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30화 (430/449)

4장 히어로 (3)

테라로부터 ‘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니는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그건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녀의 피를 뽑아내려는 사악한 인간들로부터 그녀를 지키고 싶어서 목숨을 내걸고 여기에 뛰어들었는데, 그 결과는 다시 테라의 피를 거래하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하다니…….

“근데… JL이라는 데는, 믿을 만한 곳이야? 만약에 여기 태양 그룹이랑 똑같은 놈들이면 어떻게 해?”

태권소녀가 물었다. 테라는 잠시 말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어요. 젠킨스 씨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은 꽤 끔찍했었거든요. 정말… 끔찍했어요. 하지만 이곳과 거기가 다른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JL의 연구원들은 저 같은 유형의 사람이 얼마나 드물게 존재하는지 아주 잘 안다는 거예요.”

“걔들은 그런 걸 어떻게 잘 알아?”

“그곳에서는… 예전부터 좀비들과 면역자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거든요. 애초에 좀비들이 전 세계로 퍼진 것도 그 회사의 책임이에요.”

“잠깐, 잠깐만… 좀비를 퍼뜨렸다고? 그 회사가?”

테라로부터 완전히 의외의 말을 들은 태권소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위이이잉―

커튼으로 벽을 쳐둔 유빈의 침대 쪽에서 소형 회전톱이 회전하는 소리가 난다. 치과에서나 들을 법한 오싹한 모터 소리. 제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쪽을 돌아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뼈가 잘리고 있다. 치료를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이 상황이 끔찍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커튼에 어른거리는 실루엣조차 쳐다보기가 두렵다. 커튼 안쪽에서 민구와 보안관이 지키고 있다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태권소녀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다들 청각에 신경을 집중하고 바짝 긴장한 채 빠르게 회전하는 쇠가 뭔가 단단한 것을 갈아내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회전톱의 소리가 멈췄을 때, 태권소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테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JL이라는 것들이 좀비를 전 세계에 퍼뜨린 놈들이라는 거잖아. 그런 놈들을 어떻게 믿어?”

“아… 퍼뜨렸다는 건 사실이긴 한데요… 그게 좀 복잡해요. 제가 그 일들을 모두 다 직접 보고 아는 건 아니지만, 젠킨스 씨에게서 들은 대로라면 그건 사고였어요. 꽤 높은 지위의 간부 중 한 사람이 이성을 잃고 저지른 일이었다고…….”

테라가 대답했다. 태권소녀는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건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죄를 지은 놈들이 그런 식으로 변명을 하는 건 흔한 일이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말이 되는 것도 같다. 치료약도, 예방약도 없는 병을 퍼뜨려서 그들이 대체 뭘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네 생각에 그놈들은 여기와는 좀 다를 거다, 이런 거야?”

태권소녀가 묻자, 테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 사람들은 좀비와 면역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러면서도 조심성도 없고, 양심도 없었죠.”

“흐음~”

태권소녀는 답답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들은 너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알 거라고 믿나 보네?”

“네. 젠킨스 씨는 제 발가락 상처가 낫지 않는 걸 보고, 제가 좀비들에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려줬어요. 저도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겪어보니 사실이더라고요.”

그렇게 대답하는 테라의 표정에 만감이 교차한다. 특히 자신이 오늘 식사실로 끌려가 겪었던 그 끔찍한 경험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악몽에 시달리도록 할 것이다.

“근데, 그 말이 진짜 사실이야? 좀비들한테 안 보인다는 거 말이야. 듣고 나서도 안 믿겨.”

태권소녀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민구와 함께 8층의 반대쪽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테라가 식사실 아래층에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제니가 테라 대신 대답해 준다.

“네. 아까 처음 봤을 때, 저도 엄청 충격 받았어요. 테라, 얘가 좀비들 사이에서 태연히 걸어오는 거예요. 좀비들은 얘한테 신경도 안 쓰고요. 모르는 사람이 그러고 있었으면 장관이라고 했겠지만, 거기 서 있는 게 테라니까… 머리로는 안전하다고 알면서도 불안했어요.”

“그건… 쩌네. 그럼 테라한테 피 나눠 받으면 이제 우리도 다 그렇게 되는 거야?”

태권소녀가 감탄하며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좀비 세상에서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테라는 그녀를 실망시키는 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항체가 생겨도 확률에 따라서 어떤 면역자가 되는지 정해진다고 했어요. 세 종류가 있거든요.”

“그렇구나… 골치 아파. 어떻게 해야 똑똑하게 구는 건지 잘 모르겠어. 이런 거는 유빈이가 고민해서 결정했었는데…….”

태권소녀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유빈을 만난 이후에는 복잡하고 귀찮은 계산들을 모두 그에게 맡겨뒀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나 혼자 끙끙 앓는다고 될 문제가 아닌 것 같네. 좀 이따가 애들이랑 다 같이 이야기해 보자. 그때까지 넌 좀 누워 있어. 엄청 아파 보인다.”

잠시 더 고민을 해보던 태권소녀는 테라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며 일어났다. 실제로 얼굴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워낙 TV에서 많이 봤던 아이여서, 그리고 이미 제니와 친숙한 사이여서 태권소녀는 테라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흐아~!”

잠시 후, 유빈의 상처에 대한 응급처치를 끝내며 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까딱 실수라도 했다가는 곁에서 지키고 있던 민구가 곧바로 목을 딸 기세였다.

친구의 잘린 팔목을 고정시키기 위해 꽉 붙잡고 있어야 했던 보안관도 이마의 땀을 닦는다. 괴로워하지 않는 건 약에 취해 완전히 늘어진 유빈뿐이다.

“저 사람은 물 한잔만 마시고 치료할게요. 괜찮죠?”

보안 요원을 가리키며 의사가 물었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때, 태권소녀가 진우를 데리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잠깐 회의 좀 하자. 아저씨도 오세요.”

친구들과 민구는 테라의 침대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구는 테라의 안색을 곁눈으로 살폈다.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유빈의 팔이 잘린 것을 자책하느라 더 지쳐 있을 게 분명했다. 그녀의 책임이 아닌데도.

“유빈이 팔 말인데… 테라가 JL로 가자고 했어. 거기에 의사가 있다면서.”

“JL이 뭐야?”

보안관이 물었다. 태권소녀는 자신이 들었던 걸 고스란히 친구들에게 전해줬다.

“그건…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이야기 들어보니까 한국 회사냐, 외국 회사냐 정도의 차이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런 데를 우리 발로 걸어들어 간다고? 그냥 군인들한테 가서 수술해 달라고 하면 안 될까? 건대에는 고 하사 아저씨 밖에 없었지만, 더 큰 부대에는 의사들이 있을 거 아니야? 군인들이 수천 명이면 다치는 사람들도 꽤 많을 거잖아.”

삼식이가 반대 의견을 냈다. 생명이냐, 한쪽 손이냐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손이다. 그건 유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잠실 의사들은 못 고쳐. 거기 맡겼다간 일주일도 못 가서 죽을 거다.”

민구가 냉정하게 단언했다. 잠실 의무실에서 그가 보았던 광경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여기저기 잘려 나간 병사들이 후텁지근하고 좁은 병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모습. 지친 의사들은 거의 손을 쓰지 못하고 부상자들을 방치했었다.

“그럼 형씨는 JL로 가자는 입장이야?”

보안관이 물었다. 민구는 녀석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안 했어. 결정은 테라하고 너희들이 하면 돼. 그저 잠실에 있던 의사들에게 기대하지는 말라는 거다.”

“아저씨도 그 젠킨스라는 사람 겪어봤죠?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 말만 믿고 JL이라는 데로 갈 만한 사람이었어요?”

태권소녀가 물었다. 민구는 흉터 주변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평소 행실이 마음에 드는 놈은 아니었어. 장삿속이 엄청나게 밝고, 욕심이 많은 놈이었지. 잘난 척을 해서 묘하게 사람 성질을 긁는 재주도 있고, 또 살살 눈치를 봐가며 거짓말도 곧잘 했어.”

늘어놓고 보니 참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 모든 게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니…….

“전혀 못 믿을 인간이라는 말이네요.”

“평소의 모습만 놓고 보자면 그랬어. 하지만… 죽기 직전에는 좀 달랐지. 건물에 깔려서 다리가 다 짓뭉개지고 옆구리가 찢기는데도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어. 대신에 테라에게 세상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지.”

젠킨스의 마지막을 회상하며 민구가 말했다. 비록 그 자신은 검은 군복의 목을 따느라 그 유언들을 다 듣지 못했지만, 녀석이 간절한 말투로 테라에게 애원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다.

“조금 전에 혜주가 말한 그 신호기라는 건 어디 있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진우가 물었다. 민구는 침대 곁에 떨어져 있는 유빈의 가방을 가리켰다.

“저 안에 들어 있어. 이 정도 크기의 둥근판이고, 가운데를 누르는 구조야.”

“…네? 왜 그게 유빈이 가방 속에…….”

놀라 묻던 진우는 이내 질문을 거두고 너덜너덜해진 유빈의 가방을 열었다. 이 남자가 무슨 사연으로 유빈에게 신호기를 넘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치료를 위해 그곳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한다면 몇 명이 유빈과 함께 갈 것인가를 정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건 결정하기에 꽤 까다로웠다.

“그러니까 이 부근에서 이걸 누르면… 보통 24시간 이내에 그 누른 장소로 구조하러 온다는 말이죠? 헬리콥터가… 근데 이거, 망가진 건 아니겠죠?”

지하에서의 폭발 때문에 조금 그슬린 젠킨스의 버클을 가만히 바라보며 진우가 중얼거렸다. 무슨 원리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원리보다도 더 궁금한 것은 과연 얼마나 강력한 수준의 무장을 갖추고, 몇 명이 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염두에 둬야 할 점들이 너무도 많다. 머리가 터져 나갈 것처럼 지끈거린다.

“…응?”

시선을 아래로 한 채 골똘하게 고민하고 있던 진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다들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민구라는 이 칼잡이 남자도.

“뭐? 왜들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진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보안관이 대꾸했다.

“뭐겠어?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

“응? 내 결정이 왜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지. 우리 운명이 걸려 있는 거니까.”

이번에는 태권소녀가 말했다. 그제야 진우는 지금 자신에게 유빈이 하던 역할이 임시로 부여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팀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묵직해진다. 금세 이마에 솟아난 땀을 닦으며 진우가 중얼거렸다.

“나는… 유빈이만큼 그렇게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 않는데…….”

“그렇지 않아요. 오빠는 정말 영리한 사람이에요. 혼자 강원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왔잖아요.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몇 백 킬로미터를 모두 돌파해서… 그거… 단순히 총을 잘 쏘고 건강하다고 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어쩌면 오빠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요.”

제니가 말했다. 보안관도 삼식이도, 그리고 태권소녀도 고개를 끄덕인다.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걸어왔다고? 혼자서?’

민구는 내심 깜짝 놀랐다. 그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인가 싶다. 괴물들이 약해져 있는 지하철로 피해서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민구는 총잡이 녀석이 왜 나이에 걸맞지 않는, 칼날 같은 냉혹함을 갖추고 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매일 수라지옥을 지나는 동안에 조금씩 조금씩 깎이고 단련되어 만들어진 예리하고 단단한 칼날…….

그게 바로 이놈의 마음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렇게 되기 전에 맥없이 부러져 나가고 말겠지만.

“후우우~!”

진우는 크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일단 이 신호기는 눌러놓자. 우리가 중간에 몇 번이나 마음을 바꿀지는 모르지만, 시간을 당길 방법은 없으니까 준비는 최대한 빨리 해놓아야겠지.”

진우가 신호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모두 동의하는 눈빛이다.

“눌러. 왜 말만 하고 가만히 들고 있어?”

태권소녀가 묻는다. 진우가 대답했다.

“아니, 여기에서는 안 돼. 이 신호를 보낸 위치로 찾아온다고 했잖아. 근데 조금 있다가 군인들이 사람들을 구하러 와야 하니까 우리는 여기에 계속 머물 수 없어. 그러니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가서 눌러야 돼. 그러면서도 하루 정도는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곳에서. 헬기가 바로 내릴 수 없는 장소면 더 좋아.”

“복잡하네.”

보안관이 다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우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복잡해. 우리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저쪽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 여러 가지를 감안할 수밖에 없어.”

“저 건물들 정도면 적당한 걸까?”

복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몇 개의 낮은 건물들을 가리키며 삼식이가 물었다. 진우가 말한 조건을 어느 정도 만족시킨다.

“그럼 너는 결정을 대충 내린 거네?”

진우가 건물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 태권소녀가 물었다.

“지금은 그렇긴 한데, 뭔가 놓치고 있을 것 같아서 말하기가 겁나. 그러니까 저 두 사람… 용산 철교로 보내고 군인들 데려올 때까지 좀 더 생각을 하고 싶어. 여러모로 정신이 없지만, 일단은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지.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유빈이가 다친 거잖아.”

두 끄나풀을 가리키며 진우가 말했다. 응급처치를 받은 보안 요원과 애송이가 불안한 시선으로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동안 너희들도 생각을 해줘. 뭔가 아이디어가 있으면 알려주고.”

친구들에게 한 번 더 부탁을 한 뒤, 진우는 보안 요원과 애송이에게 다가갔다.

“어지럽지 않아요? 뛸 수 있습니까?”

진우는 흰 붕대를 오른손 끝에 감고 있는 보안 요원에게 물었다. 보안 요원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 예. 그냥 여기만 부분 마취한 거라서… 근데 이제 저희는 어떻게 됩니까? 아까 저분이 갱생의 기회를 주신다고 했었는데…….”

그들은 유빈의 부상 때문에 혹시 모든 계획이 틀어진 건 아닐까 걱정하는 중이었다. 진우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맞습니다. 뛰실 수 있으면 지금 내려가죠. 마취가 되어 있는 편이 총을 잡기도 더 나을 테니까. 마침 이 근처에 대규모 좀비 떼도 보이지 않고요.”

진우는 그들을 데리고 좀비들의 시체가 가득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민구와 삼숙이가 진우와 함께 이동했다.

테라와 약에 취해 기절해 있는 유빈은 보안관과 태권소녀가 든든히 지키고 있다. 이 층을 돌아다니는 좀비들은 이미 진우가 거의 다 잡았고, 여차하면 제니가 총을 들 수도 있다.

“젠장… 이런 데에서 대번에 표가 나네.”

어느새 옥상으로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진우가 투덜거렸다. 내릴 때 엘리베이터 문에 뭔가를 끼워서 이 층에 묶어뒀어야 했는데,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이 홀랑 빠진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유빈이 있었다면 분명 뭔가 조치를 해두고 내렸을 거다. 지금 이 엘리베이터 건은 큰 문제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유빈의 빈자리를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띵―

엘리베이터는 금방 다시 18층으로 돌아왔다. 이걸 타고 누가 올라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쯤 박살 난 헬리콥터를 보며 망연자실해 있을 것이다.

“받으세요.”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진우는 두 끄나풀에게 MP5와 탄창을 나눠 주었다. 태양 그룹 직원이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웃옷을 벗어 던지고 있던 둘은 상기된 얼굴로 총을 잡았다.

“1층 로비까지 저와 함께 나간 다음에, 곧바로 무너진 담 쪽으로 뛰세요. 주차장 내부에 돌아다니는 좀비들은 상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잡을 거니까요. 그리고 곧장 달려가면서 앞을 막아서는 놈들만 쏘세요. 직진. 한강변의 산책로를 만나서 우회전할 때까지 꺾으면 안 됩니다. 탄창이 하나뿐이라는 걸 잊지 마십쇼.”

진우는 얼음 같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작전을 설명해 줬다.

단순한 임무였다. 좀비들이 이따금씩 출몰하는 약 1킬로미터의 직선 구간을 얼마나 빠르게 주파하느냐가 성패를 가늠한다. 보안 요원과 애송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갑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진우가 앞장서서 뛰어나갔다.

투투둑― 투투투―

지하 1층의 열기에 홀려 로비로 들어와 있던 좀비들이 진우의 총탄 세례를 받고 머리가 터진 채 나뒹군다.

진우는 근처에 쓰러져 있던 좀비의 시체를 끌어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도록 받쳐 뒀다. 그러고는 다시 총을 고쳐 잡았다.

투두두― 투투둑― 투투투―

진우는 마치 미리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처럼 능숙하고 빠르게 총구의 방향을 돌려가며 좀비들을 쓰러뜨리고, 방향을 바꾸고, 게이트를 점프해서 피했다. 주차장으로 이어진 계단까지 닿는 데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내려가요!”

박살 난 정문 앞에 우뚝 버티고 서서 방아쇠를 당기며 진우가 명령했다. 태양광발전 패널 주변에 서 있다가 고개를 돌리던 좀비들의 머리가 펑펑 터져 나간다.

“으아아아아!”

보안 요원과 애송이는 바짝 쫄아 있는 마음을 속이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측면에서 그들을 반기며 달려오는 좀비들! 애송이는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서서 탄창을 끼웠다.

그런데… 이게… 낯선 총인데다가 마음이 급하니까 잘 들어가지 않는다.

투투둑―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오던 좀비의 옆머리가 사라지고, 놈의 뇌수가 애송이의 볼에 튄다. 너무 놀라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뛰어! 멈추지 말고!”

진우가 외쳤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면 점점 더 많은 좀비들과 마주하게 될 뿐이다.

“죄, 죄송합니다! 그럴게요!”

애송이는 두어 번 허리를 숙인 뒤, 장전된 총을 꽉 잡고 보안 요원을 쫓아 뛰었다.

투둑― 툭―

등 뒤에서 울려오는 총성!

바람을 가르는 총알의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싶은 순간, 보안 요원의 앞을 가로막으려던 좀비 두 마리가 뒤로 팍팍 나가떨어진다.

“뒤는 신경 쓰지 마. 내가 맡을 테니까.”

두 끄나풀의 엄호를 위해 정신없이 총구를 돌리고 있는 진우에게 민구가 말했다.

스릉―

마세티를 뽑아 든 민구는 진우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주변의 좀비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목을 치고, 두개골을 부수고, 발목을 끊어 자빠뜨렸다. 두 사람이 버티고 선 정문 계단 주변은 금세 좀비들의 시체로 어지러워졌다.

철컥―

진우는 탄창을 교환하고 빠르게 다시 전방을 겨냥했다. 300여 미터를 주파한 시점부터 두 끄나풀의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고, 그 추세가 개선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처음에 너무 오버 페이스를 하면 안 된다는 조언을 해주지 않은 걸 후회하며, 진우는 둘의 주변으로 달려드는 좀비들을 계속해서 쓰러뜨렸다.

투투둑― 투투둑― 투투투―

그래도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보안 요원과 애송이 모두가 직선으로 달리라는 명령 한 가지만은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방향을 바꿔 도망가거나 하지 않고 꾸준히 계속 뛰기만 하면 곧 용산철로까지 도달할 수 있다.

“끝났나?”

잠시 후, 진우가 총구를 아래로 내리는 걸 보며 민구가 물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제 시야는 무사히 벗어났습니다. 이제 풀숲을 지나서 몇 분만 뛰어가면 용산철로에 도착할 거예요.”

“그놈들…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던가?”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 손이 날아간 사람이 체력도 좋았고, 꽤나 배짱이 있었어요. 왼손으로 여섯 발을 쏴서 좀비도 한 마리 잡았고요.”

진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풀숲 주변은 오가는 장갑차도 많고, 군인들의 보호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그 두 끄나풀에게 남겨진 과제는 불과 몇 백 미터를 돌파하는 것뿐이다.

“그래, 좋아. 잘됐군. 그럼 이제 그 신호기를 놓고 오지.”

민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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