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34화 (434/449)

5장 JL (2)

기대했던 것과 다른 모습에 일행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진우가 제니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게… JL이라고? 의료 시설 같지 않은데? 저기… 제니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들은 제니가 조종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 배가…….”

“리그(Rig)라고 부르지, 저렇게 드릴이 달린 선박이나 구조물은.”

조종사는 느긋한 어조로 어휘를 수정해 준다. 제니는 다시 물었다.

“저 리그가… JL이 맞는 건가요? 저건… 전혀 의료 시설이나 연구 시설 같지가 않아요. 그냥 석유를 채굴하는 배라고밖에는…….”

“맞아, 그렇게 안 보여. 위장을 한 거야. 뭐, 정확히 말하면 허가는 석유 채굴이 아니라 메탄 하이드레이트 채굴 사업 타당성 조사로 받았다고 들었지만…….”

거기까지 듣고 나서 제니는 진우와 친구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JL이 맞대요. 위장을 한 거래요.”

위장이라… 그리 좋게 들리지 않는다. 자기 존재를 위장한다는 게, 불법을 저지를 것이라는 예고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여겨져서다.

애초에 이런 놈들과 협력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잘못된 판단이었던 걸까?

친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구만. 사실 조금만 알고 나면 별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런 것보다 아름다운 아가씨, 이 헬리콥터 이제 슬슬 착륙해야 하는데…….”

조종사는 제니와 친구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해 제니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조종사는 다시 부연 설명을 해준다.

“착륙하고 나면 승조원들이 와서 헬리콥터를 사슬로 결속시키려고 할 거거든. 그렇게 승조원들이 다가와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거야.”

“사슬로 묶어요? 그런 게 왜 필요해요?”

“바다에 떠 있는 이동식 리그라서 그렇지. 휘청대다가 바다로 뚝 떨어져 버리면 안 되잖니? 저렇게 크니까 사실 흔들릴 일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묶어놓는 게 맞지. 갑자기 돌풍이 부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부메랑에 신호가 잡힌 걸 확인한 시점에 이미 이곳에 보고를 했었거든. 그런데 추가 보고 없이 그냥 돌아왔잖니. 그걸 이상하게 생각해서라도 여러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조종사가 말했다. 제니는 그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전했다. 결론은 당연히 반대다. 가까이 접근해 오는 놈들이 많을수록 무력 충돌의 위험성은 커지고, 누군가 다칠 확률도 높아진다.

“절대 안 돼.”

진우가 말했다.

“까다로운 손님이로군. 그럼 어떻게 할까?”

조종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마중 오는 건 이 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 딱 한 명이어야 해. 널 키드를 데리고 있지만 이 헬리콥터를 빼앗겼고, 협박당하고 있다는 말도 해야 한다고 그 할아버지에게 전해줘.”

진우는 제니를 통해 미리 준비해 놓았던 대사를 전달했다. 가장 높은 놈은 몸을 사려서 나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다음 서열의 놈이라면 명령 때문에라도 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두 번째라… 이거, 어렵군. 둘 중 누가 더 높고, 누가 아래인지 모르겠어. 선장은 명목상으로 리그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긴 한데, 그런데 또 임의로 모든 걸 결정하느냐 하면 그게 아니라 HQ의 알렉스로부터 지시를 받거든. 하여간 그래. 이 배에서 높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둘이야. 음… 그래도 역시 이야기는 알렉스와 해야겠지. 선장은 널 키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진우의 요구를 전달 받은 조종사는 한참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교신을 시작했다.

“HQ, 여기는 레스큐 팀. 패트롤을 마치고 돌아왔다. 복귀 신고 한다.”

― 치익, 폴, 왜 추가 보고 하지 않았어요? 계속 기다렸는데. MJ는요? 치이익.

“아, 그 부메랑 신호와 관련해서… 알렉스와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조종사의 비일상적인 요구를 들은 상대 쪽에서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10여 초의 시간이 지난 뒤, 상대가 다시 물어왔다.

― 치이익, 폴?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다시 한 번 현 상황 코드로 알려주세요. 치이익, 그리고 오늘 파트너, 혹시 로버트입니까? 치익.

조종사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헬리콥터를 탈취당한 상황이니 코드 37이라고 대답해야 하고, 뒤편에서는 아이들이 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아군에게 총기 무장을 준비시키는 ‘로버트’인 것도 맞다. 하지만 일단 널 키드가 타고 있으니 분쟁은 없어야 한다.

“37이기는 한데, 좀 복잡해. 일단 MJ 이야기부터 해야겠지. 그는 죽었대. 이 사람들이 보호하려고 했지만 사고가 있었다는군.”

조종사가 대답했다. 상대편에서는 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 치이익, 시체를 확인했습니까? 치익.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어. 여기에 지금 널 키드도 함께 타고 있거든. 널 키드가 한패야. 저기… 내가 알렉스랑 교신하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조금 뒤, 잠시 무전기가 흔들리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전과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 치익, 제가 받았습니다. 폴, 널 키드라고 했어요? 농담이나 실수는 아닌 거죠? 널 키드라는 건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치이익.

남자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조종사가 대답했다.

“아니… 이것 봐, 알렉스. 이 천사 같은 아가씨가 자기 입으로 널 키드라고 했다니까. 면역자라고 주장한 게 아니라, 널 키드라는 정확한 명칭을 먼저 사용했어. 그건 누구나 아는 명칭이 아니잖나. MJ가 알려준 게 분명해. 그리고 그의 신호기를 가지고 있었고, 부메랑의 위치도 알고 있었다고.”

― 치이익, 그래서 원하는 게 뭐랍니까? 치익.

“자네 혼자만 오라고 하는군.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다고.”

― 치익, 영어를 합니까? 치익.

알렉스의 질문을 들은 조종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내가 지금 어떤 언어로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다고 생각하나? 텔레파시? 그래, 영어 해. 이 중에 적어도 둘은 아주 유창한 영어를 쓰고 있네.”

― 치칙, 알았어요. 착륙하세요. 지금 곧바로 나가겠습니다. 치익.

알렉스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시원시원한 반응이라 진우에게는 좀 의외로 느껴졌다.

“자, 이제 착륙하겠네. 문제없지?”

조종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계속 떠 있어요. 내리는 건 알렉스인지 뭔지 그 녀석이 혼자 나오는 걸 확인한 다음입니다.”

흠, 조종사는 한숨을 내쉬며 답답해했지만, 진우의 지시대로 따랐다. 손목을 감싸 쥔 채 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고 있던 유빈이 제니에게 말했다.

“그… 알렉스라는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보라고 해. 키는 어느 정도 되는지, 머리 색깔은 어떤지… 특징을 알 수 있도록…….”

“알렉스? 생긴 것 말이냐?”

제니로부터 유빈의 질문을 전해들은 조종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키에… 그러니까 6피트 정도 될까? 아니면 5피트 11. 보통 체격이야.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약간 말랐다고 느낄지도 모르겠군. 머리는 밝은 갈색. 코커스패니얼 종류의 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니? 딱 그런 느낌이라고 보면 돼.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갈색 머리카락을 길렀어. 그리고 옷차림이 늘… 아, 저기 나오는군.”

한창 설명을 하던 조종사가 손가락으로 헬리포트 주변을 가리켰다. 배의 건물 옥상에 그가 말했던 것 같은 생김새의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나온다.

“옷차림이 늘 저렇다네. 캘리포니아에서 온 젊은 거지처럼 보이지.”

낡은 면 티셔츠에 헐렁한 카고 반바지, 슬리퍼 차림의 알렉스를 보며 조종사가 고개를 젓는다. 그의 말처럼 이 배의 책임자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옷매무새였다.

나이도 꽤 젊어 보인다. 조종사가 당부했던 것처럼 혼자서 온 알렉스는, 하늘에 떠 있는 헬리콥터를 향해 팔을 흔들어 보였다.

“안전벨트를 풀지 말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어요. 당신들은 당분간 더 인질로 여기에 남아 있어야겠습니다.”

헬리콥터가 리그의 전방 좌측에 배치되어 있는 둥근 헬리포트에 내려앉았을 때, 진우가 말했다.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엔진을 정지시켰다.

그러는 사이, 알렉스는 허리를 굽힌 채 천천히 헬리콥터 쪽으로 걸어왔다.

“안녕, 나는 알렉스야! 이 배에서 운항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책임지고 있어! 안녕! 안심해!”

알렉스는 손을 흔들며 또박또박 천천히 한마디씩 외쳤다. 영어로 된 유아 교육 프로그램에서나 들어볼 법한 발음이다.

왼손에 든 무전기를 제외하면, 그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옷차림도 워낙 단출해서 따로 무기를 숨길 만한 공간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이 배의 사실상 최고 권력자와 만나는 과정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간단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진우는 그게 더 불안했다. 그는 훨씬 더 길고 지루한 실랑이와 타협 과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방심은 하지 않았다.

“거기 서.”

헬리콥터 측면의 문을 반쯤 열고나서 진우가 말했다. 그의 앞쪽에서는 삼식이가 태양 그룹에서 가지고 나온 방패로 투명한 벽을 쌓아주고 있다.

“으앗! 쏘지 마! 시키는 대로 했잖아!”

진우의 총구를 본 알렉스는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유달리 배짱이 좋은 놈이어서 무작정 뛰어나온 게 아니었나 보다. 진우의 말을 들은 제니가 지시를 내렸다.

“일어서! 그리고 셔츠를 가슴까지 들어 올리고 천천히 한 바퀴 돌아. 내가 볼 수 있도록.”

“알았어! 알았어! 무장은 전혀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알렉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진우의 지시를 따랐다. 한 바퀴를 다 돌고나서 헬리콥터 내부를 본 알렉스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구조팀은… 설마…….”

“아니,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았어. 그냥 신호기가 울린 자리에 두고 온 것뿐이야.”

제니의 답변을 들은 알렉스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물었다.

“널 키드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타일러가… 그러니까 젠킨스가 직접 보고 확진을 내린 게 맞아? 혹시 좀비들 사이에 서 있었던 적 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몇몇의 시선이 테라에게 향했다. 알렉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거기, 까만 머리 아가씨! 네가 널 키드구나! 괜찮아? 헬리콥터 비행이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어?”

“뭐래?”

알렉스가 테라를 보며 떠들어 대자, 진우가 미간을 찌푸린다. 테라가 일러준다.

“제가 널 키드인 걸 알았어요. 그리고 여기까지 날아오는 게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어요.”

“젠장, 착한 척하고 있네. 아무 대답도 해주지 마. 이쪽에서 궁금한 게 먼저야. 제니야, 유빈이 팔 이야기 물어봐. 고칠 수 있느냐고.”

진우가 말했다. 아직도 긴장한 얼굴로 아이스박스를 꽉 쥐고 있던 제니가 큰소리로 외쳤다.

“팔을 다친 친구가 있어! 손이 팔목 위쪽에서 잘렸는데, 여기에서 붙여줄 수 있어? 그 잘린 손은 가지고 왔어. 얼음 사이에 담아서!”

갑자기 봉합 수술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자, 알렉스는 조금 당황스러워했다.

“잘렸다고? 상태를 먼저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뭐라고 말할 수 없어! 약속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야! 의료진은 대기하고 있어! 그보다 널 키드에 관한 건데…….”

“이 친구 팔이 먼저야! 우리가 원하는 걸 해줘! 그럼 그다음에 널 키드 이야기를 해도 돼!”

제니는 알렉스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가수답게 쩌렁쩌렁한 성량으로 외치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친구 문제 먼저! 알겠어! 말했잖아, 의료진은 대기하고 있다고.”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옆구리 근육이… 외사근이라고 했는데, 손상된 아저씨가 있어요. 여기로 오면 그 근육을 배양해서 이식할 수 있다고 젠킨스 씨가 말했었어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테라가 끼어들어서 외쳤다.

그녀의 옆에 있던 태권소녀가 제니에게 물었다.

“얘가 뭐라고 하는 거야?”

“아마 저 아저씨 이야기 같은데요? 여기로 오면 옆구리를 고칠 수 있다고 했대요.”

제니가 민구를 가리킨다. 갑자기 자신이 지목되자 민구는 당황스러워하며 테라의 말을 끊으려 했다.

“됐잖아, 그런 얘기는…….”

“아뇨! 젠킨스 씨가 몇 번이나 말했었어요,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저는 꼭 그렇게 해드리고 싶어요.”

테라도 고집을 피운다. 영어와 한국어가 섞여서 정신없이 떠들어 대기 시작하자, 알렉스도 큰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그건 간단해! 배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자, 이제 너희가 요구하는 건 다 나온 건가? 나도 부탁 하나만 할게! 널 키드라는 증거를 보여줬으면 좋겠어! 그게 우리에게는 정말로 중요하거든! 정말! 아주! 중요해!”

알렉스는 간절하게 외치며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좌우로 눈을 돌리며 혹시 몰래 접근하는 놈은 없는지 살피던 진우가 제니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피를 뽑아왔어요! 그거면 될까요?”

직전까지 무서운 테러범처럼 날카롭게 연기하던 제니가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삼식이가 가지고 나온 채혈용 주사기로 테라의 피를 조금 뽑아 그걸 유빈의 팔과 함께 아이스박스에 넣어뒀었다. 알렉스는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이야! 제발 부탁할게!”

제니는 혈액 샘플을 꺼내기 위해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얼음이 거의 다 녹아 물이 흥건한 아이스박스 내부를 보자 가슴이 먹먹해진다.

비닐봉지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이 손의 상태… 괜찮은 걸까? 이쪽은 그나마 얼음 속에라도 있었지만, 생으로 드러나 있는 유빈의 상처는…….

잘린 유빈의 손을 보자 갑자기 울컥해진 제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전달자 역할은 유빈이 맡았다. 어차피 수술을 하려면 그는 JL의 의사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유빈은 테라의 혈액 샘플을 손에 쥔 채 헬리콥터에서 내렸다.

“자요.”

유빈은 알렉스의 손에 혈액 샘플이 든 길쭉한 용기를 넘겼다. 빨간색 피가 비쳐 보이는 용기가 손에 닿는 순간, 알렉스는 벅차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행여 떨어뜨릴세라 소중히 꼭 쥐었다.

“고마워! 하지만 널 키드의 피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올라오라고 해서 이걸 진단 기기가 있는 곳으로 가져가도록 해야 돼. 그렇게 해도 될까? 그냥 한 사람만 부를게!”

알렉스는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을 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장만 하고 오지 않으면 돼.”

제니가 전한 진우의 말을 듣고, 알렉스는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피트, 나야. 지금 헬리포트로 올라와.”

잠시 후, 뚱한 표정의 작고 동그란 사내가 옥상 문을 열고 나왔다. 땅딸한 사내는 겁에 질린 눈으로 헬리콥터를 바라보며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려 들지 않는다.

알렉스는 그에게 다가가 혈액 샘플을 건네고 시약 테스트를 해보란 지시를 내렸다.

땅딸한 사내가 다시 사라진 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직 꽤 이른 시간인데도 태양빛이 내리쬐는 헬리포트 위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만큼 뜨거워졌다.

알렉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진우와 유빈, 그리고 안쪽의 테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원을 거의 꽉 채우다시피 모여 앉아 있는 헬리콥터 내부의 기온은 더 높을 것이다.

“덥지 않아? 물을 가져오라고 할까?”

알렉스가 물었다.

“괜찮아요. 물은 있어요.”

“그럼 좀 마시는 게 어때? 이런 환경에서는 체력이 빠르게 소진되거든. 체온도 올라가고.”

알렉스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친구들 중 그의 권유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등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덥다. 그러나 목숨이 걸린 중요한 탐색의 시간에 한가하게 물병을 찾아 고개를 돌리고, 주의를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다.

“검사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제니가 초조해하며 물었다.

“금방 끝나, 시약을 섞어보기만 하면 되니까…….”

알렉스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의 무전기가 울렸다.

― 띠리릭, 삐익― 후우우~ 보라색이에요, 알렉스. 널 키드 맞습니다. 삐익.

보고를 하는 피트의 목소리도, 그 보고를 확인하는 알렉스의 목소리도 떨린다. 알렉스는 얼굴을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려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렵다.

“결과가 나왔어요?”

제니가 물었다. 알렉스는 눈을 껌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널 키드가 맞대. 정말이지… 이건… 영광이야. 널 키드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럼, 이제 이 사람 손을 치료해 주세요. 꼭 원래대로 해주셔야 돼요, 제발.”

제니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알렉스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아, 그래. 최선을 다할게. 맹세하지. 그럼 의료진을 부를게. 준비가 끝나는 대로 수술을 하고… 그리고 너희들도 이제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내려와도 돼. 이 배에 널 키드를 해칠 만큼 멍청한 인간은 없어.”

“널 키드는 해치지 않겠지. 하지만 우리는?”

알렉스의 말을 전해 들은 진우가 긴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일단 유빈의 손을 치료하는 것으로 이 JL이라는 곳의 실력을 확인할 심산이었다.

“손 치료가 먼저예요. 우리는 그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릴 거예요. 미안하지만 당신도 여기에 함께 있어야 하고요. 그러니까 정말로 최선을 다해야 해요. 이게 테스트라고 생각하세요.”

제니가 진우의 말을 전했다. 알렉스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기…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어. 우리를 신뢰하기 어려운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안 돼. 수술은… 아주 오래 걸려. 마취를 하고 신경을 접합하는 것만 해도 몇 시간이 소요될 거야.”

“기다릴 수 있어요.”

제니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의지를 보였다. 알렉스는 격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래, 보통은 기다릴 수 있지. 나도 내가 기다리는 건 괜찮아. 하지만 쟤, 저기 널 키드인 아가씨는 안 돼. 이 날씨에 그런 짓을 하는 건, 내가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고. 너희들, 아침은 먹었니? 어제 저녁은? 혹시 계속 굶은 채로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버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오, 제발 그러면 안 돼. 저 친구… 안색이 좋지 않아.”

알렉스의 말을 들은 제니는 테라를 돌아보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말은 옳다. 원래부터 하얗던 테라의 얼굴은 이제 슬슬 푸른빛이 돌 만큼 혈색이 좋지 않다.

잠실을 탈출하기 위해 인파와 부딪쳐 가며 뛰었던 그제 낮부터, 태양에 쫓긴 어제 새벽, 그리고 식사실에서의 지독한 시간들과 유빈의 손이 잘린 이후 겪었던 죄책감까지…….

모두 그녀를 괴롭혔던 일들이다. 그 긴 이틀 동안 거의 제대로 먹지도 않은 채 테라는 버텨왔다.

“아니야, 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제 수액 주사도 맞았고. 빨리 저 오빠 손부터 고쳐 달라고 해, 제니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걱정스런 시선을 의식하고 테라는 제니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니는 이를 꽉 깨물었다. 테라를 위해서는 너무 가혹한 시간일지 모르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이 JL이라는 곳은 아직 그들의 믿음을 얻지 못했으니까.

“고맙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제 수액 주사도 맞았으니 충분히 버틸 만해요.”

제니가 말했다. 알렉스의 얼굴은 더욱 더 당혹스러워졌다.

“수액 주사? 무, 무슨 성분인데? 혹시… 이전에도 그걸 맞은 적이 있었니? 그러니까 물린 이후에 말이야.”

알렉스가 말을 더듬어가며 물었다. 제니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해요? 겁주려고 하는 거라면 그만둬요.”

“겁은 너희가 나에게 주고 있잖아! 너희는 지금 바로 옆에 있으니까 실감이 나지 않아서 이런 식으로 구는지 모르겠는데! 후우우~!”

갑자기 언성을 높이던 알렉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잠시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 다시 침착한 어조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었다.

“쟤는 말이지… 정말로, 정말로 희귀한 확률로 존재하는 인류의 희망이야. 너나 나나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평생 쉬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30초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고 해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종류의 희귀한 존재라고. 그런데… 너희는 그런 사람을 지금 뜨겁게 달아오른 헬리콥터 안에 가둬두고 있어. 이러다가 혹시라도 저 아가씨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그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테라 걱정해 주는 척하지 마요. 내 친구는 내가 잘 알아요! 쟤가 어느 정도 체력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참을성이 강한지 당신보다 내가 훨씬 더 잘 안다고요!”

제니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알렉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골랐다.

“아니… 있지… 몰라.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심지어 테라? 테라라고 했나? 저 아가씨 본인도 몰라. 저 아가씨가 어떤 상태인 건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어. 왜냐고? 그건 테라가 좀비에게 물리고 면역 체계가 작동한 그 시점에 그녀의 몸이 완전히 변해 버렸기 때문이야.”

알렉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제니가 친구들에게 옮기는 동안 알렉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쉽게 설명할게. 우리가 감기에 걸렸을 때 어떤 약을 먹으면 낫는지 아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비슷한 경험을 축적해 왔기 때문이야. 하지만 널 키드는… 좀비와 면역에 대해 가장 앞서 있는 JL조차도 오직 단 한 명의 널 키드에 관한 데이터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 그것도 남자였고, 게다가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관찰된 거였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제니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 순간, 테라도 영어를 한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이런 잔인한 이야기는 듣게 하고 싶지 않다. 알렉스는 최대한 순화된 단어들을 골라 말했다.

“우리처럼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자극도 저 아가씨에게는 지극히 심각한 위협일 수 있어. 평범하고 무해해 보이는 약이나, 흔히 먹었던 음식도 갑자기 그녀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이야. 체온이 1도 올랐을 때, 혹은 수분이 부족할 때,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몰라. 경험이 없으니까. 알겠어? 그녀는 우리와 달라. 그러니 그녀를 대할 때,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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