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35화 (435/449)

5장 JL (3)

“테라야…….”

제니는 테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테라는 가볍게 떨고 있었다. 항체를 줄 수 있는 면역자라는 사실을 젠킨스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두려움이 그녀를 휘감는다.

…모든 것이 다르다. 보통의 흔한 사람들과… 얼핏 그리 대수롭지 않은 말처럼도 들리지만, 조금만 고민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앞으로 그녀는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조차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 평생 동안. 그런데… 평생이라는 게 대체 얼마나 되는 시간일까?

“저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로 오래 살 수는 있는 건가요? 그게… 그러니까,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말이에요.”

잠시 제니의 눈을 마주 보고 있던 테라가 알렉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대답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어. 아무것도 모르니까……. 평균적인 수명만큼 살 수도 있고, 유감스럽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경험한 널 키드는 한 명뿐이었고, 그마저도 앱테크나야에서 미사일 공격을 받아 사망하기 전까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관찰할 수 있었어. 그러니 우리가 널 키드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라고는 아주 부분적이고 파편화된 정보들뿐이야. 미안해,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어서.”

알렉스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말했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 테라의 표정은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건… 내일 갑자기 거짓말처럼 숨을 거둬도 이상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영원히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은 너무 가혹하다.

“…젠킨스 씨는 이런 말 하지 않았어요. 저랑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요. 먹을 것에 대해서 주의를 준 적도 없었고요. 알렉스 씨가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닐까요?”

테라는 젠킨스를 앞세워 반박을 해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인정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렉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MJ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관계로 지냈는지 모르니까 왜 그런 중요한 정보를 전해 주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말하기는 어려워. 그런데 MJ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거야. 언제나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로 유혹하지. 자신이 완벽한 우위를 점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어쩌면 자신이 상황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실제로 그는 엄청 대단한 천재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MJ가 뭐라고 했든 간에 내 말은 사실이야. 모르는 걸 안다고 믿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어.”

“그만해요. 얘한테 얼마나 더 충격을 줄 셈이에요? 이미 충분히 힘들었고, 긴장해 있다고요. 당신은 지금 말로 얘를 고문하는 거랑 다를 바 없어요!”

듣다 못한 제니가 테라의 어깨를 감싸며 알렉스의 말을 끊었다. 알렉스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악역 같은 거, 전혀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처음엔 계속 권유하기만 했잖아. 물이라도 마시고, 시원한 공기를 좀 쐬면 어떻겠냐고 말이야. 그걸 완강히 거절한 게 너희들이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저… 조심하자는 것뿐이야. 아주 얇은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한 발, 한 발을 떼자는 거라고.”

“저 새끼가 뭐라고 약을 팔기에 얘 표정이 이래?”

민구가 물었다. 계속 영어로만 대화가 오가니 답답했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친구들 역시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다.

“그게… 테라는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대요, 모든 면에서. 그래서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닌 일도 테라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금 이렇게 좁은 곳에서 더위를 참고 있는 것도 위험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요.”

제니가 힘없이 대답했다. 이번에는 보안관이 물었다.

“그래, 위험할지 모르는데…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일단 여기는 좁고 더우니까 헬리콥터에서 내려서 바람이라도 좀 쐬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어요. 피곤하면 안 되니까 물도 많이 마시고, 음식도 가져다줄 테니까 좀 먹으면 좋겠다고.”

제니의 대답을 들은 민구는 알렉스를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저런 놈들 수법이야 빤하지. 일단 겁부터 잔뜩 줘놓고 얼러서 혼을 빼놓으려는 모양이군. 얘가 그제 오후부터, 아니, 그전에도 얼마나 강하게 싸우고 버텼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걸?”

하지만 유빈과 진우는 민구처럼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테라에게 특별한 강점이 있는 것이 사실인 만큼, 역으로 그녀에게 특별한 약점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긴 하다.

특히 유빈은 테라의 피를 전달하기 위해 헬리콥터 밖에 나온 뒤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안이 얼마나 좁고 덥고 답답한 곳인지를…….

헬리포트 위의 햇살이 따갑다고는 해도 간간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있으니 한결 살 것 같다.

자신의 팔을 접합하는 수술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요할는지도 모르는 채 그게 끝날 때까지 모두가 저 찜통 안에서 기다리겠다는 건 미친 짓이 맞다. 세 시간만 지나도 다들 더위를 먹고 쓰러질 거다.

설사 용케 버텨낸다고 해도 보상은 전혀 없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싸움을 하면서 그렇게 무의미한 이유로 체력을 갉아먹는 건 바보짓이다.

애초에 진우가 짜놓은 계획은 유빈을 수술실에 넘긴 뒤에 조금 거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JL의 연구소가 위치한 시점에서, 그 계획은 이미 텄다. 뭔가 타협과 변경이 필요하다.

“이 사람한테 물어봐 줘, 제니야.”

헬리콥터 문 앞에 서 있던 유빈은 안쪽의 제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을 믿고 싶지만, 아직 완전히 그러기가 어렵다고. 그럴 때 당신은 우리 신뢰를 얻고 테라를 쉬게 해주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아… 제 걱정 하느라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저 아직 견딜 만해요.”

테라가 다급하게 유빈을 말렸다. 혹시 자신을 걱정하다가 모두가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네 얼굴 보고 있으면 나도 걱정이 되지만, 꼭 너 하나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야. 다들 쉬어야 해.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 더위랑 싸우고 있을 필요 없어. 내 수술이 끝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게 아니잖아.”

제니는 진우를 돌아보았다. 진우도 유빈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지만, 심적으로 동요하고 있음을 이방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니는 유빈의 질문을 알렉스에게 옮겼다.

“아… 일단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줘서 고맙고, 그다음에… 나는 일단 너희들에게 음식과 물부터 전달해 주고 싶어. 절반씩 반대쪽 문으로 나가서 헬리콥터에 기대 먹으면 되잖아.”

알렉스가 제안을 했다.

“그건 별로야. 음식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잖아. 다 기절하거나 할까 봐 무서워서라도 먹을 리가 없지.”

제니를 통해 전해 들은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서로 신뢰를 쌓고 싶은 거지, 호구가 되어 털려주겠다는 게 아니다. 알렉스가 자신의 제안을 보강해서 내놓는다.

“가져오는 음식을 내가 먼저 먹어 보일게. 너희는 조금 기다렸다가 내가 별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 먹어. 그러면 되지 않을까?”

“그런다고 해도 별 차이 없어. 애초에 해독제나 그런 걸 미리 먹고 왔을 수도 있지. 잊지 마, 당신네들이 바로 이 세상에 좀비를 퍼뜨린 건 회사라는 걸. 이제 와서 갑자기 선량한 사람들인 척해봐야 그리 설득력이 없어.”

유빈이 말하고, 제니가 영어로 옮겼다. 그걸 듣고 난 알렉스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맞는 말이야. 이 회사가 좀비 박테리아로 큰돈을 벌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것도 사실이고,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JL에 있지. 하지만 나를 비롯해서 이 리그에 있는 연구자들이 JL의 사상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줘. 사실 우리는 그런 유포 계획 같은 것을 수립할 수 있는 레벨도 아니야. 그리고… 지난 한 달 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고, 반성을 했어.”

거기까지 이야기했는데도 유빈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알렉스는 목소리의 톤을 한 단계 다운시켜 말을 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본사와의 모든 교신이 끊어지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 한 달 동안,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빌었다고. 이게 그냥 악몽이기를… 아주 생생하고 긴 악몽이기를……. 하지만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지. 이 좀비 사태는 엄연한 현실이고, 그때서야 우리는 우리들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깨달았지. 한 번만! 단 한 번만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물론 그러는 동안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료들도 있었고… 그런데 오늘 너희가 온 거야! 아직 살아 있는 모든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널 키드와 함께!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이건 지구를 지배하는 어떤 강력한 힘이 나에게 허락해 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이제 더는 후회할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그것만은 믿어줘.”

“믿고 싶어. 그래서 여기로 온 거고. 그러니까 믿을 수 있을 만한 행동이나 제안을 좀 해 보라고.”

때때로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온 몸에 휘감기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유빈이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말했다. 섣불리 믿지 못하기에 이 협상은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는 두 손의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다시 제안을 했다.

“알겠어. 좋아, 그럼 이건 어때? 일단 얼음이라도 좀 가져오라고 시킬게. 그걸로 더위부터 식혀. 그건 약에 취할까 봐 걱정하지 않고 쓸 수 있겠지. 너희도 너희지만, 폴도 위험해. 저 사람은 노인이라고. 폴과 라파엘이 쓰러지면 그때는 헬리콥터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는 거야.”

알렉스는 얼음찜질하는 흉내를 내며 조종사를 가리켰다. 유빈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얼음을 기다리는 동안, 조종사가 등을 돌려 제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얘야… 나는 헬리콥터 조종하는 것밖에는 모르는 늙은이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뭐가 급한지는 알 것 같구나. 저 젊은 친구는 저 상태로 오래 못 버텨. 나라면 일단 빨리 병원으로 옮길 거야.”

그가 지목한 것은 유빈이었다. 손목이 잘린 채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몸으로 버티고 서서 계속 협상을 하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위태롭다. 미세하게 휘청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니의 마음도 부서지는 것 같다.

테라와 유빈, 둘 다 심각하게 상처를 받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지금, 어쩌면 가장 괴로운 것은 둘 모두를 사랑하는 제니인지도 모른다.

“저 새끼들… 저거 뭐야?”

유빈에게 협상을 맡긴 채 계속 전방을 살피던 진우가 멀리 높다랗게 솟아 있는 철제 구조물 사이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세 명의 건장한 남자가 철책에 몸을 숨겨가며 기어 올라와 망원경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다. 비록 무장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경이 쓰인다.

“저놈들은 뭐야? 분명히 이야기했잖아. 당신 혼자 오라고! 이런 식으로 약속을 어기기 시작할 거야?”

진우가 철제 구조물을 가리키며 항의를 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알렉스도 숨어 있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그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내려가라고 소리를 질러 대자, 세 남자는 마지못해 철책 뒤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미안해! 하지만 위험한 사람들은 아니야! 그냥 선원들이야! 스코프가 있으니까 너는 더 정확하게 봤겠지, 아무 무장도 하고 있지 않다는걸! 저 사람들은 그냥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던 것뿐이야! 여기에 널 키드가 왔다고 하니까 말이야!”

남자들이 돌아간 뒤, 알렉스는 열심히 변명을 했다. 조금이나마 분위기가 좋아지려는데 멍청한 놈들 몇몇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는 싫다. 진우는 아직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을 거 아니야. 왜 선원들이 당신 명령을 듣지 않았지?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선원들은… 내 말을 잘 듣지 않아. 선장의 명령을 따르지. 하지만… 이해해 줄 수도 있는 문제잖아. 저 사람들도 널 키드가 왔다는 뉴스에 들뜬 것뿐이야. 희망이 필요했던 거라고!”

알랙스는 열심히 설명했다. 물론 이렇게 압박감이 가득한 대치 상황에서 서로 소리를 질러가며 대화를 하는 방법으로는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온전히 알려주기 어렵다. 그리고 듣는 쪽에서 그것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것 같지도 않다.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무단 구경꾼 때문에 다시 대화의 방향이 흐트러졌을 때, 얼음을 가득 담은,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들고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알렉스는 그들을 내려 보낸 후, 아이스박스를 끌고 와 헬리콥터 앞에서 열어 보였다.

“자! 이거 그냥 얼음이야! 이렇게 먹어도 되는 얼음! 너희들도 이걸 가져가서 열을 좀 식혀!”

알렉스는 얼음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고 우둑우둑 씹으면서 말했다. 방패를 들고 있던 삼식이가 얼른 그걸 헬리콥터 안으로 들여갔다. 한 손으로 얼음을 집어 두 눈과 목덜미에 문대자, 저절로 신음 소리가 나올 만큼 시원하다. 조종사와 부조종사도 얼음을 입안에 넣고 돌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음… 여기에도 넣어야 돼.”

두 손으로 얼음을 쥐고 테라의 머리를 식혀주던 제니는 유빈의 손이 든 아이스박스에 다시 얼음을 채워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알렉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 박스 줘. 지금 당장 이 친구랑 같이 수술실로 옮길게.”

제니는 잠시 망설인 뒤, 아이스박스를 유빈에게 건넸다. 유빈은 다시 자신의 손이 든 아이스박스를 알렉스에게 넘겼다.

“열어봐도 괜찮지?”

알렉스가 유빈에게 물었다. 유빈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굳은 얼굴로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이 의심 많은 녀석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일단 봉합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 그게 첫 걸음이다.

“아…….”

그러나,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는 유빈의 손을 보자마자 알렉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당혹스러워서 그의 목덜미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노 굿?”

녀석의 반응을 눈치챈 유빈이 물었다. 알렉스는 유빈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유감이야.”

굳은 표정으로 아이스박스의 뚜껑을 닫으며 알렉스가 말했다. 이만큼이나 영리한 아이들이 왜 저 손을 다시 붙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건지, 그는 그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린 유빈의 손은… 불에 그슬려 단면이 타버린 상태였다. 케블라 장갑 내부의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일단 접합을 해야 할 팔목에서부터 도저히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근육과 신경은 고열에 의해 이미 불가역적인 변형을 일으켰고, 그 일그러진 조직을 정상 피부와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달걀 정도의 간단한 구조라면 또 모를까 사람의 손은…….

“아니에요! 태양 그룹 의사는 전문의를 만나면 고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제니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아예 헬리콥터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그녀를 태권소녀가 붙잡았다.

이 상황이 괴롭기는 알렉스도 마찬가지다. 이 어린 친구의 손을 깨끗하게 접합해 주는 것으로 테스트를 통과하고 신뢰를 쌓으려던 모든 계획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젠킨스 씨는 이곳에서 몸을 배양해서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는데요… 그러니까 저 오빠 손도…….”

테라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조금 희생하면 유빈의 상처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그 기대 하나로 버텨왔는데… 이런 결과는 납득할 수 없다.

“배양 후 이식은… 단순한 근육조직일 경우 가능해. 그건 그냥 고깃덩어리 정도니까. 이미 임상실험도 다 거쳤으니 안정적이고. 하지만… 손은 이야기가 달라. 이렇게 여러 개의 근육과 수많은 신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체 부위를 배양해 낸 사례는 아직 없어.”

알렉스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친구들의 실망한 표정 때문에 그의 목소리도 떨린다.

“하면 되잖아요! 존재하지 않는 백신도 만들 거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왜 멀쩡하게 있는 손을 고치지 못한다는 거예요?”

제니가 분노로 입술을 떨며 물었다. 알렉스는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면서 힘겹게 대답했다.

“그래… 시도해 볼 수는 있겠지. 그러나 이건 널 키드의 피에서 항체를 추출해서, 그걸 배양해 내는 것과는 또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이야기야. 아직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축적되어 있는 데이터가 없어.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돼. 혹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뭐라는 거야, 저 돌팔이 새끼가! 제니야, 꼭 해야 한다고 말해!”

보안관이 흥분해서 펄펄 뛴다. 진우의 눈꼬리도 매섭게 올라갔다. 요구하는 자들과 변명하는 자의 이야기가 겹쳐 울리면서 헬리콥터 주변은 또 시끄러워졌다.

“아아… 됐어. 다들! 제발!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억지 쓸 필요 없잖아! 아저씨도 스톱!”

유빈이 끼어들어서 모두의 입을 다물도록 했다.

“후우우~!”

유빈은 가벼운 한숨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꺾인 순간에는 잠시 아찔하기도 했지만, 이제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의 왼손은 어제 없어졌다. 그걸 억지로 돌이켜 보려고 하다 보니 머릿속도 멍하고, 이 중요한 상황에 자꾸 머뭇거렸다.

인류를 구하기 전에 일단 내 손을 붙여놓으라니… 객관적으로 보자면 얼마나 바보 같은 이야기인가.

유빈은 친구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손은 나중에 이야기해도 돼. 그건 어차피 부수적인 문제였어. 우리,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자.”

제니는 아직도 화를 이기지 못해 눈물이 글썽거리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테라도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제니야, 이 사람한테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봐 줘. 지금 당장 원하는 게 뭔지 말이야.”

유빈은 제니에게 부탁을 했다. 제니는 눈물을 훔쳐 내고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유빈의 질문을 전했다.

“아까부터 말했던 거지만,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일단 널 키드가 안정되기를 바라. 신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모두 안정을 되찾았으면 좋겠어.”

알렉스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유빈은 다시 물었다.

“당신, 이 피를 가지고 연구해 봤어?”

“아니. 널 키드가 사망한 이후, 남겨진 혈액 샘플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최상위 레벨의 권한을 가진 사람들뿐이었어. 하지만 자신 있어. 곧 결과를 낼 수 있을 거야.”

알렉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이 리그 내에도 널 키드의 피가 아주 소량 보존되어 있다. 앱테크나야의 널 키드가 미사일 공격에 휘말려 사망하기 전, 몇몇 주요 거점으로 분산되어 보내졌던 혈액 샘플이다.

하지만 그 샘플은 견고한 보관실 내에 보관 중이고, 그 방의 문을 여는 암호는 젠킨스만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연구도 실험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피는 얼마나 자주, 얼마만큼씩을 뽑을 거야? 그리고 그걸 언제까지 반복해야 돼?”

“채혈? 아니, 그런 문제는 지금 생각할 필요 없어. 말했잖아, 일단 안정이 우선이라고. 저 아가씨가 건강해졌다고 판단될 때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하면 안 돼. 지금 보니까 손목에도 출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안정을 취한 뒤에 다시 돌아오라, 이런 말이야?”

유빈이 물었다. 알렉스는 펄쩍 뛰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어디로 가려고? 위험하잖아. 그렇게 장거리 헬리콥터 여행을 계속하라고 권하고 싶지 않아. 여기는 안전해! 원한다면 우리 연구원들 숙소를 통째로 내줄게.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랑 함께 지내. 이전까지 뭘 먹었었는지 알려주면, 그 음식들을 제공하도록 노력해 볼게.”

알렉스의 말을 전해 들은 유빈은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또 원점이다. 이놈은 자신들이 이곳에 머물러 주기를 원하고, 자신들은 이놈의 아가리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직 그렇게까지 믿어줄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까.

“저기… 알렉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젊은 친구들은 이 배에 머물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야. 서로 이렇게 고집만 피우지 말고, 빅 아일랜드로 옮겨가 있으면 어떨까? 거기라면 이 친구들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보다 못한 조종사가 제안을 했다.

“빅 아일랜드?”

제니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조종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줬다.

“여기에서 북동쪽으로 3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무인도야. 거기에 JL 연구소 건물이 있지.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고 있지 않아 텅 비었지만.”

“왜 비었어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혹시 거기도 좀비들이…….”

그의 말을 친구들에게 전해 준 뒤, 제니가 다시 물었다. 조종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사람들 간의 문제야. 좀비 같은 건 한 마리도 없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어. 발전기의 스위치를 올리기만 하면 돼.”

“그런 곳이 있는데, 왜 지금까지 말을 안 했어? 그게 자기들을 믿어달라는 사람의 태도야?”

진우가 물었다. 비어 있는 섬이라는 건 매력적인 장소다. 수십 명의 선원과 직원들로 가득찬 배와는 다르다. 알렉스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단 그곳까지 옮겨가서 너희들을 보호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

“장난치나… 우리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어. 보호는 필요 없다고.”

“잔인한 이야기지만, 저 친구의 손이 날아가기 직전에도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테지. 나는 모든 위협으로부터 널 키드를 보호하고 싶어. 우리에게는 그렇게 하도록 훈련 받은 전투 인력들이 있고.”

알렉스의 도발적인 말을 옮기는 동안 제니의 목소리가 떨린다. 진우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너희 잘난 전문 전투 인력들은 지금 서울에 있는데? 우리한테 속아서.”

“설마 이 큰 배에 전투 인력이 단 네 명뿐이겠어? 제2조가 당연히 대기 중이야.”

알렉스가 대답했다. 말싸움이 길어지자 조종사가 답답하다는 듯 헬기의 조종간을 내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딴 걸로 고집 피우면서 잘난 척하지 마! 이 친구들은 알렉스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용병 넷을 순식간에 따돌릴 만큼 영리하고, 그들을 죽이려 들지 않을 만큼 여유롭다고! 가자고! 어차피 이 배에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니까 말이야!”

“아아~!”

알렉스는 이마를 감싸 쥐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제니를 보며 말했다.

“조건이 있어. 나도 같이 데려가 줘. 널 키드의 옆에서 조언을 할 수 있어야 돼.”

그의 조건을 전해 들은 진우와 유빈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가닥 불안이 제거되지 않은 유빈이 보안관에게 물었다.

“이 사람, 운동한 것처럼 보여? 헬리콥터에 태워도 될까?”

“운동을 했든 안 했든 그까짓 거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어차피 한 방감인데.”

보안관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그 옆의 민구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좋아요, 같이 갑시다. 대신 헬리콥터가 날아가는 동안에는 손과 발을 묶어놓을 거예요.”

걱정쟁이답게 유빈은 끝까지 신중한 조건을 달았다. 알렉스는 얼마든지 수용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조종사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자네까지 가버리면 피트도 그렇고, 용병들도 그렇고, 다들 불안해할 텐데… 선장도 기분 좋게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아. 자신들을 따돌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뜩이나 감정적으로 좀 그런데……. 널 키드가 나타나자마자 HQ의 대장이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사라진다는 건 말이야.”

“그래서 제가 계속 여기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한 거잖습니까. 빅 아일랜드 이야기는 폴, 당신이 꺼낸 거고요. 뭐… 괜찮습니다. 피트에게 이야기해 주면 그도 납득할 거예요.”

알렉스가 대답했다. 제니와 테라는 불안한 얼굴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도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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