릿속으로 생각한 게 입 밖으로 나왔는지 이제는 잘 구분도 안 된다.

“잘 자. 내일 보자.”

인사를 하면서 그녀들의 소파 옆을 스쳐 가는데, 테라의 손이 유빈의 성한 팔목을 잡았다.

“응? 왜?”

테라는 몸을 일으켜 앉은 뒤, 유빈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해요, 오빠. 저 때문에 손이… 손을 다치신 거. 이렇게 제니랑 행복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점점 더 미안해져서요.”

테라는 이미 몇 번이나 거듭했던 사과를 또 한다. 유빈이야말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녀를 구한 것과는 무관한데…….

“너 때문이 아니야. 나쁜 놈들 때문이지. 그놈들 하는 짓 때문에 우리가 참지 못하고 화가 나서 싸웠던 거야. 너는 아무 잘못 없어.”

삼식이가 말했다. 진우도 고개를 끄덕인다.

“음, 맞아. 이놈 말 잘하네.”

“야이 씨! 내 손인데 왜 너희가 생색을 내고 멋있는 척을 해!”

유빈은 또 발끈해서 삼식이에게 성질을 부렸다.

“으으음, 뭐냐… 뭐야?”

조금 전에야 겨우 잠이 들었던 태권소녀가 투닥거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보안관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냥 자. 걱정할 거 없어.”

다시 태권소녀의 숨소리가 도롱도롱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유빈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삼식이 새끼 말이 맞아. 나쁜 놈들 잘못이야. 그러니까 자책 같은 거 하지 마. 그리고 잘 자. 너희들이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고맙습니다.”

그제야 테라는 유빈의 팔목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진우는 얼렁뚱땅 그녀들의 곁에 누우려 드는 삼숙이를 끌고 자신의 소파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쾌적한 잠자리, 잠이 모두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다음 날 새벽, 폴은 하품을 하며 헬리콥터를 몰아 어제 그가 레스큐 팀을 버려두고 왔던 포인트로 날아갔다. 그의 옆자리를 늘 지키던 라파엘은 빅 아일랜드에 남았다. 한꺼번에 헬리콥터 조종사 두 명을 보낼 수 없다는 게 그 어린 친구들의 주장이다.

그리 마음에 쏙 드는 결정은 아니지만, 어차피 오늘 하루만 더 고생하면 당분간 새벽 비행은 없을 터여서 폴은 커피로 잠을 쫓으며 혼자만의 비행을 성실히 수행했다.

“이봐, 짐. 내가 온 거 다 보고 있잖아. 왜 무전을 안 보내? 인사도 안 하고 지낼 셈이야?”

어제의 포인트 주변에서 유영하던 폴이 먼저 근거리용 무전기를 잡고 말을 건넸다.

― 치익, 우리를 버리고 간 노인한테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치익.

“하하하, 그게 어디 내가 좋아서 한 건가? 널 키드가 시키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뭐, 델타 팀 정예였던 사람들에게 하루 정도 야영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폴은 쓴웃음을 지으며 가시 돋친 목소리의 짐을 달랬다.

― 치이익, 아아… 아주 즐겁더라고요. 좀비들이 몰려다니는 낯선 곳이라 캠프파이어할 맛이 나더군요.

“밥은 굶지 않았나? 먹을 게 있었던가?”

― 치익, 일주일 치 식량을 당신 가자마자 확보해 놨어요. 워낙에 믿음이 가는 노인이어야 말이지. 그보다 데려간 게 널 키드는 맞아요? 치이익.

“음, 그건 확실했어. 알렉스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네도 봤어야 하는데.”

― 치익, 알았으니까 내려와요. 치익.

무전을 마치자마자 근처 건물에 숨어 있던 짐과 팀원들이 도로로 나와 손을 흔든다. 이미 조준경을 통해서 헬리콥터에 다른 탑승자가 없다는 걸 확인한 모양이다.

“저기 짐, 부탁이 하나 있는데…….”

헬기를 착륙시키기 전에 폴은 미안한 요청을 하나 더 해야 했다.

― 치이익, 뭡니까?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기분인데……. 치익.

짐의 목소리에 슬슬 짜증이 더해진다. 폴은 그래도 제니가 통역해 준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무기 말이야, 헬리콥터에 탑승하자마자 가방에 담아서 앞자리에 넘겨줘야 돼. 그게 룰이야.”

폴은 송신을 마치고 기다렸지만, 잠시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에야 흥분한 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치이익, 그건 뭔가요? 50년대생들만 아는 구식 농담? 치익.

“농담이 아니야. 진지하다고. 그게 널 키드 쪽의 요구 사항이었어. 자네들을 태우고 빅 아일랜드로 와달라고 했지만, 무기는 안 된다는군.”

― 치익, 내 똥구멍이나 빨라고 하쇼. 그런 이야기는 관두고, 어서 내려와요, 폴. 화가 나려고 하니까. 치이익.

“어쩌지? 그렇게 하면 그 친구들 사과를 못 받을 텐데… 자네들을 태우고 돌아오는 조건이 그거였단 말이야. 그리고 그 말을 꼭 해달라고 하더군.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면 다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쏘지 않았다는 걸 알아달라. 오해는 말게, 짐. 내 말이 아니야. 해달라니까 하는 거지.”

― 치이익, 당신 대체 누구 편이요? 응? 치익.

짐의 원성을 들은 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책임은 다해야 한다.

“굳이 따지자면, 널 키드 편일세. 그 천사 같은 아이가 편안해지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어. 자네들은 강하지만, 인류를 구원할 수 없잖나. 그런데 그 애는 그럴 수 있지. 그게 차이야. 그러니 짐, 무기를 가방에 넣어주겠다고 남자 대 남자로 약속해 주게.”

― 치익,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내려오라고요, 이 망할 노인네야! 치이익.

짐은 불호령이라도 내지르듯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고는 무전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폴은 한숨을 내쉬며 어제 내렸던 자리에 다시 헬리콥터를 착륙시켰다. 부근에 거기 말고는 딱히 마땅한 공간이 없다.

“후우~ 자요! 만족합니까?”

헬리콥터에 탑승하자마자 짐은 자신의 것과 팀원들의 무기를 모두 한데 모아 가방에 담았다. 그러고는 폴에게 건넸다. 폴은 두 팔을 으쓱해 보였다.

“내가 한 게 아니라는데도 그러나. 이제 돌아가지. 그 애들이 사과를 한다고 했으니까. 잘 있었니, 샘?”

폴은 앞장서서 헬리콥터에 오르는 핏불 테리어에게 인사를 건넸다. 짐은 쀼루퉁한 얼굴로 헬기 좌석에 기대 군화를 신경질적으로 탁탁, 바닥에 부딪쳤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다. 다들 폭발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증오심을 불태우는 중이다.

한 시간이 넘는 긴 비행 시간 동안 폴은 속이 좋지 않아 몇 번이나 트림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가 아무리 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력의 지휘권은 어디까지나 짐에게 있다. 그러니 그의 비위를 건드리고 나면, 널 키드 일행의 앞날도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젠킨스가 죽었다고 하는 지점으로 가서 시신도 수습해 와야 하는데… 근처에 헬리콥터가 추락해 있다고 했어…….”

초조해진 폴은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 애를 썼다. 물론 소용이 전혀 없다.

“여기는 왜 들르는 겁니까, 폴? 빅 아일랜드에서 그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다면서요?”

리그에 도착한 헬리콥터가 헬리포트에 내려앉자 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을 열고 나서려던 폴은 두 손을 벌리며 대답했다.

“시키니까 하는 거야. 개인적인 감정은 없네. 그리고… 에, 여기에서 내가 해야 할 말은…….”

레스큐 팀의 무기가 담긴 가방을 기다리고 있던 피트에게 넘기고 나서 폴은 메모지를 꺼내 주섬주섬 살폈다.

“찾았다. 이거군… 에, 지금 기분이 영 상해 있으면 여기에서 내려도 된다고 하는군. 화가 좀 풀리고 다시 연락을 하자고. 어떤가?”

“갑시다. 빨리 타요!”

“확실한 거지?”

폴은 거듭 확인을 하고 헬기에 올랐다. 이로써 그가 맡은 공식적인 협상 임무는 끝이 났다. 피트는 무기를 맡았다는 보고를 할 것이다.

“자네는 화가 나겠지만, 내 임무는 다했어.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폴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헬기를 띄웠다. 물론 짐과 그 팀원들의 기분은 더욱 더 상해서 이제는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헬리콥터 내부를 가득 채웠다. 샘도 덩달아 으르렁거리고 있다.

“좋게 해결했으면 해. 내가 보니까 착한 애들 같았어. 그리고 말이지, 짐. 다시 말하지만, 널 키드라고. 현 상황에서는 죽은 젠킨스 이상의 고위 레벨이야.”

빅 아일랜드에 도착한 폴은 꼬리날개가 건물 쪽으로 향하도록 헬리콥터를 착륙시켰다. 이 역시 출발하기 전에 유빈이 제니를 통해 내려놓은 지침대로다.

총기를 다 회수 못한 걸 뒤늦게라도 알았다면 헬리콥터는 지금과 반대의 방향으로 건물을 마주 보며 착륙했을 것이다.

“저놈들인가…….”

짐은 연구소의 정문 앞으로 마중을 나온 일군의 젊은이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검은 민머리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잔뜩 불거져 나온다.

“저 새끼가 대장이군. 딱 알겠어.”

사모아 출신의 에디가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곱슬머리 마리오도 너클 파트의 관절을 뚝뚝, 소리 나게 꺾으며 달려들 태세를 갖췄다.

둘 다 키가 6피트 4인치 이상 되는 근육질의 거구로, 총이 없어도 사람 두엇쯤은 순식간에 목을 꺾어 죽일 수 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노려보는 것은 뾰족 머리의 커다란 덩치였다. 그 옆에 또 한 놈이 서 있었지만, 그저 평범한 동양인이다. 게다가 손도 하나 없다. 우측의 레깅스를 입은 쇼트커트 소녀가 대장일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저런 별 볼일 없는 애송이들에게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저놈들 역시 약속한 대로 총기로 무장하지 않은 채 나왔다는 것도 화가 난다.

사람을 우습게 보다니…….

“어이, 기다려. 내가 말하는 게 먼저야.”

막 헬리콥터 문을 열고 나가려는 두 사람을 짐이 만류했다.

“갈비뼈 두어 대 부러져도 대화는 가능합니다!”

에디가 벼락같이 뛰어나가며 외쳤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마리오도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죽이겠군…….”

뒤쪽에서 샘의 목줄을 잡고 있던 크리스가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짐은 두 부하를 쫓아 다급히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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