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38화 (438/449)

6장 겨울을 꿈꾸며 (1)

“증거가 있으면 당연히 그렇겠지만…….”

테라를 제외한 모두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민구를 돌아봤다.

“그럼 간단하군. 어이, 저 배에 한국말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나?”

민구는 알렉스에게 물었다.

“연구원 중에는 없고, 선원 중에 통신장이 한국계이긴 한데… 한국말은 영 서툴러. 자기 입으로 그러더군.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라고.”

알렉스는 민구가 뭘 하고 싶은지 몰라 주저하며 대답했다. 민구는 만족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몸으로 보여주는 일이니까.”

민구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슈트와 셔츠를 차례로 벗었다. 문신으로 덮인 그의 등 한쪽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인다.

“어라? 이거 설마?”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삼식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 상처를 살펴본다. 격렬한 싸움을 반복하는 동안 계속 옷에 쓸리느라 아직도 피딱지가 제대로 앉지 않은 새 상처였다.

“좀비에게 물렸었군요!”

알렉스가 다가와 민구의 상처 주변을 살살 더듬으며 놀라워했다. 좀비 특유의 독성 때문에 이빨 자국 주변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다.

그리고 이 깊게 잘려 나간 살점. 이빨 모양은 똑같지만, 사람은 이나 턱이 다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강하게 물지 못한다. 좀비만이 이런 이빨 자국을 낼 수 있다.

“언제 그랬던 겁니까?”

진우가 물었다. 민구는 턱을 쓸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니까… 그제에서 어제로 넘어오는 이른 새벽이었지. 태양 그룹 놈들에게 쫓길 때.”

“저를 지키려다가 물리셨어요.”

테라가 끼어들어 말했다. 보안관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좀비들에게 보이지 않잖아. 그런데 지킨다는 게 무슨 뜻이야?”

“태양 그룹에서 계속 개를 풀어 쫓게 했었어요. 앞쪽에서는 좀비가 달려오고, 뒤쪽에서는 개에게 쫓기고. 위에는 헬리콥터가 떠 있었고요.”

그때를 회상하던 테라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바로 이틀 전의 일이어서 그때의 모든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 같다.

잡히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다는 절박감, 온몸 구석구석까지 떨려오던 두려움, 그리고… 결국은 헬리콥터의 서치라이트 아래 스스로 몸을 내밀었을 때의 그 참담함.

테라는 자기도 모르게 제니의 손을 한 번 더 힘주어 잡았다. 그녀가 구하러 와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쯤 어떤 처지가 되어 있었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제니도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테라의 팔목 상처는 그때 생긴 거군요…….”

진우가 테라의 팔목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말했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내게 피를 나눠 줬어.”

“뭐라고 하는 거야? 응? 응? 나도 알고 싶어.”

알렉스가 궁금해하며 묻는다. 제니는 테라의 의사를 확인하고, 알렉스에게 일러줬다.

“물린 상처에 테라가 자기 피를 흘려 넣었대요.”

“피를? 직접? 오 마이… 그게 그렇게 해도 치유가 된다고?”

알렉스가 경이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널 키드의 피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다른 사람의 몸 안에서 항체를 만들어내는지는 그도 아직 정확히 모른다. 알렉스는 테라와 민구를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두 사람이 혈액형이 같아?”

“아니, 몰라.”

민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까짓 게 무슨 상관이냐는 투다. 알렉스의 시선을 받으며 테라가 말했다.

“제가 O형이에요. 다른 사람들에게 피를 나눠 주기 편할 거라고, 젠킨스 씨가 그러셨었어요.”

“그렇군… O형. 수혈 가능한 폭이 엄청나게 넓어. 물론 고려해야 할 항체는 그 외에도 많고, 여러 면에서 동일 혈액형보다 못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급한 상황에서 널 키드의 피니까… 그럼 단순히 1억분의 1도 아니구나. 놀라워.”

알렉스는 새삼 감탄하며 감격스러운 눈으로 테라를 바라본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간간이 테라에게 질문을 하던 태권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니, 잠깐… 그럼 당신은 얘 혈액형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구세주라고 한 거네? 만약 얘가 희귀 혈액형이거나 그냥 AB형 같은 거였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응?”

알렉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태권소녀를 돌아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우리가 개발하려고 했던 건 백신이야. 항체와 싸워 무력화되거나, 죽은 병원체지. 그건 혈액형과 무관해. 독감 예방주사를 맞을 때, 의사가 혈액형을 물어본 적이 있었는지를 기억해 보면 이해가 더 쉬울 거야. 그녀의 피를 일일이 수혈해서야… 전 세계는커녕 작은 도시 하나도 구해내기 어렵지. 보존도 힘들고.”

“아이, 젠장. 끼어들지나 말걸… 쪽 팔려라. 상관이 없을 거면 O형이라고 왜 좋아하는데?”

무안해진 태권소녀가 볼을 붉히면서 물었다. 알렉스는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그야…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위급 상황에서 그녀의 혈청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그게 기쁜 거야. 혹시 사고가 나더라도 그 당장은 수습이 가능하잖아.”

“그러면… 이제 이 아저씨 피를 수혈 받아도 항체가 생기는 건가? 이 아저씨도 면역자가 된 거잖아. 어제 테라가 무슨 3단계가 있다는 이야기는 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궁금증을 못 이긴 태권소녀가 다시 물었다. 테라로부터 그녀의 말을 전해 들은 알렉스는 코커스패니얼 같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도리질을 한다.

“아니,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확률은 극히 낮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면역자에 세 가지 유형이 있다는 말은 맞아. 아마 젠킨스가 들려준 이야기일 테지. 아나필락시스 진, 필락시스 진, 그리고 여기 이 테라처럼 정말 드물게 존재하는 널 키드가 있어. 오직 한 번의 면역만 가능한 아나필락시스 진… 이게 그나마 가장 흔하고, 좀비 세균에 대해서 완전히 면역 능력을 갖췄지만 다른 이에게 항체를 줄 수 없는 필락시스 진이 그다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나필락시스 진이 될 확률조차 엄청나게 낮아.”

알렉스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최대한 알아듣기 쉽도록 천천히 말해줬다.

“하지만 테라의 혈청을 주입 받으면 누구라도 무조건 적어도 한 번의 면역은 얻게 되지. 그리고 아마 대략 70명이나 80명 중에 하나는 필락시스 진이 될 거야. 그래봤자 여전히 1퍼센트를 겨우 넘는 낮은 확률이지만. 그리고 만 명에 하나 정도나 널 키드가 나올 수 있을지 어떨지……. 물론 그걸 수치적으로 증명할 일은 없어. 우리의 목표는 수혈이 아니고, 모두를 필락시스 진으로 만들어주는 백신 개발이니까.”

“딱 봐도 좀비에게 물린 거라는 건 알 수 있겠나?”

둘의 대화가 끝나자 민구가 상처 입은 날갯죽지를 움직이며 물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새살 돋기 전에 그 배로 가자. 선원들이 불안해서 난리를 친다는데, 이 정도 증거를 보여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민구는 다시 셔츠를 걸치며 말했다. 진우가 조금 놀라서 묻는다.

“지금 그 배로 굳이 찾아가겠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이 다 몰려들어서 구경거리가 될 텐데요.”

“아아, 괜찮아. 나는 원래 사내놈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떠받드는 거 좋아하니까.”

민구는 히죽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실은 위험할지도 모를 일이다. 알렉스의 말에 따르면, 선원들뿐 아니라 레스큐 팀의 전투 병력까지도 밀실공포증에 지쳐서 매우 흥분한 상태다. 갑자기 끼어든 낯선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아무도 모른다.

“아저씨… 위험한 일은 안 하시는 게…….”

테라도 불안함을 표시하며 만류하려 한다. 하지만 민구의 고집은 셌다.

“위험하지 않아. 그냥 자랑하고 오는 거야.”

“아뇨, 그래도 불안한 건 싫어요. 그러느니 차라리 제가 좀비들 사이를 걸어 다니는 게 낫겠어요. 그러면 누구라도 확실하게 믿을 거잖아요.”

테라가 말했다. 태양 그룹에서처럼 희생자만 끔찍하게 죽어 나가지 않으면 좀비들 틈에 있는 건 참을 수 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니로부터 전해 들은 알렉스가 고개를 저었다.

“오, 그래. 널 키드는 그런 걸 할 수 있지. 그런데 좀비가 없어. 그 퍼포먼스를 하려면 잡아와야 해.”

“그게 말이 되나? 여기에서 좀비를 연구했다는 걸 우리가 빤히 아는데?”

보안관은 알렉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다. 알렉스가 설명을 해준다.

“있던 건 맞아. 하지만 먼젓번 선상 반란을 일으켰다 도망칠 때, 선원들이 해치를 열어서 좀비들을 모두 물에 흘려보내 버렸어. 문 풀 아래에 보관하고 있었거든.”

“그럼 혹시 그놈들이 다시 이 섬으로 떠내려오거나 하는 건가요?”

제니가 물었다. 알렉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여기에서 적어도 50해리 이상 떨어진 바다에 버렸단 말이야. 그게 여기까지 떠내려올 가능성은 없어. 그리고… 그게 뭐가 무서워? 기껏해야 스무 마리 정도의 좀비인데.”

좀비가 없다고 하니, 결국 민구가 가서 증거를 보이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배에 내려준 다음에 아무도 따라오지 마. 나 혼자 주목 받고 싶으니까.”

다시 슈트를 걸치던 민구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또 씩 웃었다. 보안관은 그의 마음을 대충 읽을 수 있었다.

지금 민구는 일종의 테스트를 하려 하고 있다. 저 커다란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의 호전성은 어떤지, 얼마나 믿을 만한지 자신이 혼자 뛰어 들어가서 직접 온몸으로 확인하겠다는 거다. 그게 영 내키지 않아 보안관은 고개를 저었다.

“형씨, 혼자서 멋있는 척하는 거 별론데…….”

“억울하면 너도 물리고 와. 그럼 끼워주지.”

민구는 보안관을 놀리며 마세티가 든 칼 가방을 챙겼다. 이 덩치 큰 녀석과 총잡이에게는 친구들 모두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니 이런 일은 자신이 하는 게 맞다.

“잠깐만 기다려 줘. 피트에게 연락부터 할게. 어이, 폴. 정신 차려봐요! 테티스에 한 번 더 다녀와야 돼요!”

알렉스는 긴 의자에 누워서 기분 좋게 햇살을 쬐고 있는 헬기 조종사를 흔들어 깨웠다. 이 어린 무장 단체들이 ‘인질’이라 수차 강조하고 있음에도, 인질로서의 긴장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이 제멋대로인 백발의 파일럿이다. 그들은 함께 컨트롤 룸으로 향했다.

“테티스 HQ 응답해. 여기는 빅 아일랜드.”

알렉스가 마이크를 잡고 무전을 보냈다.

잠시 후, 뚱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뭐예요, 알렉스. 말씀하세요.

“피트, 거기 분위기 어때?”

― 아아, 엄청 좋죠.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믿고 기뻐하는 중이에요… 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 그냥 아슬아슬해요. 알렉스가 널 키드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고 웅성웅성… 지금 당장은 널 키드라는 존재가 너무 환상인 것 같아서 그것에 관해서 다들 이야기하느라 좀 낫지만, 이삼 일 지나면 난리가 날 겁니다. 그건 그렇고… 널 키드는 잘 쉬고 있어요?

“그래, 많이 나아졌어. 너희… 혹시 인사할래?”

알렉스가 제니와 테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테라는 수줍게 웃으며 마이크에 대고 한 문장만 말했다.

“안녕하세요?”

― 지금… 설마, 내가 널 키드랑 이야기한 거예요? 응? 알렉스? 그거 맞아요? 젠장! 목소리도 예쁘잖아요!

테라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 침묵하던 피트가 곧바로 흥분해서 떠들어 댄다.

“진정해, 피트. 그보다 부탁이 있어. 우리가 20분 정도 뒤에 테티스로 갈 건데, 그때 통신장이랑 같이 헬리포트로 와줘.”

― 통신장이요? 아, 선원들이랑 말하는 거 왠지 좀 으스스한데. 그 사람이 꼭 있어야 돼요?

“응, 있어야 돼. 통역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알렉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피트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 통역이 필요하다니… 그쪽에 영어 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면서요? 그거 폴이 거짓말한 거였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여기에서 한 사람이 갈 건데, 그 사람 통역을 해달라는 거야. 좀비에 물렸다가 널 키드의 피를 수혈 받고 항체를 얻은 남자거든. 그 사람을 선장에게 보여줘. 선원들도 함께 볼 수 있으면 더 좋겠지. 안전 문제에 각별히 신경 쓰고.”

― 그래요? 그럼 항체 타입은 뭔데요?

“그건 아직 몰라. 간 김에 항체 검사도 하면 될 테지. 부탁할게, 피트.”

― 알렉스, 당신도 같이 오나요?

피트가 물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저으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아니, 나는 한동안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널 키드 옆에 있어야 돼.”

무전을 끊은 알렉스는 민구를 돌아보았다.

“안전 문제에 신경 써달라고 했으니까 크게 걱정할 것 없어.”

“그런 건 걱정해 본 적 없는데…….”

민구는 허세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수십 명의 선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꽉 잡아. 나이를 먹었더니 맥주 몇 병에도 이렇게 알딸딸하구나.”

잠시 후, 차가운 물에 머리카락을 적시고 온 폴이 헬리콥터의 조종간을 잡으며 말했다.

헬리콥터에는 보안관과 제니, 알렉스, 그리고 민구, 이렇게 네 명만 탔다. 테라도 따라가고 싶어 했지만, 알렉스가 극구 만류했다. 널 키드에게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시킬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헬리콥터는 빠르게 바다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음주 비행이라는 엄살과는 달리 폴은 베테랑답게 헬리콥터를 몰았고, 잠시 후, 시추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모르겠는 게 있어. 하필이면 왜 저런 배를 골랐지? 석유를 파낼 것도 아니면서?”

보안관이 시추선 중앙의 높다란 철제 탑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유는 뭐, 간단해. 유람선이나 화물선은 지나다닐 때마다 허가를 받고 보고를 해야 하지만, 저건 안 그래. 메탄 하이드레이트 채굴의 사업 타당성 검사를 하고 싶다는 제안서를 내면, 여기에서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거든. 오히려 수많은 편의를 제공 받지. 연구 기지를 세울 수 있는 섬을 무상으로 임대해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야. 외국의 거대 회사가 우리 국가에서 자원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홍보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알렉스가 설명을 해준다. 잠시 후, 헬리콥터는 무사히 헬리포트 위에 내려섰다.

“인기 좀 끌고 오지.”

민구는 마세티가 든 가방을 들쳐 메고, 미리 마중 나와 있던 피트와 통역을 향해 뛰어갔다.

폴이 곧바로 다시 헬리콥터를 띄워 빅 아일랜드로 돌아가는 걸 보고 민구는 미리 마중 나와 있던 피트와 통신장을 향해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대니임미다! 이 사람은 피트임미다!”

통신장은 어색한 한국어로 인사와 자기소개를 했다. 나이는 알렉스보다 어려 보이고, 어휘는 초등학생 수준도 안 되는 것 같다.

“강민구다.”

민구는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피트가 마세티 가방을 가리키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통신장이 물었다.

“이거슨 칼임미까?”

“음, 그래.”

“이거 안 댐미다! 엄… 위험해요!”

통신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민구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꾸했다.

“안 위험하니까 걱정 마라. 이걸로 이따가 시범 보일 거야.”

“시범? 당신 마샬아츠 선수임미까? 타이쿤도?”

“응, 그래. 선수야, 선수.”

민구는 마샬아츠가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선수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여 줬다. 통신장은 피트에게 다시 설명을 해주고 대화를 나눈다.

“칼 나타날 때, 피트 허락 필요해요! 아니면 안 댐미다!”

통신장은 피트의 주의 사항을 민구에게 일러주고, 그를 계단으로 안내했다.

계단 바로 아래에 두 명의 용병이 총을 들고 대기하고 있다. 선원들과 알력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피검사할 거예요! 당신 엄… 피 타입, 뭔지 알려줌미다! 하얀색, 아나필락시스 진! 초록색, 필락시스 진, 엄… 바이올렛, 널 키드임미다!”

좁은 선실 복도를 지나면서 통신장은 열심히 설명을 한다. 어휘가 잘 떠오르지 않는지, 이따금씩 그는 앓는 소리를 냈다. 피트는 그들을 함교 아래층의 방으로 안내했다.

“하이~!”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실험 기기 사이로 몇 명의 외국인 남녀가 손을 흔든다. 다들 불안해하면서도 뭔가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트는 민구의 왼팔에서 피를 조금 뽑아 한쪽 벽에 설치된 기계에 투입했다.

“오, 마이 로드!”

잠시 후, 기계를 들여다보고 있던 피트와 다른 외국인들이 입을 감싼다. 민구는 뭐가 잘못되었나 싶어 다시 주섬주섬 팔을 걷었다.

“노노노, 피 안 필요해. 당신 결과 좋으니까 놀라쓰요.”

피트로부터 언질을 받은 통신장이 손사래를 친다. 민구는 콧방귀를 뀌었다.

“놀랐다고? 당연히 좋지. 죽다 살아났으니까. 거짓말인 줄 알았나?”

“당신 필락시스 진임미다. 초록색! 이그 1 퍼센트! 추카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던 민구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에게 그 설명을 하라고 시키는 게 가혹하기도 하거니와, 똑바로 해낼 것 같지도 않았다.

초록색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나중에 계집애들을 시켜 물어보면 된다.

“자, 이제 선원 식당 감미다! 선원 많이 모여 있슴미다!”

피트와 통신장은 민구를 데리고 다시 복도로 나섰다. 여전히 두 명의 용병은 총으로 무장하고 따라온다.

한쪽에서 이런 식으로 점령군처럼 굴고 있으니,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당연해 보인다.

“선장임미다! 인사해요!”

담배 연기가 자욱한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통신장은 가장 앞쪽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를 가리켰다. 선상 반란을 일으켰던 주범이라기에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서로 악수를 나누고 나서 선장이 뭐라고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동안 민구는 슬쩍 곁눈으로 식당 의자에 모여 앉아 있는 선원들을 돌아보았다. 대략 열댓 명가량. 배를 타본 적이 없으니 이게 많은 건지, 적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신 널 키드가 피 줘쓰요? 그래서 안 죽었쓰요?”

선장은 아주 길게 이야기했는데, 통신장은 딱 두 문장으로 뭉뚱그려 전달했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주지. 좀비에 물린 거 본 적 있나?”

통신장이 선장에게 통역을 해주는 동안 민구는 천천히 슈트를 벗고, 나이프 홀더를 벗어놓았다. 그러고는 선장과 선원이 볼 수 있도록 돌아서서 셔츠를 벗었다.

“오, 코리안 마피아!”

민구의 등에 새겨진 요란한 문신을 보며 몇몇 선원이 낄낄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구는 셔츠를 의자에 걸치고 훌쩍 뛰어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그의 상처가 훤하게 드러나자 점차 낄낄거리는 소리는 사라지고 웅성임은 커졌다.

“선장, 지금 당신 몸 만져 보고 싶슴미다!”

선장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통신장이 말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정말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대충 뭔 소리인지는 알아들었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와서 만져 보라고 해.”

의자를 밟고 올라선 선장은 민구의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그의 직업상 좀비들에 물린 상처는 여러 번 보았다. 그중에는 자신의 선원이 사고로 말려든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살아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면역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다급한 연구원들이 쇼를 꾸민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진짜잖아… 이건 정말 물린 게 맞아.”

손가락에 묻은, 찐득한 민구의 피를 보면서 선장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부어오른 상처 주변도 익숙한 모습 그대로인데… 그런데 이 코리안 마피아는 살아 있다.

“왜 물려쓰요?”

통신장이 선장의 질문을 통역했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제 새벽에 좀비들 열댓 마리가 나를 둘러싸더군. 한꺼번에 달려드는 놈들을 절반 정도 머리를 날렸을 때, 뒤가 뜨끔해서 돌아보니까 이미 물렸었어. 내 여동생이 피를 주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야.”

조금 뻥을 섞었다. 아마 실제로는 그 절반 정도였을 것이다.

“열댓이… 뭠미까?”

“열하고 다섯. 십오.”

민구는 오른쪽 손가락을 쫙 펴서 세 번 내밀어 보였다.

“총 쏴서 죽이쓰요?”

“아니, 칼로.”

통신장이 그 말을 선장에게 전하니, 선장이 고개를 저으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당신, 거짓말 해쓰요! 한 사람, 좀비 십오 못 죽이요. 사람 죽어요!”

“죽이는데……. 흐음~ 귀찮군.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면… 어이, 너 비켜 있어. 시범을 보여주지. 선장한테도 말해.”

민구는 아래쪽에 놓아두었던 마세티 가방과 쿠크리 홀더를 집어 올리며 말했다. 통신장이 선장에게 말을 전하는 동안 민구는 두 자루의 칼을 동시에 뽑았다.

선장은 흠칫 놀라며 뒤로 조금 물러났지만, 선원들 앞에서 체면을 생각하는지 달아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걸 잘 번역해. 먼저 앞쪽에 있던 놈들이랑 싸우고 있는데, 뒤가 뜨끔했단 말이야. 돌아보니까 좀비가 열 마리쯤 남았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지.”

테이블 위에 올라서 있던 민구는 통신장에게 설명을 한 뒤에 직접 어설픈 연기까지 했다.

윽,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연기, 그리고 분노에 찬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연기. 그런 다음 허공에 떠 있는 가상의 좀비를 향해 힘차게 쿠크리를 내돌렸다.

쉭―

쿠크리의 날이 바람을 가르는가 싶을 때, 민구의 마세티는 벼락같이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졌다. 그러고는 다시 쳐올리고, 쿠크리는 목을 찌르고 갈랐다.

처음에는 움찔하며 그의 돌발 행동을 두려워하던 선원과 용병들도 민구가 펼치는 혼신의 연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민구는 피하고 베고, 자르고 끊었다. 물론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칼날이지만, 테이블의 중간까지 내달렸을 때에는 뭔가를 정말로 상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 동작에 들어간 민구는 빠르게 마세티로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 그 짧은 사이에 그의 쿠크리는 허공에서 한 바퀴 반을 돌았고, 민구는 쿠크리의 날을 역방향으로 다시 잡아 직선으로 내리그었다.

콱―

합판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 쿠크리의 날이 직각으로 박힌다. 그제야 민구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쿠크리를 뽑았다. 한바탕 현란한 칼춤이 끝나자, 선원들은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치고 휘파람을 불어 댔다.

“타이쿤도 굿―!”

통신장도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민구는 두 자루의 칼을 다시 자루에 넣고 만져 보라는 의미를 담아 자신의 날갯죽지에 나 있는 상처를 두드렸다. 선원들이 하나둘 가까이 다가와 그의 등을 보며 웅성거린다.

가끔 아물지 않은 곳을 함부로 건드리면 따끔하기도 하지만, 민구는 꾹 참았다.

이 정도 쇼로 이만큼이나 들뜨는 걸 보면, 이 녀석들 믿고 의지할 게 어지간히도 없었구나 싶다. 선장을 돌아보며 민구가 말했다.

“믿어. 내가 아니라 내 여동생을 믿으면 돼. 걔는 좀비에게 보이지도 않아.”

통신장이 그의 말을 전하고 다시 선장의 질문을 옮긴다.

“당신 여동생, 빅 아일랜드에 같이 있슴미까?”

“그래.”

“여동생 어떤 사람임미까?”

통신장이 다시 물었다. 민구는 피식 웃었다. 어쩐지 이 한국말이 어눌한 놈 앞에서는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민구는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사 같은 애지. 내 동생 자랑, 들을 준비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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