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히어로 (5)
“끄으으응…….”
유빈은 꿈을 꿨다. 아주 힘들고 괴로운, 그래서 저절로 신음이 나오는, 그런 꿈이었다.
그는 거친 물살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물살의 주변에는 괴물들이,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들이 가득하다.
“봤지? 봤지?”
물고기들이 기묘한 소리로 울어 댄다. 무서웠다. 뾰족뾰족한 이빨을 가진 물고기들과 괴물이 그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입을 벌리고 달려든다.
딱딱― 딱―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이빨 소리!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방비인 상태로 벌려진 그의 팔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러다 잘리고 말 거야…….’
강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번의 굽이를 더 지났을 무렵, 활짝 벌려진 그의 팔은 물고기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싹둑―!
종이를 잘라내듯이 간단하게 손목이 사라졌다.
“아! 아아아아! 아으으!”
유빈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목소리는 입안에서 물로 변하며 그의 숨을 콱 막는다.
꾸르르르륵― 끄르륵―
코로, 그리고 기도로, 계속 물이 넘어간다. 유빈은 목을 움켜쥐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고통과 공포에 시달리며 사나운 소용돌이 속을 빙글빙글 돌던 유빈은 완전히 탈진했을 무렵에야 물가로 내던져졌다.
“컥―!”
유빈은 물을 토해내며 울부짖었다. 손이 하나 사라졌다는 게 그렇게나 마음 아픈 일일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팔을 좀 더 당겨보는 건데… 팔이 무겁고 힘들어도 계속 당겨보는 건데…….
후회가 가슴을 때리고, 눈물이 분수처럼 솟는다.
“낄낄낄, 저 놈 봐… 가뜩이나 볼품없는 놈이 이제 손도 하나뿐이야! 히히히히!”
밉살스러운 목소리.
유빈은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귓구멍을 막을 수 있는 손이 하나뿐이라 왼쪽 귀로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어온다.
“불쌍해라…….”
유빈은 싹둑 잘려 나간 자신의 왼 팔목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뭉툭한 팔목 끝이 조금씩 뾰족해지는가 싶더니, 꽃이 피어오르고 가지가 뻗는다.
마지막으로 손이… 수줍게 돋아난다. 아직은 터무니없이 작은 새 손이지만, 금세 쑥쑥 자라날 것이다.
“하하하! 돋아났다! 돋았다!”
유빈은 왼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이제 아무에게도 놀림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예쁜 손이 있으니까! 꽃이랑 함께 돋아난 손이 있으니까…….
“…돋았다. 끄으으응~ 흐흐흥, 돋았다…….”
자신의 잠꼬대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깨어난 유빈은 황급히 왼손을 눈 쪽으로 들었다.
설마… 진짜?
캄캄한 밤중인데다가 아직 온전히 잠을 떨쳐 내지 못한 눈이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잠시 더 눈을 껌뻑이던 유빈은 이내 큰 절망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팔은… 그대로다. 아무것도 돋아나지 않았다.
유빈은 쑤셔오는 자신의 왼팔을 외면해 버렸다. 당분간은 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흑―!”
옆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유빈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니…야.”
유빈은 뻣뻣해서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려 제니의 이름을 불렀다. 어둠 속에 묻혀 있지만, 바로 곁에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그녀의 얼굴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다.
“네… 깼어요, 오빠?”
제니는 눈가의 눈물을 닦고 유빈의 이마에 솟아난 땀을 찍어내 준다.
“애들은?”
유빈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혹시 내가 약에 취해 해롱거리고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들 자요. 지금 새벽이에요.”
“새벽…이라고?”
그럼 대체 몇 시간을 뻗어 있었던 거야…….
유빈은 버릇처럼 왼팔을 들어 눈가로 가져가려다가 멈췄다. 시계가 걸려 있던 팔목은 이제 없다. 그 자리에는 상처만 남아 있다.
“근데 넌 왜 안 자?”
유빈이 힘없이 물었다.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들이 있을 텐데, 머리가 잘 안 돈다. 제니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불침번 제 순서라서요.”
“그래? 다친 사람… 없지?”
“없어요. 안심하고 좀 더 자요, 오빠. 조금 이따가 움직일 때 깨울게요.”
대답하던 제니의 목소리가 또 떨린다.
없기는… 팔목이 날아간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끄으응.”
유빈은 신음 소리를 죽이며 소파에서 일어나기 위해 애를 썼다. 그 의사, 대체 뭘 얼마나 주사했던 건지… 머리가 핑핑 돈다. 그 주사를 맞았던 순간 이후의 기억은 하나도 없다.
“여기가 어디야? 윽!”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빈은 자신의 오른 팔목에 뭔가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약병과 긴 줄을 한 손만으로는 영 챙기기가 힘들었다.
어둠 속에서 약병을 두 번이나 떨어뜨린 뒤, 짜증이 솟아난 유빈은 이로 바늘을 꽉 물어 빼버렸다.
“아… 그거 진통제라서…….”
평소의 유빈과 다른 난폭한 모습에 당황해하며 제니가 약병을 챙긴다. 바늘이 땅에 떨어져서 오염될까 봐 두렵다. 유빈이 고통을 호소할 때 그걸 덜어줄 수 있는 약이 못쓰게 될까 봐 무섭다.
제니가 진통제를 정리하는 동안 유빈은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있는 곳이 당구장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당구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친구들의 얼굴도 희미하게 보인다.
다들 어젯밤을 거의 꼬박 샌 채 새벽부터 전력으로 뛰어다니고 싸웠다.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보안관, 삼식이, 진우, 혜주, 테라, 삼숙이… 그럼 다 있구나…….
유빈은 안심하며 제니에게 화장실이 어디인지 물었다.
“제 손 잡아요. 알려줄게요.”
유빈을 당구장 외부 계단에 위치한 화장실로 인도해 준 제니가 그의 손에 작은 플래시를 쥐어 주려다가 멈칫한다. ‘이걸 잡고 있으면 지퍼를 어떻게 내리지’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제니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따라가서 비춰 줄…….”
“큭! 야, 무슨 소리야. 괜찮아! 입에 물고서 하면 돼.”
유빈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제니로부터 플래시를 넘겨받았다.
“젠장…….”
입에 플래시를 문 채 한 손으로 지퍼를 내리고 소변을 보던 유빈은 주먹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멋지게 말하고 싶은데… 너무 분하고 화가 난다. 억울하고 서럽다.
…무섭다.
유빈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자신의 오줌 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왼 팔목의 붕대를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 정도의 일을 하는 데에도 몇 차례나 망설여야 했다.
피가 조금 맺혀 있는 뭉뚝한 붕대의 끝을 멍하니 보고 있던 유빈의 입술이 부르르 떨린다.
떼구르르르―
입에서 떨어진 플래시가 더러운 화장실 바닥을 구른다.
울지 말아야 하는데… 다른 애들 앞에서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은데… 어째 실수를 할 것 같다, 바보처럼…….
“후우우~!”
얼굴에 범벅이 되어 있던 눈물과 콧물을 쓸어내리고 나서 유빈은 고개를 들었다. 쪽창을 통해 비쳐 드는 반달조차도 슬프게만 보인다.
논리적으로는, 이성적으로는 다 이해 한다. 만약에 오늘 그들 중에 누군가 한 사람은 반드시 손이 잘려야 하는 운명이었다면, 그게 자신이어서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보안관이랑 진우는 싸워야 하는 친구들이니까 안 되고, 삼식이는 한없이 착한 놈이니까 불쌍해서 안 된다. 제니의 아름다운 손은 더 안 된다.
하지만… 그래도 아까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냥… 조용히 지나갔으면 안 되는 일이었을까? 살만 조금 찢는 정도로 경고만 해줬으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예전에 복지 센터 뒷산에서 레이저 와이어가 그랬듯이.
한동안 더 눈물을 글썽이면서 푸른 달을 보고 있던 유빈은 먼지투성이의 셔츠를 당겨 얼굴을 북북 문질러 닦고 플래시를 주워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오빠, 울지 마요.”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니가 마음 아파한다.
“안 울었어. 울기는 누가…….”
유빈은 아직 울음기가 걷히지 않은 목소리로 짐짓 태연한 척을 했다. 제니는 그의 눈가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오빠 손, 없어진 거 아니에요. 내가 얼음 사이에 넣어서 잘 챙겨 왔어요. 그러니까 붙이기만 하면 돼요.”
“큭!”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유빈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에서 붙여? 서울대병원에서?”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게 못된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상처 입은 감정이 만들어낸 가시 돋은 말.
유빈은 뒤늦은 후회를 하며 입을 다물었다. 제니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그 손을 챙겼을지 빤히 알면서…….
“JL에서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몇 시간 뒤에 헬리콥터가 올 거래요.”
제니는 다 이해한다는 듯 유빈을 다독이며 말했다.
JL… 유빈은 뿌연 기억 속을 더듬었다. 분명히 어제 들었던 기억이 있다.
누가 나한테 JL을 이야기 했었지?
잠시 후에야 유빈은 그게 민구였다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가 둥근 쇳덩이와 지도를 몰래 넘겨주며 말했었는데…….
가만… 그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아으윽! 윽!”
별안간 뼈끝이 시려오는 통증!
유빈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성질을 못 이겨서 진통제를 뽑아버린 대가를 이제 아주 아프게 지불하고 있다.
“그것 봐요! 아으! 조금만 기다려요. 약 가져올게!”
제니가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유빈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거 안 돼… 그거… 맞으면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 생각이 안 나. 잠깐만… 잠깐만… 이야기 좀 해줘봐. 뭘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다고? JL이 뭔데 다들 거기 이야기만 해? 그 두통약 만드는 회사?”
“이야기가 긴데… 지금도 땀을 뚝뚝 떨어뜨리잖아요.”
제니는 여전히 유빈의 상태를 걱정한다. 유빈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계단 구석에 기대앉았다.
“하아~ 하아~ 힘들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들어야 되겠어.”
좀비 사태가 벌어진 이후 어떤 결정에서 그 자신이 제외되었던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일은 그가 뻗어 있던 동안 보안관과 삼식이가 약을 구하러 갔던 거였고, 그때 둘은 좀비들에게 갇혀 곤욕을 치렀었다. 그러니 유빈으로서는 당연히 불안하다.
“알았어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제니는 유빈의 옆에 나란히 앉아서 오늘 테라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진우가 주도했던 회의에 대해 말해줬다.
JL이 좀비 사태의 원흉이자 현재 백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부터, 테라가 1억분의 1의 확률로 존재하는 널 키드라는 명칭의 면역자라는 것, 그리고 내일 진우가 JL의 헬기를 탈취해 그곳으로 모두 이동하려 한다는 것까지.
“너… 하나도 안 잤구나?”
제니가 이야기를 전하며 연신 눈을 비벼 대자 유빈은 그제야 그녀가 불침번 순서여서 깨어 있던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제니는 자신을 간호하기 위해 밤을 꼬박 지새웠던 거다. 아마 지금 보이지 않는 민구라는 사내가 건물의 옥상이나 입구에서 불침번을 사고 있으리라.
“그런 건 괜찮아요. 근데 진우 오빠 계획 어때요?”
제니가 쑥스러워하며 물었다. 유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지금 뭐가 뭔지 잘 이해가 안 가. 우리가 JL에서 백신을 만드는 걸 돕지 않으면, 핵폭탄이 터져서 다 죽게 된다고?”
“아니요. 원자력발전소가 터진다고 했어요.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길어야 1년도 못 가서 그게 하나씩 둘씩 터질 거고, 그러면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결국 다 비참하게 죽는다고.”
제니가 다시 설명을 해줘도 원리를 모르는 유빈으로서는 그저 막연하기만 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진우가 헛소리를 할 놈은 아니니까 그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헬리콥터를 훔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대? 그쪽이 몇 명인지도 모르잖아?”
유빈이 물었다.
“테라랑 진우 오빠 사이에서 부메랑이니 드론이니, 신호기니 이야기가 복잡하게 왔다 갔다 했는데요, 결국 결론은 그거였어요. 부메랑을 설치한 주기가 그렇게 느린 걸 보면 아마 헬리콥터도 한 대만 움직이는 것 같고, 전투 인원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할 수 있대요.”
“으음…….”
유빈은 괴로운 신음 소리를 냈다. 진우에게만 짐을 몽땅 떠넘기고 자신은 손을 놓아버린 기분이다. 지금까지 듣기로는 진우의 말이 다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혹시 손 접합 수술을 하고 싶은 자신의 이기심이 마음이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
뭔가 치명적인 약점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제니의 친구를 악마들에게 넘기는 바보 같은 실수는 아닐까…….
“모르겠어… 이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네. 테라는 뭐라고 해? 거기에 가고 싶대?”
“테라는 그냥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겠다는 식이에요. 자기 때문에 오빠가 다쳤다고 생각하니까.”
제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되면 정말 모든 걸 다해줄 거라고, 그렇게 수없이 다짐을 했었는데… 그런데 오늘을 돌이켜 보면,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애도 어제 오늘 정말로 많이 상처 받고 마음을 다쳤을 텐데…….
훙훙훙훙훙―
그렇게 유빈과 제니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멀리서 아주 작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헬리콥터 소리다.
“어! 진짜 왔다! 왔나 봐요!”
제니가 입을 가리며 말했다. 유빈도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쇠단추를 누르면 헬리콥터가 구하러 온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 그게 사실일 줄이야.
“사람들 깨울게요. 여기 앉아 있어요.”
제니는 벌떡 일어나며 기운차게 말했다. 당구장 문을 열려던 제니는 다시 계단으로 달려와 유빈의 얼굴을 껴안았다.
“…우리 꼭 살아남아요.”
유빈은 제니의 머리를 다독거려줬다. 제니는 유빈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나서 당구장의 문을 열며 외쳤다.
“일어나요! 헬리콥터가 와요!”
“견딜 만해?”
친구들이 쿠당탕거리며 잠을 깨는 걸 보고 있는 유빈의 곁에 민구가 슬쩍 와서 앉는다.
유빈은 깜짝 놀랐다. 그가 근처에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발소리도 내지 않다니…….
“아뇨, 아파요… 근데 언제부터 몰래 보고 있었던 거예요?”
유빈이 물었다. 민구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답하며 일어섰다.
“그런 게 뭐가 그리 부끄럽고 중요하냐? 오늘을 넘길지 어떨지도 장담 못하는데…….”
“위험한 걸 알면서 왜 여기에 끼어들려고 해요? 아저씨는 저랑 그렇게 해야 될 의리 없잖아요. 어차피 다른 곳으로 몰래 혼자 가려고 했었으면서…….”
유빈의 말에 민구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사람다운 일을 좀 하고 싶어서라고 해두지.”
☆ ☆ ☆
투투투투투투투―
8월 19일 04시. JL의 구조 헬기는 평소처럼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부메랑을 설치해 둔 포인트마다 내려서서 혹시 입력된 신호가 있는지 살펴본다.
사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부메랑을 설치해 둔 장소도 점점 늘어났고, 단순히 체크를 하기 위해 들르는 것만으로도 꽤나 긴 시간이 소요된다. 물론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오늘도 계속 허탕이다.
“다음 포인트가 어디지?”
수신 신호가 0이라고 되어 있는 DK 포인트 부메랑의 데이터를 기록 장치에 다운로드 받은 뒤, 헬리콥터에 오른 용병들이 물었다.
“KM.”
헬리콥터 조종사가 서류철에 빨간 펜으로 체크를 하며 대답했다.
“거기도 영 가망이 없어 보이던데…….”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용병이 이마에 끼워뒀던 선글라스를 내리며 말했다. KM에 유동 인구가 늘어났다는 이유로 부메랑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그 인구들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디는 가망이 있나? 다 마찬가지지.”
짙은 눈썹의 용병이 고개를 젓는다. 매뉴얼을 확인하고 장비를 갖추고 난 뒤, 근 보름 동안 매일 이 지긋지긋한 시체들의 도시 상공을 날아다니느라 다들 지쳤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신호가 오지 않는 걸 보면 MJ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어. 만약 그렇다면 이 모든 건 다 헛수고잖아.”
곱슬머리를 길게 기른 용병이 푸념한다. 그러자 리더 용병이 대번에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런 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그러니까 말조심해. 우리는 매뉴얼에 지시되어 있는 대로 부메랑의 수를 늘려가며 매일 점검하면 돼. 판단은 HQ에서 하는 거고.”
리더가 정색을 하자 헬리콥터 내부는 잠시 조용해졌다.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이런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다. 다들 꽤나 지쳤다. 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KM이다. 준비해.”
조종사가 말했다. 그런 후, 헬리콥터는 용산역 주변의 한 백화점 건물 옥상에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자 매뉴얼대로 핏불 테리어가 가장 앞서 뛰어내렸다.
탁탁탁탁탁―
네 명의 무장한 용병은 개인화기를 앞세운 채 진영을 유지하며 개와 함께 옥상 위를 내달렸다. 옥상 중앙의 높은 전파 안테나 옆에는 그들이 며칠 전 설치해 둔 부메랑이 고정되어 있다.
“…어?”
당연히 0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데이터를 다운로드 받기 위해 기록 장치를 연결하던 리더가 깜짝 놀란다. 그들이 처음 보는 숫자가 액정 화면 위에 표시되어 있다.
“…32.”
곁에서 보고 있던 곱슬머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32, 총 32번이나 신호가 수신되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