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33화 (433/449)

5장 JL (1)

“위치 확인해.”

리더가 명령했다. 덥수룩 수염이 부메랑의 기기판을 열고 조그만 버튼들을 눌러 수신된 신호가 날아온 위치를 확인한다.

“모두 같은 지점이야. 여기에서 북동쪽으로 460야드.”

덥수룩 수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더가 물었다.

“언제 보낸 게 마지막 신호였어?”

“18일, 20시 09분에…….”

그렇다면 불과 아홉 시간 전이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곱슬머리가 핏불 테리어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MJ를 만나는 거야, 샘!”

웡―!

애교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사나운 얼굴의 샘이 크게 한 번 짖는다.

“460야드면 가깝잖아? 도보로 이동해도 될 정도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쪽 도로를 살펴보던 짙은 눈썹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되겠네. 웨이브가 진행 중이라서.”

대로에서는 수백 마리 규모의 좀비들이 천천히 남진하고 있었다. 만약 꼭 싸워야 한다면 못 이길 상대는 아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네 명의 용병과 샘은 기록 장치를 회수하고 헬리콥터로 돌아왔다.

“0이라는 숫자 하나 다운로드하는 데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 줄은 몰랐네.”

조종사가 별로 우습지 않은 농담을 건넸다. 리더는 기록 장치를 들어 액정에 뜬 숫자와 글자들을 조종사에게 보여주었다.

“북동쪽 460야드 높이는 52피트… 이거 진짜야?”

액정을 읽던 조종사가 물었다. 리더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기록 장치 데이터는 임의로 입력하거나 편집할 수 없어.”

“젠킨스인 거 확실하다는 말이지? 오류나 뭐 그런 거 아니고.”

“이 대역 주파수가 할당된 건 MJ뿐이야.”

“아… 젠장! 이런! 이게…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출근이 끝나는구나! 수고했어! 빨리들 탑승해! 파티다!”

용병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조종사는 HQ와 교신을 하며 헬기를 이륙시켰다. 460야드면 거의 제자리에서 떴다가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는 구조팀, 기뻐해라. KM부메랑에서 MJ의 신호를 수신했다. 부메랑으로부터 북동쪽 460야드 떨어진 지점. 지금 현장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 여기는 HQ, KM에서 MJ의 신호 수신. 내용 확인했다. MJ를 확보하는 대로 다시 연락 바란다.

“확인했다.”

조종사는 무전을 끊고 기수를 돌렸다. MJ가 저 밀집한 작은 건물들 중 하나에 은신해 있다는 건 알겠는데, 헬기를 내릴 만한 장소가 영 마땅치 않다.

“도보 이동 거리가 좀 늘어나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조종사가 말했다. 결국 대로에 비어 있는 공간을 착륙지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어차피 주변에 당장 대규모 좀비 무리는 보이지 않는다. 자잘한 것들을 처리하며 전진하는 200야드 정도는 가뿐하다.

“자, 샘. 이 냄새야. 기억했지?”

리더는 밀폐되어 있던 플라스틱 가방을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손수건을 샘이 냄새 맡을 수 있도록 했다. 젠킨스의 체취가 배인 손수건 역시 매뉴얼 내에 포함되어 있는 물건이다. 냄새를 맡는 동안 샘의 뭉뚝하게 잘린 꼬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이 핏불 테리어는 원래부터 젠킨스를 주인으로 여기도록 훈련 받았고, 그래서 당연히 그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지금 이 과정은 단순히 그것을 재확인하는, 일종의 보험이라고 보면 된다.

“들것 챙겨.”

헬리콥터가 내려서자마자 문을 열어 샘을 내보낸 리더는, 개를 뒤따라 내리면서 팀원들에게 명령했다. 매뉴얼에는 MJ가 도보로 이동할 수 없는 상태를 대비하여 항상 들것을 예비하라고 지시되어 있다. 짙은 눈썹이 접이식 들것을 꺼내 등에 멨다.

“그라울러로 확인해!”

네 명의 무장한 용병이 모두 헬기에서 내렸을 때, 리더가 외쳤다. 곱슬머리가 경광봉만 한 크기의 마이크를 위로 들고 천천히 한 바퀴를 돌려본다.

소음 중에서 좀비들이 포효하는 패턴만을 수집해 주변에 어느 정도 규모의 좀비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 알려주는 장비다.

“가장 큰 규모의 좀비… 남서쪽, 100마리 이상일 가능성 74퍼센트.”

곱슬머리가 그라울러의 모니터에 뜬 수치를 읽었다. 6시 방향에 위협 요소가 있지만, 그들의 작업 반경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회전하고 있는 환경에서 그라울러의 신뢰도는 60퍼센트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니 방심할 수는 없다.

“좋아, 가자!”

리더는 시계에 달린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하고는 샘에게 명령했다. 샘은 망설임 없이 힘차게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네 명의 용병도 그 뒤를 쫓아 달렸다.

헥헥헥―!

샘은 이따금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기다리다가 팀원들이 따라온다는 것이 확인되면 다시 앞서서 건물들 사이로 내달렸다.

세 번의 코너를 돈 샘은 골목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 안으로 쑥 들어갔다.

“드디어!”

용병들은 HK416 돌격소총을 앞세워 계단을 뛰어올랐다.

“MJ? 구하러 왔습니다! 레스큐 팀입니다!”

리더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다. 그런데 대답이 없다.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4층 건물의 옥상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작은 검은색 배낭과 신호기로 눌러놓은 지도였다. 샘은 계속 주변을 돌며 신호기와 지도의 냄새를 맡고 있다.

“MJ의 버클이 맞기는 한 모양인데…….”

신호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덥수룩 수염이 중얼거렸다. 부메랑의 기록이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걸 여기에 놔두고 정작 MJ는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용병들은 귀신에 홀린 것 같아 잠시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 ☆ ☆

“역시… 개를 쓰는구나.”

헬리콥터에서 샘이 내렸을 때, 신호기를 놓아둔 건물과 정반대의 방향에 숨어 있던 진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신호가 정교하다고 해도 결국 정확한 지점을 찾는 건 개의 역할일 거라는 그의 예상이 맞았다.

삼숙이와 함께 여행을 해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다. 사람은 뭔가를 탐지하는 일에서 결코 훈련된 개를 당해낼 수 없다.

뒤를 이어 네 명의 용병이 내리고, 그라울러의 집음기를 머리 위로 휘두르며 한 바퀴 도는 것이 보였다.

“저건 뭐지?”

경광봉처럼 생긴 마이크를 보며 민구가 미간을 찌푸린다. 혹시 발각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진우의 등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용병들은 이내 신호기를 놓아둔 건물 쪽으로 개와 함께 달려가 버렸다.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가죠.”

용병들이 시야 밖으로 사라진 걸 확인하자마자 진우와 민구는 빠르게 자동차들 사이를 내달려 헬리콥터에 접근했다.

헬리콥터 조종사는 공격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 사람처럼 태평하게 로터까지 멈춰 놓고 기다린다. 신호를 보낸 게 젠킨스라고 아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다.

자세를 낮추고 헬기의 조종석까지 접근한 진우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K―2의 총구로 문의 유리를 두들겼다.

탁― 탁―

그러고는 곧바로 총구를 조종사의 머리에 겨눴다.

“음?”

용병들과 샘이 사라진 방향을 눈으로 쫓고 있던 조종사는 소리에 반응해서 뒤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부조종사가 황급하게 MP5에 손을 뻗으려 할 때, 민구도 쏠 줄도 모르는 MP5의 총구를 반대쪽 유리창에 바짝 가져다 대고 두들겼다.

게임 오버.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것으로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여기까지는 지나칠 만큼 진우의 계획대로 잘 풀렸다. 단 한 가지 요소만 제외하면…….

“외국 놈들이잖아….”

두 조종사의 얼굴을 보며 민구가 중얼거렸다. 진우도 난감한 표정으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JL이 외국 회사라고는 하지만, 이건 한국지사니까 당연히 헬리콥터 조종 정도는 한국인이 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전투 병력부터 파일럿까지 싹 다 외국인일 줄이야…….

“Oh, come on! You don’t have to do this. There’s nothing worthy in this chopper. Please go away. Be human.(어이구, 제발 좀! 왜 이런 짓을 해! 이 헬리콥터에 값나가는 거 없어. 제발 좀 가줘. 인간답게 살아라.)”

진우가 문을 열도록 하자 조종사가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의 파란 눈과 은발 머리카락을 보며 영어를 듣고 있자니, 진우는 갑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아… 아이 원트 투… 후우우! 아이 원트 앤드 마이 프렌드 원트… 제이엘.”

진우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땀을 뻘뻘 쏟아내며 말했다. 하지만 조종사는 알아듣지 못한다.

“Really sorry but, I don’t get it. What did you try to say?(정말 미안한데…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진우는 답답해서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이런 등신짓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이제 잠시 후면 용병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돌아올 것이다.

“…제니야! 제니야! 이리 좀 와 봐!”

그건 전혀 멋진 대사가 아니지만, 진우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뒤쪽에 숨어 있던 제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네! 네, 가요!”

진우의 목소리를 들은 제니는 유빈의 손이 들어 있는 아이스박스를 두 손으로 잡은 채 전력으로 달려왔다.

“뒷문 열어요. JL 연구소로 갑시다.”

제니는 진우의 말을 조종사에게 옮겼다. 조종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잠시 버텼다.

“예쁜 아가씨,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지만, 우리도 지금 엄청나게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거든. 그러니 친구들에게 말 좀 잘해줘. 제발 인간끼리는 돕자고.”

제니는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저씨, 이 총 진짜예요. 설마 가짜라고 생각해서 말을 안 들으시는 건가요?”

“하하하―! 그게 장난감이 아니라는 걸 알 정도 인생 경험이야 있지.”

조종사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귀여운 천사 양, 나는 예순다섯 평생 자랑이라고는 두 딸과 두 아들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것뿐이었던 사람이거든. 근데 그 다섯 명도, 일곱 명의 손주도 다 하느님 곁으로 가 버린 지금, 내가 뭣 때문에 총에 맞아 죽는 걸 무서워해야 할까? 왜? 60년을 기다리고도 컵스가 우승하는 걸 끝내 못 본 게 억울해서? 그러니 날 좀 그냥 내버려 둬주겠어?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기분 좋은 날이란 말이야.”

“…그 반가운 얼굴은 오지 않아요. 젠킨스 씨는 죽었어요.”

제니를 뒤따라온 테라가 말했다. 놀랄 만한 미녀를 두 명이나 보고 있는데도 조종사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더 깊게 파인다.

“설마… 너희가?”

“아니요!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젠킨스 씨는 태양 그룹에게 쫓기다가 죽었어요!”

테라가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하지만 이미 조종사도 부조종사도 흥미를 잃은 얼굴이다.

“그럼 저 신호를 보낸 것도 너희고? 후우~ 참 잘했다. 우리에게 죽어도 좋다고 알려주려고 그런 거겠지. 자, 네 남자 친구에게 통역 좀 해주렴. 머리에 한 방으로 좀 부탁한다고.”

“뭐래?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 왜 저렇게 잘난 척을 하는 건데?”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진우가 답답해하며 물었다. 금방이라도 골목 안쪽에서 개와 용병들이 뛰어나올 것 같아 불안하다.

교전을 하라면 뭐 그렇게 어려울 건 없는데… 협조를 요청하러 가는 입장에서 일단 네 명을 죽여 버리는 것으로 스타트를 끊는다는 건 영 내키지 않는다.

“젠킨스 씨는 죽었지만, 그가 아끼던 보물은 지켜냈어요.”

제니의 이야기에 조종사는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표정이다. 제니는 테라의 어깨를 양쪽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얘가 바로 널 키드예요.”

“설마! 그 확률이라는 게, 그리 쉽게…….”

조종사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젓는다. 그때, 테라도 결정적인 한 방을 먹였다.

“젠킨스 씨는 제 발가락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 빨리 가요.”

조종사는 고개를 내밀어 그녀의 잘린 발가락을 바라보았다. 그가 널 키드의 상처와 일반인의 상처를 구별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그런 특수 체질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있다. 이건 아무나 아는 정보가 아니다.

“뭘 그렇게 시간을 자꾸 끌어! 빨리 가자!”

유빈을 업고 와 실은 보안관이 답답해서 헬기 의자를 쾅쾅, 친다. 노인네들이 뭔 고집이 이렇게 센 건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다.

민구도 성질을 꾹 눌러 참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고문하지 말라는 진우의 부탁만 아니라면 저 부조종사 놈은 벌써 열 번도 더 죽었고, 조종사의 옆구리에도 쿠크리가 세 번은 들어갔다 나왔을 것이다.

점잖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삼숙이뿐이다. 녀석은 헬리콥터 내부에 배어 있는 샘의 냄새에 관심을 보이며 킁킁거렸다.

“타렴. 믿어보고 싶구나.”

조종사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테라에게 말했다. 여덟 명이 모두 헬리콥터 좌석에 앉았을 때, 조종사가 무전을 보내려 한다. 진우가 제니에게 물었다.

“어디로 보내는 거냐고 물어봐!”

“아까 그 용병들 복귀하라고 할 거래요.”

“아냐! 안 돼! 그 사람들은 두고 가! 그러면 우리가 위험해져!”

진우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니가 조종사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진우에게 물었다.

“근데, 그러면… 그 사람들 어떻게 하냐는데요?”

“버티라고 해. 무장 병력인 거 다 봤어. 하루나 이틀만 버티면 되잖아. 그리고 신호기 옆 가방에 물도 넣어놨어.”

진우가 말했다. 제니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조종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로터를 가동시키며 제니와 테라를 돌아봤다.

“헤드셋 착용하렴, 천사들아.”

잠시 후, JL의 헬리콥터는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조종사는 그제야 무전기를 켜고 망연자실해 있는 용병의 리더와 대화를 나눴다.

“그래, 어쩌겠어. 널 키드라잖아. 그러니 일단 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그냥 좀 참아. 필드 훈련 한다고 생각하라고. 아, 그리고 거기 혹시 검은 배낭도 있던가? 그래. 그럼 저 애 말이 맞군. 물을 넣어놨대. 친절하기도 하지. 어쨌든 내일 다시 오지. 살아남게.”

조종사는 펄펄 뛰는 용병 리더를 달래고는 기수를 남서쪽으로 돌렸다. 헬리콥터는 빠르게 날아갔다.

그런데…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헬리콥터는 좀처럼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비행 시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자 모두의 표정에 당혹감이 드러났다.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민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투덜댔다. 조금 전부터 속이 좋지 않다. 그는 자신이 멀미 같은 걸 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티를 내고 싶지도 않다. 그건 너무 가오가 떨어지는 일이니까. 민구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속을 가라앉혀 보려 애를 썼다.

“…바다다.”

삼식이가 창가에 얼굴을 대고 중얼거렸다. 청록색의 파도치는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이따금씩 보이는 작은 섬들이 휙휙 스쳐 간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렸으니, 이제 돌아간다는 게 꿈만 같다.

젠장, 서울에서는 겨우 11킬로미터를 못 가서 그 생난리를 쳤었는데…….

“제니야,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좀 물어봐 줘. 저 할아버지, 혹시 앙심 품고 우리랑 동반자살이라도 하려는 거 아니야? 젠킨스 죽인 거 우리가 아니라는 것도 한 번 더 확실히 말하고.”

유빈이 제니에게 부탁했다. 가뜩이나 팔 때문에 통증이 심한데, 계속 흔들리며 날아가고 있자니 뇌가 머릿속에서 좌우로 천천히 이동을 반복하는 기분이다.

“후후후, 그럼.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전해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먹을 만큼 늙지는 않았다고.”

조종사는 유유자적하며 제니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널 키드라는 한마디가 마약만큼이나 강력하게 그의 행복지수를 올려준 모양이다.

“자아~ 거의 다 왔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좀 우습지만… 저 까만 머리 미녀 아가씨의 말이 사실일까? 아까 저 애의 천사 같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덜컥 믿게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구나. 보이니? 저게 지금 내 집이고 직장이란다.”

잠시 후, 조종사가 기수를 약간 틀며 말했다. 친구들은 모두 그가 가리키는 방향의 창가에 달라붙었다.

거기에는 거대한, 아주 거대한 석유시추선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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