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JL (4)
“잠깐만 기다려 줘.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할 게 있으니까.”
알렉스가 제니에게 말했다. 모두의 동의를 구한 뒤, 그는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누르고 피트를 찾았다.
“아니, 아니. 피트, 그런 게 아니라고. 잠시 동안만 가 있는 거야.”
알렉스는 피트와 약간의 실랑이를 벌였다.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던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결국엔 저쪽에서 납득을 하는 눈치이다.
잠시 후, 피트는 뚱한 표정으로 은색 알루미늄 가방과 노트북 케이스를 가지고 다시 올라왔다.
“이건 내가 맡을게. 괜찮지?”
알렉스가 유빈의 손이 들어 있는 아이스박스를 들며 말했다. 제니가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요?”
“아주 저온에서 보관할 거야. 손상된 부분을 이식한 뒤, 접합시키는 기술을 확보할 때까지.”
“그런 기술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 지금은. 하지만 나중에 시도해 볼 수는 있지.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몰라. 그때 이게 있어야 접합을 하잖아.”
알렉스가 말했다. 제니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에서 포기해도 되는 걸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은 그 박스를 자신에게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유빈의 일부분을 인질로 내어주는 기분이 들어서 찜찜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저 손을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좀비 세상이 온 이래 얼음을 만져 본 것도 어제가 처음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할 거라고 약속해 주세요.”
제니는 마지막 저항처럼 말했다.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약속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언약을 받아두고 싶었다. 알렉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렉스는 아이스박스를 들고 가 피트에게 맡기고, 그가 가져온 알루미늄 가방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둘은 잠시 진지한 태도로 대화를 나눴다.
분위기만 보자면 알렉스는 계속 떠나려 하고, 피트는 사뭇 아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시죠.”
마침내 피트를 설득해서 내려보낸 알렉스가 가방을 들고 다가왔다. 유빈이 오른손으로 기다리라는 몸짓을 한 뒤, 가방을 가리켰다.
“아아, 이거. 그냥 약이야. 너를 치료하기 위한 항생제와 소염진통제, 그리고 속을 달래줄 약들과 진정제. 현실을 쿨하게 받아들여 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넌 지금 아마 엄청난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거거든. 마음 같아서는 너는 여기 남아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고 싶은데, 그건 너희들이 허락 못하겠지.”
알렉스는 가방을 열어 내용물들을 보여주었다. 푹신한 완충제 속에 체온 측정기와 주사기, 약병들이 끼워져 있다. 한눈에도 의료 용품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들로, 어제 유빈이 이로 물어 빼버렸던 형태의 수액 주사용 연결 부품도 보인다.
“됐지? 위험한 건 없어. 그리고 이건 노트북.”
알렉스는 노트북 케이스까지 모두 열어 보인 뒤, 헬리콥터에 올랐다. 보안관과 민구 사이에 끼어 앉은 알렉스는 제니와 테라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보안관은 곧바로 알렉스의 두 손목을 한데 모아 테이프로 친친 동여맸다.
“안녕. 방패를 사이에 두고 보지 않으니까 좋구나.”
킁― 킁―
낯선 사람이 끼어들자 삼숙이가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알렉스는 약간 두려워하며 몸을 움츠렸다.
“얘, 무는 건 아니지?”
“뭐라고 하던가? 선장은 아무 말 없었대?”
조종사가 헬리콥터의 기기들을 가동시키며 물었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아아, 그냥… 싫어하더군요. 레스큐 팀이 돌발 행동을 할까 봐 피트도 불안해하기에 짐도 허락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리고 또 선장이 계속 올라오고 싶어 했다고. 뭐, 널 키드라는 실체를 보고 싶었을 테죠. 진단 기기에 보이는 표시 같은 건, 그 사람들에게는 너무 막연하게 느껴질 테니까요. 조금만 참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신뢰를 얻는 게 먼저라고. 사실 제가 도망을 간다고 걱정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나요? 이런 상황에서 어디로 가겠어요?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짐이 누군데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니가 끼어들었다.
“너희가 서울에 버려두고 온 레스큐 팀 리더. 젠장,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을 진정시키는 문제도 남았네. 아마 화가 잔뜩 나 있을 텐데…….”
알렉스의 마지막 몇 마디는 다시 회전하기 시작한 프로펠러 소리에 묻혔다. 헬리콥터는 천천히 떠올라 기수를 북동쪽으로 돌렸다.
짙은 청록색의 바다 위를 빠르게 날던 헬리콥터는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빅 아일랜드가 저기야. 마음에 드나?”
조종사가 말했다. 친구들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빅 아일랜드는… 그 별명과는 정반대로 아주 작은 섬이었다. 절벽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작은 산과 그걸 둘러싼 숲이 거의 전부다.
작은 산 위쪽에 ‘ㄱ’ 자 형태로 꺾인 5층짜리 건물이 하나 서 있고, 그 뒤쪽으로 헬기 착륙장을 겸하는 운동장이 보인다. 외국 영화에서나 보았던 모양의 멋들어진 건물이었다.
섬의 반대편에 위치한 작은 선착장에는 조그만 보트도 정박하고 있다. 건물과 운동장을 빙 두른 형태로 설치된 태양광발전 패널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즐거운 비행 되셨기를. 저는 기장 폴 레이너였습니다. 내리시기 전에 다시 한 번 개인 소지품을 챙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희 레이너 에어 서비스에서는 여러분을 다시 모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헬리콥터를 운동장 한쪽 구석에 착륙시킨 뒤, 백발의 조종사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부조종사도 손가락을 세워 이마에 붙이며 가볍게 인사를 한다.
물론 그래봐야 그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민구는 폴과 부조종사를 내리도록 하고, 그들의 무기를 회수해 삼식이의 가방 안에 넣었다.
“헬리콥터가 한 대 더 있네요? 저건 누가 조종하는 건데 여기에 세워져 있나요?”
운동장의 반대편에 세워져 있는 헬리콥터를 보며 제니가 물었다. 폴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준다.
“저건 그냥 비상용이야.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헬리콥터 한 대만 믿고 있을 수는 없잖니. 고장이라도 났다가는 꼼짝없이 발이 묶이니까. 이런 게 다 젠킨스를 구조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젠킨스 본인이 만들어놓은 보험 장치였지.”
말을 마친 폴이 허무하다는 듯 두 개의 헬리콥터를 번갈아 본다. 그렇게 꼼꼼하게 준비를 해뒀건만, 젠킨스는 결국 이 섬의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정말로 아무도 없는 건가…….”
진우는 삼숙이와 함께 내렸다. 헬리콥터를 벗어나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가슴속 깊숙이 숲의 향기가 들어온다. 강원도를 벗어난 이래 정말 오랜만에 맡아본, 신선한 공기였다.
째재잭― 짹짹―
숲 안쪽에서 산새들이 울며 푸드덕거린다. 미세하게라도 좀비의 악취가 섞여 있지 않은 이런 공기는 어딘가 낯설기까지 했다. 삼숙이 녀석이 짖어 대지 않는 걸로 봐서 총기에 대한 걱정도 일단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발 조심해, 테라야.”
열이 뜨끈뜨끈하게 올라 있는 테라를 부축해 주며 제니와 태권소녀가 말했다. 테라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지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그녀의 창백한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야말로 체력의 한계를 악으로 버텨내고 있는 모양이다.
“이거 가지고 가?”
폴리카보네이트 방패를 들어 보이며 삼식이가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까지 위험성이 제로라는 말은 안 믿는 게 좋다.
스릉―
민구가 쿠크리를 뽑아 들고 다가오자, 그동안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던 알렉스의 얼굴이 굳는다. 손목을 묶은 테이프를 잘라주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는데도 겁을 먹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민구는 놈의 눈을 빤히 노려보며 쿠크리를 그었다.
“후우우~ 저 사람 인상이… 들어가지.”
한숨을 내쉬며 팔목의 테이프를 뜯어낸 알렉스는 건물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뗐다. CCTV용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문 앞에 선 알렉스는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디카드를 금방 만들어줄 텐데, 그때까지는 일단 번호 코드를 누르고 출입해야 돼. 번호를 어떻게 세팅해 줄까? 다들 기억하기 쉬운 걸로 정해. 숫자 네 개.”
제니의 통역을 들은 친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0000으로 대충 정해 버려도 되겠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의미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이 낯설고 조금은 불안한 장소에 조금이나마 더 정 붙이기가 쉬워질 테니까.
“어제가 며칠이었지?”
태권소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전자시계를 들여다본다.
표시된 날짜는 8월 19일.
새삼 믿기지가 않았다. 좀비 사태가 일어난 게 불과 한 달하고 일주일 전인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삶을 지배하는 모든 질서와 법칙들이 싹 다 바뀌어 버렸다.
“0818로 할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모인 첫날이니까?”
태권소녀가 모두를 둘러보면서 제안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했다. 잘려 나간 유빈의 손만 아니라면 매년 큰 기념 파티를 열어도 좋을 만큼 의미 있는 날이다.
그 거대한 악마의 성 안으로 뛰어들어 테라를 구해냈던 일은… 정말이지 평생 잊히지 않을 강렬한 경험이었다.
“0818. 그걸로 세팅해 주세요.”
제니가 알렉스에게 말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코드를 다시 세팅했다. 잠시 후, 띠리릿― 하고 세팅이 완료되는 소리가 울렸고, 강화유리 자동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린다.
“으아, 덥구나. 잠깐만 기다려. 금방 에어컨을 켜줄게. 모든 출입문의 코드도 맞춰야 하고.”
소독약 냄새가 나는 건물 안으로 앞장서 들어가며 알렉스가 말했다. 그가 로비에 발을 내딛자 그때까지 꺼져 있던 조명이 그의 주변을 밝히며 켜진다.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진우는 사방을 둘러보며 삼숙이의 반응을 살폈다. 알렉스는 복도에 슬리퍼 소리를 타바닥, 타바닥, 울리며 컨트롤 룸을 향해 걸어갔다.
컨트롤 룸은 태양 그룹 지하 1층에 있던 경비 본부와 유사한 형태였다. 벽면 한쪽이 수많은 모니터들로 채워져 있고, 컴퓨터 장치도 복잡하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이 훨씬 규모가 작았고, 건물의 시스템을 하나의 터치스크린을 통해서 조절한다는 정도이다.
“…전기 시스템… 가동. 출입문 코드는… 일원화. 에어컨 온도는… 일단 지금 더우니까 화씨 73도 정도로 세팅해 놓을게. 건물이 좀 서늘해지면 그때 77도로 올리면 되고…….”
알렉스가 터치스크린의 아이콘들을 조절하는 동안 천장의 공조 장치에서 시원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아, 저기… 건물 내부 CCTV 말인데, 혹시 가동을 해도 좋을까? 아가씨들도 있고 하지만, 나에게는 널 키드의 평소 행동을 관찰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 데이터가 쌓이면 결국 저 아가씨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몇 개의 세팅을 더 하던 알렉스가 친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일단 켜보라고 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이는지 알아야 결정을 내리지.”
진우가 말했다.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터치스크린을 조작하자 벽면 가득 채워진 스크린들이 일제히 켜졌다. 진우와 유빈, 그리고 다른 친구들은 스크린에 비춰지는 영상을 신중하게 살폈다.
옥상의 수영장부터, 지하의 영화관, 개별 숙소, 식품이 보관되어 있는 냉동 창고까지… 이 건물의 거의 모든 공간이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CCTV가 닿지 않는 곳은 화장실과 샤워실 정도뿐인 것 같았다.
“어지간히도 호화판으로 해놨네.”
바다와 마주 보도록 꾸며진 화려한 식당의 모습을 보며 보안관이 중얼거렸다. 제니에게 물어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은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야 여기는 연구소인 동시에 만일의 상황이 벌어지면 젠킨스의 집이 되어야 하는 곳이니까… 겪어봐서 알 테지만, 그 사람은 뭐든 최고급 아니면 상대하지 않잖아.”
그 말에 민구와 테라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최고급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다는 말과, 늘 건빵 가루를 입 주변에 묻히고 있던 젠킨스의 모습이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진우는 유심히 화면을 살폈다. 사람이 숨어 있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비워놓은 건물이었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거 봐.”
삼식이가 구석의 화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청소가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스테인리스 바닥. 사람을 걸기에 충분할 만큼 높게 붙어 있는 고리와 인간미라고는 없는 스테인리스 침대들. 그리고 철책으로 만들어진 소형 우리.
누가 봐도 좀비를 해부하던 곳이다. 어쩌면 인간을 좀비로 만들던 곳일지도 모른다. 태양 그룹에서 보았던 것과 거의 유사한 장소가 여기에도 있다.
“역시… 이것들도 개새끼들이었어. 저 매가리 없는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니까.”
보안관이 질린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친구들의 시선과 표정을 읽은 알렉스가 제니를 향해 변명을 한다.
“이것 봐, 나는 우리가 선한 기업이라고 말한 적 없어. 그리고 이미 다 인정했잖아. JL은 좀비에 대해 오래전부터 연구하던 곳이고, 좀비들을 전 세계에 확산시킨 범인이라고 말이야. 그건 다 사실이야. 저 해부실? 그래, 저곳에서도 몇 차례나 실험이 있었어.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끔찍한 실험이었고, 내가 책임자였던 적도 있지. 하지만 그건 예전의 이야기야. 지난 한 달 이상의 괴로운 시간을 겪는 동안 우리는 변했어. 달라졌다고.”
제니로부터 그의 말을 전해 들은 진우는 이마를 긁적였다. 역시 감시 카메라를 통해 모든 걸 다 보여주고 기록하도록 해주기에는 아직 찜찜하다.
“CCTV는 아직 곤란해. 이게 여기에서만 보인다는 보장도 없고. 혹시 아까 그 배로도 화면이 모두 전송되면 우리 허점을 다 알려주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꺼둬. 만약에 저게 작동하는 기미가 보이면 너에 대한 신뢰는 많이 훼손될 거야.”
유빈과 의견을 교환한 뒤, 진우가 말했다. 알렉스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양보했다.
“좋아, 끌게. 당분간은 내 눈으로 관찰해서 기록하지 뭐……. 자, 아가씨. 이거 보이지? 비디오 서베일런스 항목. 작동 안 함으로 세팅했어.”
알렉스는 터치스크린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고, 화면의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벽면 가득 보이던 스크린도 모두 꺼졌다.
“외부와 연결된 카메라는 예외라는 점만 말해둘게. 그건 움직임이 감지되면 저절로 작동하고 기록을 남기니까. 그럼 이제 여기에서 할 일은 다 끝났어. 다음 스케줄은 어떻게 잡을까? 어디로 가고 싶어? 일단 샤워부터 하고 나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져도 되고, 식당에서 뭘 좀 먹을 수도 있고…….”
알렉스가 물었다. 진우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건물 투어부터 하자. 앞장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그리고 정말 아무도 없는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유빈과 테라의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큰 건물이 아니라서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하… 너희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정말 꼼꼼하구나.”
알렉스는 질린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걷는 방향에 맞춰 조명이 켜졌다가 모두가 지나가고 나면 잠시 후 꺼진다. 일행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일일이 문을 열어가며 둘러봤다.
건물은 깔끔히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젠킨스가 쓰려고 만들어뒀던 시설들은 유달리 호화로웠다.
“이 건물 어디를 어떻게 쓰더라도 상관없는데, 여기 이 층만은 건드리지 말아줘. 여기는 레스큐 팀 숙소니까. 아, 물론 문은 열어서 확인해 봐도 돼.”
숲 쪽을 향해 꺾여 나온 건물의 4층으로 들어서며 알렉스가 말했다. 진우는 망설이지 않고 첫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개인화기를 거치하기 위한 진열대가 보인다. 하지만 비어 있다.
“사람이 쓰던 것 같지 않은데? 총도 싹 치워져 있고.”
진우가 물었다.
“그야, 배로 옮겨간 지 꽤 됐으니까. 여기에 총을 놔둘 이유가 없지. 아마 저 복도 끝 창고에 가면 예비용 무기들이 좀 남아 있을 거야.”
알렉스가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옥상의 수영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투어는 끝이 났다. 바다와 잇닿아 있는 착각이 들도록 만들어진 넓은 수영장을 보고 있으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마약왕의 별장에라도 놀러온 기분이다.
“좋지? 해질녘이 특히 경치가 좋아. 물론 경치 같은 것도 속이 편할 때나 눈에 들어오는 법이지만… 내려가자. 바에서 한잔해도 되긴 하는데, 여기는 온도 조절이 안 되니까. 일단 몸을 좀 식혀. 너희들도 너희들이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널 키드가 제일 걱정돼.”
엘리베이터 입구의 옆에 설치되어 있는 바를 가리키며 알렉스가 말했다. 그 곁을 지나던 삼식이가 쇼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맥주병을 꺼내며 감탄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차가워. 전기는 꺼놨다고 하지 않았어?”
“불필요한 부분은 그랬지. 냉동 식량 창고나 냉장이 필요한 부분은 작동하고 있었어. 음식을 다 썩힐 수는 없잖아. 자, 이제 어디로 모실까?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는 어디였어? 널 키드 아가씨, 어디에서 휴식하면 가장 마음이 편안할까? 젠킨스의 라운지가 제일 고급이기는 해.”
알렉스가 물었다. 테라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봤다. 피곤하다. 쉬고 싶고, 제니와 단둘이 손을 꼭 잡은 채 그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고 싶다. 하지만 둘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면, 그때부터는 통역을 할 사람이 없어진다.
“그냥… 다른 분들이 결정하시면 모두와 함께 있을래요.”
“모두와 함께라… 그러면 식당으로 가지. 거기 소파에 누워 있어도 되고. 리클라이너도 있으니까.”
알렉스는 1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강화유리를 통해 외부의 경치가 고스란히 보이는 노출된 형태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빈이 물었다.
“이렇게 좋은 곳을 비워놓았던 이유가 뭐야? 그 배가 여기보다 더 안락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던데. 태양광발전 패널을 보니까 전기 걱정도 없을 것 같고.”
제니를 통해 질문을 전달 받은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지… 인간이라는 게 참 우스워서 위급한 상황이 오면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랄까?”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알렉스는 식당 쪽으로 모두를 안내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원래 우리의 주 생활 무대는 여기였어. 테티스가 아무리 커다란 리그라고 해도, 배에서의 생활이라는 건 뭍만큼 편안하지는 않거든. 그러니 그건 그저 이 주변에 떠 있으면서 만일의 사태를 위한 이동 기지 역할만 수행하면 되는 거였지. 그게 MJ가 만들어놓은 매뉴얼이기도 했고… 처음 며칠 동안은 그런대로 그게 잘 지켜졌어. 한데 본사와도, 또 주요 지사와도 통신이 끊어진 채로 열흘 정도가 지났을 무렵부터 배에서 뭔가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됐지.”
알렉스는 계속 입심 좋게 떠들어 대면서 식당의 문을 활짝 열었다. 전면 창 가득 바다를 보여주는 식당은, 기업의 급식실이라기보다는 근사한 호텔 라운지 같은 모습이었다. 몇 개의 원탁과 안락의자들이 드문드문 설치되어 있는 배치만 보아도 여유가 느껴진다.
“세상을 망하게 하는 연구를 했던 주제에 저희들은 아주 귀족처럼 살고 있었구만… 테라야, 여기 누우면 될 것 같다. 이렇게 비스듬히 누워.”
태권소녀가 투덜대며 테라를 긴 안락의자에 앉혔다. 보안관은 식당 입구에 설치된 작은 세면기의 물을 틀고 머리를 식혔다.
“이 물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야? 안 짠데?”
얼굴에 흐르는 물을 혀로 핥아본 보안관이 물었다. 알렉스가 말했다.
“담수화 시설이 절벽 아래에 있어. 펌프로 그 물을 끌어 올리는 거지.”
“Desalination이 뭔가요?”
통역을 하던 제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알렉스는 빙긋 웃으며 설명을 해준다.
“염분을 제거한다는 말이야. 뭐 좀 먹을래? 아니면 직접 보고 골라도 돼. 캘리포니아의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 종류는 거의 다 있다고 보면 돼. 거기에 기준을 두고 음식들을 세팅했거든. 주류는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주방 안으로 들어가 몇 개나 연이어 서 있는 냉장고들의 문을 열어보며 알렉스가 말했다. 여섯 팩 묶음의 맥주를 꺼낸 알렉스는 의자 깊숙이 기대앉은 조종사와 부조종사에게 두 개를 건네고 하나를 민구 쪽으로 던졌다.
턱―
민구는 손바닥 안에 들어 있는 차가운 맥주 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어가 잔뜩 박혀 있는 맥주캔…….
태평양을 건너 여기까지 온 물건이다. 게다가 이 낯선 차가움.
“크아, 너희들도 마셔. 설마 여기에도 무슨 약을 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미 맥주를 따서 벌컥대며 들이켠 뒤, 알렉스가 말했다. 민구의 생각에도 그의 말이 옳다. 올지 안 올지도 불분명한 미지의 누군가를 약으로 기절시키기 위해 이 큰 건물을 비워놓고 냉장고의 음식마다 약을 채워놓는다는 건 미친 짓이다.
“그래도 불안하면 저 개에게 먼저 먹여보든가.”
삼숙이를 가리키며 알렉스가 말했다. 별 악의 없이 장난 삼아 한 말이지만, 진우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저 새끼가 뒈지고 싶은 건가…….
“정말이네… 국산 음료수가 하나도 없어.”
알렉스를 따라 냉장고 쪽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던 태권소녀가 말했다. 그녀는 생수 두 병과 이온 음료 한 병을 꺼내 들었다. 그동안 제니는 한쪽에 고이 접혀 있던 냅킨을 물에 적셔 테라와 유빈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냉동 음식은 저기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돼. 오븐은 이쪽.”
알렉스는 냉동실을 열어 안쪽 가득 들어 있는 냉동 음식을 보여주었다. 풍요롭다. 그리고 아까 CCTV 화면에 비친 대형 냉동 창고는 이 모든 냉장고를 합친 것보다 더 풍요로웠다.
여기를 보고 나니 코스트코 옥상에서 풀을 만들어놓고 세상의 왕이 된 것처럼 기뻐했던 게 왠지 화가 난다.
이 지랄로 여유를 부리면서 살았는데… 힘이 들어서 반성을 많이 했다고?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괜찮니? 어지럽다거나 토할 것 같지는 않고?”
생수를 마시고 있는 테라에게 알렉스가 물었다. 테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그럼 이제 팔을 다친 친구 차례.”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은 알렉스는 유빈의 옆에 앉아 자신이 가져온 알루미늄 가방을 열었다.
“상처를 볼게. 그래도 되지? 물론 드레싱은 치료가 끝난 뒤에 새로 해줄 거야.”
제니가 알렉스의 말을 전했다. 유빈의 의사를 묻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상처를 보이는 게 괜찮은지를 에둘러 확인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제니를 시켜 물었다.
“아까 왜 배로 옮겨갔는지 이야기해 주다 말았는데, 배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말까지 했어. 수상한 움직임이란 게 뭐야?”
“선상 반란이었어. 두 명이 죽었지.”
알렉스가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