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31화 (431/449)

4장 히어로 (4)

진우와 민구는 태양 그룹 빌딩 밖으로 나와 18층에서 보아뒀던 후미진 작은 건물들 쪽으로 이동했다. 삼숙이가 씩씩하게 가슴을 내밀고 진우와 발을 맞춰 걷는다.

골목까지의 거리는 약 100여 미터. 어느새 한낮을 맞은 태양은 높이 솟아 이글이글 타오르고, 기온은 건물 내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겁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걸었다. 포격을 받은 태양 그룹의 건물이 워낙 주변의 좀비들을 잔뜩 끌어들였기 때문에 골목 안으로 향하는 경로는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그리고 그렇게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은, 잠시 미뤄뒀던 고민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도록 만들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당연히 염두에 뒀어야 하는 건데 그만 깜빡하고 있는 부분은 있지 않을까… 그 엘리베이터 문처럼…….’

골목 안으로 들어가 걷는 동안 진우는 계속 스스로에게 물었다. 눈으로는 건물들을 보고 있지만, 그의 머릿속은 JL 헬리콥터와 조우하는 가상의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졌다.

상대가 총 몇 명이나 될는지 몰라도 그들을 반드시, 그리고 별다른 타격 없이 제압해야 한다.

그런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다른 사념들이 떠오른다. 괴로운 이미지들이었다.

자신이 보았던 광경. 컴컴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잘린 손목… 뼈가 드러난 유빈의 팔, 그가 평생 그런 상태로 살아야 한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

그러니 더 신중하게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친구의 팔목도 멀쩡한 상태로 되돌리고 싶고, 너무도 사랑스러운 미소녀의 삶도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이편에서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안전한 신의 한 수 같은 건 없는 걸까…….

혹시라도 ‘내 판단 착오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지지는 않겠지?’ 하는 걱정이 들자마자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던 하 중위의 얼굴이 스쳤다.

진우는 얼른 고개를 저어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 버렸다. 싫다. 이제 그런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안타까운 건 알겠지만… 그게 그렇게 당황할 만한 일인가? 집중력이 온통 흐트러질 만큼?”

민구가 물었다. 난데없이 던져진 질문이 귀를 울리자, 진우는 비로소 그를 짓누르던 망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예?”

“팔 잘린 친구 말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누군가의 목을 따러 나섰을 때는, 당연히 내 모가지도 따일 수 있다는 각오를 했을 테니까.”

민구는 아무 감정 없이 말했다. 진우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따일 각오를 했다고 해서 막상 그 일을 당했을 때 기분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죠. 무사히 이기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는 건데.”

“뭐, 맞아. 최선을 다했지. 그러니 좀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해서 다들 죄인처럼 대가리를 못 들고 허둥댈 필요는 없잖아. 이건 원래 그런 싸움이었어. 그리고 결과도 이만하면 꽤 좋은 편이고.”

“이런 걸… 좋다고 해야 합니까?”

진우는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물었다. 이 칼잡이 남자의 말이 맞다. 머리로는 그의 논리에 수긍할 수 있지만, 가슴은… 유빈의 피를 보고 흥분한 가슴은 납득이 안 된다.

“그렇게 계속 머릿속으로 딴생각만 하고 있으면 결국 점점 더 안 좋아질걸? 너, 지금 골목 안으로 얼마나 들어왔는지 기억하고 있나?”

민구가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진우는 말문이 막혔다. 모르겠다. 몇 미터 정도나 들어왔는지, 코너는 몇 번이나 어느 방향으로 돌았는지… 지금 진우는 평소의 그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아주 멍청한 상태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후우우~”

진우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진정이 안 돼요. 화가 나서… 내가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후회도 되고.”

“침착해지는 건 좋아. 그런데 네가 아무리 침착했어도 터져서 날아가는 쇠문 방향까지 예측할 수는 없지. 그냥 우연이었어. 거기에 내 머리가 걸렸어도 이상하지 않고, 그 덩치 큰 놈의 다리가 잘렸을 수도 있지. 물론 아무에게도 맞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수도 있었지만, 어디 세상이 내 하고 싶은 대로만 돌아가나?”

그렇게 말하며 민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가 지포라이터에 불을 켜자 진우가 어처구니없어 한다.

“담배 피우면 안 됩니다. 좀비들이 그 냄새를 쫓아와요.”

“알아.”

민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을 붙였다.

“그런데 일부러 피우는 건 뭡니까?”

“나 혼자라면 조심하는 척이라도 하겠는데, 너랑 같이 있으니까 이래도 별문제 없을 것 같아서.”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민구가 말했다. 더 잔소리하고 싶지 않아서 진우는 그냥 내버려 뒀다. 혹시 몰려드는 좀비들이 많으면 좀 귀찮아지기는 하겠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는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이 부근이 하루 동안의 은신처로 적절하지 않다는 이야기니까.

“우리가 지금 몇 번을 꺾었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며 진우가 물었다.

“골목 입구로 들어온 다음 세 번.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 또 오른쪽.”

민구가 담배를 끼운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려 보인다. 진우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큰길에서 멀어지려는 의도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여기는 너무 후미지다. 적어도 헬리콥터가 내릴 만한 곳과 시선이 닿기는 해야 승부를 보기가 편하다.

‘아니, 잠깐…….’

다시 돌아 나가자고 하려던 진우는 멈칫하며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신호를 누른 지점과 밤을 샐 장소가 꼭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는 거였다.

그래…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깊숙하게 들어온 것이 오히려 더 결과적으로는 나은 거일지도…….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새로운 입장에서 후보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저 건물 옥상에서 신호를 보내죠.”

하나하나 신중하게 건물들을 살피던 진우가 말했다.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던 민구는 이런저런 말 없이 선선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왜 여기로 정했는지 안 물어봅니까?”

4층 건물의 옥상에 올라 신호기를 꺼내며 진우가 물었다. 민구는 고개를 저으며 옥상 바닥에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나중에 다른 녀석들이랑 같이 듣게 되겠지.”

“그때 들어보니 영 마음에 안 들면 어쩌시려고요? 바보 같은 작전이라거나.”

“설마 그런 바보가 이때까지 살아남았겠나? 어디 구석에 숨어 있다가 바깥에 처음 나온 것도 아니고.”

민구가 말했다. 그는 총잡이 녀석의 눈빛이 다시 예리하게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진우는 더 걱정하지 않고 신호기를 눌렀다.

그런데… 이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진우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다못해 작은 불이라도 들어와 주면 ‘신호가 제대로 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이건 그냥 스프링이 작동해서 스위치를 다시 밀어 올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부가 작동이 없다.

혹시 방향이 맞지 않아 신호가 잡히지 않은 걸까 싶던 진우는 제자리에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며 대략 30도마다 한 번씩 신호기를 눌렀다. 그래도 여전히 신호가 들어갔다는 표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우우―! 컹컹컹!

그 순간, 어디에선가 개들이 울부짖어 댔다.

“이거, 켜진 걸까요?”

진우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폭발의 여파를 맞았던 유빈의 배낭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JL로 갈 것인지에 대해 아직도 마음을 확고하게 정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예 신호조차 보내지 못하는 건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나한테 물어봐야…….”

진우로부터 신호기를 넘겨받은 민구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기계, 그것도 이런 식의 낯선 기계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가끔 차가 말썽을 부릴 때에도 그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타이어를 냅다 걷어차면서 욕설이나 퍼붓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참 등신같이도 만들어놨군.”

한 번 찰칵, 하고 스위치를 눌러본 민구는 아무 반응이 없는 신호기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스위치를 마구 연타해 본다. 타이어 걷어차기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얼―!

그때까지 진우의 곁을 얌전히 지키고 있던 삼숙이가 돌연 민구를 향해 짖는다. 똑똑하던 개가 갑자기 이상행동을 보이며 달려들려고 하자 민구도 순간 주춤했다.

컹컹컹! 아우우우~!

조금 전, 울부짖던 동네의 들개들도 다시 짖어 대기 시작했다. 정신이 홀랑 빠지는 것 같다.

“이놈 뭐야?”

민구가 미간을 찌푸린다. 하지만 진우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 그거… 신호 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음?”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민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개새끼가 개기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줘보세요.”

진우는 민구로부터 신호기를 다시 돌려받아 삼숙이의 귀 가까이대고 꾸욱 눌러봤다. 삼숙이는 싫은 내색을 하며 머리를 돌려 피한다.

“아아, 알았어. 삼숙아, 안 할게. 응, 응. 그만할게.”

두 발로 서서 얼굴을 핥으며 아부하려는 삼숙이를 진우가 다독였다.

“아마 이게 신호로 소리를 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귀에는 안 들리는, 그런 종류의 소리. 그런데 그게 얘한테는 거슬리는 거겠죠.”

진우가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 댄다.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민구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개들은 사람이 못 듣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사실 그로서는 JL로 가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손해 보는 것은 없다.

신호를 보낸,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호를 보냈다고 믿은 두 사람은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좀비들을 잡으면서 다시 태양 그룹 건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후우우~!”

지하에 갇혀 있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전, 진우는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CCTV에서 본 바로는 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셔터에 갇힌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게 부담스럽다.

곧 구조가 될 거라는 희망을 주는 건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 말을 전하는 동시에 엄청나게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다급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니, 당장 셔터를 열어달라고 애원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줬다가는 보호 받지 못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좀비가 돌아다니는 거리로 쏟아져 나갈 거고, 그 결과는 많은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권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믿음을 주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을 지시에 따르게 할 수 있는, 그런 모습.

“…특수 요원 박진웁니다! 특수 요원 박진우라고 합니다… 아아, 영 별로인데…….”

거울을 보며 자기소개를 연습하던 진우가 거칠어진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으며 괴로워했다. 건대에서 통했던 기억 때문에 특수 요원이라는 가상의 신분인 척하려고 하는데, 그게 너무 쪽팔리다.

‘특수 요원’이라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눈을 아래로 슬쩍 내리깔며 부끄러워한다. 이래서야 다급한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 리가…….

“안 믿을 것 같아요. 내가 봐도 영 구라 같은데…….”

진우는 민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다 못한 민구가 나섰다. 그는 로비에 쓰러져 있는 쉐도우 실드의 시체들을 가리켰다.

“저것들을 써봐.”

“네? 쓴다는 게 무슨…….”

“답답하구만. 엘리베이터에 몇 놈 끌어다 앉혀놓으라는 말이야. 거울에 피도 좀 묻혀놓고.”

“그게 어떤 도움이 됩니까?”

진우가 물었다. 민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총잡이 놈은 가지고 있는 능력과 달리 너무 순진하다. 허세가 사람 심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자, 어때? 여기에서 총 맞아 죽은 것처럼 보이지?”

민구는 일단 시체 한 구를 끌어와 엘리베이터 구석에 앉힌 뒤 물었다. 백 마디 말을 듣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보는 게 더 나은 법이니까. 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기는 한데, 자세히 보면 아니라는 게 표가 납니다. 일단 거울에 피가 퍼진 범위가 너무 적고…….”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못 봐! 그냥 시체 있고, 피 있으면 깜짝 놀라서 ‘여기에서 죽었구나’ 한다고. 이런 놈들을 한 셋 정도 끌어와서 엘리베이터에 깔아. 그러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저 밑에 갇힌 놈들이 보고 깜짝 놀라겠지.”

진우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민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암만 멍청이들이라도 이 검은 군복이 나쁜 새끼들이라는 건 기억할 거란 말이지. 그때 네가 내리면서 말하는 거야. 구조하러 왔는데, 아직은 위험해서 문을 못 열어준다. 하지만 이 새끼들 이제 거의 다 죽였으니 안심하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그 말만 딱 하고 곧바로 다시 엘리베이터에 타. 그럼 바짝 쫄아서 찍소리도 안 하고 기다릴 테니까.”

아하… 진우도 이제 납득이 간다. 예전에 칼에 찔려 죽은 여자의 시체를 앞세워 군인들의 수색을 잠시 피했던 것과도 어딘가 상통하는 데가 있다.

사람들은 공포 앞에서 논리가 흐려진다. 허술해 보이는 트릭이라도 통할 것 같았다.

의기투합된 진우와 민구는 쉐도우 실드 대원들의 시체를 두 구 더 끌어와 엘리베이터에 눕히고 앉혔다. 일부러 피를 찍어 거울에도 발랐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직전 진우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 투투둑― 투두두―

총소리는 로비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 정도면 지하 2층에도 어렴풋이 들렸을 거다. 준비를 마친 진우는 지하 2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꺄아악!”

어두침침하던 지하 2층 주차장에 엘리베이터가 환한 빛을 발하며 열리자, 예상했던 대로 잔뜩 긴장해 있던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당연한 일이다. 피투성이 시체가 몇 구나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때, 버튼 옆에 기대 숨어 있던 진우가 몸을 돌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진정하십쇼! 구조댑니다! 아직 전투 중이라 당장은 여러분들을 꺼내 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미 승기를 잡았고, 곧 구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거기까지 말한 진우는 곧바로 엘리베리터 문을 닫았다. 어지간한 충격을 연속으로 받은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진우는 숨을 골랐다. 이제 여기 남자들이 갇혀 있는 곳에서 조금 전과 똑같은 대사를 한 번만 더 말하면 된다.

첫 구조대는 그로부터 20여 분이 흐른 뒤, 정말로 대로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애송이와 보안 요원이 그들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모양이다. 비록 장갑 트레일러 한 대 뿐이지만, 진우와 친구들이 안심하고 태양 그룹 건물을 빠져나가기에 충분했다.

반신반의하며 도착한 병력들이 이곳의 실상을 확인하고 나면 이내 훨씬 더 큰 규모의 후발 구조대가 도착하리라.

진우는 일행을 건물 뒤쪽의 왼쪽 골목으로 이동시켰다. 돌아오는 길에 그가 보아두었던 5층짜리 건물 맨 위층 당구장에 도착한 친구들은 그제야 처음으로 등을 대고 누웠다.

“여기에서 신호 보냈어?”

아직도 약에 취해 있는 유빈을 소파 위에 눕힌 뒤, 큰대자로 뻗은 보안관이 물었다.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신호 보낸 데는 저기 반대 골목 안쪽이야. 여기에서는 안 보여.”

“근데 왜 여기로 왔어?”

“작전이 떠오른 게 있어서.”

거기까지 들은 보안관은 더 묻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지금 당장은 물어볼 기운도 없다.

“끄으으응~ 으으응~”

반쯤 잠들어 있는 유빈이 붕대로 친친 감긴 왼팔을 흔든다. 아마 오른팔에 꽂힌 수액 주삿바늘이 불편해서 빼보려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진우는 또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 안 돼. 집중해라, 집중해.’

진우는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슬퍼하고 걱정하는 건 뒤로 미룰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JL로 가는 걸로 결정 났어?”

테라의 수액 주사를 살펴주던 태권소녀가 물었다. 진우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혜주, 네 결론은 뭐였어?”

“아아,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태권소녀가 당구대 위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가야 한다는 건 아는데, 무서워. JL이라는 데도 또 태양 놈들처럼 굴까 봐. 그러지 말란 법이 없잖아.”

다들 부인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만약 JL이 태양 그룹만큼, 혹은 태양보다 더 사악한 놈들이라면 그때는 또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 같은 건 없다. 모두 다 죽게 될지도 모른다. 태권소녀는 유빈을 한 번 돌아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면 발을 뺄 생각은 없어. 사실 따지고 보면 유빈이 다친 거, 내 책임이 꽤 커. 애초에 테라를 구해서 피를 나눠 받고 싶다고 했던 게 나였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테라랑 우리, 꼭 다 같이 움직여야 돼? 안 그래도 되지 않을까?”

삼식이가 말했다. 보안관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같이 안 움직이면 뭘 어쩌겠다고?”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거야. 우리 중에 꼭 JL로 가야 하는 사람은 유빈이뿐이잖아. 손을 고쳐야 하니까. 나머지는… 사실 가야 할 필요가 없어.”

“유빈이만 덜렁 보내자고? 걔네가 왜 태워 가서 치료를 해주겠냐? 그리고 설사 태워 간다고 해도 뭐가 좋아? 다시 돌아오지를 못할 텐데.”

“그건 아니지. 내 말 들어봐. 테라가 피를 좀 뽑아서 날 줘. 그럼 내가 그 피를 가지고 있다가 유빈이랑 같이 헬리콥터를 타는 거야. 유빈이는 아파서 말을 잘 못하니까 내가 거래를 하는 거지. ‘이게 바로 너희가 찾던 면역자의 피다. 이거 더 받고 싶으면 얘 손을 온전히 고쳐 놔라’ 이런 식으로……. 봐, 이렇게 피 뽑는 주사기도 얻어 왔어.”

삼식이는 자신의 배낭에서 혈액 채취용 주사기를 꺼내 보였다. 보안관은 널브러진 채 떨떠름한 표정으로 또 물었다.

“똑똑한 네가 그 지랄 하는 동안에 우리는 뭐하고?”

“너희는 코스트코로 가서 좀 쉬면서 기다려. 대충 한 달 정도 뒤에 여기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면 되잖아.”

“만약에 약속한 날에 너랑 유빈이가 안 오면? 그럼 어떻게 해? 전화도 없고, 주소도 모르는데.”

“그때 안 오면 다 그른 거지, 뭐. 그냥 우리는 잊어버려. JL도 신경 쓰지 말고. 나쁜 새끼들일 게 분명하니까.”

삼식이가 아주 처량한 이야기를, 아주 평온한 어조로 들려준다. 엉덩이라도 한 대 걷어차 주려고 몸을 일으키던 보안관이 녀석을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속상하게 신파 영화 찍고 자빠졌네, 미친 새끼가.”

“아닌데… 그렇게 하면 위험은 줄이고, 얻는 건 똑같잖아.”

“씨발, 친구 넷 중에 둘이 없어지는 거나, 그냥 다 같이 위험해지는 거나 뭐가 다르냐고! 그렇게 하고 나서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

보안관과 삼식이가 그렇게 투닥거리고 있는 동안, 민구는 가방을 구석의 당구대 위에 올려놓고 의료실 냉장고에서 쓸어 담아온 음료수와 스낵들을 꺼내놨다.

“마시면서 떠들어.”

음료수 캔을 삼식이와 보안관에게 던지며 민구가 말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결국은 몸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려면 에너지와 수분이 필요하다.

“나더러 결정을 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생각을 해봤어.”

아직 냉기가 남은 콜라를 마시며 진우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를 돌아본다.

“나름 결정도 했고. 그런데 그전에 테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테라야, 너 젠킨스라는 사람에게서 여러 가지 들었다고 했지. 너 같은 면역자가 얼마나 많은지 혹시 알아?”

진우는 테라에게 물었다. 테라는 조금 멋쩍어하면서 대답했다.

“다른 사람에게 항체를 줄 수 있는 면역자는… 1억분의 1 확률로 존재한대요.”

허, 듣고 있던 친구들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1억분의 1. 전 세계 인구가 모두 살아 있다고 가정해도 겨우 60명…….

“그렇구나. 이렇게 다들 욕심낼 만도 하네. 그럼 좀비는? 이것들의 수명은 얼마나 된다고 했어?”

“몇 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좀비는 멀쩡했대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그의 결정이 더 확고해졌다. 진우는 자신이 생각한 작전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아침까지 JL이라는 데가 좀비 백신을 연구하는 줄도 몰랐어. 근데 JL도 아직 우리에 대해서 전혀 몰라. 젠킨스라는 사람이 죽은 것도 모르고. 그러니까 내일 헬리콥터가 온다면, 그 젠킨스라는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서 오는 걸 거야. 바로 그 점에서 우리가 유리해. 저쪽은 기습에 대한 걱정을 거의 하지 않고 있을 테니까.”

“만약에 나쁜 놈들이면 너무 위험부담이 큰데… 차라리 내 아이디어가 더 좋지 않아?”

삼식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진우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내가 삼척에 있을 때, 우리 분대원들도 도망칠 수 있었어. 트럭이랑 탄약, 다 갖춰놓은 상태였지. 하지만 왜 그러지 않았냐면… 우리가 도망가 버리면 원자로 건물을 잠글 수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 그래서 위험한 걸 빤히 알면서도 버텼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그날 원자로에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차피 이 나라 어디로 도망을 치든 몇 달 내에 다 죽는 거니까.”

진우는 테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1억분의 1…….

“만약에 이 좀비 사태가 진정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차피 다 죽어. 길어야 1년, 짧으면 몇 달……. 우리가 아무리 똘똘 뭉쳐서 좀비들하고 잘 싸운대도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 어딘가에서 원자력발전소가 붕괴될 수도 있고, 공장에서 독가스가 유출될 수도 있지. 왜냐하면 높은 군인들은 강원도에서 서로를 죽이느라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거든. 그러면 우리는 이유도 모르는 채 죽는 거야. 나는 그렇게 되기 전에 세상이 망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 비록 아주 위험한 도박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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