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37화 (437/449)

5장 JL (5)

“선상 반란? 누가 누구에게 일으킨 반란인데?”

유빈이 물었다.

“선원들이… 당시 리그에 탑승하고 있던 JL 연구원들을 죽였어. 지정된 위치를 벗어나 달아나고 싶은데 그걸 못하게 하니까. 말리던 연구원들이 이쪽에 알리겠다고 무전기를 드는 순간, 이성을 잃고…….”

알렉스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시늉을 해 보인 뒤 말을 이었다.

“다행히 한 명이 도망가 문을 잠그고 잠시나마 교신을 했었지. 깜짝 놀란 우리가 헬리콥터에 레스큐 팀 여덟 명을 꽉 채우고 서둘러 날아갔을 때, 리그는 이미 한참 도망가고 있더라고. 그때 벌였던 활극은 진짜… 잊을 수가 없어. 헬리콥터를 착륙시키지 못하도록 물대포를 쏘고, 배를 좌우로 흔들고……. 헬리포트에 가까이 접근한 다음, 가까스로 뛰어내려서 진압을 하기는 했지만, 이미 연구원 둘은 숨을 거둔 뒤였지.”

알렉스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유빈의 팔을 감싼 붕대를 마저 풀어냈다. 상처가 드러나자 고린내가 슬슬 풍겨져 나온다.

“…역시 곪았네. 너무 더웠으니까, 뭐.”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독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눈에도 무척 다급하게 치료한 상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양도, 간격도 들쑥날쑥한, 꿰맨 자리 안쪽에 고름이 비친다.

“소독을 할 거야. 실밥 사이를 벌리고 소독약을 넣는 거라서 느낌이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위험하거나 한 건 아니니까 마음을 편안히 가져.”

알렉스가 핀셋으로 소독 솜을 집으며 말했다. 그 말을 옮기는 제니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알았어. 그런데 잠깐만… 저기, 야, 너희들.”

유빈이 잠시 기다려 달라는 손짓을 하며 알렉스의 뒤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제니가 돌아보니 모두의 시선이 유빈의 다친 팔 쪽으로 쏠려 있다.

삼식이, 보안관, 진우, 태권소녀, 테라 심지어 민구까지…….

“구경하는 건 괜찮은데, 그렇게 우울한 표정은 좀 짓지 마. 나까지 기분이 더 다운되잖아. 우리가 이겼고, 테라도 무사히 데려왔으니까 좀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해. 음료수도 마시고… 너희들 표정만 보면 내가 지금 어디 장례식에 와 있는 것 같아. 아니지, 요새 상갓집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분위기가 우울하지는 않을걸.”

유빈은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다들 침울해하고 있으니 그도 덩달아 더 어두워지는 기분이 든다. 슬퍼해 준다고 해서 잘린 팔목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갑자기 웃음이 터지겠어? 아무래도 속이 상하지.”

진우가 가장 먼저 쭈뼛거리며 대꾸했다. 다른 친구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소중한 뭔가를 영구적으로 잃게 된 상황을 받아들이려면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노력이라도 해봐. 그게 나를 위하는 거라 생각하고 말이야… 아야야! 아으, 아파!”

소독약을 바른 솜이 피부를 벌리고 안쪽으로 들어오자, 여유를 부리고 있던 유빈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걸 보고 있는 친구들의 마음도 편치 않다.

유빈은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제니를 통해 다시 알렉스에게 물었다.

“아까 선상 반란 이야기 말인데… 선원들은 대체 어디로 도망가고 싶어 했던 거야? 사람까지 죽여가면서… 그전에 엄청 위험한 임무라도 맡겼었나?”

“전혀. 오히려 아무 일도 시키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야. 위험한 일 같은 건 아예 없었어.”

알렉스가 대답했다. 유빈으로서는 점점 더 이상하게만 들리는 이야기였다. 위험하거나 강도가 심한 일을 시킨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지점에 가만히 떠 있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것도 이미 온 나라가 좀비로 덮여버린 상황에서?

“이해하기 어려운가 보군. 하긴 직접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사치스러운 투정처럼 보일 수도 있겠어. 특히 육지에서 좀비들과 싸워가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더 그렇겠지.”

유빈의 표정을 살핀 알렉스가 맥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낯선 극동의 바다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매일 MJ의 합류만 기다려야 한다는 게, 실은 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일이었어. 그 무기력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MJ는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널 키드의 혈액샘플을 아예 건드릴 수조차 없도록 세팅해 놓았거든. 거기에 좀비 확산에 대한 공포가 더해지면, 계속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지지. 뭔가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한 번 생겨난 밀실공포증은 적절한 외부의 자극이 없으면 점점 더 강해지지. 선원들의 심정도 그랬던 거야.”

“밀실이라고? 저렇게 큰 배가?”

“규모는 상관이 없어. 고립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인 거지. 생각해 봐. 며칠을 기다려도 가까이 다가오는 배가 단 한 척도 없어. 그리고 이쪽에서도 뭍으로 갈 일이 없고. 사방에 물밖에 없는, 거대한 밀실이 된 거야. 1년 이상의 장기 선상 거주에 익숙한 선원들이지만, 그렇게 답답한 상황을 만난 건 또 처음이었지.”

“뭐가 다른 거지? 그냥 평소의 생활과 비슷할 것 같은데. 그전에도 이 부근에 떠 있었다면서?”

이번에는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우가 물었다. 알렉스는 소독을 계속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그럴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완전히 다르더군. 그 전에는 보급 물자를 실은 배가 주기적으로 들락거리고, 이쪽에서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근처의 섬으로 가서 즐기다 올 수도 있지. 또 무엇보다도 평소에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날짜가 정해져 있어서 하루하루를 지워 나가고 있는 중이었잖아. 아무런 기약이 없는 이런 상황과는 비교가 안 돼.”

소독을 마치고 새 붕대를 감아준 알렉스는 유빈의 다친 팔 혈관에 수액 주사용 링크를 꽂고, 그걸 통해 몇 종류의 약을 주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구는 자신의 붕대를 갈아주던 젠킨스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면… 이런 거야. 운항 가능한 리그가 연료를 거의 꽉 채우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 밀실공포증에 걸린 선원들에게는 지루한 매일이 지독한 유혹의 시간이었던 거야. 심지어 그들은 한 번의 선상 반란을 진압당한 뒤에도 리그를 몰아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계속했어. 가족과 친구들이 아직 생존해 있을지 모른다는 환상에 완전히 빠진 거지. 연구원 팀으로서는 배에 감시조를 남겨놓기가 너무 무서운 상황이 되어버린 거야.”

“언제 또 살해당할지 모르니까요.”

제니가 말했다. 알렉스는 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맞아. 이미 두 명이나 목숨을 잃었으니 당연히 무서웠지. 그렇다고 아예 배를 비워놓을 수도 없었어. 그랬다가는 언제 우리를 내버려 두고 배를 몰고 도망갈지 모르니까 말이야. 결국 레스큐 팀을 비롯한 모든 연구 인원이 여기를 떠나 리그로 거처를 옮겼고, 거기에서 선장과 함께 지내면서 감시를 해야만 했어. 오늘 너희들이 오기 직전까지도.”

“구원이었지! 내가 데려왔다고!”

알렉스의 말을 듣고 있던 조종사가 큰소리로 자랑스럽게 외쳤다. 그와 부조종사가 앉은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 캔이 잔뜩 놓여있다. 그의 표정에서 널 키드를 만났다는 안도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유빈도 진우도 대충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럼 배에 남아 있다는 또 다른 전투 병력들은 배와 선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 너희들을 선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머물렀던 거네?”

“불행하게도 그래.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레스큐 팀도 혹시 딴마음을 먹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눈치를 봐야 했어. 그렇잖아. 만약 그들이 선원들과 힘을 합쳐 버리면, 우리는 도저히 당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지금까지는 짐이 잘 리드를 해줘서 별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알렉스가 말했다. 또 짐이라는 녀석의 이야기다. 진우가 서울에 남겨두고 온 네 용병 중의 리더.

검은 피부에 민머리, 강인해 보이는 얼굴. 개와 함께 앞서 달려가던 그 녀석의 모습을 진우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용병들 사이에서 신망이 있다고 하니, 죽이지 않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 됐어. 조금 지나면 몸의 열도 한결 내려가고, 고통도 덜해질 거야. 드레싱은 저녁때 한 번 더 하자. 초반의 관리가 중요하거든.”

치료를 끝낸 알렉스가 유빈에게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고맙습니다.”

유빈은 정색을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알렉스는 ‘천만에’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에게 감사하고 싶은 내 마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니까. 우리는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어. 매일매일이 아슬아슬했고, 동시에 지독하게 무료했지.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무덤덤해질 만큼.”

“그 손 말이야. 꼭 제 거여야 하나? 아니면 크기만 비슷하면 아무거라도 접합할 수 있는 건가? 저 놈에게 좀 물어봐.”

맥주 캔을 비우며 유빈의 상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민구가 뜬금없는 걸 물었다. 민구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잠시 멍해져서 그를 돌아보았다.

같은 질문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단순한 호기심이려니 하겠지만, 이 남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아니, 형씨… 대체 어디 가서 누구 팔을 잘라오려고…….”

보안관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민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죽는 사람이 많은 때니까 사람 팔도 구하려고만 하면 흔하지. 그런 눈으로 볼 이야기가 아니야.”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친구들도 완전히 생뚱맞은 소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어제 그들이 죽인 검은 군복들의 수만 해도 두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친구에게 붙여주기 위해 사람의 팔을 잘라서 그걸 가지고 온다는 건 이상하다. 이미 숨을 거둔 사람이라고 해도 너무 원시적이고,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이야기다.

저런 발상을 할 수 있다니…….

“왜, 뭔데? 무슨 이야기이기에 너희들 표정이 그래?”

알렉스가 제니에게 물었다. 제니는 여전히 이마를 찡그린 채 민구의 질문을 영어로 옮겨줬다.

“아아, 가능하지. 자신의 팔보다는 여러모로 못하지만, 거부반응 같은 것도 일반 장기에 비하면 훨씬 적고… 이 친구처럼 다친 부위가 팔꿈치 아래인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난이도도 낮아. 우리 의료진 수준이라면 성공 확률이 엄청 높다고 할 수 있지. 단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일단 혈액형이 일치해야 하고,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여야 해. 직후가 제일 좋겠지. 그리고 연령이 젊은 사람의 것이 더 좋고. 저온 상태로 가져온다면 바로 이식도 가능해. 물론 면역 억제제를 아주 오랫동안 복용해야겠지만.”

알렉스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친구들은 다들 기겁을 하며 들은 이야기였는데, 이 사람은 아주 편안하고 일상적인 주제처럼 거리낌이 없다.

“만약 잘라올 거면 이왕 하는 일이니까 좀 여유 있게 가져와. 이 친구가 손상된 부위에 맞춰 우리가 길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 이만큼이면 되겠지. 알겠어? 거기 아저씨, 이만큼이야. 그리고 곧바로 얼음 속에 넣어서.”

알렉스는 민구를 향해 돌아서서 자신의 팔꿈치 주변에 선까지 그어가며 확실하게 일러준다. 통역이 없이도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민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연구원 아저씨도 지금 잘라오라고 하는 거지?”

두 사이코패스의 커뮤니케이션을 보고 있던 유빈이 제니에게 물었다. 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혈액형이 맞고 죽은 뒤 곧바로 자른 팔이라면 수술은 쉽대요. 길이를 좀 넉넉하게 해와 달라고.”

“어우~ 토할 것 같다. 젠장…….”

유빈은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장면이 상상되어 버렸다.

민구가 태양 그룹의 검은 군복을 빈사 상태에 빠뜨리고 혈액형을 묻는 상상, 민구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들고 활짝 웃으면서 ‘어이, 맘에 드는 걸로 골라’라고 말하는 상상…….

끔찍하다.

“저기, 아저씨. 혹시라도 엉뚱한 사람 팔을 자를 생각 하지 마요. 특히 아저씨 말은 죽은 사람 거를 잘라왔다고 해도 잘 믿기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는 잊어주세요.”

유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좀비 사태 이후 끔찍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지만, 민구라는 사내를 만난 이후에는 그 레벨이 한 단계 더 올라간 느낌이다.

인간과 야수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을 추는 느낌이랄까?

하여간 여기에서 한 발짝을 더 내디디면 그때부터는 인간이기를 놓는 단계일 것 같아 무섭다.

민구는 유빈을 힐끗 쳐다만 볼 뿐, 대꾸하지 않은 채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다. 어디에 가면 많은 팔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데?”

유빈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낀 알렉스가 물었다. 유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혼란스러워서 그래. 후회했고 반성했다면서 지금 팔을 잘라오라는 말을 할 때는 또 완전히 잔인하게만 보여서.”

“착각하고 있나 보군.”

제니의 통역을 들은 알렉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 사람이 어디에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어떤 짓을 하든, 그런 건 난 관심 없어. 나는 갑자기 박애주의자가 되지도 않았고, 원래 남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타입도 아니야. 내가 지금 관심이 있는 건 오직 널 키드의 안전뿐이야. 그녀가 건강해야 내가 그녀의 피에서 건강한 항체를 추출하고, 그걸로 백신을 만들어 인류의 역사가 좀비 때문에 끊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으니까.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너를 치료하는 이유도 딱 하나뿐이야. 일행인 네 상태가 좋아져야 널 키드의 심리적 안정감도 올라갈 테니까.”

“그건… 꼭 테라를 이용하기 위해서 돌보겠다는 말 같은데?”

유빈이 물었다. 알렉스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댄다고 표현하자. 나는 그녀의 건강을 해치거나 자유를 제한하면서까지 혈액을 채취하고 실험을 강행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럴 능력도 없지. 그냥 그녀의 선한 의지에 기대고 싶어서 나는 철저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야. 지금도 봐. 이 중에 누가 절대 약자의 처지인 건지.”

알렉스는 주변을 빙 둘러 손짓하며 말했다.

“전부 다 너희 일행들이잖아. 게다가 칼과 총으로 무장을 했고. 너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두렵겠지만, 반대로 내가 지금 얼마나 무서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갑자기 너희들이 난폭하게 돌변해서 칼로 나를 찌르면… 그걸로 내 생명은 고통과 함께 끝나는 거야. 저 두 노인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리도 없고, 내 스스로 피할 능력도 없지. 하지만 나는 기꺼이 너희들을 따라왔어. 죽게 된다고 해도, 또는 모든 직원들의 의심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심정이었단 말이야. 그만큼 절박하니까……. 아, 젠장 너무 열을 올렸군.”

감정적인 말들을 토해내던 알렉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가 새 맥주와 음료를 꺼냈다. 그러고는 모두의 앞에 캔 하나씩을 올려놓았다.

“어쨌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너희들이 세상의 멸망을 막을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 널 키드를 위하여.”

알렉스는 제멋대로 지껄인 뒤, 맥주를 들이켰다.

딱.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던 유빈도 한 손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진 콜라 캔을 잡고 마개를 땄다. 제니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굳이 거절했다.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남으려면 혼자 해내야 한다.

유빈이 차가운 음료수로 입술 정도만 축이고 있을 때, 알렉스가 노트북을 들고 다가왔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면 이걸 준비해 둘게. 다른 사람의 팔도 나쁘지는 않지만, 즉시 사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바이오닉 핸드가 훨씬 우수하지. 우리가 네 손을 배양할 수 있을 때까지 이걸로 생존해.”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것은 의수를 안내하는 브로슈어였다. 지금까지 유빈이 알고 있던 의수와는 사뭇 다른 생김새였다. 사이보그의 팔이라고 해도 믿길 만큼 정교해 보인다.

“3세대 바이오닉 핸드야. 이전 세대 모델까지는 엄지손가락의 구동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이건 달라. 독립된 전기 자극 센서가 엄지에 대한 명령을 별도로 처리하지.”

그의 말을 옮겨주던 제니도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 회사 손 본 적 있어요. 사고를 당하신 소방관 아저씨께 이걸 증정해 드리는 행사에 테라랑 같이 갔었어요.”

“성능은 어때? 잘 움직여?”

유빈이 물었다. 의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어딘가 슬프면서도 동시에 조금은 기대가 된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공과 가벼운 공이 무작위로 번갈아 나오는데, 그걸 떨어뜨리지 않고 집었어요. 물론 그 아저씨는 적응 훈련을 아주 오래했대요.”

“아니, 이건 그때 그 모델보다 훨씬 개선된 거야. 더 정교하고, 더 빠르게 반응하지. 네가 노력한다면 카드 셔플까지도 가능해. 게다가 이 센서는 바이오닉 핸드의 손끝에 닿는 느낌을 역으로 너에게 전달해 줘. 부드럽고 약한 것인지, 강하고 단단한 것인지 만지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고.”

알렉스가 제니와 유빈의 대화를 옮겨 듣고는 자신들의 회사가 만든 의수를 자랑한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 화면에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별로 힘을 못 쓴다거나 그러는 거 아닐까? 확 잡아당기면 덜렁 빠진다거나.”

걱정쟁이 유빈이 애써 부정적인 전망을 상상해 내며 물었다. 알렉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4만 달러짜리 2등 기업들의 모델도 그렇지는 않아. 하물며 이건 시장을 선도하는 8만 5천 달러짜리야. 그렇게 허술하게 만들어질 리가 없지. 악력은… 네가 소음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네 원래의 손보다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저기 저 덩치 큰 친구만큼 강해질 수도 있지. 물론 그걸 마음대로 컨트롤하려면 적응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최대 출력과 최저 출력의 폭이 적을수록 힘 조절이 쉬우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는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의 각 관절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영상 속 첨단 의수는 체리를 짓뭉개지 않은 채 빠르게 꼭지를 따고, 피아노를 치고, 심지어 테니스를 친다. 그리고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수행이 가능하다.

위이이잉―

팔목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뭐에 쓰는 기능인지는 모르겠지만, 낯설고 신기하기는 했다.

“이게… 이 물건이 지금 저 배 안에 있다고?”

한동안 홀려서 동영상을 보고 있던 유빈이 물었다. 알렉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도면이 있지. 3D 프린터가 네가 원하는 크기와 디테일대로 만들어줄 거야. 너는 색깔만 정하면 돼.”

“불! 제니야! 손바닥 꺾으면 불 들어오게 해달라고 해! 파란색으로!”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삼식이가 오늘 처음으로 기뻐하며 웃었다.

“야이씨! 내 손인데, 왜 네가 기능을 정하고 난리야!”

“알았어! 그럼 노란불!”

유빈이 발끈하고 삼식이가 맞장구를 쳐주자 주변의 친구들도 따라 웃는다. 그만큼 JL의 의수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멀쩡한 손과 그걸 맞바꿀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뭉툭한 팔목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요긴하고 멋지다. 은발의 두 늙은 조종사도 헐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댔다.

유빈은 제니와 테라에게 부가성능을 설명해 주며 웃는 알렉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한 말들은 대부분 믿을 만한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손을 치료해 주고 첨단 의수를 준비해 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에 현혹된 판단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 녀석이 진심을 말하기 때문인지 혼란스럽다.

똑같이 낯선 사람이지만, 만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등을 맡길 수 있던 민구의 때와는 또 다르다.

민구는 사납고 거칠지만,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 같은 강한 느낌이 있었다. 유빈은 약기운이 퍼져 몽롱해지는 와중에 계속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인간은 언제 다른 인간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쉬잇, 얘 잔다.”

삼식이가 모두를 조용히 시키고 아주 천천히 물러나게 했다. 유빈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아주 곤하게 잠이 들었다. 펄펄 끓던 열도 꽤 내려갔고, 이따금씩 경련하게 만들던 극심한 통증도 조금은 잠잠해진 모양이다.

“브람스를 틀어주고 나가자.”

알렉스는 오디오를 켜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나지막이 흐르도록 해놓고, 친구들을 외부 베란다로 안내했다. 민구와 삼식이는 카운터에 진열되어 있던 외국 담배를 가져와 맛있게 피웠고, 제니는 테라의 곁에서 서로 손을 꽉 맞잡았다. 에어컨 바람을 쐰 덕분인지 그녀의 열도 조금은 식었다.

“계속 통역을 하느라 피곤했겠지만, 한마디만 더 부탁할게. 저 총잡이 친구에게 말해줘. 어차피 아무도 공격하러 오지 않으니까 그렇게 긴장하고 있을 필요 없다고. 레스큐 팀은 지금 선원들로부터 연구원들을 지키는 것만도 벅차거든.”

제니의 곁으로 다가온 알렉스가 진우를 가리키며 부탁을 했다. 진우는 아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다. 바이오닉 핸드보다 오히려 더 기계처럼 보인다.

“다 좋은데, 아까는 왜 우리더러 그런 곳에서 함께 지내자고 한 거야? 서로 언제 죽일지 몰라서 24시간 내내 눈치만 보고 있는 배로 들어오라고. 무슨 생각이었지?”

진우가 물었다. 알렉스는 맥주를 삼킨 뒤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잖아. 그 갈등은 다들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긴 거였어. 널 키드라는 구세주가 등장해서 희망을 주기만 하면 사라질 갈등이었다고. 선원들도 보고 싶었던 거야. 자신들이 협력을 하면, 언젠가 저 지긋지긋한 좀비들이 모두 사라질 거라는 약속을… 그들의 밀실공포증을 날리는 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아주 작은 증거 하나면 되는 거였어. 널 키드의 항체를 받아 목숨을 건진 사람이라든가,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럼 그런 증거만 보여주면 그놈들은 다 얌전해질 거다, 이런 이야긴가?”

제니의 통역을 듣고 있던 민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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