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26화 (426/449)

3장 공주는 잠 못 이루고 (5)

메이저의 얼굴에서 웃음기와 여유가 싹 걷혔다.

저 커다란 두 자루의 칼… 자신은 짤막한 대검…….

놈이 아무리 허접한 약골이라고 해도 장비에서 이 정도의 차이가 나면 상대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게다가 자신은… 그 덩치에게 맞아 갈비뼈가 나간 상황…….

“어이, 어이, 이 새끼야.”

메이저가 얼빠진 표정으로 대검에 시선을 던지고 있자 민구가 마세티를 쫙 뻗어 놈의 귀를 살짝 그었다.

상처는 대번에 벌어지고 피가 뚝뚝 떨어진다. 예상치 못했던 예리한 고통에 메이저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다.

“정신 차려! 나는 너를 얼마나 또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김빠지게 굴면 안 되지. 왜 칼이 영 구려? 그거로는 실력 발휘가 안 될 것 같아?”

민구는 마세티로 녀석의 등 뒤를 가리켰다.

“사람이 여유도 갖고 주변도 좀 돌아보고 살아라. 네 뒤에 연장 많이 있잖아, 이 새끼야.”

그제야 메이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민구의 말처럼 정말로 살벌한 연장들이 잔뜩 놓여 있다. 메이저는 일단 가장 가까운 스테인리스 테이블에 손을 뻗어 손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거면 되겠어? 후회 없냐고?”

민구가 빙글거리며 물었다.

후회?

메이저는 다시 주변을 곁눈질했다. 마음이 급해서 자신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방금 귀가 잘릴 때, 저 흉터새끼가 내지른 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번쩍하는가 싶더니, 귀에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5초 줄게, 빨리 골라. 이왕 하는 일인데, 재미있게 하자. 약한 새끼 괴롭혔다는 말은 듣기 싫으니까. 하나!”

민구가 수를 헤아리기 시작하자 메이저는 후다닥 뒤로 뛰어가서 바쁘게 눈알을 굴렸다. 뭔가 날카로운 것들이 잔뜩 있기는 한데, 그가 익숙하게 보았던 것들이 아니다.

“이익!”

메이저는 일단 날 길이가 25센티인 뼈 절단용 나이프부터 집어 왼손에 쥐었다. 엄청나게 묵직하고, 칼등도 두툼하다. 생긴 모양도 일반 식칼과 비슷한 형태여서 사용하기에 전술용 나이프와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셋!”

민구의 숫자는 이미 셋을 지났다. 메이저는 퉁퉁 부은 입술을 날름거리면서 바쁘게 고개를 돌렸다. 대검을 내려놓은 그는 손도끼와 뼈 절단용 톱을 번갈아 만지작거렸다. 저 커다란 마세티를 상대로 어느 게 더 효과적일지 모르겠다.

“넷… 다섯!”

마음을 정한 것처럼 손도끼를 들어 올리는 척하던 메이저는, 민구의 입에서 다섯이라는 숫자가 떨어지자마자 손도끼를 민구를 향해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재빨리 자신의 대검을 다시 집어 들고 민구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 정도는 다 읽는다.”

민구는 몸을 틀어 날아오는 도끼를 뒤로 흘려 버리고, 왼손의 마세티를 크게 휘둘렀다.

챙―

대검을 앞세워 돌진하던 메이저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난다. 마세티의 강력한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대검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흐윽!”

메이저는 두려움에 휩싸여 거친 숨소리를 냈다. 그는 바로 옆의 테이블을 더듬거려 30센티 길이의 스테인리스 맬릿을 집었다. 작고 단단한 해머. 뼈를 부수기 위해 만든 것이니 마세티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다.

“간다!”

민구는 환하게 웃으며 쿠크리를 앞세워서 거리를 좁혀왔다. 쿠크리가 빙글빙글 돌면서 메이저의 눈을 현혹시킨다.

스윽―

팔뚝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

메이저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히 본 나이프로 막는다고 내밀었는데… 저 이상하게 휘어 있는 칼날은 뱀처럼 그의 팔을 가르고 지나갔다.

메이저의 팔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민구는 조용히 말했다.

“우연히 만난 것치고는 타이밍이 아주 좋았어.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렇게 여유롭게 즐길 수가 있잖아. 나는 찬찬히 정성을 다할 테니까, 너도 열심히 해 봐라.”

“으야아! 개새끼야!”

메이저는 욕설과 함께 스텝을 내디디며 힘껏 맬릿을 휘둘렀다. 민구가 발을 뒤로 빼며 피한다.

이놈… 이런 움직임을 할 줄 아는 놈이었나?

메이저는 허공을 가르는 자신의 맬릿을 보며 생각했다.

사악―!

또다시 스며드는 날카로운 고통!

이번에는 손등이다. 핏줄이 베이고 갈라진 손등에서 피가 왈칵왈칵 솟는다. 메이저는 서둘러 팔을 거두며 왼손에 쥔 본 나이프를 휘둘렀다.

슥!

또! 또 베였다! 이번에는 세로로!

팔의 안쪽을 따라 나란히 쿠크리의 칼날이 가르고 지나갔다.

“으으윽!”

메이저는 고통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 저 칼의 범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말이지…….”

민구는 녀석을 쫓지 않고 쿠크리로 겨누기만 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죽이고 싶은 놈이 셋 있었어. 그래서 내 머릿속 수첩에다가 아주 꾹꾹 눌러서 적어놨지. 생각 속에서도 글씨는 잘 못 쓰더라고. 크킄, 뭐, 어쨌든 너는 거기에서 세 번째 리스트였는데, 아마 실제로 죽이게 되는 건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 왜 그런지 이야기하자면 긴데, 하여간 일이 그렇게 됐어. 그래서 너한테 선택권을 주려고 해.”

“무, 무슨 서, 서, 선택권…….”

메이저는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놈의 약점이 뭐였는지 이제야 기억이 났다. 저놈은 오른쪽 옆구리를 잘 못 움직였었다.

하지만 아닌데… 저렇게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죽는 방법 말이지. 네 목숨이니까 그 정도는 선택할 권리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안하게 골라. 1번은… 가죽을 까는 거야. 팔부터 시작해서, 등, 가슴, 얼굴, 머리끝까지 싹 다 까줄게.”

“까, 까불지 마! 개새끼야!”

메이저는 맬릿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민구가 몸을 튼다. 그때, 녀석이 마세티를 휘둘러서 그 무게로 중심을 잡는 걸, 메이저는 똑똑히 보았다.

역시… 이놈은 오른쪽 옆구리가 시원치 않다! 바로 여기가!

메이저는 본 나이프를 있는 힘껏 내질렀다. 하지만 민구는 아주 능숙하고 여유롭게 쿠크리의 날을 돌려서 녀석의 손목을 찍고 확― 당겼다.

찌익―!

근육과 함께 정맥이 뜯겨 나간 메이저의 손목에서 피가 치솟는다. 팔의 방향이 틀어진 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된 메이저의 얼굴 위로 쿠크리의 날이 번쩍 스친다.

“으아악!”

콧등이 반으로 잘린 메이저는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민구는 여전히 문을 등지고 선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 잘 듣고 신중하게 선택하는 게 좋을 텐데… 이런 식으로 하다가 혀가 잘리거나 해서 의사 표현을 못하게 되면 내 마음대로 해버리는 수가 있어. 그건 좀 비인간적이잖아. 2번은… 다지는 거야. 말 그대로 뼈랑 근육이 잘 구분이 안 갈 만큼 곱게… 이걸로.”

민구는 마세티의 커다란 칼날을 들어 보이며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메이저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실수다… 차라리 그 근육 덩치 놈에게 덤벼볼걸… 이 비열한 놈이 실력을 감추고 있었을 줄이야… 다진다니… 씨발…….

그 어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강이뼈가 시큰거리는 것 같다.

‘아니! 아니야! 정신 차려!’

메이저는 입술을 꽉 깨물어 자신을 다그쳤다. 저놈의 현란한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예전에 잠실에서도 저놈이 쉐도우 실드 대원들을 죽였다는 도발에 말려 일을 그르쳤었다.

비록 빠르기는 하지만, 저놈의 몸뚱이는 온전하지 않다. 일단 저 마세티를 무력화시키면… 그러면 놈은 중심을 잡지 못한다.

“너! 듣고 있냐?”

민구는 펜싱 선수처럼 풀쩍 뛰어 거리를 좁힌 뒤에 손목만으로 마세티를 놀려 메이저의 양쪽 광대뼈 주변을 차례로 그었다.

그 공격을 막아보려 뒤늦게 들어 올린 맬릿에서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양쪽 볼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린다.

쨍강!

민구는 쿠크리로 맬릿을 내려치며 가드를 무력화시키고, 다시 칼날을 역으로 돌려서 메이저의 옆구리를 그었다.

“끄으으윽!”

메이저는 얼굴을 찌푸리며 본 나이프를 내질렀다.

사각!

뭔가가 처음으로 칼끝에 걸렸다!

메이저는 팔을 틀어 한 번 더 반대쪽으로 그어봤다. 이놈도 결국 인간이다!

후웅―

하지만 그의 회심의 일격은 허공을 갈랐고, 민구의 매서운 응징이 곧바로 이어졌다. 민구는 마세티 칼등으로 메이저의 무릎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콰직―!

무릎뼈가 박살 나는 것 같은 고통!

메이저가 앞으로 허물어진다. 민구는 녀석의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쿠크리를 집어넣고 죽 훑었다.

“아으으윽! 아악!”

메이저가 경련하며 뒤로 나자빠지자 민구는 다시 물러났다. 그러고는 녀석이 일어날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주기 위해 쿠크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담배를 꺼냈다.

“방금, 뭔가 걸린 것 같았지? 그거 옷자락이었어. 그걸 느낀 거 보면 네놈도 의외로 감각이 예민하구나. 생긴 거나 움직이는 건 미련하기 짝이 없는데… 아, 맞다. 젠장.”

말을 하며 계속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지던 민구는 자신이 조금 전, 마지막 한 번의 불꽃을 쓰고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민구는 메이저를 돌아보았다. 전에 바짝 붙었을 때, 입에서 담배 쩐 냄새가 진동했으니 놈 역시 흡연자다.

“너 지금 라이터 가지고 있지? 뒈진 다음에 그 라이터는 내가 가져야겠다. 그건 그렇고… 세 번째는…….”

“씨발 놈아! 다, 닥쳐!”

메이저는 맬릿을 집어 던지고 벽을 짚으며 일어났다. 집어서 쓸 수 있는 무기는 아직 많다. 이번에는 수술용 톱이다. 맬릿보다 가볍고 의외로 리치가 길어서 처음부터 이걸 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끄으으! 끄으~!”

메이저는 스테인리스 테이블을 짚고 힘겹게 일어났다. 조금 전 베인 겨드랑이에서 걱정했던 것보다 피가 많이 흘러나오질 않아 다행이다.

대신에 반으로 갈라진 코에서는 쉬지 않고 피가 흘러넘친다. 그게 숨을 쉬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야압!”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는 시늉을 하던 메이저는 느닷없이 테이블을 뒤집어 민구 쪽으로 엎었다.

위에 늘어져 있던 자잘한 날붙이들이 민구를 향해 날아간다. 민구는 스텝을 밟으며 마세티를 휘둘러 날아오는 메스를 바닥으로 쳐냈다.

“이익!”

그 틈을 노려 달려든 메이저가 톱날을 민구의 어깨를 향해 내긋는다. 예리한 톱날이 전등 불빛을 받아 번쩍인다.

빠악!

민구가 쫙 내뻗은 마세티의 뭉뚝한 칼끝이 메이저의 팔목을 때린다. 톱을 휘두르던 팔이 뒤로 돌아가고 방어가 열린 틈을 타서 민구는 허벅지를 사정없이 그었다.

서걱―!

허벅지 뒤쪽 근육이 끊어졌다!

메이저는 입을 벌린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명조차 터져 나오지 못할 만큼 날카로운 통증!

무방비로 경련하면서 메이저는 죽음을 직감했다. 이제 곧 저 마세티의 커다란 칼날이 자신의 목을 치리라!

하지만 민구는 아직 이 회합을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쿠크리를 빠르게 놀려 메이저의 어깨에 세 줄의 날카로운 칼자국을 남긴 뒤, 놈의 옆구리를 걷어차 자빠뜨렸다. 그러고는 다시 놈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으으으! 아으으윽!”

메이저는 분을 이기지 못해 땅을 치다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흐으으! 으윽! 주, 죽여라. 나, 나, 남자답게… 하아아! 끄으으!”

숨을 헐떡이며 눈물까지 뚝뚝 떨어뜨리던 메이저가 손에서 칼을 떨어뜨리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저 흉터 놈에게는 못 이긴다. 그건 확실해졌다. 이렇게 계속 모욕과 고통을 당하느니 그냥 죽는 게 낫다. 저놈의 솜씨라면 베이는 줄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끊길 것이다.

“집어!”

민구가 차갑게 내뱉었다. 지금까지 빙글거리던 표정이 사납게 변한다. 메이저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놈이 뭔가… 더 끔찍한 벌을 내릴까 봐… 그게 무서웠다. 잠시 칼을 집을까에 대해 고민하던 메이저는 고개를 저었다.

“네, 네, 네 마, 마음대로 다, 다, 다 되지는 않을 거다, 개새끼야! 그, 그냥 주, 죽여!”

“큭큭큭!”

민구는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죽고 싶으면 그냥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무 날붙이나 집어서 제 목을 그으면 된다. 아무리 다치고 기진맥진 했어도 그 정도 기운이 없지는 않으니까.

말은 저렇게 해도 저놈은 살고 싶은 거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땡깡을 부려 대는 중이다.

민구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유치한 놈에겐 유치한 방법을 써주면 된다.

“좋아, 결국 이거잖아. 이게 싫은 거지? 나만 이렇게 큰 칼을 들고 있으니까 불공평해서.”

민구는 마세티를 들어 보였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이제 난 저거 안 쓸 거야.”

그 말을 했을 때, 메이저의 눈이 흔들리는 걸 민구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놈을 유혹했다.

“그리고 네가 지정하는 팔로만 싸울게. 왼쪽? 오른쪽?”

거기까지 양보했는데도 메이저는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다.

쳇, 귀찮게 구는 놈이군…….

민구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또 조건을 하나 붙였다.

“내 피 한 방울만 흐르게 하면, 그때는 내가 지는 걸로 하지. 약속해. 두말도 안 하고 보내줄게. 거기에 마세티 안 쓰고, 네가 쓰라는 손으로만.”

“그, 그걸 미, 믿으라고?”

놈이 걸려들었다. 민구는 마세티를 놈의 옆으로 밀어 던진 후, 진지하게 놈의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러면 믿겠나?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약속은 어긴 적이 없어.”

“조, 좋아! 사, 사내새끼라면 그 말 지, 지, 지, 지켜라!”

메이저는 이를 악물고 서둘러 무기를 집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선택은 마세티였다. 그리고 왼손에는 익숙한 대검을 골랐다.

놈이 절뚝거리며 덤벼들 자세를 취하자, 민구가 다급하게 물었다.

“새끼, 어지간히 급하네. 어느 쪽 팔을 쓰라는 건 정해줘야지!”

“하아~ 하아! 왼쪽!”

메이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코에서 역류한 피가 입안 가득 차서 입술을 열 때마다 침에 섞인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민구가 쿠크리를 왼손으로 고쳐들자마자 메이저는 걸음을 떼며 거리를 조절했다.

“이야아아아!”

메이저가 힘차게 마세티를 휘두른다. 산이라도 가를 기세다.

20여 분이 흘렀다.

비명과 헐떡이는 숨소리, 그리고 애원이 계속해서 이어진 20여 분이었다. 민구에게는 꽤나 알찬 시간이었다. 쉽사리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그런 시간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메이저의 것은 20분을 넘기지 못했다. 민구는 새 담배를 입에 물고, 피투성이 시체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라이터가…….”

민구는 아직 굳지 않은 메이저의 시체를 뒤져서 라이터를 찾기 시작했다.

뭔 놈의 주머니가 이렇게 많은지… 피가 흥건하게 젖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민구는 어느 주머니에 들어 있는지 정도는 미리 물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를 했다.

놈은 끝내 고집을 피우며 어떤 방법으로 죽고 싶은지 고르지 않았다. 나중에는 마음을 바꿔먹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땐 이미 선택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민구는 임의로 3번을 골라줬다. 가장 창의적이면서도, 길고 생생하게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방법.

“찾았다.”

마침내 상의 오른쪽에서 지포라이터를 찾아낸 민구는 뚜껑을 열고 불을 켰다.

찰칵―!

특유의 기름 냄새가 담배 연기와 함께 섞여 코로 들어온다. 민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달달하다. 이 복수처럼.

개인적으로 가장 흥겨웠던 부분은 육체에 고통을 가하던 게 아니다. 실컷 놀 만큼 놀고 나서 놈의 손에 들려 있던 마세티를 빼앗아 오른손으로 세차게 휘둘렀을 때, 놈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그 당혹감! 그 어리석은 배신감!

그게 가장 좋았다. 그다음부터는 그저 기계적인 과정이었다.

“젠장, 손을 닦을 데가 없네…….”

온통 시뻘겋게 물든 두 손을 닦아보려고 메이저의 옷을 살펴보던 민구는 포기하고 벽의 개수대로 걸어갔다. 아직 물이 나온다는 건 정신을 잃었던 녀석을 몇 차례나 깨울 때 이미 확인했다.

쏴아아아아―

두 손을 대강 비벼 닦은 민구는 라이터 표면의 피도 함께 닦았다. 테라에게 약속을 지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는데… 거기에 더해 반가운 얼굴에, 신나는 놀이에, 기념품까지… 상쾌한 콧노래가 담배 연기와 함께 저절로 흘러나온다. 이제 아주 개운한 기분으로 테라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 ☆ ☆

“끄으으윽!”

오 박사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우우웁! 웁!”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견딜 수 없는 욕지기가 인다. 가슴이 토사물로 꽉 막혀 있다.

“아아아악! 아윽!”

토하기 위해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던 오 박사는 다시 얼굴을 찌푸리며 쓰러졌다.

심장이…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아프다. 누군가 커다란 손으로 꽉 움켜쥔 채 즙을 짜내려고 하는 것 같다.

“우욱! 우우욱!”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토사물은 치솟아 올라온다. 오 박사는 자신이 토한 위액에 익사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가 또다시 가슴을 잡고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커헉! 커헉!”

거친 숨을 내뱉던 오 박사는 고통을 참기 위해 자신의 주먹을 꽉 깨물었다. 아니, 깨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들어 올린 왼손에는 더 이상 주먹 같은 게 달려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절망감! 그리고 상실감!

너무도 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으으으으! 으윽!”

뒤늦게 기억이 되살아난 오 박사는 오열하며 오른 주먹을 꽉 물었다. 이내 살갗이 찢기고 피가 배어나온다. 하지만 심장의 통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온다.

“우우웁!”

또다시 밀려오는 욕지기.

오 박사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고통은!

정말로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다. D.E.M을 다리에 찔렀어야 했는데! 너무 다급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필 가장 고통스러운 심장 주변에!

“아으으으으!”

진저리를 치다가 잘려 나간 팔뼈의 단면이 리프트 바닥과 닿자, 그것이 고통스러워 오 박사는 또 다시 울부짖었다.

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나마 활동을 개시한 것과 동시에 잘려 나간 혈관에서는 또 피가 찍― 찍― 뿜어져 나온다.

“까으으윽! 으윽~!”

오 박사는 이를 갈며 울었다. 16층의 넓은 세균 배양실 전체에 걸쳐 그의 울음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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